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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Aug 09 2022
누가 누구에게 요구를 하는가 사람들이 만들어 온 수없는 제도와 규칙, 법, 관습들이 때론 내 사상에 맞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다.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특히 그렇다. 경찰은 경찰다워야 하고,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고, 문인은 문인다워야 하고……. 다들 사람 아닌가? 사람이 사람다우면 됐지 사람이 갖고 있는 직업 따위로 ‘다워야’ 한다는 논리가 싫다. 방대한 우주를 태양계나 은하 몇 개로 좁혀 바라보는 아둔함이다. 종교나 관습 또는 우리가 후천적으로 익힌 고정관념을 잣대로 사람을 기준 잡아 보는 짓은 버려야한다. 아직까지도 첫인상이나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사람답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엔 저 사람은 어찌어찌한 사람 같아.’ 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내가 비웃는 것도 우습다. 그건 그렇고, 나 자신을 보면 사람으로서 형편없을 때가 있고, 그럭저럭 대충 사는 때도 있고, 참 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내가 변했을 때다. 변하는 이유는 모르던 것을 새롭게 배워 각인 됐을 때나, 알고 있던 지식의 영역이 한 차원 확대 되었을 때 변하게 된다. 변하게 되면 삶의 방식이 변하고 습관도 변하며 말투나 행위도 변한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마치 중학교 교복을 벗고 고등학교 교복으로 갈아입듯이 변하게 된다. 유치한 시절을 벗어나 한번 더 성숙해진다. 늘 궁금해 하며 알고 싶어 하고 경험해보고 싶어 한다. 모든 창작은 배우고 경험한 속에서 나오게 된다. 그것이 기본이고 상상해서 그리든 쓰든 기본에서 비롯한다. 기본이 풍부하면 인정을 받고 기본이 없으면 대접받지 못한다. 우리는 그 기본은 학교졸업장이나 자격증, 증명서에서 찾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내가 그렇게 자랐기에 아이들도 그렇게 키운다. 그건 그렇고, 사회에서 원하니 아이들에게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챙겨줄 뿐인가? 어른들은 어떤가? 신랑이 아니면 신부가 갖춰야 하는 조건들을 위해 스펙 조립에 한창 아닌가? 다이어트 하다가 죽고, 성형수술 하다가 죽고, 스펙의 완성도를 위해 여기저기서 돈 끌어다 쓰고는 신용불량자로 추락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사회가 원한다는 스펙 챙기느라 허리띠를 있는 대로 졸라매고 ……. 사람이 사람다우면 됐지 사람들이 만든 각종 증명서 한장 따내려 왜들 그리 애를 쓰는가. 그 사회가 원한다는 스펙을 위해 소중한 삶으로 남아야할 시간들을 얼마나 갖다 버리고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그 시간을 사람다워지려 투자한다면 스펙으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참맛을 누리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사회로 나가 실무를 접하고 성인으로서 사회 속 일원이 된 후가 더 답답할 것이다. 원하는 일자리, 원했던 결혼 생활을 위해 노력하며 갖춘 스펙이 그 중 몇 할이나 도움이 되던가. 사람이 만든 사회가 개인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스펙은 정작 개인의 삶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스펙을 쌓던 경험으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내 생각엔 시간낭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요구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것에 삶을 쪼개어 던지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다. 스펙이란 것이 돈과 연결 되어 있어 민감하게 바라보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사람의 철학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 되는 것도 아니고 왜 다들 똑같은 종잇조각 하나 따내려들 애쓰는지 답답하다. 나를 살아야한다. 어떤 조직이, 어떤 권력이나 무언의 힘이 나를 밀어도 나를 살아야한다. 어려워도 나를 살아야한다. 내가 살고 싶은 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남과 전혀 다른 아름다운 나로 살아야한다. 그건 그렇고, 나는 나를 살아서 궁핍하다. 그러나 마음은 평화롭다. 욕심도 없으며 지금이 좋다. 늘 가능성은 열려있으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이기에 만족한다. 배가 좀 고프면 어떤가. 내가 행복하다는데. 요즘은 없지만 아직도 가끔 나를 한심하다거나 측은지심이 이는 사람으로 보는 눈들이 있다. 대부분 틀에 박힌 고정관념의 시선이거나 첫인상으로 사람 잘라보는 좁은 그릇들이다. 