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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Aug 04 2022
도서관 혹시, 도서관 가봤수? 사는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 어디에 붙어 있는가는 알고는 있수? 그 때가 언젠가... 중학교 때는 마포도서관을 다녔는데 입장료가 100 원이었습니다. 그 땐 도서관 앞에도 공부할 수 있는 8인용이던가? 제법 큰 책상이 일렬로 여럿 있었습니다. 위로는 눈비를 막기 위한 천막이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제법 큰 노점상이나 무슨 행사장처럼 보였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 있느냐. 도서관 좌석이 꽉 들어차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몫이었죠. 일찍 가지 못하면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 뒤로 입대 후에 출퇴근을 하면서 경남 진해에 있는 진해도서관을 다니기도 했지만 해군이라 배를 타는 입장이었죠. 출항이 잦아 다니는 둥 마는 둥했지요. 전역 후엔 회사네 뭐네 지내며 잊고 살다가 요즘에서야 동네에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최첨단 설빕디다. 빈 좌석도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화면으로 바로바로 확인가능하고 원하는 자리의 번호표도 즉석에서 기계가 뱉어 줍니다. 요즘 영화계를 말아먹고 있는 대기업 소유의 독점식 영화관과 비슷한 좌석시스템을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놈으로 변해버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건 별로 관심도 없을뿐더러 책상사이에 칸막이도 없습디다. 그보단 책 빌리는 일에 관심이 더 컸죠. 가보니 참 많은 책들이 있는데, 내가 이미 읽었던 책들도 있고, 사보고 싶었던 책들도 많아 홀딱 반했지요. 대여기간이 최장 21일이나 되니 읽을 기간은 넉넉한데 세권이상은 한 번에 빌리진 못한답니다. 층마다 자판기와 휴게실이 있고, 발간된 월, 계간지, 신문, 각 종 전문잡지, 전문서적, 이론서... 가는 곳마다 읽을 것들과 쉴 것들입니다. 쓸데없이 수 천 원 들여 카페 같은 데서 맹맹한 커피나 마시는 것보단 훨씬 좋아요. 커피 값도 200 원이고 밥값도 2천원 위아래니까.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 어딘 가 한 번 살피시고 가보시기를 권합니다. 그건 그렇고... 몇 달 전 책을 읽고 느낌을 적어야하는 일이 있었는데,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읽었고 느낌도 적긴 적었죠. 그런데 그 책을 읽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나 책꽂이에 꽂혀있는 그 책을 봤어요. 저 책을 내가 읽기는 읽었는데 수박을 겉핥았단 말요. 여러 노숙자가 나오고, 공동묘지도 나오고, 겨울 도로에서 노숙하다 개에게 물어 뜯겨 죽은 여인도 생각나고, 실수로 떨어뜨린 아기의 죽음도 생각나는데, 주인공의 이름이나 저자의 이름 또는 시공간의 흐름을 물 흐르듯 엮을 수가 없더란 말요. 그렇다면 저 책을 내가 읽기는 했지만 참으로 읽은 것인가 하는 느낌을 받았죠. 심지어 저 책속에 문장 중에 떠오르는 문장도 없더란 말요. 나름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책인데 말요. 다시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죠. 얕은 기억 속에 읽으니 머리에 속속 박히더란 거요. 의무감으로 책을 읽는 사람과 얼마 간 요리조리 뒤적이고 정보를 듣고, 책이 뭘 말하려는 지 어느정도 개념이 들어선 후, 작정하고 사서 읽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 때우려 슬슬 읽는 사람과 등장인물, 시공간의 배경, 작가의 의도를 살피며 보는 사람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서평이나 비평문을 쓰기위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각도의 시선으로 책을 해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철역에 널브러진 메트로보듯이, 길거리에 꽂혀있는 생활정보지 보듯이 보고나서 ‘나는 다독한 사람이요’ 라고 한다면 자신의 양심에게 인정받을 수 있것수? 숨 쉬는 매 순간 우리는 삶을 태우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나이를 한 번 새삼스레 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나. 벌써 학교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결혼을 하고, 애들이 이젠 내가 다니던 학교를 가고... 찰라 같습니다. 따라서 무엇 하나를 해도 의미를 부여하고 내 삶이 아깝지 않도록 써야 하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 한 부분인 책을 읽는 것도 나름의 규칙을 정해서 독서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정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서울에 풍납토성을 아십니까? 몇 년 전 TV에서 풍납토성의 건축비법이 공개 됐는데요, 세밀하게 하나하나 밟고 밟아 압축하고 정성에 정성을 들여 건축한 결과, 기원전에 축조를 시작한 흙으로 된 토성이 지금도 그 틀을 그대로 유지하며 서있는 것입니다. 수 천 년 지났지만 앞으로도 수 천 년이 지난들 무너지겠습니까? 그와 같이 독서 하나를 해도 우리네 삶의 성(城)도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히 다져놓을 필요가 있지 않것느냔 말요. 