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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Aug 10 2022
그건 그렇고 - 아름다운 가게 동전들을 이곳저곳 뒤져가며 모아보니 소주 두 병은 살만하다. 간만에 밖을 나가보니 밤새 눈이 내려 복사뼈를 덮을 만큼 수북이 쌓였다. 주춤, 뒤뚱 대며 가게로 간다.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면 어떻게 해요? 몸도 좋지 않으신 분이.” 가게 아주머니가 속 타는 말투로 한마디 건넨다. “주(酒)님의 은총으로 사니까요.” 귤 몇 개를 집어 봉지에 넣어 준다. “매번 미안합니다.” “껍질이 쭈글쭈글해서 팔지도 못하는 것들이에요.” 쪽방으로 돌아와 소주 뚜껑을 딴다. 경쾌한 금속의 마찰음이 감금 중이던 소주를 밖으로 인도한다. 온 세상을 눈이 덮어버린 이른 아침, 공복에 소주는 짜릿하다. 점액질 위장약보다 장기를 발라 내려가는 것이 빠르다. 빠른 소독과정 후 장기들을 갉아 먹겠지. 집 뒤에 가게를 가지 않고 굳이 네거리로 내려가 작은 구멍가게를 찾는다. 새벽 2시까지 가게를 연다는 이유 말고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오전 10시쯤 이었던가? 담배를 사러 갔는데 주인이 없다. 그런데 계산대 위에 쪽지가 하나 있었는데 내용은 대충 이랬다. “원하시는 물건 가져가시고 돈은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세요. 잔돈은 돈통에서 거슬러 가시고요.” 우수리를 위해 남의 가게 돈통을 만진다는 건 꺼림직 해서 기다렸다. 잠시 후 자전거 한 대가 도착하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돌아왔다. “대체 가게를 이렇게 비워두고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요.” “우리 가게는 도둑맞은 적 없어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가게로 못 오시니까 전화하시면 배달해드리지요.”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며, 보기 좋은 모습인가. 또 어느 날이었던가. 미사 드리는 시간이 끝나고 잠시 성당에서 명상 중이었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바로 가게 아주머니였다. 사실 내가 다니는 성당을 알려준 것은 가게 아저씨였다. 늦은 밤 시간에는 아저씨가 가게를 본다. 여러 가지 연으로 나는 조금 걸어도 그 가게만 간다. 그 두 분은 늘 웃고 있으며 물건이 파손되거나 잃어버려도 그러려니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가게를 갈 때마다 법정스님이 생각난다. 느긋함과 느림의 아름다움. 서두르지도 욕심도 없는 가게. 며칠 전 공구를 이웃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한 아저씨의 말이 생각난다. “그 사람한테 도움이 됐다면 그만이죠. 내가 조금 손해 보면 되니까요.” 그건 그렇고... 몇 해째 햄스터를 키워 왔다. 그런데 지난 해 가을부터 햄스터가 한 마리씩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애비 어미도 못 넘는 우리를 젖도 못 뗀 어린 것들이 넘을 리는 없고, 나는 이 쳐 죽일 놈 색출에 나섰다. 3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여름날 나는 비닐봉지를 뒤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가 흰색 도둑고양이와 침대 위에서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조용히 “가라 가! 잠 좀 자자.”했더니 가버렸다. 그 고양이 후로 다른 고양이들도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을 저지른 잡놈은 시궁쥐뿐이다. 나는 그 쥐들에게 먹을거리도 주며 겨울을 나도록 해줬었다. 밖은 너무 추우니까 부엌 구석에 살도록 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서 그 쥐를 봤는데 입에 내가 키우던 햄스터를 물고 집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저런 배은망덕 한 놈을 봤나!” 소리치고는 약국으로가 쥐 잡는 끈끈이를 사다가 방과 부엌에 깔았다. 곧 잡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한 놈이 아니라 두 놈이 잡힌 것이다. 짝꿍이었다.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복수극의 난리를 친 며칠 뒤 나는 부엌문밖에서 새끼 쥐를 봤다. 아찔했다. 순간, “내가 저 녀석의 부모를 죽였구나. 그래서 홀로 떠도는 구나. 인과응보로 가는가.” 날은 춥지만 부엌문 밖에다 먹이를 줄 수밖에 없었다. 먹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잘 살고 있구나.” 생각한다. 더 이상 미물이라도 심장을 가진 것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내가 학문을 탐구하면서 바뀐 것은 비만 오면 개수대에 나타나는 민달팽이나 가을이면 찾아오는 귀뚜라미처럼 생명을 가진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 유일하게 죽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기다. 장마철이나 태풍이 오면 집 앞 개망초(국화과의 두 해살이 식물)는 묶어 보호하지만 모기는 박멸을 목표로 한다. 다른 생물과 달리 사람을 해하며 고통을 주거나 죽음을 부르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나 맹수에 죽는 사람의 통계를 비웃는 것이 모기에 의한 죽음의 통계다. 결국 생명을 죽이는 것은 같으니 모기를 죽이겠다는 내 말은 자기 합리화다. 그건 그렇고... 밀린 책들을 모두 읽었다. 상쾌하다. 책은 숨이다. 내가 숨 쉬는 이유다. 탈고가 끝나지 않는 시들을 살펴볼 때다. 단편 소설들의 초고도 꺼내 놓았다. 종잇조각에 남긴 작은 문장들과 스친 생각들을 적은 담뱃갑 크기 스프링노트도 꺼냈다. 탈고는 창작의 시작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누리고 있는 문학을 포기해야 할지 기로에 서있다. 방세와 세금은 누적되고 내달이면 이 쪽방도 비워야 한다. 곧 철거가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7월까지는 버텼으면 한다. 그 때는 탈고가 끝나니까. 하기야 탈고가 끝난 들 방도는 없다. 그저 이곳에서 쓴 것들을 이곳에서 탈고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나는 여름 초입까지 이곳에 머물 것이라 믿는다. 그건 그렇고... 근래 자신이 낸 시집과 책을 소포로 보내주는 일이 잦다. 받을 때마다 미안하다. 드릴 것이 없기에. 이 탁한 세상 끝없이 정화하는 문인들이 없다면 인류는 멸종이다. 보내 주신 작품집들에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2010.03.10 10:13 風磬
風文  Aug 10 2022
그건 그렇고 - 귀뚜라미 보일러 얼마 전 눈이 온 뒤 강추위가 전국을 덜덜 떨게 하던 날 옆집 할머니가 찾아왔다. 두문불출하신 분인데 웬일인가 해서 나가봤더니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다. 집주인한테 말하라고 했더니 대신 해달란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여긴 부천이고 집주인은 대구에 산다. 집주인은 수리를 하라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보일러 회사에서는 수리가 아니라 보일러를 통째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일러실에 가보니 보일러 내부에 수직으로 뻗어 서있는 두께 1Cm정도의 파이프에서 물이 물총을 쏘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세한 구멍이라 물줄기는 길었다. 테이프로 감아도 보고 덜덜 떨면서 20여분 손을 댔지만 허사였다. 다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중고 보일러를 알아보란다. 사방팔방 전화를 해서 알아봤지만 취급하지 않는 단다. 나는 보일러 회사에 전화를 걸어 저 얇은 파이프만 교체하면 되지 않겠느냐 물었더니 비웃는다. 결국은 50만원이 넘는 새 보일러로 갈아야만 했는데 집주인은 곧 철거되는 동네에서 무슨 새 보일러로 바꾸느냐며 험한 소리를 한다. 나의 인내심은 거기서 철거됐다. 온수 파이프 하나로 할머니와 내방이 같이 쓰기 때문에 나 역시 온수를 쓸 수 없어서도 그랬지만 괘씸했다. “이 양반아! 고등학교 선생이란 양반이 그게 할 소리요? 할머니가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집주인이 돼가지고 적극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그게 무슨 소리요?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얼어 죽어도 된다는 말이요? 배웠다는 양반이 어째 위아래도 없고 그리 무책임합니까?” 결국은 할머니와 집주인이 반반씩 새 보일러 값을 내기로 하고 끝났다. 당장 할머니가 추위로 덜덜 떠니 교체할 수밖에. 얼마나 억울한 세입자의 처지인가. 나는 그날 옆집 할머니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곧장 보일러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작은 파이프에 1m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구멍도 수리 못하면 그게 대기업이요? 창피한줄 알아야지. 썩어 문드러진 기업 같으니라고. 자동차 부품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면 새 차를 뽑으란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나라에서 알아준다는 귀뚜라미 보일러라는 회사가 작은 구멍하나 수리 못하고 부품교체도 못하면 그게 기업이요? 작은 문제만 생겨도 수십만 원을 들여 새 보일러로 교체하라는 말뿐 다른 해결책도 없는 단순무식한 기업 아니요?” 