정작 행복한 건 난데 왜 그대들이 난리브루스인가. 나는 조바심도 없으며 남과 나를 비교하지도 않고 게다가 사회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짐작하여 걱정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나는 꿈을 가지고 산다. 자고 일어나 지난 밤 죽지 않았음을 고마워하고 눈 뜬 오늘을 사는 것이 나고, 오늘을 잘 살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행복하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고,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산다. 스펙 쌓는 것이 행복하다면 신나게 쌓을 일이다. 그러나 나는 스펙 쌓는데 내 삶을 들어 바칠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누구도 나에게 스펙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하면 그 누구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지만 내가 불행하면, 나를 나로 살지 않으면, 사방팔방에서 내게 뭔가를 요구한다. 요구조건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들을 만족 시켜줘야한다는 일념에 빠지고 그들이 만족감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처럼 여긴다. 왜냐하면 나를 만족시킬 생각은 않고 그들을 만족시키려하기 때문이다. 2010. 07. 05 06:57 윤안젤로
風文  Aug 09 2022
여그저그 싸돌아다니는 술꾼 근래 몇 군데 일터를 알아보고 다녀보기도 했다. 돈도 못 받고 일한 대가를 떼이기도 했다. 어떤 곳은 전기자전거 AS직으로 갔었는데 며칠 근무하자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여서 파는 성능도 불안한 자전거를 나더러 팔란다. 그래서 파는 건 싫다고 그만두니 늙은 사장이 내게 욕질을 하기도 했다. 조폭과 같이 일하니 안전하다는 둥 별 잡스런 곳도 보고 별별 더러운 꼴도 봤다. 답답하기도 하고 일당도 벌어 담배라도 살 겸 돌아다녔는데 상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결국 비싼 버스비만 날렸다. 버스 타는 걸 좋아해서 날린 버스비를 관광비로 생각하고 나니 편하다. 집 밖을 잘 나가지 않다보니 안산이란 동네가 궁금하기도 했고, 안산도 꽤 큰 도시구나 하는 생각과 사람마다의 장단점도 새삼 보고 들었다. 중소기업에 대해 나는 아주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친구나 형제처럼 이야기하며 지낼 수 있기도 하고, 내 생각이 경영에 반영 되기도 하고, 조금 덜 보수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0년 전쯤 내가 다니던 진보적이고 깨어 있는 회사는 찾기 힘들다. 그런 일터가 안산에는 없는지 내가 못 찾는 건지 모르겠다. 주 5일 근무제가 도입 된지 한참 지났지만 안산은 주 5일 근무제가 무색한 곳이다. 노동부에 입 다물고 조용히 일할 수 있는 시간제 일터를 구한다는 이력서를 넣어 놓고 담배 한 대를 문다. 회사에 얽매이는 것보단 일당이나 시급을 받는 편이 내겐 편하다. 가장 불편한 질문이 “한 달에 어느 정도의 월급을 원합니까?” 라는 질문이다. 내 대답은 늘 “사정대로 주쇼”다. 한심한가? 그건 그렇고, 요즘 겪은 사장들을 보며 나이가 들수록 뇌가 굳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인생경험이라면 삶의 근육이 탄탄하고 부드럽게 연마 되었을 것이고 웬만한 돌발 상황에 대한 노하우도 있을 것이고 삶에 대한 유연함과 학식이 있을 법한데, 내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 만났는지 대부분 돌대가리들이다. 아니, 돌대가리라기보다는 돈으로 굳어진 돌대가리들이 많다. 원인을 보면 일터가 가장 큰 원인이다. 퇴근을 해서도 일 걱정, 일 이야기, 수입 계산 등 눈 떠있는 내내 일에 관한 것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도 사람을 만나든 공원을 가든 술집엘 가든 그곳 분위기나 사람들을 글로 적거나 떠올려 문장을 만드는 버릇이 있는 걸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늘 깔려 있다. 그렇다면 나는 글 생각으로 굳어진 돌대가리인가? 그건 그렇고, 몇 년 전 전기공사를 하는 매형을 따라서 화성시와 인천현장을 오가며 일한 적이 있다. 매형은 현장에 전기에 관한 모든 일을 감독하는 책임자를 두고 이곳저곳 현장들을 오가며 돈줄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 중 한 현장에서 만난 감독이 있었는데 전기에 관한 육체적 기술은 달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는 책에 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 늘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고 일을 하는 현장에서도 책이야기가 주였다. 나중엔 존경심이 생겼다. 그는 일 외에도 사람이 꼭 알아야할 영역, 즉 인문학에 관한 관심과 공부가 많았고 그의 일 속에는 학문이 학문 속에는 그의 일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언행에 흠이 없고 일에 관한 진행도 차분하고 정확하며 남을 위한 배려가 몸에 붙어 다녔다. 