그건 그렇고... 요즘은 양장본들이 줄어들고 있고 소설들도 겉표지나 크기 등 제조원가를 낮추려는 노력들이 보입니다만, 요즘 책값이 너무 비싸긴 비싸요. 허기사 공공요금이네 뭐네 물가가 연 중 수시로 오르니 책값인들 버티것소만, 내게는 비싸긴 비싸단 거요. 나 같이 전기세나 가스요금을 수시로 못내는 사람들에겐 도서관이 최고요. 왜냐면 교통비만 있으면 되니까요. 요즘은 도서관들이 트럭을 몰며 주택을 돈답디다. 책 좀 빌려가라고요. 좋은 세상 아뇨? 그러니 좀 빌려들 보쇼. 공짜 아뇨 공짜. (그래서 내가 머리가 벗겨지나?) 그건 그렇고... 컴퓨터를 또각거리고 있는데 중국노래들이 있습디다. 뭔 소린지 알바는 없지만 듣기 좋단 말이죠. 듣기 좋으면 내 음악이지 안 그요? 언젠가 아름다운 언어(?)에 관한 글을 봤는데 듣기 좋은 언어 1위가 불어, 2위가 중국어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해금이나 대금소리들을 구하다가 얼후라는 악기의 소리를 접하게 됐는데 풍류 음악으론 제격입디다. 술 한 잔 할 때 틀어놓고 한 잔 하면 술이 술술 들어가더란 말요. 한 겨울이지만 강화도 황금들녘이 떠오르고, 눈 내린 춘천도 떠오르고... 한시(漢詩)도 모르는 놈이 오언이네 칠언이네 구(句)가 안 맞네 하기도 하고... 아! 거참. 괜히 술 얘기는 꺼내가지고... 절정의 휴식을 위해 각종 술이 냉장고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다리는 골목 사거리 가게로 가 볼랍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시간을 참되게 쓰며 올바르게 쓴단 말이죠. 어디 빈대라도 붙어 술이나 처먹을 생각이나 하고 말이죠. 그나마 빈대 붙을 놈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거요. 혼자 마시는 것보단 낫잖우. 2008.01.28 18:45 風磬
風文  Aug 04 2022
風文  Jul 31 2022
감동(感動)에 관하여 남을 위해 뭘 도왔을까? 자기합리화 중이던 모습도 떠오르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도 도움이라 생각하며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남을 돕는 일엔 특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도움은 조금의 감동이 포함되어야 참 맛이 아닌가 한다. 도움의 내용 속에 물리적으로 직접 돕는 것보단 간접적일 때 감동(感動)이 더하다고 느낀다. 한편의 글이나 시가, 읽는 이에게 감(感)을 주고 마음을 동(動)하게 해서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본다. 좋은 글은 혜안을 넓혀주거나, 나보다 남을 생각하게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해주는 감동스런 도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으며 어떤 감동을 주며 살았는가. 생각해보면 어쭙잖은 어설픈 사상으로 도움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남을 움직일 만한 선(善)을 갖추고 있는지, 역으로 나는 위에서 말한 감동을 타인으로부터 직접 받아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내가 남에게 감동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말로만 글로만 떠들고 있지 않은가. 성찰할 일이다. 감동은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다. 내가 받든 남이 받든 감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글을 보고 내 인생이 바뀌었소.”, “그 영화를 본 뒤로 나는 다른 삶을 삽니다.”, “그 시 한편이 내 인생을 뒤집어 놓았소.”라는 말들은 모두 간접 체험이다. 작품을 만든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몇 단계를 거친 감동이다. 작품을 만든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별 답은 없다. 감동은 그냥 감동 스스로다. 그렇다면 직접 마주보며 주는 감동은 뭘까? 마주한 채 줄 수 있는 감동 말이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내가 지금 당장 만난다고 하자. 대 놓고 나에게 감동을 달라면 나는 당신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당신의 사상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감동은 추적 끝에 얻는 탐미다. 가끔 우연한 기회에 얻는 감동도 있지만 감동을 추구하면서 얻기도 한다. 감동은 은근한 바람이자 희망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어떤 일을 겪고 감동을 받아 어려움을 벗어났고 그 후로 삶이 변했다.” 이 말은 우연히 받은 감동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어렵게 살기에 뭔가 바랐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다가 만난 감동이다. 고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면서 얻는 감동인 것이다. 어려움에 어둡고 포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감동이 지나가도 모른다. 감동할 마음 속 공간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직접 받는 물리적인 도움이나 깜짝 감동에 민감하며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연히 받은 감동이든 희망하며 얻은 감동이든 그 감동으로 삶에 변화가 일어 행복감을 만난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감동이 된다. 