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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Aug 10 2022
정도(正道) 춥다. 겨울 같다. 이상 기후로 달력가지고 겨울이라 말하기엔 막가는 지구다. 중동에 눈도 내리니 말이다. 언젠가 지구자기장이 일정 주기로 변한다는 학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적 이 있다. 즉, 남극과 북극이 바뀌는 것이다. 자석의 N극이 S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으로 공룡의 멸종까지 설명한다. 그 학설은 지금의 지구가 N극과 S극이 기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상기후는 해마다 심해질 것이라 설명한다. 금성이던가, 화성이던가... 붙어 돌던 위성이 떨어져 와 지구의 극을 치고 지나가 지구가 23.5도가 기울고, 그 위성이 지금의 달이라는 학설보다는 위에서 말한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말하는 학설이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지구자기장은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방사능을 막아주고 있다. 태양 일부분의 작은 폭발에도 지구에서 휴대전화통화나 TV시청에 장애가 있을 정도니 전체의 방사능과 에너지는 어느 정도겠나 상상해본다. 그건 그렇고... 식도와 목에 통증이 심해 막걸리도 넘기기가 쉽지 않다. 따뜻한 커피도 식도를 찢고 지나는 느낌이다. 그래서 찬물만 마신다. 몸을 추스를 필요가 있는데 어리석은 습관 덕에 몸이 고생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전국이 건조특보상태다. 작은 불씨하나면 산마루 한두 개는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에 없어진다는 얘기다. 건조하긴 건조한 듯하다. 자전거만 지나가도 먼지가 이니 말이다. 방에 젖은 수건들이라도 널어 둬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정도(正道)는 뭔가. 그냥 도(道)면 도지 정도가 뭐냐. 현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위기상황도 누가 억압하는 일도 없는데 왜 최선을 다하며 사는가. 그냥 선하게 살면 되는 거지. 바동거려봐야 뭐가 달라지나. 험한 상황이 닥치지 않게 천천히 살면 되는 것이다. 뭔 야그냐. 공부를 해도 죽어라 하지 말고 즐겁게 하고, 술을 마셔도 죽어라 마시지 말고 즐겁게 마시고, 밥도 배 터져라 처먹지 말고 배만 안고프게 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요즘 다이어트전쟁이라고 하는데 살이 안 찌게 처먹고 걸어 다니면 되는 것이지 마음같이 안 된다는 핑계는 자기합리화다. 다이어트시장이 연간 수조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회적인 낭비인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르쳤어도 그게 되나? 꼭 시비 걸고 못된 짓하는 놈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싸움이 일게 마련이다. 어른이라고 다른가? 국회를 보라. 예나 지금이나 늙은이들이 2종격투기 뺨치고 있잖은가. 그러고선 사적인 자리에 나와 친한 친구사이라고 하잖나. 인간에게 정도(正道)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인간은 혼자 있을 때 그나마 정도(正道)를 지키려한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은 저지른 일을 떠올리며 반성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혼자 있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를 모르는 것이다. 무릎 꿇고 반성하고 지내면 되는가? 책을 읽을까? 공부를 할까? 우리는 자꾸만 머리에 지식이나 뭔가를 집어넣으려는 습관이 있다. 사회가 만든 경쟁심리 탓이다. 스스로를 생각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또는 복수는 어떻게 하고 돈을 어떻게 하면 많이 벌겠나 하는 생각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살아 왔고 내 주변엔 누가 있으며 현실은 어떤가.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내 마음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고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 방구석이 답답하면 나가도 좋다. 영화, 여행, 등산은 혼자 만끽하는 것이 참맛이지 이놈저놈 전화걸어서 건수나 만들어봐야 술이나 지방섭취뿐이다. 사회생활하면서 게다가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은 좀처럼 맞이하기 힘들다지만 그것도 자기합리화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얼마든지 혼자 보낼 수 있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만들 수 있다. 출퇴근 지하철 속에서도 얼마든지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공간이 마련되지 않는가? 답이 없는 나를 찾는 시간이 축적될수록 탁한 마음도 맑아지며 사회생활의 활력소도 된다. 그건 그렇고... 어제 안경을 찾으러 가는데 휴지 아저씨를 또 봤다. 대화는 못해봤지만 내가 이사 한 뒤로 몇 개월 만에 보는 턱이라 반가움이 일었다. 바람까지 불어 옷도 두툼하게 입었어도 상당히 추웠는데 휴지 아저씨가 입은 옷은 안쓰러울 정도로 얇았다. 여전히 상가 이곳저곳을 돌며 두루마리 휴지를 내밀고 있었다. 손수레를 보니 한 봉지도 못 판 듯 보였다. 키도 크고 차림도 깨끗하며 멋지게 생겼지만 다리를 저는 데다 말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여전히 어려운 듯 했다. 종일 휴지수레 끌고 다리품 팔아 한 수레 다 팔면 만 원 정도 된다. 저 아저씨는 먹여살려야할 아이들이 있을 수 있고, 병든 아내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혼자 살 수도 있다. 팔리든 안 팔리든 살기 위해 이 추운 날 수십 리를 걷는다. 저 아저씨가 걷는 길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저 아저씨만큼 살고 있는가? 밥 먹고 똥을 싸기 위해서라도 저 만큼 노동을 하고 있는가? 한다면 그 노동에 보람을 느끼는가? 선뜻 내놓을 답이 생각나질 않는다. 2008.02.17 15:13 風磬
風文  Aug 10 2022