나는 방송 3사 게시판과 소비자보호원 등에 민원을 넣고 싶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왜 자기 회사가 그렇게 컸는지 모른다. 물건을 팔 때는 온갖 아양은 다 떨면서 문제가 생기면 배 째라는 식이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다. 그들이 생산하는 걸 써야하고 요구하는 대로 비용을 내야하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노예계약을 맺고 기생하는 벌레와 같은 기업들이다. 참으로 추악한 귀뚜라미 보일러다. 보일러를 교체하고 간 뒤 하나하나 사용법을 알려주고 방으로 돌아오니 손이 시커멓다. 할머니가 오죽하면 나를 찾아 왔으며 얼마나 추웠겠는가. 몇 시간 후 다시 할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고맙다며 야쿠르트 두 개를 주고 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람들이 왜 셋방살이 탈출을 꿈꾸겠는가. 더러운 집주인 때문 아닌가. 집주인 말대로 ‘어차피 동네가 철거되는 마당’인데 나도 막나가기로 마음먹었다가 접었다. 같은 놈 될까봐.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집주인의 제자들이 스승이 얼마나 추악한지 깨우쳤으면 한다. 그건 그렇고... 맹자의 사단설 중 첫째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말이 있다. 불쌍한 이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남의 불행을 내가 당한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사람이라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직접 도움을 주지 못해도 남에게 일어나고 있는 불행을 본다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몇 년 전 신길역에서 철로로 떨어진 아주머니를 구한 적이 있다. 부평방향 급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승강장에서 아주머니가 철로로 떨어졌다. 내가 서있던 곳은 부평행 가장 뒤 칸이고 철로는 꺾어져 열차가 들어오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복선이라 어느 때 열차가 올지도 몰랐지만 나는 단숨에 건너편 철로로 뛰어가 아주머니를 어깨에 올려 승강장 위로 밀어 올리고 구두를 주워 던져놓고는 곧바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도 그렇고 부축하고 있는 아들로 보이는 사람도 그렇고 둘 다 정신지체로 보였다. 걷는 것도 이상히 걷고 고맙다는 표정이나 말은커녕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선배가 미쳤냐고 물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시간이 0.3초라고 한다. 0.3초 후에는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이 내놓은 말이다. 근래 들어 남의 불행에 무감각해졌었다. 스스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기도 하지만 그러든 말든 내 알바 아니었다. 남의 불행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았든 내게 돌아오는 것도 없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남이 문제인가. 그러나 예수님이든 공자님이든 부처님이든 하나같이 남을 위해 살라는 말뿐이다. 게다가 무엇인가를 바라고 도우면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다. 스스로 가난할수록 도우란 말을 나는 오늘 새긴다. 그건 그렇고... 고기를 먹은 지 오래 되어 동네 마트 정육점엘 갔다. 5천원 어치 삼겹살을 달라했더니 담뱃갑 두 개도 안 된다. “혹시 돼지비계만 파시나요?” 안 판단다. 미안하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산책삼아 재래시장엘 가야겠다. 이천 원이면 두 근은 산다. 그건 그렇고... 4월이 열흘 정도 남았는데 영하의 기온이다. 게다가 오늘 저녁엔 폭설이 내린단다. 선 세대가 버린 자연은 후대로 남고 후대가 자연을 복구해야 한다. 물려줄 유산이 파괴한 자연 뿐이다. 불쌍타.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쉽지만 복구는 막막하다.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은 강대국대로 기후조약을 파기하고 후진국은 공해를 내뿜는 개발 중이고 우리나라는 눈치나 보고 수천 년의 문화재를 매몰시키며 강토나 파헤치고 있고.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이사는 어디로 가야하나. 그건 그렇고 : 2010.03.17 17:28 윤 안젤로
風文  Aug 10 2022
나는 오늘 잘 살았는가? 째깍거리며 제 갈 길을 가는 초침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시간은 아까워하면서 흐르는 물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 인식하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살아 온 삶을 돌이켜 보면 순식간에 지나온듯하지만 당연한 것이고 선대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경쟁, 타인과의 경쟁이 시간을 아깝게 느끼도록 뇌를 세뇌해왔다. 성공지침서라는 책들도 시간을 잘 쓰는 법 등 1초를 아깝게 생각하도록 우리의 뇌를 압박한다. 그런 책은 조바심만 생길 뿐 마음의 여유를 주지 못한다. 한 시간 일해서 지갑에 돈을 채울 수도 있고, 한 시간 명상으로 하루를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두 가지를 같이 한다면 더 할 나위없다. 사순절을 기념하는 교황의 짧은 한 마디가 기억난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 그건 그렇고... 요즘 돈에 노예가 되어 부모를 칼로 죽이고, 보험금을 노리고 배우자를 죽이며, 약한 여인들을 폭행하고 살인하는 사람들이 매일 마다 뉴스에 단골 소식으로 나온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죄는 돈과 관련이 있다. 삶의 기준이 돈인가?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를 극장에서 조조할인으로 봤었다. 그 큰 극장에 관람객은 나뿐이었다. 영화 속 의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요즘 누가 병 때문에 죽나? 돈 때문에 죽지.’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은가? 돈이 없으면 먹지도 입지도 비를 피할 곳도 얻을 수 없다. 응급할 때 병원비도 못내 죽으며 어머니 장례비도 없어 서러워 우는 사람도 봤다. 일복은 타고 났어도 돈복이 없는 사람도 있고 별다른 노동 없이 살아도 화려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돈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가난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모든 일을 하며 몸도 지배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이 목표다. 어느 누가 불행을 즐기겠나. 그건 그렇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철학하는 삶, 마음을 다스려 죄짓지 않는 삶,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삶, 이런 삶을 살도록 낳아주신 어머니를 위한 삶, 내 반쪽을 위해 기쁨이든 고통이든 반으로 나누는 삶, 나의 행위가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삶, 돈에 환장하지 않는 삶,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매일 성찰하는 삶……. 어떤 사람을 보면 늘 웃고 있고 어떤 사람을 보면 늘 심각한 표정이다. 모두 마음이 빚어내는 표정이다. 마음이 행복하면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웃는 것이다. 적당히 입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자고 적당히 일하며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지는 삶이 좋지 않겠나. 하지만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벌고 죽도록 모아서 스스로 만족한다면 그것도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고 누가 당신 대신 살아주지도 못한다. 삶은 모두가 다르다. 추구하는 행복도 다르며 행복으로 가는 길도 다르다. 그저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오. 라고 말할 뿐이다. 단,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늘 갖고 살아야 한다. 삶의 철학을 잊으면 스스로를 버리는 길이다. 그건 그렇고... 평화로운 죽음은 평화롭게 살아야 온다. 지지고 볶으며 살아도, 멋대로 살아도, 성자처럼 살아도 죽음은 온다. 과연 그날 ‘세상에 나와 원 없이 잘 살다가 갑니다.’하며 갈 수 있겠는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의식 있는 하루를 시작하고, 복을 짓고 나누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 평화롭게 잠들기 전 ‘나는 오늘 잘 살았는가?’하고 내게 물어본다. 부족했거나 스스로 잘못한 말이나 행위가 있었다면 진심으로 뉘우치면 된다. 이는 내일을 위한 준비가 되며 내일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평화롭게 갈 수 있는 삶이 된다. 그건 그렇고 : 2010.03.21 13:45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비 장난치듯 비가 온다. 마치 “제가 내리는 것 같나요? 