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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Aug 11 2022
風文  Aug 11 2022
비 내리는 어느 날 빗소리에 깼다. 얼마나 잔걸까. 몸이 천근이다. 뼈마디마디가 곤하다. 어릴 적, 밤새 끙끙~ 신음소리로 뒤척이시다가도 새벽 5시, 밥도 마다하고 서둘러 나가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늘 아버지를 철인으로 봤다. 지금 나이에 안다. 아버지는 철인이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들만이 지는 짐을 늘 지고 다니던 그냥 아버지였다. 오늘 출근하지 못했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아버지보다 못하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할 텐데 미안함이 인다. 험한 일 시켜 미안타. 방이 빙빙 돌다가 겨우 진정 된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막걸리가 보인다. 노가다와 술은 뗄 수 없나보다. 그리보면 노가다도 예술로 봐야할 듯하다. 어제 침을 맞을 때 의사가 금지해야할 여러 가지를 일러줬는데 몇 가지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 단어 10개를 외우게 하고 자고 일어나 몇 개나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대학실험이 생각난다. 하룻밤을 자도 잊는 것이 많은데 수십년을 살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았겠나 떠올려 본다. 머리엔 VBA가 떠오르고 멋진 엑셀프로그램을 만들던 옛 생각도 난다. 일터 동료들이 원하는 게 많았는데 주문하는 대로 만들며 만족해하던 그때 그 마음이 떠오른다. 수학은 즐거운 것이었다. 지금 공부하는 수사학보다 즐거웠다. ‘시인마을’사람들이 주문하는 대로 누리집을 수리하고 제작하며 기뻐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문학으로 가는 길’ 전신인 자유문학을 만들며 돌아가신 두 형님도 생각난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이룰 것도 있다. 꿈을 마음에만 간직할 때는 지났다. 꿈을 드러낼 때가 왔다는 걸 늘 느낀다. 드러내지 못하면, 보여주지 못하면 꿈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럴 여건이 되질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싶다. 묵은지가 다 되어 곰팡이가 설고 있다. 곧 버려지기를 기다리는 썩어버린 꿈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며칠 전 회사 비품실에서 만년필에 잉크를 채웠었다. 문병을 가기 전 두 권의 책을 두 분께 선물하려고 표지 뒤에 쾌유를 기도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잡은 펜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쓰는 글은 내가 나를 향해 쓰는 글보다 아름답다. 끼적일 때가 가장 즐겁다. 뭔가를 쓰는 행위가 더없이 행복하다. 잊혀도 잊어도 사라져도 쓸 때만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글을 쓰면 글을 남긴 시간을 하단에 적는다. 얼마 전 읽은 안도현의 책(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속에서 글을 쓴 날짜, 시간 쓰지 말라는 질책을 읽었다. 출판물에 누가 시간 적던가? 나는 그런 책 못 봤다. 제 발 저린다고 왜 내 발이 저린지 원……. 요즘 읽는 책이 있다. 신봉승의 ‘조선정치의 꽃 정쟁’이다. 아는 내용들이 있어도 세부적으로 저자의 입김과 근거 史料가 충분해 읽을 만하다. 신봉승의 책들을 나는 좋아라한다. 책이 두꺼운 건 지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다. 끼적이고 나니 몸이 조금 더 낫다. 낙서처럼 재미난 짓도 드물다. 비가 많이 내린다. 지난 해 비보다 묵직하다. 장마와 폭설은 자연을 건드린 자들에 대한 대답이며 그 대답을 인간은 무력하게 온전히 받는다. 그래도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드린다. 오늘문득 : 2011.6.29. 15:51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초심 남의 죄는 잘도 보면서 내 죄는 왜 보이지 않는가. 남을 보며 만족스럽지 않음은 느낀다면 나는 나를 만족해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웅장했던 초심은 어디로 가고 게으른 나만 보이는가. 