목적지 맷돌을 돌리면 깎이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땐가 다하고, 나무를 심고 기르면 자라는 것이 눈에 띄지는 않아도 어느새 크게 자란다. 덕을 쌓고 거듭 실천하면 당장은 훌륭한 점을 모르나 언젠가는 드러나고, 의리를 버리면 그 악한 것을 당장은 모른다 해도 언젠가는 망한다. 사람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면 큰 그릇을 이루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이것이 고금(古今)에 변치 않는 도(道)이다. 변치 않는 도(道) - 영원 유청 스님 (? ~ 1117) -------------------------------------------------------------------------- 사람들은 적어도 보편적 이성을 갖춘 상태에서 생활하며 생각하고 사람을 대(對)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을 예절이라 표현해도 되겠으나, 나는 예절대신 배려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배려가 예절이 아니냐는 말을 하지만 뭉뚱그려 말하는 것에 나는 별 취미가 없습니다. 보편적 이성은 무엇이고 나는 그것을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합니다. 스치는 교육과 어른의 훈계 그리고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성립되어갔지만 한계가 있지요. 나는 지금 독특한 유아독존의 길을 오래 걷고 있습니다. 근래, 보편적 이성을 굳이 갖출 필요가 있는가 하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데 복잡해집니다. 되레 복잡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름을 채우고 고속도로를 타고 장거리를 간다면 운전자는 유량계의 바늘만 쳐다보고 가지 않습니다. 반 정도 가면 기름이 어느 정도 남았나 가끔 확인할 뿐입니다. 봐야할 것은 전방의 도로 사정이고 표지판일 것입니다. 여기서 신호나 표지판은 교육을 통한 지식으로 우리는 구분합니다. 도로는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다양한 목표를 향한 길입니다. 그러나 광주로 갈지 평택으로 갈지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요즘 나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출발도 안한 것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얼추 왔다 싶은데도 갈 길은 멀다 느껴지고 기름은 떨어져 가는데 기름값도 없습니다. 나는 요즘 고속도로고 뭐고 폐차 하고 어디론가 숨어들어갈까 생각 중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은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 아닌가합니다. 위에서 말한 보편적 이성을 갖출 필요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목적지를 갖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상통합니다. 이런 글을 읽고 신세편한 소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목적지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목적지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도착했다는 사람 본 적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자는 그저 걸어온 길에 만족하다는 유언 아닌 유언으로 만족감 없는 만족감으로 종지부를 찍을 뿐입니다. 나는 지금 독특한 유아독존의 길을 오래 걷고 있습니다. 2007.02.20 07:26 바람의 종
風文  Aug 10 2022
행복한 노동 왜 바빠야 하나. 바쁘면 근심도 없어지고 시간도 빨리 가고, 잡생각도 없어지고, 세월이 약이겠지요? 근심 없이, 잡생각 없이 사는 것이 행복한가? 인간이 무슨 기계요? 시간 빨리 보내려고 태어났나? 그럼 빨리 죽지 왜 살아?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팔자 늘어진 생각만 하고 자빠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자 늘어진 생각을 하는 것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적당한 노동 그리고 그에 따른 적당한 대가로 먹고 싸야한다. 그 외의 시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에 몰두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어떤가요? 지난달인가 진단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병원에 갔었습니다. 약값을 찾기 위해 현금출납기 앞에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휠체어를 탄 사람이 옆에서 허우적대며 답답해하고 있었습니다.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고자 했지만 팔을 움직일 수 없어서 목을 이리저리 비틀고 입으로 물어 제치는 등 힘들어 했습니다.'제가 걷어드려도 될까요?' 하니까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아마도 인상이 험악했겠죠. 당황한 듯 반문했습니다. '네?'허락도 안 받고 나는 목도리를 걷어주었는데 목도리 안에서 지갑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지갑을 주워 그에게 주었더니 그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 대신 돈 좀 찾아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나는 말했습니다. '돈을 갖고 튈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하니까 껄껄껄 웃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노동을 제공했지만 그는 나에게 그 노동의 대가를 줄 의무가 있나요? 내가 요구하기도 전에 나는 그의 미소를 대가로 받았습니다. 어젠 고마운 분이 문병을 왔습니다. 하도 술을 처먹어서 그런지 며칠째 고꾸라져 거동이 힘들었죠. 아! 아픈 사람 곁에 누가 있다는 것이 이리도 안심이 될 줄이야. 육신의 아픔이 절로 낫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문병에 대한 어떤 대가를 줘야할 까요? 문병으로 인해 편안함과 고마움이 들었다면 이미 대가는 지불한 것입니다. 찾아 온 분도 그것을 원한 것이고요. 일반적의미의 의식주를 위한 노동에 비해 배려가 깔려있는 노동은 대가가 없어도 묘하게 기분 좋은 것입니다. 특히 안면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준 노동은 기쁨이 몇 배에 달합니다. 노동을 돈과 의식주에 결합시키기 보단, 노동을 봉사라는 말로 구분지어 미화하기 보단,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의 도구로 써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사람이 좌우를 살피고 있다면 차를 세워 먼저 건너게 해보세요. 뒤에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빵빵 거리면서 당신에게 항의 하겠지만 당신의 작은 발목노동이 행복으로 가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대가도 없고 기분도 나쁜 노동의 경우겠지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해봤다면 대가도 없고 기분도 나쁜 노동은 최소한으로 줄어 들것입니다. 2007.03.05 08:00 바람의 종
風文  Aug 10 2022