내겐 먼지 속 노동자가 아닌 현인처럼 보였다. 이처럼 책은 돈에 절은 사장이나 돌대가리 노동자라는 말을 막아주고 존경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하는 좋은 처방전이다. 서점엔 돌대가리들을 기다리는 책이 셈을 못할 지경으로 태산을 이루고 있다. 책을 멀리한 자들의 대화내용과 책을 가까이 하는 자들의 대화내용은 질부터 다르다. 그러나 책은 사회생활을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이기도 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안내서이긴 하나 결국 나를 위한 것이며 책을 통해 내 모습을 확인 할 때 나이 값을 하게 된다. 가격대비 끝내 주는 처방전 아닌가? 요즘 책값이 올라 비싸다고 투덜대지 말고 동네 도서관을 가보기 바란다. 무료로 빌려준다. 그건 그렇고, 나이 들어갈수록 유연해져야 한다는 말은 임기응변이나 잔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문에 몰두하고 매년 논문을 제출하라는 뜻도 아니다. 돈에 절어 늙어가며 뇌를 굳히지 말라는 뜻이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든 쉽게 부러지지 않는 강한 내구력의 유연한 철학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상을 구분하고 흡수할 수 있는 그리고 황폐 해지는 삶을 건져내주는 유연한 낚시가 가능해야 한다. 황희를 깨우친 소 두 마리를 가진 농부가 학자였던가? 거친 삶 속이라도 나를 성찰하고 나를 스스로 키우며 멋진 철학으로 휘감고 늙는 것처럼 매력적인 삶이 어디에 있나. 돈 주름보다는 글 주름이 더 아름답다. 고스톱으로 치매 예방할 생각 말고 책으로 예방하자. 벽에 똥칠하는 문인 봤나? 글은 몸에도 좋다. 그건 그렇고, 컴퓨터 옆 응달에 작은 시루 하나 놓고 콩나물 콩을 넣었다. 쌀 씻을 때마다 물을 주고 잠들기 전에 물 한 번 주고 자면 된다. 건조함도 막아주고 내가 키운 콩나물을 내가 먹으니 좋다. 마우스로 여기저기 눌러보면 1Kg에 3,000원 안팎으로 콩나물 콩을 살 수 있다. 보일러가 있는 다용도실에 상추를 심었는데 실패하기 일보 직전이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려고 애쓰고 있다. 15,000원 하는 배추 한 포기를 보며 그냥 되돌아 온 날, 뉴스 기사를 봤다. “이명박 정권의 성공은 한나라당의 승리!” 책상위에 모니터를 오독오독 갈기갈기 자근자근 씹어 먹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일터 구한다고 차비 날리며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지인의 의견을 적극 수렴. 잡글들을 정리 중이다. 정리가 끝나면 새로 써내려가야 할 쪽지와 종이들이 도박판 벌이다 걸려 달아난 뒤 흩어진 화투장처럼 널브러져 있다. 손바닥만 한 스프링노트를 늘 들고 싸돌아다니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 막상 꺼낼 종이가 없다. 그러다보니 선술집에서 ‘무담보, 무방문, 무보증, 당일대출’이라고 인쇄된 종잇조각을 빌려 그 위에 쓴다. 그것들이 저 모양으로 시위 중이다. 짜아~식들. 그건 그렇고, 돈을 냈더니 전화가 된다. 엄니한테 뒤통수 긁으며 고춧가루님이랑 마늘님 계시냐고 겸사겸사 걸어볼 참이다. 2010.10.05 15:14 윤영환
風文  Aug 09 2022
그건 그렇고 - 말과 글 정보화 시대에 정보가 생산하는 개인주의를 눈과 귀로 만나면 정(情)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하루에도 수없는 정보들이 쏟아지고 엄청난 소식들이 누리터와 미디어통신선을 통해 영상으로 문자로 전해진다. 걸러내기 벅찰 정도로 끝없이 생산되거나 재생산된다. 걸러내고 판단하는 건 개인의 몫이다. 정보를 걸러내고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판단하는 건 사람들의 지적수준이 다르듯 사람마다 다르다. 이런 정보들로 틀에 갇히기도 하고 없던 고정관념을 스스로 뇌에 박아 새기기도 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다르면 거부하기도하며 받아들이기 쉬운 또는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와 지식만을 섭취하려 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이라 말할 정도로 정보는 많다. 자리 잡고 있던 이념이 붕괴되기도 하고 없던 이념이 새로 생겨 세상을 편짓는 눈을 만들기도 한다. 단계적이고 부동적인 지식축적방식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축적방식으로 변했고 지역적 특성은커녕 IT 발전으로 지도상 국내외 경계선도 없어졌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전자우편이나 누리터에 올라온 글을 통해 그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철학교류도 쉽다. 하지만 컴퓨터 화면 속의 글이나 신문기사 따위를 통해 사람을 결정짓는 오판의 연속선상에서 산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판하지 않는 눈, 즉 정보를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스스로 만든 지혜에 달려있다. 