좋은 말 좋은 글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나는 왜 실천하지 않았나. 나도 안 하는 실천을 왜 남에게 가르치려 했던가. 남에게 성찰을 권하면서 나는 왜 성찰을 게을리 했던가. 지금 생각해봐도 나의 초심은 대단한 각오였다. 그 초심은 작심삼일이었나. 한번에 이루지도 못하고 조금씩 꾸준히 이루지도 못하는 꿈은 말대로 그저 꿈이었나. 초심을 거꾸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육신의 삶은 앞으로 가더라도 마음은 초심 찾아 거꾸로 가야한다. 무릎을 탁! 하고 칠 순간이 올 것이라 믿는다. 말이나 생각이 아닌 실천으로만 가야한다. 어느 누구도 내가 걷는 이 길을 대신 못 가준다. 부지런함도 게으름도 한 곳에서 빅뱅 했다.한 순간 터진 폭발로 꿈은 노력이란 끈을 꽁무니에 달고 날아갔지만 나는, 노력이란 끈을 끝까지 잡지 못했다. 힘들다는 유혹으로 게으름이란 안락의자에 앉아 버렸다. 꿈은 보이지 않을 만큼 가버렸지만 노력이란 끈은 여전히 내 앞에서 살랑인다. 안락의자를 걷어차고 실천을 손에 쥐고 노력을 잡자. 수 없는 굴곡을 지나면 초심이 꿈을 안고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꿈을 안아보는 날엔 다른 꿈이 빅뱅 할 것이다. 그날 참으로 웃게 되지 않을까. 이미 실천으로 달려온 경력이 있잖은가. 글이 꿈이면 벗도 글이다. 늘 같이 걷는 벗을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 외면해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난감하다. 글을 탐구하는 안내서는 내가 글과 손잡기 전이다. 말을 걸지도 않으면서 탐색만 하면 내 친구라 말할 수 없다. 알고 싶으면 손잡고 같이 걷거나 황당하지만 직접 물어보면 된다. “글아! 넌 내 초심이니?” 수많은 초심들. 입학할 때, 입대할 때, 전역할 때, 첫 출근 때, 결혼식 때, 매년, 매 십년, 아침마다……. 초심엔 나쁜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다. 잘 잊어버리는 것도 초심이고 그래서 찾으러 다니는 것도 초심이다. 초심대로 사는 건 어렵고 힘들어서 습관, 유혹, 편함이 초심을 앗아가기 쉽다. 초심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그 때 마음먹었던 그 초심이 올바른 삶이라는 도덕적·합리적 가치판단이 자기 철학에 경종을 울렸기 때문이고, 지금 내 삶의 양식을 초심이라는 거울에 비추었을 때 부끄럽기 때문이다. 초심은 늘 곁에 있고 언제나 꺼낼 수 있는데도 우리는 늘 초심을 찾는다고 말한다. 초심이 내 안에 존재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초심을 낸 것도 나고 잊은 것도 나고 찾는 것도 나인 셈이다. 누구나 첫 마음을 발현할 때 짜릿함을 느끼며 심장박동도 빨라진다. 설레고 기대되며 첫 마음대로 살 때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면서 흐뭇해한다. 그렇다면 초심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왜 인간은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새로운 환경, 새로운 목표가 생기면 초심을 낼까. 닥친, 닥치게 될 일들을 미리 예상하며 내놓은 자기 지침서가 아닐까. 초심은 본능에 가깝다. 초심을 어떻게 내어야 하는 안내서 따윈 의미가 없다. 각자 모두 다르기 때문에 초심에 표준안이나 관련 법률 따위도 없다. 성장, 교육, 가족, 친구, 스승 등 자라 온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초심도 다르다. 초심에 빗댈 단어가 하나 있다. 각오(覺悟)다. 각오는 협박의 의미가 없다. 성찰하라는 말과 같다. 깨달으려 道를 구할 필요도 없다. 간단하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면 된다. 스스로 물어 볼 때마다 나는 잘 살고 있지 않다는 답을 낸다. 각오하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처럼 오늘 내가 죽으니 오늘을 잘살아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여기저기 게으름이 보이고 언행뿐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게으름이 보인다. 어떻게 살아야하는 법들은 작은 지식으로나마 안다고 해도 실천이 어렵다. 이럴 때 꺼내 드는 것이 초심이다. 초심을 꺼내 들 때마다 쥐구멍을 찾듯이 부끄러워한다. 가장 큰 문제는 초심을 꺼내만 들고 실천을 안 하는 데 있다. 끼적거리다 보니 반성문이 돼버렸다. 쉬는 시간엔 반성만 하나보다. 더 쓰다가는 인간쓰레기라는 단어까지 나올 지경이다. 자~ 커피한잔 마시고 다시 꿈이 끌고 다니는 노력이라는 끈을 잡으러 가야겠다. 오늘문득 : 2011.12.21. 16:37 윤영환.