좋은 감동은 오래 기억하며 삶을 바꿀 정도의 감동은 잊히지 않는다. 정조실록에 이런 기사가 있다. “돌아보건대 과매(寡昧)한 내가 어찌 하늘에 미더움을 얻어 감동시킬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는가마는 어제는 자못 비가 내릴 가망(可望)이 있었는데 오늘은 다시 막연하기만 하다. 따라서 마음속에 계구(戒懼)가 엇갈리는 것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허물은 나 한 사람에게 있으니, 만백성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5일 동안 감선(減膳)하겠다.” - 정조 1년(1777 정유 / 5월 9일 계유 2번째 기사 ) 내가 덕이 없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 가뭄이 들어 백성이 힘든 것은 모두 내 탓이니, 이에 근신하여 5일 동안 수라상에 오르는 반찬을 줄이겠다(減膳)는 임금의 뜻이다. 감동은 사람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주인을 살리려고 목숨을 내놓으며 은혜 갚는 여러 동물이야기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늘을 비롯한 천지간의 모든 것은 감동한다고 믿어왔다.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이 희망하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하늘이 느껴(感) 비를 내리는 움직임(動)은 백성뿐만 아니라 천하에 모든 생명이 감동할 일 아닌가. 따라서 하나의 감동은 그 감동을 보는 이들 모두에게 나누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감동을 전하는 큰 역할은 예술(藝術)이 하고 있다. 책이든 영화든 사람이 만든 것이며 예술을 접하는 것도 사람이다. 예술은 좋은 감동매개체다. 감동은 인간 행복추구에 원인이 있다. 모든 인간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본능이 있다. 행복해 지고 싶고 만족을 원하며 고통을 멀리하려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일수록 감동을 원한다. 심리적이든 경제적이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감동을 원한다. 스스로 원해 자기합리화가 되는 감동도 있고 마음이 뭉클해지며 큰 요동 뒤에 삶이 바뀌는 감동도 있다. 모든 감동은 인간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본능에 따른다. 불행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감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거부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시선을 약간 비틀어, 고난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한 삶을 감동으로 받아들이며 빈곤함과 없음을 행복으로 누린다. 수도자들이 고난이나 소유 없음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모든 수행이 감동을 위한 절차라 믿기 때문이다. 수도하는 모습을 세속의 눈으로 보면 안타까울 수 있지만 수도자의 눈에는 되레 수도생활을 안타깝게 보는 세속의 눈을 안타깝게 본다. 감동으로 목적을 이루든 목적을 이루고 나서 감동스럽든 중요하지 않다. 감동은 삶의 방식을 바꿀 만한 벅찬 기(氣)다. 감동을 받고 나면 작은 습관하나라도 스스로 변하며 순간일지라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적응력에 있어서 강한 생명체인 인간의 약점 중 하나는 겪은 감동이 다시 찾아 올 때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일이다. 소소한 감동을 우습게 여기거나 별 것 아닌 듯 잊어버리거나 홀대한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이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스치는 감동을 못 알아보는 데에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를 거창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만해야 감동으로 인식하며 작은 감동을 보지 못하는 감동맹인이 되고 만다. 자연이 주는 소소한 감동을 우습게 여기다보니 지구가 하루하루 급속도로 늙어가는 것이다. 늘 보니까 아니면 흔해빠진 것들이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하며 살지 않나 성찰해볼 일이다. 되레 가족들에게 투정이나 부리고 화내고 죄 없는 들꽃이나 밟고 다니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내 주변에서 작은 감동들을 찾아내다보면, 그래서 감동 받으며 살게 된다면 그 즐거움에 새롭고 색다른 감동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것이 꿈이고 희망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감동하는 것도 이룬 후에 감동하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수반된다면 그리고 내 감동이 나눌 수 있는 감동이라면 더욱 큰 감동으로 올 것이다. 감동을 겪고 삶의 변화를 맛 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둘 이상의 이야기다. 나 이외의 그 어떤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감동한다. 글, 사람, 종교, 자연, 물건 등 만나는 감동매개체가 있다. 혼자서 스스로 감동하는 일은 없다. 책을 만나든 사람을 만나든 반드시 감동매개체가 있다. 