웃는 연습 혼자 사는 사람이라 적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웃고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사람도 없는데 빈방에서 혼자서 웃고 있으면 돌아이 같아서 자제하고 삽니다. 요즘 습하죠? 비도 오고 날 덥고 아니면 변덕스럽고... 캐비넷 옷장에 '물먹는 하마'에도 물이 좀 찼더군요. 멀쩡한 책들도 눅눅해보이고... 해수욕장도 개장했고 요즘 휴가네 뭐네 들뜰 시기죠? 회사 다닐 땐 어디갈까 고민도 하고 그랬었는데 반지하에 외출도 자주 안해서 여름같지도 않고 계절 모르고 선선하게 삽니다. 집앞에 산이 있어요. 등산로도 좋고 높지 않아서 어르신들도 많이 다니시고 좋습디다. 등산로 입구에 나무들이 주~욱 서있는데 3, 4층 연립보다 키가 큽니다. 열대우림 생각이 날 정도로 엄청난 푸르름입니다. 고개 들어 빠꼼 쳐다보면 나뭇잎사이로 하늘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합니다. 그러고 서있으면 웃음이 납니다. 슬펐던 생각도, 잠재된 악마성도 수그러 들고 왜그러고 살았나 싶기도 하고 잠깐의 미소로 사람이 다시태어나는 느낌입니다. 어제 밤 열시쯤 산에 올랐다가 한시간 뒤에 내려와 지금까지 술마시는 걸 보면 대자연도 인간의 감정을 토닥일 수 없음을 압니다. 아니면 대자연에 비해 인간이란 존재는 티끌 수준일까요?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미국인들이 학살을 시작하기전에 과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땅을 소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이며 대자연 속에 소유의 개념은 없는 것이라고요. 자꾸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소유하려하고 구속시키고...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됩니다. 흐르는 냇물도 돌을 집어가며 흐르지 안잖아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인정하며 갈길을 가죠. 자신을 품고 하나가 되어줄 엄청난 규모의 바다가 있는 걸 아는지 아무것도 들고가지 않나봐요. 저도 믿고 싶어요. 나를 품어 하나가 될 엄청난 규모의 그 무언가를요. 그날을 위해서라도 웃는 연습은 필요하답니다. 2007.07.10 12:01 風磬
風文  Aug 10 2022
구더기와 대청소 얼마 전 선물로 달걀 한 판을 받았다. 여덟 개를 냉장고 문 위에 있는 달걀 터에 넣고 나니 나머지 달걀들이 문제였다. 냉장고가 작다보니 달걀판을 통째로 넣기 힘들었는데, 냉장고 벽면에 기울여 넣으니 들어갔다. 달걀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오늘 냉장고를 열어보곤 우연히(?) 달걀판을 발견했다. 그제야 부랴부랴 판을 꺼냈는데 달걀들이 꽁꽁 얼어있었다. 부피가 팽창하다보니 모두 금이 가거나 깨져있었다. 고민하다 일단 녹이고 보자 생각하고 달걀로 할 수 있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달걀찜, 달걀탕, 달걀말이... 그건 그렇고... 하나하나 달걀껍질을 벗기며 냄비에 담고 있는데 껍질을 버리다가 쓰레기봉투에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다. 구더기였다. 봉투를 부엌 한가운데로 가져와 보니 대충 3~4백 마리정도가 우글거렸는데 다 큰놈들은 이미 부엌바닥을 오가며 한가로운 여름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순간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들꽃들이 생각났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살 수 있는 최소의 여건만 있으면 어디서든 생명은 탄생하잖나. 구더기도 만찬가지다. 문득 구더기도 심장이 있나 궁금했다. 학교시절 개구리해부의 경력을 바탕으로 구더기를 해부해보고 싶었다. 논문조작의 위험성도 있었지만 구더기 논문은 쓰지 않기로 했다. 문구용 칼로 구더기를 갈라보니 심장은 보이질 않았다. 있는데 못 보는 건가? 순간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놈은 정말 대단한 기술력을 갖고 있구나.” 그건 그렇고... 그냥 둬도 괜찮나 생각하다 쓰레기봉투를 보니 큰 놈들이 계속 봉투 밖으로 나온다. 방까지 들어올 판이다. 봉투는 아직 헐렁하니 버리기 아깝고... 그렇다! 대청소를 하는 거다. 대청소를 하면 쓰레기가 엄청나게 나올 것이고, 저 봉투를 내다 놓을 만큼 꽉꽉 채울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청소시작! 찢어질 정도로 쓰레기를 봉투에 채워 넣고 골목 어귀에 전봇대 아래 내려 놓으며 구더기와 대청소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다 전봇대 위를 보게 됐는데, 전봇대에 이정표가 하나 보였다. “허난설헌2길” 이라 쓰여 있다. 운동화를 질질 끌고 아파트 담을 따라 내려가니 “허날설헌1길”이라 쓰여 있다. 다시 거슬러 올라와 반대편으로 조금 내려가니 “사임당길”이라 쓰여 있다. 동네 길 이름이 예술이다. 그건 그렇고... 개나리, 목련, 벚꽃, 장미들이 지고 요즘 별다른 꽃이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동네 길 이름 찾다가 무궁화를 봤다. 흰색, 분홍색이 뒤섞여 길가를 장식한 모습을 보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무궁화를 오늘 처음 본 것이다. 나름 國花라는데 왜 무궁화는 쉽게 볼 수 없는 꽃인가. 자료를 찾아보니 일제강점기 때 무궁화를 키우던 애국지사 남궁억을 일본 경찰들이 끌고 가 형무소에 가뒀다는 기록도 있고, 애국가를 만들며 자연스레 국화가 됐다는 유래도 있지만 왜, 누가, 언제 國花로 지정했는지 기록이 없다. 진딧물 등 벌레들이 많이 붙고 잎도 지저분해 사람들이 키우기 꺼린다는 말도 있다. 나는 마르고 닳는 애국가 가사도 별로지만 무궁화도 별로다. 얼마 전엔 국기에 대한 맹세도 바뀌었다고 하던데 그것도 별로다. 별로인 것도 별로다. 이명박한테 존칭어 안 썼다고 잡아가던데 나도 여기서 더 떠들었다간 잡아 갈 듯싶어 그만 쓴다. 그나저나 저 많은 달걀찜은 언제 다 먹누. 2008.08.01 22:41 風磬
風文  Aug 10 2022
그건 그렇고 (세 살 버릇) 가끔 나 살아온 행적을 뒤지다 보면 거짓말의 달인 같기도 하고, 이중인격자의 표본 같기도 하고, 핑계, 두 얼굴, 무능력자...... 그건 그렇고... 남에게 해주는 좋은 말 만큼, 즉 내가 뱉어낸 말처럼 살고 있나? 그냥 얼버무려, 대충 흐지부지...... 늘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지. 요즘 부쩍 추악해져가는 심신. 추스르자. 바로잡자. 쉽게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바닥이 필요하다. 하루 내내 늘 정화하자. 내가 내게 욕 퍼붓는 일 없도록...... 그럼 뭐부터 하면 되나? 그렇게 해왔어도 요 모양 요 꼴인데 뭘 더하나? 생긴 대로 살긴 싫고, 그렇다고 확! 바꿔 사는 것도 사기 치는 것 같고...... 뭐 꿈? 희망? 놀고 있네. 꼭 그따위 말 뱉는 놈들이 배 까보면 구더기밖에 없더라. 그나마 종교로 세뇌 불가한 대가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내겐 중세를 벗어난 끝없는 상상력이 있잖은가. 토닥여본다. 그건 그렇고... 꼬박 이틀은 꿈적도 않고 누워있었다. 요즘 시체처럼 식음을 끊고 눕는 일이 잦아졌다. 2층 아저씨가 수도요금을 받으러 온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우편함 뒤지러 갔다 오다가 부엌문에 붙어있는 수도세 내라는 쪽지보고 알았다. 그래도 사람소리엔 후다닥 잘 깼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다. 그건 그렇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이 속담을 믿는다. 