아닌가요?”라고 묻듯이 비가 온다. 안개였다가, 가랑비였다가, 장대비였다가, 이슬비였다가, 보슬비였다가, 소나기였다가, 는개였다가, 작달비였다가, 여우비였다가, 지금은 궂은비다. 그건 그렇고... 할 일은 많고 주어진 시간은 짧지만 할 일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주어진 시간은 잡스럽게 보내지 않는다면 남아돌지 않겠는가? 지정된 날짜 안에 모두 해치울 수 있다고 본다. 끝까지 노력해보고 이루지 못했으면 내 능력 밖인 것이다. 내가 창조주인가? 오버하지 말고 살자. 뭘 그리들 쫓겨 사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화경(2007), 이상 문학에 나타난 주체와 욕망에 관한 연구, 한국학술정보(주)’를 읽었다. 학술연구서, 즉 논문의 형식이라 뇌가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李箱에 대해 많은 시각들이 접근하는 것은 좋지만 책이 얇더라도 다른 책들과 중복되는 문장이나 참고문헌을 줄이는 것이 저자의 능력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참 잘 읽었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이 내가 쓰는 '그건 그렇고'에 대해 댓글이나 전자우편을 보낸다. 이미 내 누리집에 당당히(?)써 있듯이 만취 상태에서 쓰는 글이 '그건 그렇고'다. 수필이며 수필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영화 한편을 볼까 하다가 문득 만화가 보고 싶어졌다. 외장하드를 연결해, 보관 중인 만화가 무엇이 있나~ 살펴보다가 ‘스카이 크롤러 (スカイ クロラ: The Sky Crawlers, 2008), 감독 : 오시이 마모루’를 호기심에 클릭해서 봤다. 난해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감이 잡히고 엔드 크레딧이 올라 간 후에 다시 영상이 나온다. 그 부분에서 확신을 하고 ‘참 잘 만들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극장문화는 ‘The End’가 자막으로 올라오면 관객들은 다 일어나 나가버린다. 그 뒤로 또 상영하리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극장도 조명을 모두 켜기 때문에 조급증에 나가려 애들을 쓴다. ‘The End’가 올라가면 ‘당장 일어나!’라는 명령으로 알아듣는다. 영화음악의 백미는 ‘The End’ 전후에 나온다. 하마터면 마지막 장면을 놓칠 뻔했다.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했고 뭔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모 월간지에 입선이 되어 문화 상품권이 왔다. 또 어디서 원고가 채택되어 상품권이 왔다. 그 상품권으로 맹자(차주환(2002), 孟子 (上, 下), 명문당)를 샀다. 한자의 글씨체가 커서 잘 보이고 직역, 색인, 역자 주까지 달아 보기 좋다. 사다 놓은 김훈의 소설 ‘공무도하’는 당분간 미룬다. 2010년에 맹자가 우리나라에서 공직에 있었다면 좌천 내지 구속 후 무기징역 감이 되지 않겠나 싶다. 시경만 봐도 논어만 봐도(물론 걸쳐 내려오면서 첨삭이 있었다.)그 수천 년 전에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맹자는 더 살벌하다. 내가 왕이라도 당장 목을 쳤을 것이다. 어설프게 스치며보거나 말로만 듣다가 원전과 함께 보니 좋다. 그건 그렇고... 사고 싶은 책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도서관에 가면 되질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창작할 때 옆에 두고 늘 봐야하는 책은 사야만 한다. 그러나 요즘 책값이 내가 감당할 금액이 아니다. 고고함을 접어 그런가? 그 책값으로 차라리 쌀을 사겠다. 그건 그렇고... 요즘 각종 문학상에 당선되는 시들을 보면 전부 길다. 수필 같다. 깨우쳤다. 시는 길게 써야하는 거구나! 또는 내가 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 훗! 그건 그렇고... 聖三日이 내일부터 시작이다. 4월 4일은 10개월을 준비한 세례식이 있고, 그 뒤로 3개월 뒤엔 견진성사가 있다. 수녀님은 월, 수, 금 독거노인 및 노숙자를 위한 무료 점심급식이 있으니 이용하라고 내게 권한다. 자존심 때문에 가질 않았지만 무료급식을 받고 싶다. 배고픈 놈 건드려봐라. 배고픈 놈이 미친놈 된다. 그건 그렇고... 염병할 놈이 걱정이 없다. 발등에 불도 못 끄는 놈이 태평하며 낙관적이다.(~적을 쓰면 안 되지만) 뭐 이런 말을 고맙게(?)건네는 분들이 있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안다. 걱정하면 해결 되나?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하고 만다. 걱정을 왜 하나.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해결할 방도가 없으면 그냥 사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걸! 하하하! 그건 그렇고... 비가 그쳤다. 그쳤다는 것은 ‘그만 내리쳤다’라는 말이다. 자연(自然)이 내리치는 것은 방어가 불가능하다. 물론 우산이야 있겠지만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만 좀 해라, 그 정도 했으면 됐다, 그거면 되겠니? 이글을 쓰는 주제인 ‘그건 그렇고’도 궁금하다. ‘그’의 어원은 뭘까? 금(禁)의 표기로 변화 한 단어로 미루어 보지만 번역본도 살펴 볼 일이다. 궁금한 것이 많으면 삶이 고달프다. 그건 그렇고... 시 두 편을 빼고 겨우내 쓴 모든 원고를 찢어 버렸다. 건질 것이 없는 추악하고 격 떨어지는 문장들과 단어들. 소설은 왜 그리도 유치한지. 겨우내 쉬지 않고 썼음에 만족한다. 배우고 읽었으면 쓰자. 조건 달지 말고 쓰자. 찢어 버리더라도 쓰자. 메모하자. 적자. 나는 이제 과거와 달리 이젠 닥치는 대로 써야한다. 벌자. 알바하자. 돈 벌자. 먹고 살자. 누가 이기지는 못하지만 겨뤄보자. 글이여! 너를 내가 사방팔방 죽이며 살리되 나만 산다. 요즘 느낌이 많이 온다. 많이 써지고 풍부해진다. 모조리 작살이 나더라도 닥치는 대로 쓴다. 즉, 즐겁다는 말이다. 비가 그쳤다. 2010.03.31.21:38 윤안젤로.
風文  Aug 10 2022
이사를 가며 일교차가 크다. 가스 밸브를 잠갔으니 오늘은 좀 껴입고 자야겠다. 이 방에서 마지막 밤이다. 짐은 모두 묶고 담아 정리를 했으니 내일 이사차가 오면 바로 실으면 된다. 이글도 이 방에서 마지막 글이다. 4년 가까이 살며 생활비를 벌기도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특히 공부를 참 많이 했던 4년 이었다. 그리고 눈물과 웃음이 공존했던 추억이 깃든 쪽방이었다. 죽음의 고비도 넘겼고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17년을 살았던 부천도 이 방과 같이 떠나게 된다. 이사 올 때나 지금이나 동네는 조용하다. 근래 들어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 이삿짐 나르는 소리를 들어오다 이젠 내가 이사를 가게 됐다. 아파트에 환장한 나라가 싫다. 그건 그렇고... 단골 가게에 들러 이사를 간다고 인사를 했더니 난리가 났다. 왜 갑자기 가게 되느냐고. 선물로 소주를 줄까 딸기를 줄까 묻는다. 책을 묶을 끈도 빌려줬다. 몇 시간 후 쓰레기봉투로 끈 값을 대신 냈다. 어차피 안산으로 가면 쓰지도 못하는 쓰레기봉투다. 언제나 물물교환이 가능한 희귀한 가게다. 집 앞 카센터 아저씨도 왜 갑자기 가냐고 묻는다. 커피를 권한다. 앉아 소담을 나누고 다시 방으로 들어서는데 쌓여 있는 짐들이 어색하게 보인다. 앞집 할아버지가 사과를 두 개 준다. 잘 가서 잘 살라는 말도 덤으로 주신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든 말만 듣고 서두르면 손해다. 충분한 의논도 없이 급한 마음에 뱉는 말들이 많은 피해를 준다. 역시 말은 조심할 일이다. 여러모로 이번 이사는 출혈이 크다. 그건 그렇고... 휴대전화에 이어 TV를 청산하려고 TV에 폐기물 처리 스티커를 붙여 내 놓았는데 금세 사라졌다. 누가 그 빠른 시간에 가져갔을까? 부디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 TV는 20여 년 전 내가 하사시절 효도용으로 어머니께 사드린 TV다. “GoldStar”가 명확히 박혀있지만 화질은 끝내줬던 TV다. TV는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정보화? 컴퓨터는 있으니 정보는 알아서 찾으면 된다. 술자리에서 드라마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별로 없었는데 이젠 그 별로도 없어지리라.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다. 인터넷 전화 070을 쓰고 있는데 저것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버릴 것이다. 차라리 우표가 낫다. 그건 그렇고... 옷은 장애인협회에서 설치한 재활용 통에 넣고 여러 가지를 버렸다. 모두 필요한 사람에게 갈 것이다. 쓰레기는 거의 없고 모두 재활용 가능한 것들만 버리게 됐다. 집 안에서 쓰레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좀처럼 쓰레기는 나오지 않는다. 짐 많은 것처럼 추접한 것이 없다. 이사 할 때마다 짐이 줄어 좋지만 책이 늘어 부피는 비슷하다. 책상과 침대만 나가면 이사의 50%는 끝난다. 나머진 책이다. 그건 그렇고... 일주일 넘게 밥을 못 먹고 있다. 올 1월 겪었던 최악의 건강상태로 복귀한 듯하다. 매우 힘들다. 내일 이사도 걱정이다. 공부고 일이고 효도고 사랑이고 건강해야 하는 것들이다. 희망도 건강해야 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사 후 어머니께 다녀올 생각이다. 이사도 돕지 못했는데 어디에 사시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뭐든 본연의 마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원래 냉정하고 차가웠던 나로 돌아가야 할 때다. 별다른 흔들림은 없다. 그건 그렇고... 우리나라 대학은 배움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취업이 목표다. 그렇다면 명패를 바꿔야 하지 않나? 서울취업원, 연세취업원, 이화여성취업원... 대학생들은 자칭 지성인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썩어 문드러진 개인주의,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 선거에 대한 멸시 등 좁은 그릇 안에서 스스로 먹고 살 길만 채찍질 한다. 태어난 나라의 한글도 모르는 자들이 외국어에 미쳐있고 요즘 요구하는 것이라 말하며 피한다. 한 학기에 천만 원을 내며 다니면 지성인 인가? 취업전문학교생들이 무슨 지성인인가. 과거 선배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이는 오늘이다. 그건 그렇고... 글이 길어진다. 이러다 날 새것다. 아니, 날 새고 싶다.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나를 위해줬던 사람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또 이곳에서 내가 돕던 사람들 모두가 떠오른다. 냉동고에서 꺼낸 소주가 다 녹았다. 시원하게 한 잔 한다. 17년. 정든 부천. 정든 사람들. 급하게 떠나 미안타. 2010.04.15 21:35 風磬