감동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삶을 감동 속에서 바라본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이 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라면 나 역시 그들을 내게 감동을 주는 존재로 자연스레 인식하고 있어야 맞다. 시나브로 모든 사람들이 감동매개체가 된다면 지상낙원이 아닐까? 서로 나누려하는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나부터 시작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감동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전파 되는 특성이 있다. 이 글을 읽으며 글이 좋든 아니든 당신이 숨 쉬는 것에 감동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음에 감동을 받는 중이다. 가족들, 친구들, 선후배들 얼굴을 찬찬히 떠올려 본다. 나를 낳았고 나를 알며 나와 함께함이 얼마나 감동인가. 공원을 걷다 흔한 개망초나 제비꽃 같은 흔한 들꽃들을 보다가 지구 위에서 저 꽃과 내가 만날 확률을 떠올려 본다. 하물며 인연(人緣)의 확률은 어떻겠나. 감동 아닌가? 이 글을 당신이 읽을 확률에 나는 감동하며 쓰고 있다. 2010.08.26 05:43 윤영환
風文  Jul 31 2022
오해와 소통 내가 말하는 성격이 곧다는 말은 군대식 말투나 사무적 말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며 만들고 키운 지조를 말한다. 때문에 여러 지조들 속에 살다보면 가끔 오해를 살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을 정도는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혼자 생각으로 일으키는 오해라 쉽게 풀린다. 말에 살을 좀 붙여서 부드럽게 하려고 애는 쓰는데 쉽지 않다. 글이라면 억지로라도 좀 꾸며보겠는데 말은 참 힘들다. 어릴 적 별명이 많았는데 그중 코미디언도 있었다. 말을 잘하고 남을 잘 웃기곤 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대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공부하고 독서를 즐기며 나이 들수록 말은 줄어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경우가 줄어들게 됐다. 잘난 지조 때문에 회사 같은 조직엔 못 들어가니 사업도 해보고 장사도 해봤는데 내가 할 일들이 아니라기 보단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니었다. 홀로 지내면 많은 철학도 하지만 필요 없는 상상도 하게 된다. 직업으로 말하는 수도자가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외로움에 빠지게 되고 즐기던 고독도 괴로울 때가 온다. 견디기 싫어 사람들을 만나 대화도하고 놀이문화도 찾아 나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나의 존재가 주변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오해가 생기고 해명해야 하는 하기 싫은 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다시 나 홀로의 생활로 돌아가기 싫었다. 감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해가 생기면 풀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보편적 지성 외에 개인마다 지조가 다르기 때문이고, 마음그릇도 크기가 다 다르고, 배워온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 언어와 일상 언어는 차이가 있다. 시나 소설을 보고 글쓴이의 현재 마음이나 미래 삶을 짐작함은 어리석은 짓이다. 문학은 문학의 눈으로 봐야지 문학을 일기로 보면 오해가 생긴다. 설사 내 심정을 적은 일기를 누리터를 통해 읽었다 하더라도 사실을 확인해봐야 한다. 말로 하는 의사소통과 글로 하는 의사소통은 쓰임부터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글이 조금 더 내 마음을 털어 놓는데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만나서 확인도 안 해본 글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한다. 영혼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지만 일기는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일기가 편하게 생각나는 대로 막 쓰기 때문에 바로바로 마음을 적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의견이야 어떻던 잡 글이나 일기, 편지 등 문학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오해를 살만한 글은 전화를 걸어보거나 직접 만나서 대화로 확인하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그 확인 작업 없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겠다던 사람이 글만보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 적이 있는데, 되레 잘 됐다는 생각이다. 어떤 글인지 그 글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단순한 판단도할 수 없는 정도의 지식인이면 옆에 없는 편이 낫다. 끝없는 오해와 해명만 하다가 늙을 것 아닌가. 문학은 평론가들이 텍스트로 해석을 하던 작가의 전기와 엮어 비평을 하던 작가의 손을 이미 떠난 것이다. 이미 출판이 끝났으면 어떤 방법론으로 해석을 하던 독자와 평론가들의 몫이다. 