그건 그렇고, 성대를 울려 혀를 통해 입술을 지나 소리를 내면서 전달하는 방식과 문자를 이용해 글로 전달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쓴 글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글로 쓴 단어나 문장 그대로 우리는 발음도 하지 않으며 어휘도 다르며 억양과 음의 높낮이도 다르다. 토론이나 학술회에서 자료용으로 들고 나온 참고자료용 문서를 보고 읽지 않는 이상 우리는 글로 쓴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쓴 일기나 글을 소리내어 직접 읽어보라. 평상시 그런 억양, 그런 단어선택, 그런 말투로 말하던가?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편한 사람은 말이 나를 전달하는 도구로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글이 더 편한 의사전달 도구가 된다. 그러나 요즘은 정보화 시대라 그런지 글이 우선 되는 경우가 많다. 말이 먼저 나왔고 그 뒤에 문자가 발명 됐다. 문자는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체계다. 그러나 생각을 적을 수 있음에 유연성이 좋고 다듬기도 좋다. 문자는 신체적, 거리적 특성 등으로 직접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다. 이 문자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 될 목적으로 출판이 발명 되었고 제3자가 편집하는 언론이 등장하면서 문자는 진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논쟁에 늘 휘말려 살고 있다. 특히 이미 죽은 사람의 글은 진실을 따지기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주변 장수(만호(萬戶) : 종4품 무관벼슬)가 직접 한 말인지 이순신의 말을 만호(萬戶)가 전한 것인지 모른다. 나의 추론은 죽음 이후 그 사실을 알아 챈 장수 중 한명이 지시했다는 이론을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으로 관련 글들을 증명할 텐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살아나 증언하지 않는 한 모른다.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화통화 대신 통신기기를 이용해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같은 내용의 글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낼 수 있게 됐고 의사소통을 위한 글은 짧아졌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성싶은 공적이고 중요한 내용은 다중영상통화를 이용해 대화하며 녹화한다. 그러나 공적이지 않은 개인적인 말은 대부분 글로 적어 블로그나 누리터에 올려놓는다. 나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글은 나의 육성이 주는 느낌을 온전히 실을 수 없다. 글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읽는 사람이 인지하고 이해하지 않는 이상, 글은 언제든 오해와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잘 이해하고 수용하거나 버릴지, 아니면 그 불씨에 불을 지펴 화근을 만들지는 전적으로 스스로 만든 지혜에 달려있다. 그건 그렇고, 사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우표를 붙이며 보내는 나를 미개인으로 보는 눈들도 있다. 심지어 우체국 직원이 궁금해 묻기도 한다. 며칠 전엔 물어 볼 것이 있어 모 통신사 대리점에 가서 상담을 했는데 여사원에게 "휴대폰 없이 사는 사람도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TV도 없다고 말하면 그녀는 뭐라고 할까?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모두 그 여사원처럼 퉁명스럽게 말하거나 귀찮아해서 친절하다는 인상을 받은 곳이 없다. 이를 지인에게 말해줬더니 행색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풀어 말해, 너덜거리는 오래 된 칙칙한 옷에 그것도 대충 걸쳐 입어 제멋대로인대다가 긴 머리를 묶고 있고, 노숙자 내지는 경제적인 하층민으로 봤을 거란 이야기다. 기회가 되거나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하면 세탁소와 미용실을 거쳐 정장을 입고 가볼 생각도 마구 일지만 그런 일은 없을듯하다. 구두나 정장은 내겐 있지도 않고 세탁소나 미용실에 쓸 돈 있으면 신영마트(단골가게)에 가서 소주나 두어 병 사올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불친절한 통신사 사무실들에 서류로 문의를 하면 어떤 반응이 올까? 내 경험으로는 글로 물었을 때 글로 답이 오는 경우는 모두 친절하게 답이 온다.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글예절’이 회사규정이자 인간들의 ‘글관습’이다. 그러나 상대가 없는 글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고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다. 