風文  Aug 10 2022
직장을 구하다 할 말은 글로 다 남겼고 마지막 편지도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그들이 원하는 증명서와 내용을 보냈다. 그들이 원했던 대학입학증명서나 이외의 증명서도 원하면 보내준다고 했다. 나를 의심했던 내용이 풀려 그들이 내게 뒤집어씌운 ‘거짓증언자’라는 누명이 벗겨지길 바란다. 이사 오기 전 도시가스 도둑놈이란 누명보다 더욱 치욕스러운 누명이었다. 가난한 글쟁이보다는 좀 넉넉한 학벌과 재산가를 만났으면 한다. 그건 그렇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사랑 따라 난생처음 안산에 왔다. 사랑은 나를 믿지 않았다. 안산 근처도 오지 않고 떠났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년초에 내게 맞는 편집 일이 있었다. 작은 곳이었지만 적성에 맞는 일이었고 보수도 좋았지만 사랑덕에 포기했었다. 후회 해봐야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직장을 구했다. 다음 달부터 출근이다. 노동시간은 15~17시간, 선 채로 일해야 한다. 처음 해보는 공장일이지만 퇴근하면 잠은 잘 올듯하다. 8시간 노동이나 주 5일 근무제 같은 건 이곳에선 미친 짓이다. 게다가 불법체류자 단속원들의 무자비한 폭력 검거가 수시로 이루어진다. 예전 뉴스를 통해 분식집에서 앞치마 하고 일하던 외국인 여성을 구둣발과 따귀를 휘갈기며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던 단속반의 영상이 생각난다. 갑자기 박노해 시인이 떠오른다. 노찾사의 사계도 떠오른다. 취업난이라 하지만 공단엔 사람 구하느라 정신없다. 사람들은 3D에 속하는 노동을 일이 아니라 징역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다행히 일요일은 쉰다. 몸을 만들고 있다. 몇 년을 앉아 눈으로 책에 구멍 내기 바빴고, 대학공부나 스스로 하고 싶었던 공부도하며 시도 쓰고 소설도 준비해왔다. 집어치우고 요즘 유행한다던 ‘몸짱’을 만들고 있다. 그래야 하루의 노동을 버틸 수 있다. 오늘 저녁 미사 드린 후 큰 수녀님께 고맙다는 말을 전할 것이다. 나처럼 슬퍼하시며 긴 기도를 해주심에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그건 그렇고... 걱정이 하나 있는데 새벽에 나가 일하고 집에 오면 오후 아홉시나 열시일 텐데 우편물이나 택배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웃도 모르고 답답하다. 정기적으로 도착할 책이나 우편물이 등기로 오기 때문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무슨 길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읽은 책들은 책꽂이에 꽂아두고 읽지 않은 것은 책상 왼편에 쌓아 둔다. 오늘 따라 책들이 불쌍해 보인다. 기대하고 내게 왔건만 주인 잘 못 만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녀석들. 짜~아식들! 걱정 말거라. 내가 너희들을 버리겠느냐. 음 하하하! 짬짬이 작은 수첩에 쪽지 적듯 조금 씩 쓸 것이다. 공장에서 욕먹지 않을 정도만. 그건 그렇고 : 2010.04.25 18:03 윤안젤로
風文  Aug 10 2022
단골을 뚫다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서 자주 갈 구멍가게와 선술집을 뚫어야 한다. 나처럼 도서관이나 성당 말고는 외출이 없는 사람은 매우 중요한 일다. 특히 술집의 경우는 분위기가 편해야 하며, 혼자 앉아 한잔해도 눈치 보이지 않아야하며, 외상이 돼야 한다. 삼겹살집이 나의 레이더에 걸렸다. 그 간판이 마음에 든다. “이 정돈(豚) 돼야지”다. 기가 막힌 문장이다. 삼겹살이 이정도 되는지 가게 수준이 이 정도는 돼야하는지 각종 생각이 들지만 글월대로 돼지고기가 이 정도는 돼야지다. 싸다. 며칠 다녔다. 나만 외상이 된다. 고로 뚫었다 말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돼지 돈(豚)과 비슷한 한자가 집 가(家)다. 지붕아래 돼지(가축)를 키우는 것이다. 우리민족도 마찬가지고 다른 민족도 만찬가지다. 지금도 이 풍습은 강원도나 우리 시골에 남아있다. 파키스탄, 이라크 변두리엔 지금도 수천 년간 가축을 집안에 키우고 있다. 예수의 탄생은 희한한 것이 아니다. 가장 따뜻한 곳이 집안에선 가축이 길러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겨울 외양간에 들어가 소똥을 치우던 기억이 있는 데 얼마나 따뜻한지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소의 몸에서 나오는 체온이 실내에 돌기에 얼음 따위는 얼지도 않는다. 가끔 뒷발질 하면 소의 엉덩이를 삽의 평평한 면으로 때리며 “주인도 몰라보는 놈!”하고 윽박지르던 생각도 난다. 지금 내가 뭔 소리 하는 겨? 그건 그렇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는데 골목-골목이라 하기엔 매우 넓다.-이 쩌렁쩌렁하다. 이사 와서 최초로 듣는 어른들의 목소리다. 워낙 동네가 고요해서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린다. 그런데 들어보니 남자가 여자를 패고 있다. 어린 딸은 매달리며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운다. 그런데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가는 곳이 내가 사는 건물이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난리가 났다. 각종 비명소리와 목이 찢어져라 우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소름을 돋게 한다. 옛날 같으면 벌써 내려가 말렸을 것이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나는 늘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썼다. 더 이상 이웃에 대해 참견하고 싶지 않다. 목격자 조서 쓰는 데만 두 시간이 넘어간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이웃을 돕는 자를 심각하게 괴롭힌다. 오늘 뉴스를 봐도 헌법을 손대는 정치인들이 왜 병신소리를 듣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안타까운 건 저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이다. 그래서 아직도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 못하고 있음이다. 이 글을 적고 있다 보니 아래층이 잠잠해 졌다. 오늘밤이라도 저 가정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한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단골이 생겨 좋다. “아무 때나 와서 드세요.”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적적하면 아랫동네로 내려가 TV도 보며 한잔 마시고 올라올 생각이다. 처음에 갔을 때는 경계의 눈초리들이 심했다. 내가 워낙 키가 크고 덩치가 커서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묶어 등 위에서 찰랑거리니 누가 나를 정상인으로 보겠는가. 아마도 그들의 보편적 인식은 내가 좀 깼다고 본다. 사람은 다 똑같다고. 외모는 중요하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외상이라는 특혜가 주어진 것이 아닌가. 내가 이 낯선 곳에 와서 고마워 할 사람이 한 분 더 있는데 그 분에 대해 따로 쓸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이 글 질을 좀 그만 두려고 하는데 좀처럼 멈추질 않는다. 종이 상자에 처박아 둔 원고에 자꾸 눈길이 간다. 글 쓰지 말자고 늘 다짐한다. 쓸데없는 다짐인가? 지금도 가끔 버스정류장에 나가면 시를 쓴다. 그 정류장의 느낌을 적는다. 병이다. 접자. 그만 쓰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구했다던 직장은 굿바이 됐다. 또 알아보자. 아름다운 일자리로 쌀부터 사자. 들리는 샹송(chanson)들이 사람 녹인다. 오늘문득 : 2010.04.28 23:03 윤안젤로
風文  Aug 10 2022