작가는 손을 떼야 하고 작품을 깎아내리는 비평이 있다고 해서 작가가 나서서 해명하는 일은 큰 의미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위한 글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면 확인을 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일기에 ‘괴롭다.’ 라고 썼는데 ‘저 사람은 나 때문에 괴로운 거야.’ 하거나, ‘가난하다.’ 라고 썼는데 ‘저 사람은 가난뱅이군.’ 하며 그 사람을 특정한 환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괴로운지, 돈이 없어 가난한지 아니면 마음이 허해 마음이 가난한지를 물어야 한다. 문학도 작가와 독자 사이를 잇는 소통역할을 하지만 수시로 나눌 수 있는 일상 언어는 아니다. 문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글들은 일상 속 의사소통이다. 두 가지를 헛갈려한다면 공부가 덜 된 것이고 낙서 같은 글을 보고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정짓는 사람은 인생을 어둡게 걷고 있는 사람이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끊어지는 경우가 있다. 통신기지의 병목이든 일시적 고장이든 그런 경우에 당황하기도 한다. 다시 전화가 걸려오면 “말하고 있는데 버릇없이 왜 전화를 끊어?”하고 화를 낸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그냥 끊어졌어요.” 라고 말하면 “웃기고 있네. 듣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 라고 한다. 이때부터 피가 역류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에 쓸데없이 격렬히 뇌가 회전하는 억울한 경우다. 오해는 매우 작은 의견차이로 또는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을 때 생긴다. 아니면 그냥 넘어가도 될 사소한 일을 꺼내 드러내며 생긴다. 잡던 손을 놓게 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그 기억을 꺼내 거리를 두게 된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사랑과 이별노래를 해오고 있다. 그 수천 년 전 사랑과 이별 노래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점은 소통수단이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말도 편지도 실시간으로 받아본다. 기계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도 한다. 이런 빠른 소통수단이 오해를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느긋함이 없고 당장 연락이 되지 않거나 소식이 없으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왜 그러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오해를 하지 않는 경지엔 가까이 온 듯하다. 이별이란 단어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별은 오해를 사서하게 만드는 슬픈 단어다. 풀리는데 참 오래 걸리는 많은 오해를 억지로 만든다. 묘한 건 이별하며 만든 수많은 오해들이 어느 날 어느 한 순간 한꺼번에 풀려버린다는 것이다. 체념, 용서, 이해 같은 말을 하지만 내 경험으로 이별을 버리고 사랑을 담으면 쉽게 풀린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시대적 암울함을 떠나 사랑노래로 보면 오해 같은 건 없다. 되레 이별로 인한 원망과 슬픔을 정화하고 있다. ‘즈려밟는’ 고통은 있어도 오해는 없다. 김소월은 오해를 사지도, 하지도 않는 경지에 오른 건 아닐까? 우리네 삶 속에서 오해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풀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씩 풀어서 그 인연의 끈으로 서로를 엮으라고 있는 것이다. 나를 반성할 때 내가 오해를 하는 쪽인지 오해를 당하는 쪽인지를 생각해본다. 오해를 당하게 만드는 언행도 어리석게 오해를 하는 것도 모두 좋지 않다. 그 바탕에 말과 글이 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오해가 반응한다. 동물들끼리는 오해가 없다. 사냥을 위한 신호, 이동을 위한 신호, 가족보호본능 등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유독 생명체 중 사람만 오해를 한다. 말과 글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말과 글을 얼마나, 어떻게 습득하며 자라고 성장하는 가에 따라 오해가 발생하는 빈도가 결정 된다. 그러나 사는 내내 언제든 갈고 닦아 오해라는 단어를 아예 잠재우는 경지는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나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숙고해보면 나는 아직 그 경지까지는 먼 듯하다. 2010.05.17 16:21 윤영환
風文  Jul 31 2022