나는 글 쓰다 쉴 때 글을 쓴다. 몰두해서 글을 쓰는 일로 머릿속이 피곤해지면 넋두리나 늘어놓는 ‘잡글’을 지금처럼 쓴다. ‘잡글’로 나를 판단하는 것은 금물일뿐더러 나를 표현하기 위한 나의 모든 작품도 나를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 말과 글은 여기서 차이난다. 그럼 말은 나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가? 그건 그렇고, 말을 새겨듣고 몰입해서 이해하려 하는 귀는 아무리 말주변이 없는 사람의 말도 정확히 알아듣는다. 그런 귀는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의 말도 가려들으며 왜곡 점을 짚어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읽는 눈이 밝으면 어떨까? 글을 만날 때 읽는 눈이 밝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것은 글에 국한 되어 있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글 이외의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은 마음에 있다. 읽고 있는 글 외의 것을 그 글을 기준으로 상상하고 추론하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읽어낸 이외의 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는 것은 저자에 직접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문자가 규정짓지 못하고 말로 온전히 드러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를 만나도 그를 알 수 없다는 오류가 있지만 서로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마음으로 대화하면 충분히 그를 알 수 있다. 그 마음이 하는 일을 돕는 도구가 글이고 말이지 글과 말이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평생 수십만 통의 편지를 주고받아도 사람하나 알기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과거 기록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건 그렇고, 정보를 잘 걸러내는 눈, 정보를 왜곡하고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 눈, 의미 없이 정보를 주물러 임의대로 퍼뜨리는 입, 바른 말을 고깝게 듣는 귀, 참 삶을 위한 맑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전적으로 스스로 만든 지혜가 조율한다. 피아노 조율사는 음을 잃어버려 조율을 해도 제 음을 내지 못하게 된 줄은 가차 없이 끊어 버린다. 말과 글은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줄이다. 통하기 싫어 끊어 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하고 싶어서 있는 줄이다. 제 음을 내지 못하는 마음은 없다. 이해가 가는가.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건 말과 글이 고개를 숙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읽지 않아도 너의 마음과 내 마음이 통하면 한마음 아닌가? 마음이 같으니 하고 싶은 말도 같다. 마음이 다르면 뱉는 말은 모두 갈등이고 싸움이다. 너의 글을 읽는 마음이 다르니 너에게 글을 쓰는 마음도 다르다. 말과 글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너와 내가 가까워지고 행복을 위한 도구도 되지만 서로를 해치는 흉기도 되기 때문이다. 불과 같고 물과 같다. 하지만 불이나 물이 재해로 와 내게 주는 상처보다는 말과 글이 주는 상처가 더 깊다. 그러나 말과 글이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는 아름다움도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과 글은 신중히 써야 한다. 그런 면에선 이런 ‘잡글’이 편하다. 한번에 써내려가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퇴고 따위의 지끈 거리는 혈압상승은 없기 때문이다. 문득 이따위 ‘잡글’보다는 격이 있는 글과 말의 전파를 위해 부단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말과 글’이라는 도구를 잘 다듬어 다른 사람들도 잘 쓸 수 있도록 내놓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다. 마음이 고픈 것보단 낫다.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는데 무엇인가로 마음이 가득 차있다. 맥박이다. 숨 쉬는 기쁨이 심줄들을 매초 튕긴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는 말보단 “나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가 더 좋다. 근래 건강이 조금씩 나아짐을 새록새록 느낀다. 그건 그렇고, 시계를 본다. 오후 들어 6시간 넘게 앉아있다. 더 앉아 있어도 내 엉덩이는 건재하다. 