뒷담화 뒷담화(談話)는 뒤에서 남을 말하며 헐뜯는 짓을 말한다. 당연히 사전엔 없다. 일본어투성인 당구용어 ‘뒷다마(たま)’에서 왔다. 공이 굴러 다른 공의 뒷부분을 치거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 번 더 회전하여 공의 뒤를 때리는 행운의 경우를 말한다. 풀어 쓰면 뒤통수치다, 뒤에서 험담하다 정도 되겠다. 1년 내내 한글을 말아먹고 있는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해대니 애나 어른이나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원래 의미에서 벗어나 험담이 아닌 ‘일이 있은 후 벌어진 뒷이야기’라는 의미로 변질되어 쓰기도 한다. 뒤 담화(談話)는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뒤’라는 한 글자로도 좋은 대화는 아님을 안다. ‘앞 담화’라는 말이 있던가? 그건 그렇고... 나에게 말하고 싶거나, 문제가 있거나, 지적하고 싶거나, 충고를 하고 싶으면 전자우편을 보내든지 전화를 걸면 된다. 내가 없는 장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 기분 좋을 사람 없다. 상처입지 않고 충고는 고맙게 잘 받는다. 그러나 뒤에서 충고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죄졌나? 왜 뒤에서 나를 까나. 앞에서 까라. 마주보고 까면 얼마나 기분 좋겠는가. 이 맑고 좋은 세상에 왜 어둠 속에 숨어서 까나. 까나까나 하니까 까나리가 생각난다. 그건 그렇고... 이사 온지 보름 만에 밥을 하려고 밥솥을 열었더니 보름 전 밥이 그대로 있다. 그럼, 밥솥에 밥이 있는데도 그대로 들고 이사 왔다는 말인데. 아무래도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반짝거리며 푸른빛이 도는 곰팡이가 밥만큼 두껍게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함박눈의 결정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참 예쁘다. 이 곰팡이도 확대해서 찍으면 아름다운 결정이 보일까? 검색을 시작했다. 예쁘게 생긴 것도 있지만 대부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진들이다. 설거지를 어떻게 할지 혼자서 100분토론 중이다. 설거지? 설거지의 어원에 대해 옮겨 적은 글이 있는데 읽어보자. ………………………………………………………………………………………………………………… '설겆이'에서 '설겆'은 무엇일까? 우리가 집안 일 중에서 제일 싫어 하는 것이 '설겆이'지요. 이 '설겆이'는 '설겆- + -이'로 분석할 수 있고, 이 '-이'가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임은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렇다면, '설겆-'은 무엇일까요? 이 '설겆다'는 옛말에서는 '설엊다'였습니다. 그리고 '설다'라는 동사가 있었는데, '설다'는 '치우다, 정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자로는 '수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엊다'는 "먹거든 또 그릇들 설어저 오라"(먹거든 또 그릇들을 정리하여 와라)라는 우리가 지금 쓰는 문장도 보이지만,"우리 잘 데를 설엊자"(우리가 잘 곳을 정리하자)라는 문장도 쓰이고 있지요. 그러니까 '설엊-'은 자연히 '설- + 엊-'으로 분석됩니다. 그렇다면 '엊-'은 또 무엇이지요? 이 '엊-'은 '설'의 '리을' 밑에서 '기역'이 탈락한 것입니다. 즉 '겆-'입니다. 만약에 '겆-'이 아니고 '엊-'이었다면, 이것은 '서'기역'이 탈락하였기에 '설엊다'로 표기된 것이지요. 이 '겆'은 '걷다'의 '걷'이 구개음화된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겆-'이었으니까요. '겆다'도 역시 '수습하다, 정리하다'란 동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설겆이'는 '정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두 개의 동사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재미있는 우리말 어원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그건 그렇고... 한 동안 운동 좀하더니 요즘은 종일 의자에 붙어있다. 의자에서 자기도 한다. 운동은 작심삼일이었던가? 내일부터는 시간을 정해 자명종을 맞춰놓고 울리면 바로 일어나 산책삼아 공원을 걸어 볼 참이다. 여긴 큰 공원이 두 개가 마주보고 있다. 각골공원과 반월공원인데 조금 더 내려가면 오목골공원, 반대로 올라가면 가장 큰 본오공원이 있다. 사방이 공원이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 그건 그렇고... 편지지를 사기 위해 문구점을 찾다가 못 찾고 마트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올라가서 왼쪽으로 조금 더 가서 오른쪽으로 길 건너 왼편에 있다고 알려줬다. 말대로 따라갔다. 없다. ‘왼쪽 오른쪽을 헛갈렸나?’ 그런데 그때 간판하나가 보였다. ‘문구’라고 벽걸이 간판이 보였는데 살다살다 저렇게 작은 간판은 처음 본다. 내 배게 보다 작다. 입구에 처박혀있는 무늬가 있는 편지지들을 살피다 지쳤다. 대부분 무슨 곰돌이인형 그림이나 ‘좋은 친구 되자’ 같은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애들이 쓰면 좋겠지만 영 아니다. 그 중 좀 수수한 걸 골랐다. 문제가 또 생겼는데 250원짜리 우표를 붙이고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야하는데 동네에 우체통이 없다. 다 어디로 간 걸까. IT강국답게 우체통은 모두 사라졌다. 결국 우체국까지 걸어갔다. 그건 그렇고... 배고프다. 뭐라도 좀 들여보내야지 안 그러면 장기가 장기간 파업한다. 밥 묵자. 아! 설거지. 오늘문득 : 2010.04.30 20:14 윤안젤로
風文  Aug 10 2022
휴대기계, 휴대공해, 휴대중독 98년부터 벤처기업들의 거품이 드러날 때까지 삼성역 근처에서 근무를 했었다. ‘테헤란로’라고 하는 길의 끝부분쯤에 회사가 있었다. 그 때는 모뎀이라는 것이 있어 팩스 전송 시 들리는 ‘삐리리~ 지지직’하는 연결 음을 들어가며 누리터에 접속을 했었는데, 문자로만 이루어진 누리터 환경에서 그래픽 위주의 조금은 깔끔한 환경으로 바뀌던 때였다. 요즘처럼 영상이 흐르는 입체적 환경이나 화면은 상상만 했던 때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팩스마저도 잘 쓰지 않는다. 전자우편으로 대부분 일들을 해결하면서 외출해서 하는 일과 출장이 줄어들고, 더불어 걷는 양도 줄었다. 등본 등 각종 행정양식과 주식이고 은행이고 집에서 일 다 본다. 그러다보니 헬스클럽 없는 동네가 없고 게다가 다이어트 시장이 급격하게 늘어 지금은 수조원규모의 시장이 돼버렸다. 급속히 늘어만 가는 성인병들도 걷는다면 줄어들지 않을까? 사람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이 휴대기계들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긴 문장도 보낼 수 있는 휴대전화기도 있지만 한정된 길이의 문장만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말이 짧아지고, 은어, 축어, 신조어, 비속어, 변질 된 외국어들이 등장하고 이것을 그대로 방송과 언론이 대량 유통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묘한 단어들이 국어사전에 등록예정 중이거나 심의 중이다. 사라져가는 순우리말은 유치하게 느껴지고 신기술로 개발된 예쁜 기계들로 나누는 언어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는 공감대도 있다. 문장을 수식하려 들지 않아 예절은커녕 공문서 냄새가 물씬 나거나 군용 언어 같다. 이미 쓰던 외계어(통신언어)부터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알기 힘든 외계어들도 있다. 학생들을 대할 때 집에 국어사전이 있냐고 물으면 할아버지 취급한다. 휴대전화 꺼내서 단추 몇 개만 누르면 검색이 가능한데 뭣 하러 그 두꺼운 걸 돈 주고 사냐는 거다. 그러다보니 다른 우리말엔 별 관심이 없고 현실 속에서 순간순간 접하면서 이해가 안 되는 단어만 잠깐 알아보고 만다. 그러니 우리말이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나. 게다가 우리는 방송과 언론, 누리터와 휴대전화기가 가져온 세대 간 언어불통이 있다. 손녀의 말, 편지, 휴대전화기를 통한 문자를 할머니가 이해 못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기업들이 돈 버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말고 수익의 일부를 한글을 위해 썼으면 한다. 기계와 함께 한글도 같이 수출하는 방법이나 휴대기계 속 한글놀이, 축제에 투자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글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며 말은 있었으나 글이 없던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族의 공식 문자다. 그리고 문자 중 가장 빨리 휴대전화기에 입력하는 과학적인 문자가 한글이다. 중국이나 일본, 영어권 국가들은 휴대전화기로 문자 한통 보내는데 한글에 비하면 긴 시간이 필요하고 방송을 통해 보니 러시아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한글은 휴대전화기를 만드는 기업에도 고마운 존재다. 과연 고마워하고 있을까? 정보기술시대는 고속을 원한다. 정보량은 많아지고 대부분 실시간으로 일이 처리 되는 지구촌이다. 전송되는 정보는 문자 말고도 사진이나 고화질의 영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대응하기 위해 꾸준히 기계를 발명하고 개발해왔다. 종이가 사라진다며 등장한 ‘기계를 통한 독서시대’가 열렸고, TV로도 책을 보며 주문도 한다. 작은 기계 하나에 시립도서관분량의 책이 들어가는 건 문제도 아니다. 휴대기계를 팔거나 통신료를 받는 기업의 고속성장은 국민이 줬다. 그렇다면 그 공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것도 국민책임인가? 팔아넘기고 허가 해주고 관리했던 자들은 무엇을 책임지고 있는가. 기업과 국가는 휴대기계로 인한 공해와 그 부속품들이 물들이고 있는 토양오염을 막을 의무가 있다. 그간 해왔던 짓들처럼 일단 팔아먹고 나중에 심각해져 말들이 많아지면 여론수습차원으로 기업과 국가가 부랴부랴 떠들 일이 아니다. 더불어 우리에겐 필수품이라 말하는 휴대기계예절이 필요하다. 