마음정비소는 무료 배에는 조타실이 있다. 배의 방향을 정해 바른 항로로 배를 몰고 가는 자동차 운전석과 같다. 그러나 기관실에 있는 엔진이 돌지 않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암초나 항로를 보기 위해 지도도 있지만 레이더가 없다면 지금 항해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밤에도 위험하다. 선상에서의 일들은 갑판장의 지휘로 이루어진다. 화물을 내리고 싣기, 그물을 던지고 걷기, 사고를 대비한 정비, 입항하고 출항할 때 부두에 배가 잘 닫도록 관리도 한다. 오랜 항해를 대비해 조리실엔 조리장이 늘 음식을 준비하고 냉장고에 들어갈 식재료도 출항하기 전에 잘 챙겨야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가 근무하는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때 항해는 순조롭다. 유기적이며 한 사람이라도 의무를 소홀히 하면 항해는커녕 배가 좌초되거나 다른 배와 충돌할 수도 있다. 몸은 어떤가. 건강한 이(齒)로 골고루 잘 씹고 넘기면 식도가 잘 내려가게 하고, 위에 도착하면 영양분을 천천히 분리해서 장기들을 거치며 흡수하고, 미주알을 지나 항문으로 필요 없는 것들을 배설한다. 입부터 항문까지 한 곳이라도 막히거나 장기 중 하나라도 고장 나면 당장 사는데 문제가 생긴다. 병원을 다니며 치료해야하고 원하지도 않던 약품들을 먹어야하고 하고 싶은 일이나 꿈도 접게 될 수 있다. 내 몸을 소중히 여겨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꿈을 향한 인생의 항로를 순항할 수 있다. 몸끼리는 어떤가. 어디에 살 든 우리는 사람을 대하며 살아야 한다. 산 속에 홀로 살아도 먹고 입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가게주인을 만나야하고 심어 키울 씨앗들도 사야한다. 어디에 있든 우리는 사람과 함께 산다. 나도 사람이 낳지 않았는가.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사람을 낳고 키워 사람을 잘 만나도록 사람 되라고 사람이 가르치는 학교에 보내고 사람이 쓴 책을 보며 배우고 익혀 사람들이 만든 사회라는 계약적 공간에 서게 된다. 사람들과 살다 죽어도 내 시신을 사람이 옮기며 태우고 뼈를 빻고 뿌리는 것까지 사람이 한다. 올 때나 갈 때나 우리는 사람과 함께 한다. 수많은 국가 중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났고 우리사회 속에서 산다. 모두 하는 일이 다르지만 열심히 할 일을 하고 산다. 어디 한 군데 고장 나면 나라는 흔들리며 균형을 잡으려 애를 먹는다. 나라를 세우는 것도 사람이 하고 나라를 망국의 길로 끌고 가는 것도 사람이 한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 많으면 어딘가 고장이 나있는 것이다. 나라끼리는 어떤가. 지구에 있는 나라들도 유기체다. 이웃 나라가 전쟁 중이면 내 나라도 시끄럽고 어려워진다. 나라와 나라는 국경을 긋고 서로 공식적인 계약을 맺거나 거래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강국과 약소국을 구분 지었고 강국의 논리와 주장대로 약한 나라는 끌려 다닌다. 나라끼리 원수가 되어 복수를 꿈꾸며 테러를 하거나 전쟁을 준비하기도 한다. 강국이든 약소국이든 모든 나라는 내 나라 내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싸움의 원인이다. 세계사에 자주 등장하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내 종교가 으뜸이며 참이라 믿고 다른 종교는 이단이라 터부 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테러가 많을수록 지구에 고장 난 나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구에 인류가 등장해서 오늘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음은 고장 난 것을 수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에서 엔진을 떼어내면 그 배와 엔진은 단순한 고철에 불과하며, 내 몸에서 심장을 떼어내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은 독약이 되고, 국민이 없으면 국가라 할 수도 없으며, 이웃 국가가 없으면 국가라는 말은 거짓이 된다. 우리의 마음과 몸은 누구나 아는 올바름으로 가면 갈수록 편해지며,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깊게 철학하면 이웃에 대한 편견이나 미움을 버리게 된다. 내가 그리도 소중하다면 남도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까. 싸움의 원인은 대부분 내 가족, 내 돈, 내 나라, 내 생각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보다는 우리를 쓰는 마음을 가지면 ‘나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물에 빠지면 내 가족부터 구하기 마련이다. 내가 세상에 난 이유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나를 낳았고 내가 낳았기 때문이고, 남과 같은 방에 살지 않으며 남을 가족처럼 밤낮으로 매일 보지 않으며, 가족만큼 정이나 책임이 덜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1호선 신길역 승강장에서 아주머니를 구하기 위해 철로로 뛰어든 적이 있다. 가볍게 느껴졌던 것은 빨리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온 힘을 다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지만 몸을 쓰는데 망설이게 된다. 우리라는 생각은 모두 갖고 있지만 실천을 어려워한다. 몸이 고장 나면 곧바로 병원을 찾지만 마음이 고장 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수리하지 않는다. 아예 마음이 고장 났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꽤 오랜 시간 뒤에야 뉘우치기도 하지만 무덤까지 모르고 가기도 한다. 반성하고 자신을 늘 돌아보는 일은 마음이 고장 나 삶이 꼬이는 것을 미리 막는 방법이며 남은 인생을 나 홀로가 아닌 우리 같이 순항하기위한 수양이다. 우리는 유기체다. 우리가 되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며 소중한 나처럼 당신도 소중하다. 우리는 고장 나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자.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이 오면 같이 우리하자. 얼마든지 누가 오든지 우리하고 살자. 2010.05.13 15:43 윤영환