시계를 본 이유는 밝았던 창문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시계와 달력이 없던 집에 시계와 달력이 놓이게 된 건 때를 맞춰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생겼기 때문이다. 바쁘다. 언제부턴가 “할 일이 밀려있다.”는 말을 안 하게 됐다. 대신 “오늘 할 일은 다했다.”라고 마음으로 말한다. 일이 분에 넘치게 많다는 건 문제가 있다. 내가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일에 치어 살다가 뜨고 싶지 않다. 하루를 잘 산다고 생각한다. 할 일은 스스로 약속한 시간까지 열심히 하고 이외에는 나를 찾는 일을 한다. 나를 찾는 일도 내 일이긴 하다. 잠자는 것도 내 일이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조금씩 당기고 있다. 하루를 잘 살기위한 육신의 충전이 잠이지만 지나치면 독이고 외관상 잠든 내내 시체와 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잠들기 전 드리는 가톨릭 기도문이다. 기도서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린 지금 아니면, 오늘 잠들면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소식지를 통해 고속도로 사고소식을 보면 매초,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약한 존재임을 늘 느낀다. 살아 있음에 감사드림은 이 ‘잡글’을 쓰는 내내 갖는 감정이다. 따라서 내 삶 속에 내가 쓰는 글과 뱉는 말에 대해 늘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음은 시체와 같다. 누군가에게 실언했다면 되돌릴 수 없다. 이미 말하고 쓴 것은 벌어진 사실 그 자체다. 모두 과거다. 1초전도 과거고 눈 깜짝하는 행위의 시간도 과거로 간다. 지남에 대해 잘못은 없는지 늘 돌이켜 성찰하는 사람이 백만장자보다 편히 잠든다. 그건 그렇고, 말은 말씀이 될 수 있다.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말씀은 아무나 함부로 못함을 알면 말은 무서운 것이다. '말'을 표기하는 '문자'를 쓰는 손은 말씀을 쓰는 손과 다르다. 말은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되돌릴 수 있으나 말씀은 되돌릴 수 없다. 시대가 인정한 가치있는 글(기록)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만든 역사서에 말보다는 말씀이 많다. 말은 소멸 되나 말씀은 소멸 되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다. 차이를 아는가? 그건 그렇고, ‘그건 그렇고’라는 ‘잡글’을 연재한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다음 ‘잡글’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로 재해석해서 ‘잡글’을 써 볼 생각이다. 왜? 말과 글은 무한한 생산력을 갖췄고 의미가 담겨있고 누구나 공평하게 갖고 있는 도구니까. 위에서 엉덩이가 건재하다고 썼는데 이젠 엉덩이가 아프다. 의자를 떠나야 것다. 2010.10.18 19:38 윤영환 안젤로
風文  Aug 09 2022
그건 그렇고 - 늘 행복할 수 있다 시련은 늘 지나갔다. 시련이 오면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도록 시련을 밀치며 살았다.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며 살았다. 돌아보면 겪은 대부분의 시련들은 쉽게 또는 스치듯 지나갔다. 큰 슬픔 중 하나를 죽음으로 본다. 주변에 지인이나 가족이 떠나면 화장터가 젖도록 슬피 운다. 하지만 다시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무의식 속에서 슬픔을 끝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산 사람이 주는 이별의 슬픔은 꽤 오랜 시간을 머문다. 같은 하늘 아래 살기에 길거리에서 스치며 볼 수 있고 찾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 때문에 산 사람이 주는 슬픔은 끝낼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눈물에 밥을 말아먹고 술잔에 눈물을 타마시며 죽음을 물색하기도다. 어떤 사람은 뭘 그런 걸 가지고 죽네 사네 염병을 떠냐고 비웃는다. 사랑에 목숨 걸어봤나? “목숨 걸고 사랑 해봤는가!” 말이다. 나는 걸어봤다. 젖내 나는 풋사랑도 육신의 욕망이나 호기심도 아닌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애무하는 사랑을 해봤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 내 사랑도 숭고하다.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마음으로 통하는 사랑을 했었다. 참으로 맑은 영혼과 영혼의 사랑은 ‘사랑박동’이 정지 되면 곧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맑은 영혼 사이의 사랑이 비난을 받고 욕을 먹고 저주를 받더라도 더 이상 깨끗한 사랑은 없다고 믿는다. 서점엔 위인전들이 있다.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손가락질을 받았다. 불경, 성경은 어떤가? 인간으로 숨 쉬며 살 때 그들은 비난의 종점이었다. 