기초교육에서부터 통신언어교육이 참고나 교양정도가 아닌 필수로 지정되어야하며 앞으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닌 정보기술을 우리 말글을 살리고 세계로 알리는 좋은 도구로 어떻게 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갖는 고유기능을 포함한 화상전화, 독서, 구매, 오락, 사전 등 집에 있는 큰 컴퓨터에서 얻는 대부분 기능을 갖춘 예쁘고 작은 기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고 싶은 욕구가 이는 것은 새로운 기술문명과 문화를 소비하는 세대교체가 가져다 준 ‘기호가치’가 한 몫을 한다. 다들 가지고 있는데 나만 없으면 상대와 대화할 때나 연락할 때 소외감을 느낀다. 명품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이 사니 이 사람도 사고, 너도나도 사니 나만 없으면 소외감을 느낀다. 이런 삶을 더불어 산다고 말하기엔 억지가 있다. 모든 첨단휴대기계 등 ‘기호가치’의 구매력을 높이는 것은 기업이다. 한두 달 전 내놓은 제품보다 더 광고하고, 더 예뻐야 하고, 더 기능이 많고, 더 비싸야 한다. 그러면 다른 기업은 가만히 있을 까? 경쟁 기업은 한층 더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 내놓고 우리는 그들이 설계한 것들 안에서 고를 뿐이지 나의 기호는 아니다. 쉽게 말해 내 것이 없고 내 개성이 없다. 이 약점을 묘하게 이용한 것이 통신업체의 배경사진, 수신음, 대기음, 음악 등의 판매다. 같은 기계지만 조금이라도 내 개성에 맞게 조작을 한다지만 어차피 다른 기계에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휴대기계가 나올 때마다 비용이 올라가다보니 저소득층이나, 기업들이 요구하는 문화에 흡수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소외되고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다. 이미 대기업에 의해 당연히 모두가 받아야 할 문화를 누리지 못하고 소득에 따라 문화차별을 받고 있는 셈이다. 늘 돌아오는 답은 “억울하면 벌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 제작하고 그 기업이 소유한 전국의 개봉관에서 개봉한다. 단편영화나 사정이 어려운 영화제작자들은 크고 유명한 개봉관엔 발붙이기 힘들다. 보편화, 대량공급하며 기호를 지배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다 봤다는데 나만 못 봤다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이탈 되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지하철 입구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신문을 혐오한다. 이유는 복제인간들처럼 똑같은 신문을 들고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다. 차라리 내가 헌책방에서 500원 주고 고른 누런 책이나 아니면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을 들고 나와 펼치는 것이 낫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이사를 했는데 답답해 한 사람들이 있다. 집주인, 공인중개사, 이삿짐 차 아저씨, 통신회사 아저씨, 도시가스 연결하는 아저씨다. 연락이 되지 않으니 발만 동동 구른 모양이다. 계약금도 내고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이사 전에 모두 이야기를 끝냈는데도 믿지 않고 당일 통화를 해야 해소되는 조급증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3천 원짜리 공중전화 카드를 하나 사서 공중전화로 안심을 시켜놓고 또 재확인을 한 후 이사를 했다. 휴대전화기가 없어 더 답답한 사람들은 택배 아저씨나 집배원 아저씨다. 집에서 기다리다가 급한 일이 있어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현관문에 쪽지들이 붙어있다. 방문 했지만 아무도 없어 돌아가니 전화를 달라며 휴대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간다. 배달 된 물건을 대신 받아주던 이웃 간에 벽과 문이 두꺼워지고 혼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늘면서 휴대전화는 주민등록증과 같은 필수품이 됐다. 요즘은 초등학교 입학 선물이 돼버렸고, 흉악범죄 대응용으로 인공위성위치추적을 위해 또는 경찰이나 구조대원과 바로 연결하기 위해 어린이들 손에 쥐어지고 있다. 여유는커녕 휴대전화로 늘 긴급 상황실 분위기다. 바쁘지도 않은데 불안하고, 휴대전화기가 내 주변 어디에 있는지 반드시 알고 있어야하며, 오지도 않는 문자나 기다리며 기계만 바라보다가 이것저것 누르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통화버튼을 눌러 통신낭비의 길로 간다. 그렇게 시간이나 보내는 불안한 여유들을 종종 본다. 그 휴대기계가 반드시 필요한가를 생각해보자. 휴대기계를 사더라도 기계에 구속되지는 말자. 생활에 여유를 줘야지 긴장감과 조급함을 준다면 사람에게 해가 되는 기계다. 그건 그렇고, 어느 날 인천행 지하철에 앉아 서류를 대충 정리해 가방에 넣고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 꺼내는 데 정지된 화면처럼 주변사람들이 멈춰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세숫비누만한 기계를 향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영혼을 빨아 마시는 휴대전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저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한 칸을 걸었다. 문자를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화투나 카드놀이 하는 사람, 동영상으로 오락방송 보는 사람, 사진 찍고 보내고 받고 등 저마다 강한 집중력이었다. 여가 활용인가 중독인가 아니면 그저 시간을 날리는 중인가. 길을 걷다가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작은 기계를 보며 실실 웃고 지나는 사람을 본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저러나 생각도 들고 예전 동네 바보들이 저러고 다니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가장 신경에 거슬리는 건 휴대전화 소음이다. 수신음도 수신음이지만 옆에 앉아있는 아주머니 가정사를 왜 내가 모두 들어야 하는가. 그 아주머니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든 바람이 나든 내가 왜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목소리는 왜 그리 큰가. 심지어 조용히 누려야하는 장소인 공연장, 극장, 도서관, 독서실, 성당, 법당 할 것 없이 휴대전화가 주는 공해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다. 어느 장소든 자기 안방이고 자기 사무실인양 떠들고, 울리고, 찍어 댄다. 오죽하면 공연장마다, 지하철 각 칸마다 ‘휴대전화는 진동으로’라는 표어가 붙어 있겠는가. 무식의 극을 달리는 몇몇 사람들이 안 지키니까 붙여 놓은 것이다. 그런 표어도 나는 공해로 본다. 가뜩이나 지하철은 어디나 광고 천지인데 그런 표어까지 봐야하나? 그건 그렇고, 아는 지인이나 받은 책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시낭송 음반을 선물한다. 등기나 속달도 아닌 일반 우편으로 보낸다. 250원하는 우표를 한 장만 더 붙이면 서너 날 지나 잘 도착한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급하다면 전자우편이나 휴대전화문자가 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급할 일도 없고 집전화기 하나면 충분하다. 어느 날 은행엘 가서 글로 써 낼 것이 있었는데 멀쩡한 정신인데도 나의 필체가 만취 상태의 필체였다. 한문 같기도 하고 아랍어 같기도 하고 어쩌다 내 필체가 저 모양으로 변했나 생각이 들었다. 써 놓은 내 글씨를 보며 그 종이를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편지나 엽서 또는 일기도 써보며 내 필체를 찾고 가꾸는 것도 나름 재미다. 내 책상 위엔 타자문화와 육필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종이나 우표를 좋아한다고 해서 시대에 적응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반대로 첨단기계로 무장하다시피 다니는 사람들도 시대에 적응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첨단기계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이 있고, 첨단기계를 갖추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걱정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생계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반드시 그 기계가 필요한가를 고민하는 것은 환경을 위해서도 통신낭비와 각종 공해를 줄이는 데도 좋은 자세이자 가져야할 양식이다. 내 컴퓨터는 6년을 내 옆에 두고 있다. 내가 컴퓨터로 하는 일들은 고성능을 요구하는 일들이 아니다. 고장으로 수리를 못할 지경이면 고장 난 부품만 갈아 끼워 쓴다. 늘 집 안에 있으니 남에게 피해 줄 일도 없다. 그러나 휴대기계는 다르다. 필요한 휴대기계를 갖게 되면 ‘기계예절’에 대해 나름 다짐하고 되도록 새것으로 바꾸지 말고 오래오래 쓰자. 그건 그렇고, 얼마 전 젊은 부부가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아기 분유를 챙기지 않아 아기가 죽었다는 기사를 봤다. 이 부부는 중독이다. 중독은 간단하다. 나와 남의 삶에 해가 되면 중독이다. 휴대기계든, 컴퓨터든, 각종 취미나 기호품들……. 보통 습관이 중독으로 가는데 반대로 나와 남의 삶에 도움이 되고 희망이 되는 습관을 찾아 들이자. 중독으로 가지 않으려면 ‘적당히’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시 한편이 떠오른다.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전문) ……………………………………………………………………………………………………………… 연탄은 적당히 타지 않는다. 죽도록 죽어라 죽을 힘을 다해 검정을 모두 벗을 때가지 탄다. 유독가스가 모두 나가면 하얀 재만 남기고 죽는다. 그 유독가스를 조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당장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좋지만 스며드는 가스를 단단히 막지 못해 중독 되는 것이다. 휴대기기든 컴퓨터든 단단히 막지 못하고 그 쾌락을 조절하지 못해 그 기계에 구속되다 중독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주도 즐기다 말아야지 죽도록 죽어라 죽을 힘을 다해 마시니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는지 없는지 하다 "골뱅아 부디 안녕~" 하면서 세상 뜨는 게다. 왜 또 소주 얘기는 꺼내가지고...... 2010.05.05 15:14 윤영환