나의 나쁜 습관이 현실 속에서 무심코 드러날 때 뜨끔뜨끔 놀라기 때문이다. 나는 저 세 살 버릇을 고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가끔 세 살 때 버릇이 뭐가 있었나? 떠올리며 고민하는 덜떨어진 뇌들을 보며 유전자의 다양성은 과학도 못 푼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한 열흘 만에 설거지를 하는데 부엌바닥에 물이 안 빠진다. 그래서 봤더니 머리카락 한 움큼이 수챗구멍을 막고 있지 않나. 나날이 밝아지는 찬란한 마빡이 불쌍타. 그래도 아버지의 유산 아닌가. 스킨도 발라주며 문화재보호에 힘쓰자. 그건 그렇고... 며칠 전에 냉동고를 뒤적이다 생닭을 한 마리 발견했는데 “심봤다!” 외치며 솥에다 집어넣고 불을 댕겼다. 그랬으면 좀 살펴야지. 딴 짓하다가 삶은 닭이 군 닭이 돼버렸다. 너무하잖은가? 죽은 놈을 또 삶아 죽이고, 또 구워 죽이는 그런 잔악무도한 심성이 내게 있다니...... 그렇다. 나는 다시 마른 솥에 물을 붓고 쌀을 한 줌 넣고 또 죽였던 것이다. 다행히 누룽지 되기 전에 닭을 구출할 수 있었다. 문제는 타버린 재들을 어떻게 걷어 내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물을 조금 더 붓고 휘휘 저으니 재들이 둥둥 떴다. “역시 난 똑똑해!” 로 사이코드라마는 끝났다. 그건 그렇고... 취중이라 쓰는 게 귀찮다. 예전엔 이 “그건 그렇고...”로 연재를 한 번 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쓰다 보니 소재가 없더란 말이지. 살아가는 시시콜콜한 것들이 소재였는데 사는 게 매일 똑같으니 내용이 그게 그거 거든. 하지만 나는 살아가는 시시콜콜한 것들이 불후의 명작들임을 안다. 모든 문학이 살아가는 이야기 아니던가. 간단히 말해 낚시 중이란 거다. 쓰다보면 걸리는, 마음을 툭! 치는 문장이 있으니 가져다 쓰면 될 것이다. 잡소리든 뭐든 쓰면 줄줄이 사탕인데 문제는 안 쓰니 문제란 거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세 살 버릇인 게다. 2008.10.29 05:27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그건 그렇고 (사랑) 도서관을 갔는데 새로운 책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이야! 이게 웬 떡인가. 그런데 책들이 지난번과 달리 새롭게 정렬돼있었다. 아마도 갈래순, 가나다순 같은데 답답함이 일었다. 어떤 책은 책의 제목순으로 되어있고 어떤 책은 작가 이름순으로 되어있지 않은가. 화가들 전시회도 아니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어 말 좀 하려 직원 책상으로 가는데 그 직원이 어떤 할아버지 앞에서 얼굴이 붉어져 쩔쩔매는 것이 아닌가. 슬쩍 보니 할아버지는 한문으로 책이름을 적어왔는데 직원이 한자를 모르는 거였다. 그냥 할아버지께 여쭈면 될 듯싶었는데 적어온 한자가 복사 용지의 절반이다. 할아버지가 읊으면 직원은 한글로 받아 적고 있었다. 직원이 한 명이다 보니 내 뒤에 줄을 선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직원은 1초가 1시간이었을 것이다. 도서관에, 그것도 책을 수납하는 사람은 기본적인 한자는 알아야 하잖나? 대한민국 정부가 관리하는 도서관의 수준이 이 모양이라면 말 다한 것 아닌가? 할아버지도 예의가 없는 것이다. 한글로 적어오는 것이 가문에 먹칠하는 짓인가? 본인의 뒤로 길게 늘어선 줄은 경로우대로 설명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얼마 전 지하철에서 양보 안 한다고 앉아있는 사람 따귀를 후리는 할아버지와 뭐가 다른가. 그건 그렇고... “의료보험료를 악질적으로 장기체납한 자로 각종 통장은 물론 부동산 등의 압류 그리고 강제징수절차 및 갖고 있는 거 몽땅 경매처분에 들어간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편지가 한 장 왔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대체 뭘 가져가겠다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압류하러 오면 소주 한 병만 사주고 가라 할 참이다. 국민연금은 형편이 안 되면 1년씩 연장이 가능하나 이 의료보험은 좀 살벌하다. 사정 좀 이야기하려 전화를 했더니 씨알도 안 먹힌다. 혹시나 이 컴퓨터를 홀랑 가져갈까 걱정도 되나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하며 소주 뚜껑을 딴다. 그건 그렇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떡볶이를 한입 잘라먹고 두리번두리번 한다. 다시 포장마차로 들어가더니 또 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찍어 밖으로 나오더니 한입 잘라먹고 두리번두리번 한다. 불안해 보여 물었다. “꼬마야. 편하게 먹지 왜 그렇게 불안하게 먹냐?” 그랬더니, “학원 버스와요. 놓치면 큰일 나요.” “뭐가 큰일인데?” “엄마한테 죽어요.” 나는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뭔 놈의 나라가 애들 떡볶이도 편하게 못 먹게 하는 교육환경을 갖고 있나? 대여섯 놈들이 무거운 가방은 걸친 듯 만 듯 매고 사막의 몽구스마냥 불안하게 떡볶이를 먹나 이 말이다. 허리춤 오는 꼬마들은 학원버스가 오자마자 후다닥 사라졌다. 뭐? 선진국? 국민소득 1인당 2만 불? 아이들 떡볶이 하나 먹는데 비무장지대 수색대를 방불케 하는 나라가 선진국인가? 그건 그렇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 나름 새 책인 평론서를 침을 질질 흘리며 음탕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탁상시계가 삐삐하면서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단추를 눌러서 소리를 재웠는데 갸우뚱했다. 고장난지 오랜, 대충 1년 반이 넘도록 소리도 못 내던 놈이 왜 오늘 우냐 이거다. 당연한 듯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나는 왜 무의식적으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을까. 육감? 예지능력? 아니다. 사람은 특별한 현상 또는 문득 불길한 마음이 들었을 때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부터 떠올린다. 그것을 우리말로 아낀다(愛)라 한다. 나는 사랑의 어원을 사(思)+낭(娘)으로 본다. 사량(思量)도 설득력이 있지만 낭(娘)을 어머니로 본다면 더 넓은 의미가 아닌가 한다. ...... 공부하자. 2008.10.31 19:32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혼자 여행을 가고싶다 나는 떠나고 싶어서 마음먹고 가본 여행이 단 한 번도 없다. 일에 치여, 돈이 없어, 용기가 나질 않아서...... 얼마나 마음 가난한 삶인가. 집 앞 구멍가게나 도서관 말고는 밖에 나가 걷지도 않는다. 답답하거나 힘겨울 때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겪어 봤음직한 마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떠나라고 하지만 경험이 아예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엄두조차 내질 못한다. 그보단 마음이 족해 할 만한 여유가 내겐 없다는 말이 더 그럴싸한 변명 같다. 수북한 재떨이나 굴러다니는 소주병들이 지겹기도 할 텐데 뭘 망설이는 건지. 