기업가든 철학자든 성공했다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작은 모두 주변의 우려와 비난에서 시작했다. 그 시선을 지극히 개인으로 돌려 보면 나를 향한 비난은 격려가 된다. 스스로 나를 마취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일에 맑음을 씌우면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관습의 눈은 어둡다. 그 어두운 시선이 내겐 힘이 되는 요즘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맑은 영혼의 사랑은 무엇인가. 맑은 영혼이라는 정의를 누가 내리며 기준은 뭘까? 없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없고 보편적인 맑은 영혼의 개념도 범위가 넓어 꼬집기 어렵다.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맑은 영혼의 사랑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그 사람의 돈, 지위, 학력 등 사회의 눈이 내리 꽂아 놓은 기준을 벗어나 바라보는 것이 맑은 영혼의 사랑 아닐까? 대표적인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사회에서 뭐라든지, 돈을 벌든 말든 내 자식이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사랑이 맑은 사랑이다. 가물가물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시계를 팔아 여인에게 머리띠를 사주고, 여인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남자에게 시곗줄을 사주는 이야기. 가난에 절어 있어도 사랑하나로 내게 남은 건 뭐고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아끼는 마음이 맑은 사랑이다. 장기를 떼어 남편에게 또는 아내에게 주는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행여 내가 잘못되어 목숨을 잃어도 그 사람 행복하면 한없는 사랑이 맑은 사랑이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며 자식들에게 그만 퍼줘라 해도 옥수수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 이혼하라고 처가든 주변인이든 아니면 당사자가 원해도 자신의 배를 열어 장기를 떼 아내에게 주는 마음에 탁함이 어디 있겠는가. 즉석에서 대화하나 지어 본다. --- “행여 굶어 죽게 되면 꼭 끌어안고 같이 죽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뭔 소리여. 죽긴 왜죽어. 그것도 굶어 죽어? 산 입에 거미줄 치것어. 열심히 살믄 되는겨. 괜한 소리 말고 걱정 하덜덜 말어. 내가 있잖여.” “당신 수입으론 병원비 감당 못해. 나도 알건 알아.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떠나도 좋아. 나 당신 원망 안 해.” “당신이 움직이지 못하믄 나가 움직이면 되지 않것어? 우린 손발을 세트로 갖고 있어. 여분 많으니까 노후보장 끝난 겨. 고향집허고 이것저것 정리 허니까 널널혀. 돈 걱정 말고 일어날 생각만 혀. 1프로도 가능성 없는 병원 없어. 우리가 그 1프로여. 알것어?” 그의 손톱 밑으로 닦아내지 않은 시멘트가루가 보였다. 가루는 물을 먹고 이미 굳어 있었다. 수목원과 고향집은 이미 사라졌음을 그의 갈라진 손톱이 말해주고 있었다. 베게 밑에 손톱깎이를 넣어두고 그의 코고는 소리를 기다렸지만 밤새 그는 코를 골지 않았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숨죽여 일어 선 후 물소리가 들렸고 곧 현관이 닫히는 쇳소리가 들렸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손톱깎이를 감아쥐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이 소설 속 여인은 살았을까? 그렇다면 이 부부의 미래는 예상할 필요도 없는 행복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여인을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네 삶은 수시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선택하는 것은 미래가 되어 내게로 온다. 모든 선택은 행복을 원한다. 선택이 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생각들 하지만 고통이 내포한 행복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고통이 행복을 품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건 그렇고, 행복도 늘 지나간다. 그러나 행복이 오면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이의 본능이다.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권리. 행복추구권이 내게 있다. 난 꿈이 있고 그 꿈이 실현 되면 다른 꿈을 꾸며 살 것이다. 물도 고이면 썩는다. 정지 된 지식, 수도(修道)의 의미를 잃어버린 수도, 타인을 배제한 자아도취는 生이 아니라 死다. 혼자 즐거운 수도는 독도(獨道)다. 어차피 수도는 ‘나’라는 개인의 문제다. 그 길을 걸을 때 깨달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눠야한다. 