風文  Aug 10 2022
끼적끼적 “요즘 많이 힘들지?” 이 한마디로 자살을 접는 이는 수도 없다. 문제는 둘뿐일 때 오직 둘뿐일 때, 둘이 각자 힘들 때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지 못할 때 말해야 할 순간을 지나쳤을 때 그저 뒷모습만 바라보며 ‘잘 이겨내겠지.’라고 생각할 때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더욱 치명적일 때가 있는데 “요즘 많이 힘들지?”라는 말을 왜 그 사람에게 해줘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영육의 평화를 깨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 아파도 스스로 조각 낸 것에 내가 시리더라도 내게만 오던, 나를 만족시키던 각광(脚光)을 버리고 그 사람 주변을 비춰보면 그 사람 왜 힘든지 알게 된다. 각광을 받고 있으면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보이지 않고 보여도 흐릿하며 모두가 나를 주인공으로 받아 줘야만 사는 외발 인생이 된다. 답답한 건 내가 답답한 건 각광의 유한함을 모르고 내게 찔러대는 그 사람의 기침(氣針)이다. 두 손 모아 서로를 위해 기도할 줄만 안다면 족하다. 어린이는 ‘어리석은 이’다. 한자로 유치(幼稚)하다고 말한다. 어른은 유치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맑은 마음을 유지하려 애쓰며 유치를 벗을 때를 아는 사람이다. 시도 때도 없이 유치하면 곤란하다. 그 맑음이 빛을 잃기 때문이다. 매우 처절한 자화상이 된다. 오늘 그린 자화상은 10년 뒤 얼마나 추하게 보일까. 오늘문득 : 2012.01.13. 21:42
風文  Aug 10 2022
시를 읽다가 시간 참 잘 간다. 하지만 지루한 것보단 낫다. 방금 출근한 듯 한데 금방 퇴근시간이 되고, 일주일이 삽시간에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렇게 바쁜 일상이 이어지던 오늘 묘한 마음이 이는 시 한편을 감상했다. 아무렇지도, 별 느낌도 없는 시로 스윽 지나도 될 만했는데 더 이상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이 시 한편 때문에 지금 이글을 쓰고 있다.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정끝별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심장이 요동치는 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가끔 속으로 ‘이거 대박이다!’하는 시를 만나면 참 기분이 좋다. 그러다 만난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저 시인을 모르는데 저 시인은 어떻게 나를 저리 잘도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민생고 통에 허우적대거나, 화장터에서 빻아준 뼈를 뿌린 날이나, 응급실에서 눈을 떴던 날이나, 좀먹듯 월세가 보증금을 다 깐 날이나 시를 썼다. 시는 쓰고 싶은데 아니, 써야하는데 시어는 떠오르지도 않고 술만 들이붓던 괴로운 날에도 그 괴로움을 시로 썼다. 하지만 쌀통에 쌀이 가득하고, 세금도 밀리지 않고, 전화나 전기 그리고 도시가스도 끊어지지 않고, 주머니에 소주 값이 넉넉하면 시를 쓰지 않는다. 남들은 행복해서 그 행복을 시로 쓰거나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며 나무나 꽃을 보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무너져야 시를 쓴다. 왜일까? 어떤 시는, 긍정적이고 행복감을 주는 시처럼 보여도 그 뒤엔 시인의 고통이 숨어있음을 눈치 채곤 한다. 그때 뭉클해진다. 웃고 있는 시를 쓰는 시인은 울고 있는 것임을 알 땐 가슴이 저려온다. 통닭 한 마리 들고 찾아가 술잔을 주고받고 싶다. 왜 그런 시를 썼는가를 묻지 않는 마주 앉은 심장끼리고 싶다. 할 일없는 놈팡이 같은 것들이 일해서 쌀이나 사먹지 쌀통에 쌀 없다고 울고 자빠져있다고들 해도 듣는 시인의 심연은 요동이 없다. 시인은 여울목이다. 잔잔히 흐르는 냇물을 받아 휘감고 젓고 흔들거리며 고통을 삼킨 후 다시 세상으로 잔잔히 흘려주는 혼탁한 세상 속 여과기다. 그 여과장치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에게 내장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게다가 수시로 업그레이드 돼야하니 말이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팔면 좋겠다마는. 요즘에 굶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들 한다. 굶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르지. 그들을 찾아야 할 사람들은 독자들이다. 시인의 고통을 읽어줘야 시인은 배부르다. 끼적거린 지도 꽤나 오래 됐다. 쓰고 싶은 열정이 식어가던 오늘, 저 시 한편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오늘문득 : 2012.7.25. 17:45
風文  Aug 10 2022