그런 놈이 군 훈련소는 어찌 그리 씩씩하게 혼자 갔는지...... 그건 그렇고... 인적 드문 산속에 홀로 있는 허름한 집에서 살고 싶다. 갑자기 홍철 형 생각난다. 툭하면 차를 몰아 양평으로 향하곤 했는데...... 헬리콥터 말곤 외부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산속 삼족오 비닐대문 집. 태어나 처음 보는 삼족오를 보고 무당이라고 놀려댔던 기억이 난다. 술에 취해 헛소리 질러대도 웃어주던 형.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 조선 검술의 달인. 뭐든 품어주는 따뜻한 사람. 지금 살아 있다면 아마 모조리 걷어치우고 갔으련만. 그건 그렇고... 뭔가 될 듯 될 듯 안 되고, 뇌가 엉클어진 듯하고, 꽉 막힌 것만 같고, 답답한 나날이다. 내일은 대보름이다. 엄니한테 가봐야 하는데 못갈 듯싶다. 맥이 없다. 188Cm의 거구가 지하철에서 쓰러지면 누가 업겠나. 경험상 시민들에게 민폐다. 이틀 전 꿈자리 사나웠던 엄니한테 전화가 왔다. “아야. 너 그렇게 살다 죽어야! 나가 니 몸을 너보다 더 잘 알어.”그 말이 묘하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한편으론 벌써 갔어야 하지 않나싶다. 나는 항상 어머니를 웃겨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산다. 나는 늘 어머니보단 일찍 죽지말자는 생각으로 산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 아닌가. 그건 그렇고... 그러고 보니 건강보험공단인가 갱단인가에서 밀린 보험료 안 낸다고 통장을 압류한다는 편지가 왔었다. 받아 처먹은 약값도 돌려 달란다. 통장이야 뭐 압류해봐야 동전뿐이니 별 상관없지만 내 방에 있는 것들을 몽땅 압류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그 압류절차 비용도 내가 내야 한단다. 사정했더니 씨알도 안 먹힌다. 이 컴퓨터도 갖고 갈려나? 보증금도 빼간다는데 집주인한테 진짜 전화 거나? 저 책들도 가져다 팔려나? 아니면 고물상에 무게 달아 시집들을 폐기 처분 하려나? 킬로그램 당 100원이니 내가 먼저 갖다 팔면 보험료 내고도 남지 않을까? 압류하러 오면 “소주한잔 하며 풉시다.” 하면 풀리려나? 문 잠가놓고 숨죽이고 있으면 돌아가려나? 내 방 꼬락서니를 보고 압류할 마음이 들려나?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내일 못 간다는 전화를 엄니한테 어떻게 건담. 일단 한 잔 하면서 생각해볼 일이다. 잠도 자야 하니까. 소주만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 재워주고 대신 울어주고 화도 풀어주고 토닥여주고 음악도 틀어주고 새벽하늘도 보게 해주고 까칠한 부작용만 빼면 참 좋은 친구다. 햄스터한테 소주를 좀 줬더니 잘 먹는다. 주인 닮았다. 짜아식! 손을 갖다 대면 올라탄다. 외로운 거지. 친구들 다 죽고 외로운 거지. 짜아식! 먹고 자고 싸는 일만 한다. 나랑 똑같다. 한심한 짜아식! 저놈이 말만 하면 좋은데 말을 못해 소주에 밀리는 친구다. 귀여운 짜아식! 그건 그렇고... 얼마 전 오랜 시간 연락 끊긴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야! 너 왜 그리 한심하게 사냐?” “그나마 두심하지 않으니 다행 아니요?” “개소리 그만하고 나와. 술값 걱정 말고 나와.” “십리가 넘어 안가요.” “뭔 소리야?” “나는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나는 사람이요.” 사실 가고 싶었다. 왜 나가지 않았을까? 요즘 뉴스를 보면 무슨 “은둔형외톨이”가 어쩌네저쩌네 지랄들이다. 내가 “은둔형외톨이“인가 생각해봤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정신상태가 좀 삐딱해서 그렇지 저따위의 정신병은 없다. 정신병자네 뭐네 말하지 말라하지만 정신병이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자살이나 하고 범죄나 저지르고 뭐하는 짓인가. (너나 잘하세요.) 그건 그렇고... 요즘 문학평론, 비평 책들을 읽고 있는데 한 권씩 읽어 갈 때마다 나 같은 놈은 절대 글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뭐 무서워서 글 쓰겠나. 살벌해서 겁난다. 문학이론서들이야 좀 참아주고 읽겠지만 이건 뭐 껌도 아니고 질겅질겅 씹어대니 원...... 직접 한 번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댁이 쓴 문학 좀 봅시다. 그건 그렇고... 2009년엔 문인들이 조금씩 입을 여는 듯하다. 작년엔 그리도 침묵하더니 요즘 들어 목소리들이 들린다. 사실 2008년 내내 서점가를 휩쓸었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책 파는 것 말고 뭘 했나. 요즘엔 정부정책을 비판하면 한 겨울에 안방까지 쳐들어와 수갑 채우고 철창으로 끌고 가서 가둔다. 가둬놓고 먼지를 턴다. 털어서 저학력에 무직자면 언론에 공개하면서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버린다. 군부정권에서 쓰던 잔인한 인권유린이다. 누리터 논객 미네르바 구속을 놓고 전 세계 유명 언론이 대한민국을 향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미개국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언론도 있다. 중국 공산당에서 하는 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한나라당에선 반정부정책적인 글을 쓰거나 정권비판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법안까지 통과시킬 예정이다. 그 법을 중국 정부에서 극찬하며 같이 도입할 예정이라는 소릴 TV토론에서 들은 것같다. 대체 뭐하는 짓들인가. 뚫린 입으로 말도 못하고 사냐? 영혼 없는 공권력들이 뻔뻔하게 대놓고 판을 치고 있고, 보수단체소속이라는 사람들은 불에 타죽은 철거민들을 죄인으로 몰고 간다. 웃기지 않나? 합법적인 공무집행인데 사람이 왜죽어? 사람이 죽었으면 이미 합법적인 공무집행이 아닌 것이다. 이런 간단한 논리를 왜곡하고 뻔뻔하다 못해 자랑스럽게 경찰을 두둔하고들 있다. 촛불 들고 공원을 걸어도 잡아가서 왜 촛불을 들었는지 조사하고 신원조회를 한다. 집회만하면 끌고 간다. 웃긴 건 보수단체가 집회하면 경찰이 보호한다. 문인들이여 말하고 써라. 억울한 영혼들을 노래하라. 당신의 독자들 아니었는가. 그건 그렇고... 넋두리. 나는 넋두리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루터기, 여울목, 는개 같은 단어들도 좋아한다. 오늘따라 푸념이 길다. 나는 졸릴 때까지 글을 쓴다. 3일을 뜬 눈으로 지샌 적도 있다. 그다지 영양가도 없는 글들이지만 우연히 걸리는 마음에 드는 문장도 보인다. “캬~. 내가 썼지만 멋진 문장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라톤을 하며 중간 중간 마시는 음료수 같은 해갈의 기쁨이다. 그건 그렇고... 해가 뜨기 전에 자야 할듯하다. 끝내기 전에 요즘 읽는 책 하나 추천하고 싶다. [제목 : 전혜린, 저자 : 이덕희, 출판사 : 이마고]
風文  Aug 10 2022