風文  Aug 09 2022
정신이 좀 든다(入魂) 터지려다가도 기도하며 잠재우기가 몇 번인가. 터지고 싶은데 터지면 온갖 꼬투리 잡아 욕질이다. 심지어 단어하나 잡아가지고 욕으로 소설을 쓰니 폭약만 쌓여갈 뿐이다. 폭약 덜어내는 것이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인가? 결코 아니다. 그건 그렇고, 나이? 이 길에 들어서도 위아래가 있다. 어딜 가든 없겠나. 그러나 이 길에 들어서면 사라져야 하는 예절이 있다. 너의 작품에 반말이 가능하며 이 길과 상관없는 너의 자찬에 얼굴을 마주보고 있더라도 욕이 가능하다. 나이만 먹으면 무슨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뇌들이 싫다. 다른 길(道)에서야 주도, 차도, 법도 등 많은 길을 지킬 수 있지만 이 길에 들른 주막에선 길은 의미 없다. 이 길은 하나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길’이라 부르는 것도 의미 없다. 다른 길이 없는데 이길 저길 어디에 있나. 이 길에서 나이로 누르든 배운 지식으로 누르든 예절로 누르든 욕으로 누르든 나는 눌리지 않는다. 다른 길에서 눌러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르지 않아도 숙인다. 그건 그렇고, 어느 자리에서 늘어놓는, 주로 남들은 궤변이라 하는 것들을 늘어놓으면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어쩌다 내가 미친놈이 됐는지는 모르나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놈이 아닌지 생각도 든다. 나는 나의 얄팍한 지식이 아닌 커가는 사상을 푼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든 플롯을 복권 추첨하듯이 섞어 풀든 내 마음이고 내가 할 말이다. 논리로 까서 들어먹는 놈이 있고 논리를 거부하는 놈도 있다. 왜? 자신의 논리를 거부하는 발언에 대해 벽을 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 두드려 열리지 않으면 그냥 내가 접는 것이 몸에 좋다. 웃고 살아도 짧다. 그건 그렇고, 이 길에서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70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 벌이다. 60 전후의 형들도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 벌이다. 그 이하의 나이로 대화로든 작품으로든 나에게 충격이나 감동을 준 사람은 이미 죽거나 없다. 또는 내가 못찾고 있는 것일 게다. 따라서 나와 동갑이거나 내 또래와는 진지한 대화는 없다.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이사 온 후로 형들마저 못보고 지낸다. 술자리에서 막내로 내가 엉덩이 붙일 일 없이 잔심부름을 하더라도 나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좋다. 존경할만한 분은 대부분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 소박함을 만든 것은 존경할 만한 철학과 지식 그리고 경험이다. 그리고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평화롭게 살자고 내려간 사람들 대부분은 쪽박을 차고 다시 상경한다. 평생을 농사라는 길을 걸어온 농사를 전공한 철학자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여러 서적, 누리망, 현지 공무원의 안내, 이론으로 무장하고 내려갔기 때문이다. 김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지저분한 옷이 초라해 보이나? 내로라하는 전공 교수들과 농사 경합을 한다면 당신이 초라하게 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백전백승이다. 그 길을, 자신 춘추만큼 걸어 온 분들이다. 농사 공부는 절정에 오르신 ‘달인’이다. 그만큼 그 분들의 농사작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실패해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짓는 생명들이라 여기고 내년을 기약하지만 농사 초보들은 이해 못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그분들에게는 이론도 쓰신 논문도 없다. 그러니 달인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잡다한 개똥철학이 나를 미친놈으로 몰고 가지 않나 싶다. 끝없이 써왔고 틈만 나면 누리망에 들어가 관련 유력설을 뒤지거나, 도서관가서 사실인지 찾고 또 쓰고 수정하고 집어던지는 공중에 뜬 삶. 남는 건 종이쓰레기. 방바닥을 뒹구는 몸뚱이. 차라리 그 시간에 돈만을 위해 살았다면 더 나은 생활을 하지 않겠냐는 충고가 잇딴단다. 나 때문이 아닌 내가 돕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말도 맞다. 당장 그 사람을 돕고 싶은데 그런 마음이 드는데……. 그들을 위해 마음으로 늘 기도한다. 그건 그렇고, 누군가 밟고 지나간 민들레, 제비꽃, 개망초 들을 보고 한참을 서있다. 왜 사람들은 산책로로 걷지 않을까? 저것들을 밟아 죽일 급한 일이 있었나? 나는 쪼그려 앉아 다시 세운다. 밟혀도 꺾여도 나처럼 다시 일어나라고. 나처럼 다시 일어나 살라고 짓밟힌 것들을 세운다. 재개발에 미친 공사장 천지의 나라 우리나라는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밟아 버리고 새롭다며 콘크리트로 도배를 하고 있다. 철거 촌을 떠나 왔지만 그곳의 이웃들이 생각난다. 나만 편한 것이 아닌지 생각도 든다. 나를 짓밟은 사람 원망 말고 그런 사람을 위해 스스로 뿌리 깊은 나무가 돼야 할 것이다. 다시 일어서야 하니까. 그게 사는 이유고. 그건 그렇고, 며칠간 매우 몸이 좋지 않았다. 정신이 좀 든다. 지인에게 부탁해 병원에 가볼 생각이지만 용기가 나질 않는다. 차분차분 살 일이다. 저 고목이 하루아침에 저처럼 위엄 있게 설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은 위대하며 자연스러운 건 모두 천천히 이루어진다. 자고 일어나니 내 이름을 알아주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이 됐다는 말은 천천히 살아온 결과물이다. 조급하기 싫어 10년 전 회사라는 조직을 떠났지 않았나. 너희들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안타까워 나를 위해 떠났다. 여전히 후회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안타깝다. 몽롱하다.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 연한 블랙으로. 2010.05.23 23:05 윤영환
風文  Aug 09 2022
잘 살자 언제부턴가 방문 근처에 아주 작은 개미들이 기어 다닌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면 팔이 근질근질할 때가 있는데 그 작은 개미가 내 팔에서 전력질주 중인 것이다. 방에 먹을 것이라고는 소주하고 물 뿐인데 뭘 먹겠다고 돌아다닐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사료봉지가 하나 보인다. 햄스터 암수를 키우고 있는데 그 녀석들 사료다. 개미를 추적하던 중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그 사료봉지 주변임을 알게 됐다. 어떻게 사료봉지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을까? 저 사료봉지를 천장에 매달아 놓으면 천장까지 올라갈까? 잔인한가? 개미들에겐 사료봉지가 63빌딩 아닐까? 암벽등반 그만하라고 사료 한 두알 던져줬다. 소설 ‘개미’가 떠오른다. 그건 그렇고, 덥다. 비가 콸콸 좀 내렸으면 좋겠다. 겨울이 올 때까지 매일매일. 요즘 번식기인지 동네 새들이 난리다. 공원마다 참새도 많고 난 생 처음 보는 새들도 날아다닌다. 새들이 많다는 건 먹이가 있다는 것이고 그 많은 먹이들이 사는 건 이곳은 아직 오염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엄니는 늘 환생하면 새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어디든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다고. 그러고 보면 꽃처럼 산새들을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 없다. 그건 그렇고, 벼룩의 간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간이 있기는 있나? 벼룩으로 검색을 해봤다. 벼룩도 종류가 많다. 사진들을 보며 다시는 검색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룩의 간도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어릴 때 빈대가 궁금해서 현미경으로 본 뒤론 빈대도 안 본다. '벼룩시장'이라는 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벌레와 곤충의 차이는 뭘까? 바퀴벌레는 벌레인가 곤충인가? 여기저기 뒤져보니 개념이 선다. 궁금하면 찾아볼 일이다. 그건 그렇고, 커튼을 건 쇠로 된 봉이 떨어지면서 커튼과 함께 화분을 덮쳤다. 화분은 내 주먹만 하다. 작은 사고라도 곧 저세상인 것이다. 잎들이 시들시들하더니 누워버렸다. 화분을 욕실로 옮기고 물을 주며 세수하러 갈 때마다 지켜봤다. 잎들이 일어선다. 다시 섰다. 조금 찢어진 잎들도 있지만 다시 꼿꼿하게 섰다. 살고 싶었을 게다. 나도 살리고 싶었고. 예전에 들었던 물 이야기가 있다. 맞는지 모르지만 내용은 대충 이렇다. 두 개의 컵에 물을 담아 꽃을 하나씩 담아 놓고 커튼을 쳤다. 교수는 제자를 불러 한쪽 물엔 ‘나쁜 물’이라고 말하고 다른 컵엔 ‘사랑한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제자는 컵에 물이 있는지 꽃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며칠 동안 교수의 지시대로 했다. 며칠이 지나자 ‘나쁜 물’이라고 들었던 컵의 꽃이 죽어버렸다. 물도 느낀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나. 화분에 있는 저 식물의 줄기와 잎이 다시 일어선 것은 나의 바람을 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세수를 할 때마다 일어나라고 했었다. 너도 살고 싶었고 나도 너를 살리고 싶었다. 그런 게 서로 잘사는 법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넘어지려하면 잡아주는 힘. 더 끼적이고 싶은데 힘들다. 좀 누워야겠다. 그건 그렇고 : 2010.06.06. 16:37 風磬