風文  Jul 31 2022
글 시(時)와 시간 1998년부터 빈 책에 글을 쓸 때 나는 끝에 시간을 적어 왔다. 1988년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흔적이 있고 1992년 군 시절에도 있지만 본격적인 마감을 위한 글 시(時) 기입은 어림잡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작품을 썼기에 시간을 쓴 것이 아니라 나름 일기나 탈고의 기록이라는 의미로 남긴 것이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각 가정에 모두 보급되다 보니 웹페이지 상에 글을 올릴 때 역시 글이 만들어진 시간을 입력하는 명확한 시간을 표기한다. 누리터상에서 활발하게 문학 동호회 활동을 할 때나 기타 온라인상에서도 나는 내 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늘 표기해왔다. ‘2008.02.19 04:17 風磬 윤영환‘ ’2008.02.19 04:17 風磬‘ '2008.02.19 04:17 윤영환‘ ’2008.02.19 04:17 바람의 종‘ 위와 같이 글의 마지막 줄에 입력해왔다. 연월일시초까지 입력한다. 그런데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요즘 들어 저런 표기방식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처럼 쓰다가 조선왕조실록의 편년체로 돌아가는 끝맺음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뭔가를 자꾸 남기려 든다. 글로든 그림으로든 흔적으로든 말이다. 이런 묘한 습성에 대해 심리학, 사회학 적으로 나름대로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다지 신뢰감이 없는 떨거지 이므로 접는다. 위에 예를 든, 내가 쓰는 저런 표기는 정확한가?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쓰고 있는 동경표준시와 KBS 9시뉴스의 시계,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428-50 1층 반 지하 뒷골목 첫 번째 집의 시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금사리 765번지 시계가 똑같나? 저 시간에 정확히 탈고 했나? 위에 적힌 2월 19일은 정확한 날짜인가? 정말 2월 19일인지 누가 정의 하는가? 당신은 펼쳐진 오늘의 달력을 보고 오늘의 날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달력에 표시된 날짜는 진실인가? 그렇다면 음력은 뭐고 양력은 뭔가? 서기는 뭐고 불기는 뭐고 단기는 뭔가? 자전은 뭐고 공전은 뭔가?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이 시간을 문자로 적어 낼 수 있는가? 적는 순간 시간은 가고 없는 것이다. 수천만 원짜리 고성능 카메라가 민들레를 찍었다고 치자. 그게 정확한 시간을 포착했다고 믿나? 오차 없는 찰나를 진실로 포착했다고 보는가? 공간을 찍은 것이지 시간을 찍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물어 보자. 일 년이 365일이라 믿는가? 아니지 않는가. 대충의 짐작이지 정확함은 없는 것으로 사는 게 현실이다. 자꾸만 정확함을 따지려하니 인생이 곤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에 물든 직선으로 흐르는 역사의 개념이고 시간의 개념이다. 0부터 2008년. 1분은 60초. 어떻게 해서든지 숫자로 표기하려하니 머리에 새치만 늘고 이마의 주름도 몇 개나 되는 지까지 숫자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9시까지 출근해서 12시에 점심 먹고, 1시에 업무시작해서 6시에 퇴근하고, 집까지 45분에서 50분이 걸리고 옷 갈아입는데 5분, 씻는데 3분, 저녁 먹는데 30분, 이를 닦는데 3분, 방에 들어와 독서 2시간 30분, 몇 시까지 자야하니 불 끄고, 내일 몇 시 몇 분에 일어나서 전철역까지 몇 분, 그 전철을 타고 회사까지 몇 분...... 하다가 출근카드 찍고 지각을 모면한 마음에 한숨 돌리며 커피 한 잔 하는 것이다. 월급 895,740원에서 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방세, 전기세, 주민세...... 하다가 얼마 남고, 저축 들어가고, 자동이체네 뭐네 제하고...... 이게 뭐여? 이게 사는 겨? 하다가 시계보고 내일 출근 시간 맞춰 알람시계 확인하고... 순간마다 확인하는 이런 시간들. 의미 있나? ‘완벽하지 못해 표기 불가능한 시간' 중 대충 그 즈음이 부모 기일이고, 내 생일이고, 출근 시간인 것이다. 당신이 맞이하는 생일이 당신이 태어난 정확한 시간이라 믿는가? '가'라는 기업이 있다고 치자. 울산 지점과 서울 본사에서 동시에(불가능 하지만) 출근카드를 찍었다고 하자. 문자로 찍혀 나오는 시간이 같다고 완벽하게 동일한 시간이라 보는가? 정확한 시간을 누가 말할 수 있나. 나름 과학이라고 서양에서 들어온 이런 숫자개념의 시간은 동양인에겐 맞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저녁 6시까지 모임이 있다. 10초 늦었다고 욕을 하는 사람 없고 5분 늦었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 없다. 역으로, 몇 분 일찍 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6시라고 하는 것은 그 즈음이다. 그 언저리가 인간의 의식이다. 시계라는 기계에 더 이상 집착을 말아야 한다. 이처럼 어리석게 스스로 생산하는 스트레스가 어디에 있나. 시간 관리가 성공이라는 서적들이 판을 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기계의 노예인가 한탄이 인다. 