그릇 몇 년 전 책 속에서 “장르를 갈래로 부르자.” 라고 주장한 사람을 봤는데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이었다. 그의 글을 요즘 다시 보게 됐는데 나는 나 나름대로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우리네 사용언어에서 남용하지 말자는 뜻으로 갈래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 전에 조동일 선생이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선생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창피했다. 책 속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 갈 때 반성과 함께 내가 어떻게 말하고 써야하는 가를 느낀다. 미안한 감마저 든다. 그건 그렇고 요즘 나는 뭔가 결심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예를 들면 전장에서 수십만의 부하를 거느린 장수가 궁지에 몰려 이대로 지체하다간 사랑하는 내 모든 부하들뿐 아니라 나의 목숨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면 된다. 반드시 선택해야하는데 피해를 감수하는 결정이냐, 아니면 피해 없이 서로가 행복해지느냐다.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내 꿈은 하나다. 미친놈처럼 쓰다가 가는 것. 아니 글 쓰는 미친놈. 그 하나뿐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오로지 글 하나만 쓸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그러나 삶은 나를 글에 몰두하게 두질 않는다. 매우 슬픈 나날이며 심한 갈등에 신경이 예민해져 하루하루 성질이 더러워진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매우 괴로우며 고통스럽다. 이대로라면 나는 글쓰기를 포기해야 할 듯 싶다. 그건 그렇고 다독에 대해 말하고 싶다. 시인이 시 한 편을 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보는가. 사람들은 시가 짧아 별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시인이 시 한편을 쓰려면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의 시집을 읽어야 한다. 또한 소설가가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의 단편 하나 내려면 가늠이 불가능한 독서량을 필요로 한다. 엄청난 시간과 공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 한편 나오는데 일이년이 걸린 사람은 문학신동이란 뜻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읽고 써야 한다. 예를 들면, 도공이 예술품이라 칭송받는 도자기 하나를 만들어 낼 때, 대체 몇 개의 도자기를 박살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 시인 스스로 셀 수 없이 깨버린 도자기의 수를 생각해보라.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깰 수준에 이르렀다면 도자기를 보는 눈이 보통 수준은 넘었다는 뜻이다. 관련된 이야기는 차후 수필을 통해 할 말이 많다. 그건 그렇고 나는 늘 반성하려 애쓴다. 성질이 더러워 되도록 실언하지 않으려 애를 무던히 쓰는데 쉽지 않다. 남이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더라도 참아야하는데 쉽지가 않다. 모함을 해도 그리고 그것이 억울해도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는 것은 나의 그릇이 작기 때문이다. 내게 매우 실망스럽다. 나는 상대가 도를 넘더라도 참을 줄 아는 내 그릇을 원한다. 공부가 부족하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께 가봐야 하는데 약속드린 며칠 후엔 못갈 듯싶다. 몸도 시간도 허락을 거부한다. 어떻게 말씀드려야할지 걱정이다. 2009.03.12 12:03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자연스러운 짓 비위와 상관없이 모든 음식을 거부하지 않는 왕성한 위장을 가진 강철 내장의 보유자였다. 그러나 요즘은 약간의 냄새만 맡아도 곧바로 토해 버린다.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먹는 자유를 박탈당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먹고 싶은 음식이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물이나 약간의 알약으로 배를 채운다. 속이 쓰리면 위산억제제나 구토억제제를 빨아 마시며 내장을 달랜다. 나는 이 액체를 처방한 의사에게 고마움은 없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고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돈 없는 환자는 가차없이 죽이는 인간들 아닌가.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맛남을 거부하고, 향기로운 맛을 몸이 싫어한다. 꽃 향기만큼은 거부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요즘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 중 본능이 지배하는, 본능을 따라야 하는 자유 중 하나를 박탈당하면 생명과 직결된다. 배변의 욕구, 수면, 음식...... 나는 아직 잠들고 싶은 본능은 아직 박탈당하지 않았다. 이를 역이용한 먹는 자유를 되찾으려 요즘 애쓰고 있다. 그건 그렇고...... 박탈이라는 것은 남이 또는 스스로의 의지가 자유를 앗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저지르는 짓 중 가장 어리석은 짓이 박탈이다. 따라서 초자연적이거나 신의 능력으로서의 박탈은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신(神)도 인간이 누려야만 하는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 자유는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닌 인간이 어머니의 양수를 마시며 세뇌되는 것이며 음양이 조화 되어 잉태하는 순간 자유는 부여된다. 박탈은 신이 아닌 인간이 행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또는 스스로가 말이다. 그건 그렇고...... 묻고 싶다. 막장이라는 최악의 노동환경 속에 일했던 광부가 숨쉬기를 스스로 박탈했는지 교통사고 후 수혈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박탈했는지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깊은 산 속에서 평생을 살아 온 사람이 위암에 걸렸다면 스스로 위암을 원한건지 묻고 싶다. 그것은 운명인가? 주변 환경에 대한 역학조사를 원하는가? 웃기는 소리다. 과학이 탐지 못하는 영역이 마음이다. 스트레스 지수와 심리학? 그것들이 밝혀냈다고? 그런데 왜 사망자는 늘어만 가는가. 주변 정신과가 어딘지 몰라서? 웃기는 서양의 과학들에 가래를 뱉는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단어가 스트레스인데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세뇌시키고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정신의 온 것인양 쇼하는 의사들을 보면 토가 나온다. 언제부터 우리가 스트레스라는 단어에 집착했나. 쪽팔린줄 알라. 사람들은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인줄알고 벌벌떤다. 갖잖은 서양지식팔아먹고 진료비나 받아 처먹는 것들이 혐오스럽다. 