風文  Aug 09 2022
힘든 하룻밤 자다 눈을 뜨니 책장 앞에서 쪼그리고 있는 다리가 보인다. 밤새 자벌레처럼 방을 뿔뿔 기어 다닌 기억이 난다. 침대위에 오르지 못한 건 구토 때문일 것이다. 무의식중에서도 침대와 이불이 더럽혀질까봐 내려와 잤겠지. A4용지에 적힌 많은 글들이 보인다. 알아먹지 못하는 단어들과 문장이 많다. 적잖은 분량이다. 뭔가를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5시 반인데 집안에 연기가 자욱하다. 부엌에 가보니 큰 냄비하나가 타고 있다. 안엔 지난 달 선물 받았던 닭과 쌀이 타고 있다. 꼴에 닭죽이 좋다는 말을 듣고 닭죽을 끓여보려 했나보다. 치우고 닦고 환기하니 좀 낫다. 불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생닭을 선물한 지인에게 미안타. 반팔 티엔 피가 묻어있다. 거울을 보니 코피도 쏟은 모양이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샤워를 하고 싶은데 기운이 없다. 그건 그렇고, 단골 술집 아주머니가 오이소박이를 담아 줄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손녀가 오이소박이를 좋아 한단다. 담는 김에 내 것도 좀 담아 주겠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왜 외상값 달라는 소리를 안 할까? 원고료가 언제 나올 줄 알고. 갈 때마다 친절하다. 외상값 달라는 소리 안 한다고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엔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착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세상 아닌가? 다 착하면 법원이 왜 있겠나. 나는 판사라는 직업을 매우 혐오한다. 내 나라 역사를 봐도 판사는 매우 추악하며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그다지 좋지 않은 직업이다. 법전이 두꺼울수록 그 나라는 썩어가는 나라다. 그건 그렇고, 방송대를 쉬고 있지만 같이 다니던 형님이 있다. 작년이 칠순인지 올해가 칠순인지 가물가물하다. 전화를 한 번 걸어봐야겠다. 그 형은 어르신이나 선생님이라고 하면 싫어한다. 늘 내가 찾아가면 소주와 안주를 준비하신다. 이사 온 뒤론 뵙지 못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데도 그리고 형편이 나쁘지도 않은데 아르바이트를 하신다. 물었더니 놀면 뭐하냐는 것이다. 내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봐 준다고 하셨는데 이사를 와버렸다. 한문을 많이 아시고 문장들을 많이 아셔서 늘 배울 점이 많고 내 넋두리도 잘 받아주셨다. 나를 친동생처럼 늘 배려해주셨다. 늘 거절했지만 형수님도 갓김치나 반찬을 챙겨주려 늘 배려해주셨다.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안부전화를 넣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커피를 한 잔하니 정신이 좀 든다. 종일 나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다. 의자에서 잠들기도 한다. 깜깜이. 나는 어릴 적 엄니한테 밤을 늘 깜깜이라고 했다. 깜깜이가 오면 코~ 자야했기 때문에 깜깜이는 나와 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깜깜이가 오면 엄마 품에 쏙~ 들어갈 수 있어서 깜깜이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항상 질문이 많고 그 질문을 풀기위해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는 늘 책을 사다 날랐다. 초등학교 때 이대 옆 대흥동(?)에서 살았는데 창고엔 늘 읽고 난 전집들로 꽉차있었다. 하지만 형은 늘 그 읽고 난 책들을 헌책방에 팔고 다녔다. 후에 알았지만 읽고 난 건 팔아야 다른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형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나의 책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복사가 어렵고 글 쓰다 참고하려 책장을 가면 아직 반납이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종종 있어서다. 그건 그렇고, 나는 영악해지고 싶지 않다. 계산하고 짐작하는 행위는 싫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좋으면 웃는다. 당연하지 않나? 내가 화를 내자 떠난 인연이 있는데 웃기지 않나? 지는 평생 화내지 않고 살았나? 지가 말하던 생각과 말과 행위로 화내지 않고 살았나? 가장 답답한 건 왜 자기에게 화를 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사상으로 어떻게 인생을 사나? 입으론 평화를 행위론 저주를 하는 추악한 모습 중 하나다. 천주교인은 미사 드릴 때 제 탓이오! 하면서 가슴을 친다. 진심인가 아니면 습관인가. 나는 가슴을 치며 하루 동안 잘못한 일은 모두 떠올린다. 죄짓지 않겠음을 다짐하며 가슴을 친다.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매일 다녔다. 장마가 오든 폭설이 내리든 매일 다녔다. 그러나 성당을 다니든 안다니든 나는 교리를 믿기 전에도 늘 반성을 해오며 살았다. 지난날의 죄와 오늘을 늘 성찰하며 살았다. 종교와 상관없이 늘 반성하며 살았다. 실수를 하든 죄를 짓든 뉘우치며 살았다. 필요 없는 언행을 자중하기를 스스로 닦았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다. 내가 신도 아니고 언젠가는 실언을 하게 되고 죄를 짓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반성할 줄 알아야하고 뉘우칠 줄 알아야하고 변해야 한다. 모르고 고치지 않는 사람과 알고도 고치지 않는 사람은 다르다. 그건 그렇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쪽지를 받았다. 글로 사생활까지 모두 공개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오판했다. 나는 모두 공개하지 않았다. 작은 일부만 쓰는 것을 그는 몰랐다. 고마운 건 그 일부를 사실로 받아들여준 점이다. 별다르게 꾸미지 않는 것도 가식 없는 것도 나름 의미 있다고 본다. 나를 만나지 않고 나를 알지 못하고 나와 대화도 못한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짓은 용납이 어렵다. 그저 글 몇 편 읽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심판하는 행위는 죄다. 인간의 사상을 어떻게 글 몇 편으로 쓰겠는가. 논어 하나가 공자의 모든 것이라 믿나? 그 고전 하나가 공자를 온전히 모두 들러냈다고 보나? 신약 하나가 예수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법화경 하나가 부처의 전부인가? 다 쓰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인간의 사상이다. 어찌 글월 몇 자 읽고 사람을 판단하는가. 역으로 묻자. 사람을 판단할 자격은 갖추었는가? 그 정도로 당신은 위대한가? 그건 그렇고, 내가 참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여자들이 외출할 때 화장하는 것이다. 화장품은 비누하나면 족하지 않나? 로션정도는 봐줄만 하다. 창간호 행사나 신간 행사에 가보면 다들 쥐잡아먹은 입술들이다. 향수 속 하얀 얼굴들. 무대 위에 서는 배우도 아니고 행위예술도 아니다. 적어도 문인은 그러고 살지 말자. 예절이네 뭐네 별별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게 싫다. 뭐가 창피해 얼굴을 덮는가. 왜 자연스러움을 포장하는 가. 남들 보기 창피한 인생이니 포장하는 짓이다. 죄 지은 놈이 숨는 것과 뭐가 다른가. 남들도 하니 나도 해야 하나? 그건 그렇고, 손톱정리를 잘한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왜 내 손톱에 관심을 둘까? 생각해보니 손이 크고 술자리라 소주잔 드는 손을 보고 말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종종 손톱을 자르는데 그 이유는 타자할 때 손끝이 아파서다. 어떤 사람은 타자를 친다고 하는데 치는 것은 타(打)에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타자를 한다. 타자 중이다. 타자해서 원고를 제출한다.’ 라고 써야 맞다. ……. 할 이야기를 잊었다. 한마디 더 있었는데……. 좀 누워야겠다. 곤하다. 그건 그렇고 : 2010.06.09. 09:31 風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