경도 상으로 말하는 울릉도에서 해를 맞는 시간이 동경 시(時)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더 세밀하게 말해서 당신의 손목시계 1초와 내 손목시계 1초가 같지 않다. 1초에서 벗어나자. 그 작은 기계에서 벗어나자. 늘 책장 꼭대기에 시곗바늘이 보이지 않는 먼 곳에 두지만, 저 탁상시계를 만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저 시계가 내 표준시다. 컴퓨터에도 시간이 표시된다. 그러나 내 눈에 먼저 띄는 것이 내 표준시다. 단순한 기계일 뿐이고 그리 마음먹으면 여간 편안한 것이 아니다. 가끔 건전지가 늙어 죽으면 건전지하나 갈아 끼운 후 9시뉴스를 보고 예의 상 분침 돌리면 끝이다. 초침까지 뭣 하러 맞추려 애를 쓰나. 대충 맞춘 저 초침이 내겐 ‘완벽한 시간’인 것이고, 마침표 찍던 그 시공간에서 공간을 제외한 표기가 내 글의 생일인 것이다. 시계가 5분 빨리 돌고 있는 친구 집에서 글을 썼다고 치자. 그럼 그 친구네 시계가 나의 표준시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정한 표준시는 개인에겐 의미가 없는 것이고, 내 방안에 있는 시계들도 각자 돌아가는 기계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 시(時)를 남기는가. 이 질문은 '당신은 왜 사진을 찍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추억이 되며 훗날 내 글들을 볼 때 '아! 이 시절이었지.' 하며 추억하려 남긴다. 인생의 목차가 될 수도 있고, 훗날 과거를 볼 때 그 시절의 글 테두리의 너비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식 태어날 때 그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충 그 시절 쓴 것일 뿐 이외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지금도 거짓 시(時)인데 미래엔 명확한 거짓 아닌가. 2008.02.19 06:01 風磬
風文  Jul 31 2022
선택 살다보면 반드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혼란스럽다면,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한다. 그 원인을 알면 해답이 나온다. 갈등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1년 뒤나 미래에 후회가 없겠는가를 생각한다. 그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나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변인을 둘러보고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가서 이야기 해보자. 선택에 도움이 된다. 결정되면 빠른 선택이 필요하다. 머뭇거리면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고로 미래에 후회하게 되느니 마음이 서면 뒤돌아보지 말자.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아직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온다. 경험이 쌓이면 스스로의 철학이 생기며 바른 길을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과거와 달리 선택은 쉬워지며 책임감도 덜해 부담이 없는 것 같지만 벌어지는 결과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주변인의 충고도 듣지 않게 되며 이어지는 오판은 아주 오랜 세월 지나야 결과로 나타난다. 그것도 경험되어 나이 들면 혼란스러움마저 사라지게 된다. 즉, 수많은 착오, 착각, 결과들을 겪다보면 왜 내가 혼란스러워 해야 하는 지 무의미 해진다. 도를 닦지 않아도 세월은 그 경지로 이끌지만 잘못된 선택임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나이 들어도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나는 지금 혼란스럽다. 나는 나의 철학을 돌려보지 않는다. 언제든 수정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철학은 무덤에 갈 때도 완결되지 못한다. 아쉬워 책으로 남기는 것도 계획표에 불과하다. 증명하려 하면 할수록 책은 얇아지니 흐름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핑계다. 흐름을 막을 수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초침을 거꾸로 돌리려 애들을 쓴다. 바다는 넓다. 강물이 온다고 막지 않으며 평지에 내린 비도 땅의 빈곳으로 흘러 고인다. 물은 수직으로 서거나 위로 흐르지 않는다. 늘 빈곳을 찾아다니며 아래로 흐르며 메우며 산다. 사람은 의자를 만들 수 있어도 나무를 만들지 못한다. 나무는 땅과 하늘이 만든다. 한 여름 아스팔트 위로 물 한 컵을 버리면 물이 사라진다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방금 손에 들고 있었던 물 한 컵은 어디서 왔겠는가. 나는 혼란스럽다. 바뀐 환경, 이상한 책들, 민생고, 수북하게 쌓인 무보수의 일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입에 발린 충고나 하며 지나고 아는 사람은 세월이 약이네 젊음이 자본이네 한다. 선택했다. 흐름에 나를 던지기로. 살아가지 않는가.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흐름 아닌가 생각해본다. 숨 쉬는 것이 흐름 아닌가. 행복하려 애쓰지 않아도 흐름의 청사진엔 행복이 있기 마련 아니던가. 다가오는 행복을 위해 나는 준비할 것도 차려입을 것도 없다. 글時 2007.05.15 11:50 윤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