한글이 어눌한 이중국적자일 뿐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들에 대해 상당한 혐오감을 갖고 산다. 다른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작은 증상가지고 곧 죽을 것처럼 말하고 보험회사들이 이들의 말을 빌어 사기를 치고 있다. 사채광고로 욕처먹던 연예인들이 요즘은 보험광고로 전환하는 더러운 미디어광고 구현의 선구자들이 바로 돈에 영혼을 파는 의사들이다. 그건 그렇고.... 모든 병은 마음이 만들며 아무리 청정지역에 살고 문명과 벽을 쌓고 산 속에 살아도 마음이 울면 죽는 것이다. 우울증, 스트레스 들먹이며 알약이나 처방하는 돈에 눈 먼 자들을 멀리하라. 100세가 넘은 할머니가 서울 한복판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책을 들고 글을 쓰며 즐겁게 사는 것은 그 동네가 공기가 좋아서가 아니다. 마음을 기가 막히게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살지 않는 인간은 모조리 암병동이나 응급실에 가있다. 그 할머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기에 우리는 귀농을 하고 시골을 찾는 것이다. 어떤 사이비는 죽을 때가 되면 흙으로 가기 위해 시골을 그리워 한다고 말한다. 현혹되지 말라. 빛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이고 흙을 찾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어두워야 하고 흙의 기를 마셔야한다. 지금은 어떤가? 24시간 밝잖은가. 언제든 불을 켤 수 있고 가로등 불빛이 늘 동네 곳곳을 비추는 전기의 천국이다. 사람들이 시골에 정착하려 하는 이유는 빛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왜냐면 그 짓이 자연스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능이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졸리면 자야하고 마려우면 싸야하고 해지면 어두워져야 한다. 심심해서 먹고, 우울해서 먹고 졸려도 못자고 똥도 참으며 돈벌고 밤낮없이 뛰며 사는 것들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네 삶은 해 대신 기계가 아침을 알리지 않던가. 그건 그렇고...... 원래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잊어 버렸다. 아마 잊어 버린 것도 자연스러운 것일 게다. 2009.04.01 3:40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영혼 없는 전도자들 젊은 남녀가 나란히 문 앞에 서서는 "수도하는 사람인데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식사 후라 심심하던 찰나에 잘 됐다싶어 나가봤다. “계룡산에서 왔수?” “아닙니다. 시내에 수련원이 있는데요, 잠깐 설명 드려도 될까요?” “뭘요?” “도(道)에 대해 공부 중입니다만...” “누구의 도요?” “네?” “스승 없수? 경전이나 당신의 도를 이룬 선지자 같은 인물 없냔 말요. 뭔 선사 같은 거 말요.” “말씀 많이 들으셨나 봐요?” “뭔 말씀이요. 회원접수하고, 회원증 받고, 돈 내라는 말씀 말요?” “실례 했습니다.” “뭔 실례요? 들어오쇼. 소주나 한 잔 합시다.” “네?” “진정한 도에 대해 100분 토론 한 번 합시다. 이래봬도 내가 계룡산에서 2천 5백년간 공자랑 이메일 주고받으며 논어를 공저했던 사람이요.” 설레설레 뒷걸음치더니 그냥 가버린다. 뒷걸음친다는 것은 스스로가 사이비종교인임을 시인하는 것이거나 나를 맛이 간 놈으로 쯤으로 본 것이다. 소주 대신 커피를 권할 걸 그랬나 싶었다. 이른 아침 회사원들 실어 나르는 미어터진 지옥철. 연일 쳇바퀴가 실어 나른 피곤함에 몇몇을 빼곤 대부분 졸고 있다. 그 틈으로 목청 좋은 사람 하나 비집고 나오더니 붉은 십자가 들어 올린다. "불신지옥! 예수천국!" 졸던 사람들이 눈을 뜨더니 곧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숙취를 빌어 성경으로 판소리 중인 전도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는 붉은 십자가를 내 코앞에 바짝 갖다 대고는 "사탄! 사탄! 사탄은 물러가라!" 발악을 한다. 열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리자 나는 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며 "이웃을 사랑하라!" 일러줬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그도 깨우쳤을 것이다. 지옥철 안 이곳저곳에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부엌문 열리더니 여자목소리가 난다. 그녀는 이미 집안으로 들어와 방문 앞에 서있다. "사거리 교회에서 나왔는데요,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 나는 부스스 일어나 내려간 팬티를 주섬주섬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침대 속에 나란히 누워 받는 감동적인 전도를 원합니다. 옷 벗고 들어오시죠." 전도자는 문발이 휘날리도록 집밖으로 내달린다. 나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무단침입으로 고발하진 않았다. 찻잔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는데 TV속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할아버지 목이 잘려서 피가 나요" 하며 운다. 뒤돌아보니 전도자들이 단군동상의 목을 잘라 옆에 던져놓고 가슴에 사탄이라 적은 뒤 붉은 물감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행위예술을 하고 간 화면이 보였다. 단군동상의 목을 칠 기술과 힘이 있다면 금수강간 왜놈들이 박아 놓은 쇠말뚝이나 뽑지 그러나 싶다. 그 날 등교하던 어린 아이들은 이웃을 사랑했던 아이들이었다. 눈이 채 녹지 않았던 때 50년 불교인생 살아오신 어머니는 무당년이란 폭언 속에 주인집 집사에게 쫓겨났다. 엄동설한 복덕방엔 나온 집은 없고 시골로 시골로 시골로 내려가 군부대 앞 곰팡이 벽지로 우울한 방 하나 얻었다. 나는 한동안 "집사년! 집사년!" 하고 떠들었지만 어머닌 그러지 말라 했다. 나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쫓아낸 주인집 집사 여자를 죽이진 않았다. 나는 새벽에 차분히 반야심경을 들으며 우울할 땐 크리스마스 캐럴을 치료제로 쓴다. 묘하게도 술 마실 땐 'Nana Mouskouri'의 'Amaizing Grace'를 종종 듣는다. 어머니는 매년 성탄절이면 모세가 바닷길을 여는 영화를 본다. 모세를 따르는 핍박받는 백성이 바닷길을 탈 없이 건너길 매년 기원하면서 말이다. 어머니 계신 곳엔 말 많은 윗집 아주머니가 산다. 윗집 아주머니 주일예배 갈 때 타는 버스를 어머니는 절에 갈 때 같이 탄다. 버스가 하루 네 번뿐이라 돌아 올 때도 윗집 아주머니와 옥수수나 눈깔사탕 나눠 먹으며 같은 버스를 타고 온다. 오는 내내 부처나 예수 이야기는 없다. 그저 올해 고추농사가 잘 됐다던가 저녘엔 누구네 집에서 밥 먹자는 이야기들 뿐이다. 이웃 사랑이란 종교와 관계없이 이미 몸에 배어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절을 뜻한다. 