그건 그렇고 43호 : 2020 장마 9년 만에 ‘그건 그렇고’를 다시 연재한다. 설렘이 있고, 아내가 좋아했던 장르이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하다. 늘 손이 근질근질했고 스프링노트만 쓰던 시간을 뒤로하고 자판을 잡는다, 어떤 분은 “이제 글을 쓸 소재가 있나? 뭐가 있어야 쓰지.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고 다 공개된 세상에……. ”라고 푸념한다.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나는 말한다. “그럼 접어!” 그건 그렇고 며칠 전 새벽에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얼마나 큰소리였는지 외부소리는 들리지 않는 내 방에 그것도 잠들면 시체가 되는 내가 깨어날 정도면 꽤 큰 소리였던 것 같다. 베란다에 가보니 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리고 있었다. 몇 시간 뒤 해가 떠오를 때쯤 안산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곳은 괜찮냐고 안부를 물었더니 “무슨 일 있니?”라는 답변이 왔다. 별일 없었나 보다. 안산에서 9년을 살던 중 딱 한 번 비 때문에 일어난 일화가 있다. 아침에 갑자기 아내가 “내 차가 물에 잠기고 있어!” 하면서 나를 깨웠다. 나가보니 뒷바퀴 절반이 물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차를 안전한 곳으로 몰아 주차를 하고 아내를 출근시켰다. 집에 들어오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건 그렇고 어제 책상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파트 관리실 방송이 나오고 휴대전화로 문자가 오면서 비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는 소리를 보고 들었다. ‘뭔 일이 터졌구나!’ 하는 직감에 커튼을 젖혀보니 창밖으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TV를 켜보려고 리모컨을 찾는데 도통 보이지 않는다. 속으로 ‘TV가 장식이냐? 평상시 뉴스라도 보고 살아!’ 하면서 리모컨을 찾아댔다. 결국, 침대 오른편 구석에서 리모컨을 찾았다. 뉴스가 나오는 첫 화면에 어떤 할머니가 울고 앉았다. 바로 알아차렸다. ‘이거 심각하구나!’ 농부는 비닐하우스단지 앞에서 울고 있다. 모두 물에 잠겼고 두 동은 이미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오이란다. 흙 속에 엄마와 딸 그리고 2살 된 손녀를 소방대원들이 장비를 동원해서 찾았지만 모두 사망했고, 다음 화면엔 잘 가던 차가 옆으로 가더니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사람이 튀어나온다. 기가 막힌 건 남쪽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고 열대야로 주민들이 힘들어한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중국 상해에 상륙한 태풍이 사라졌는데 그 반동으로 수증기를 품고 있는 구름이 우리나라 중부지방으로 향한단다. 지금까지 내린 비는 비교도 안 되는 비가 내린단다. 뭘 어쩌라고……. 시민제보로 들어온 영상을 봤다. 달리던 차 앞으로 왼쪽 산에서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도로를 막으며 그 차는 급정지했다. 논바닥 안에 저수지에서 내려온 팔뚝만 한 잉어가 튀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인간은 자연을 너무도 무시하고 사는구나!’ 자원봉사팀은 이미 1차 출발했고 더는 그들의 눈물을 볼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같은 날인 오늘 뉴스에 러시아와 미국의 산불이 커져 이곳저곳에서 여객기가 급회항한단다, 우리는 장마를 겪고 남쪽은 열대야로 시달리고 있다. 시베리아 남부는 얼음이 녹아 마을이 침수되고, 더 황당한 건 우리에겐 아직 태풍의 계절이 오지 않았다는 뉴스를 보며 가슴이 저린다. 차가 어찌 되고 집이 어찌 됐든 사람이 우선이다.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힘든데 이상 기후로 사상자들은 늘어나고 있다. 하늘은 계속 회초리를 치고 알아차리라 하는데 우린 왜 깨닫지 못하는가. ‘생긴 대로 살아!’라는 말을 우린 많이 들으며 살아왔다. 왜 자연을 생긴 대로 두지 않는가. 지금의 지구를 노자는 손뼉을 치며 껄껄 웃겠지만 언젠가 우린 깨우치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나는 지금 등려군(鄧麗君)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듣고 있다. 그것도 글을 쓰는 내내 반복재생으로 듣고 있다. 앉아 있는 이 책상 정면에 베란다가 있고 그 창들 밖으로 논들과 밭들이 보인다. 커튼을 젖히는 어느 날엔 둥근 달이 보이고 그러다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어느새 왼쪽에 있던 달이 오른쪽으로 가버려 보이지 않는 날도 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담배 하나 물고 앉아 있으면 참으로 평화롭다. 나는 오늘 빌어 본다. 법이 없어도 잘 살 사람들이 2020년 장마에 다치지도 죽지도 말고 잘 이겨내길 온 마음으로 말하고 싶다. 2020.08.04. 09:43 윤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