배려와 예절이 갖춰졌을 때만이 이웃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 것이며 배려와 예절이 갖춰졌을 때만이 신으로부터 종교를 믿을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혹, 당신이 믿는 종교가 있다면 고결한 당신의 영혼을 그 어떤 존재에게도 헌납하지 말아야 하며 고결한 당신의 영혼을 당신이 믿는 종교로 다듬어 고결한 타인의 영혼을 다솜스레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 고결한 타인의 종교를 존중할 줄 알아야 고결한 당신의 종교가 빛나는 것이다. 이런 영혼을 갖고 사는 이웃이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이웃이며 그것을 신앙심이라 한다. 2008.09.09 05:45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그건 그렇고 - 자존심 “오랜 시간 나는 잘 해준 것 같은데 왜 날 떠나려 하나.” 생각이 들 땐 늦었다.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말에 무게를 실어 몇 번이나 일렀거늘 당최 인성이 변하질 않는구나.” 생각이 드는 상대방도 이미 늦었다. 저 두 사람이 원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선 가늠이 불가능한 노력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 회복을 원하지 않는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정쩡한 등돌림으로 끝난다. 간혹 잘못을 알고 변하려 애써본다며 다가오지만 파헤쳐진 골을 메우기엔 서로가 힘들다. 이겨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내 주변에선 성공한 사례는 없다.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은 둘 중 한 사람의 자존심이 완전히 뭉개졌음을 의미한다. 인연이 끝나는 날 전엔 모른다. 상대가 자존심을 누르고 말하는지 농담으로 말하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무시하고 귓전을 스치는 바람정도로 생각하다간 인연이 끝나는 날에 후회하게 된다. 필요이상으로 배려하는 것도 문제지만 필요이상으로 상대의 자존심을 뭉개는 것이 더 위험하다. 그렇다면 자존심이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자. “자존-심 (自尊心) :「명」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 반상(班常)의 법이 존재하던 옛 시대의 자존심과는 조금 다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존심은 가난한 자들이 강하게 주장한다. 비굴하게 돈을 꾸고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밥을 해 꾸역꾸역 아가리에 처넣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주로 자존심을 내세운다. 나처럼 얄팍한 지식을 갖춘 놈이 돈 때문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형제가 해체되고, 홀로 쪽방에 살며 내세우는 것이 자존심인 것이다. 그러나 내 경험상 쌀보다는 자존심이 나(自我)를 흔들리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나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는가를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허물어졌는가. 사람들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늘 색안경을 끼고 사니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 특수부대원이나 입을 법한 위장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 겉치레가 혐오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아마 故 김수영 시인을 알고 난 뒤부터라 생각한다. 돈 때문에 누르고 살던 자존심과 반항심이 봇물처럼 터졌고 다니던 회사가 아닌 이 사회에 대한 쓸데없는(?) 고심의 시작부터 나는 허물어졌다. 모든 옷을 벗었고 소속된 모든 것들에 대해 벗어났다. 그 뒤로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그건 그렇고 “글이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그 글은 사람이 쓴다.” 그건 그렇고 충고에 대해 한 마디 한다. 교육에서든 책에서든 우리는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거나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 되라고 들어왔다. 물론 좋은 말이다. 그러나 “내게 이야기 하거나 내게 충고하는 자의 자질을 보고 들어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과연 내게 충고하는 자가 나 이상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지, 그것이 증명이 됐는지 그리고 나를 얼마나 통찰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그에 대해 스스로가 판단해야 한다.(책도 마찬가지다.) 듣고 마는 것은 그 후에 할 일이다. 요즘은 개나 소나 제 잘난 맛에 살기에 충고도 충고답지 않으며 말이 많아 충고도 농처럼 들린다. 역으로 남에게 말할 때에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혀를 남발하지 말라! 충분한 자격이 있고 보편적으로 도나 예에 어긋나 충언을 해줘도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버티는 사람이 있다. 그런 피는 당장 피하라. 어미애비도 모르는 피니라. 그건 그렇고 최고의 해법은 입을 다문 채 마음이 움직여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인데 그것이 여간 어렵다. 말을 해줘도 책을 쥐어줘도 모른다. 그저 하던 대로 살밖에……. 그건 그렇고 어떤 시인이 나의 시를 자신의 누리집에 퍼놓고 씹어대고 있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뿐이었지만 마음이 상했다. 왜 내 누리집에서 대놓고 못 씹나? 그것도 예절인가? 시도 좀 시 같은 걸 가져다가 씹던가 하지. 별 쓰레기 같은 습작시를 가져다가 그럴 필요 있는가? 그건 그렇고 옆집아저씨가 이사를 간다고 한다. 1층엔 할머니, 나 그리고 아저씨 세 가구인데 늘 전기세는 아저씨가 걷으러 다니셨다. 할머니 전기세는 좀 덜 걷자고 나와 작당하기도 했고 근래 친해졌는데 아쉽다. 곧 나도 집을 비워줘야 한다. 그건 그렇고 나는 요즘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이것저것 정리도 좀 하고, 박살난 자존심도 좀 회복하고, 동굴도 좀 알아보고……. 그러나 딱히 방법은 없다. 날도 풀렸으니 다시 노숙자로 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스르르 사라질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찰나도 예언하지 못한다. 급살 같은 심장마비가 올지, 비오는 날 보도블록에서 장초하나 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뽁뽁대며 뿜는 담배연기가 빗소리와 참 잘 어울리는 밤이다. 2009.05.15 22:10 風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