그러나 그 밑거름이 행복이 돼야만 한다. 우리는 고통 받을 때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지만 행복할 땐 고통 받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으려한다. 행여 그 고통이 간접적으로라도 내게 오지 않기를 바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은 것이다. 그 고통이 지금의 행복을 만들었고 다가올 고통을 맞이하는데 좋은 거름이 된다. 그러나 고통이 아닌 행복을 거름으로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행복한 것이 뭔지 그건 그렇고, 돈 없이 살 수 없지만 돈 때문에 살지 않는 것이 내 수도다. 나는 그 수도를 모든 인간이 가야할 길이라 본다. 노후보장에, 자녀교육에, 문화생활에, 치료에, 사회적 지위를 위한 줄과 빽(?)을 위해, 지금보다 더 풍요로움을 위해 돈에 절어 살도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교육비는 나날이 증가하는데 왜 살인, 강간, 폭행, 유괴 등 흉악범죄는 증가하고 자살률은 세계 1위인가. 교육비가 적어서? 교육을 받았는지 아닌지 종이로 확인하도록 만든 우리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버스나 지하철을 타보라.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을 포함해서 욕설을 빼면 아이들은 대화가 안 된다. 얼마나 교육비를 더 들여야 할까? 돈 안 되는 인문학과는 각 대학에서 퇴출대상 1호 학과다. 취업준비를 위해 가는 학원에 인문학이 무슨 필요가 있나? 누가 아이들을 누가 우리를 옥죄는가. 그래서들 유학 가는 게다. 교육이 이미 아이들이나 부모에게 고문이 됐기 때문이다. 날고 긴다는 대학 나온 정치인들의 국정감사장을 보라. 돈과 관련 없는 비리는 없다. 비리의 벼룩시장이다. 그런 인간들이 “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돈 없이 살 수 있냐?”라고 묻는 것들이다. 그건 그렇고,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잡글’의 매력인가? 그건 그렇고, 네 편의 수필을 써야하는 즐거움이 왔다. 아마도 시 공부가 부족한 내 시들이 격이 떨어져 수필로 왔나 한다. 그런데 음...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면 일본어의 경우 배우기가 쉽다. 그런데 중반에 접어들면 일본어는 매우 어렵다. 영어도 문학번역은 나 같은 초짜는 큰 산이다. 수필도 그렇다. 편하게 쓰다보면 점점 어려워진다. 매 해가 지날 때마다 수필의 격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다. 지난날의 수필들을 보면 ‘잡글’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래서 어려운가? 요즘 단편들을 쓰고 있다. 상당히 버겁다. 쓰면서 “소설은 내 영역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인다. 내가 주장하는 주제를 무슨 국가기밀문서도 아니고 밑에다 깔려다보니 켁켁 댄다. 그러나 하루의 모든 시간을 글과 함께 하기에 행복하다. 잘 쓰든 못 쓰든 읽든 안 읽든 나는 글과 산다.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리 잡으면 잘 일어나지도 않으니 집중하면 소주와 쌀도 아낄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많은 돈을 만져보는 행복도 있었지만 지금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가끔 스승님을 좀 만나면 좋겠는데 일생이 독학이니 포기한지 오래고 그저 수도하는 마음으로 산다. 이것이 나의 행복이다. 하루에 돈을 떠올리는 때는 거의 없다. 고로 돈을 만지는 일도 드물다. 그러나 돈을 혐오하지 않는다. 돈 싫어하는 사람 어데 있나. 돈이 있어야 소주를 사지. 안 그런가? 조금 더 만족하고 지금 더 만족하고 조금 부족해도 만족하고 많아지면 나누며 만족하면 된다. 행복한 것이 뭐 별건가? 그건 그렇고, 직업에서 찾든 가족에서 찾든 아니면 지금 찾든 행복할 수 있는 길은 통계가 없다. 그저 지금 우울하면 바로 고통이고 지금 행복하면 참삶이다. 단, 하나 말하고 싶은 건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행복추구권엔 ‘표현의 자유’가 들어간다. 말하고 쓰면 된다. ‘표현의 자유’가 내포하는 큰 의미는 혼자가 아니라는, 우리가 나눌 자유다. 서로가 서로를 나누고, 모호하면 만만한 상대에게 표현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내게 표현하면 된다. 표현하는 시대 아닌가? 추하지 않도록 누리면 된다. 요즘, 온갖 사상들이 누리터에 올라온다. 동영상, 이론, 반박자료 등 넘쳐난다. 뭔 종교도 새로 생기나보다. 하여간 별난 그리고 재미난 글들이 많다. 수많은 책들과 논과 서들 사이에 흔들리지 말고 바로가면 된다. 무엇이 바른가만 찾으면 답이 온다. 간단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에 비추어 맑고 밝으면 된다. 보편적인 바름을 바탕으로 더 맑은 바름을 찾아 살다보면 사회의 잣대나 손가락질이 얼마나 한심한지 알게 된다. 그건 그렇고, 수도(修道)는 타도(他道)와 독도(獨道)를 포함한 극도(極度)로 가는 길이다. 도통(道通)하면 도(道)가 아니다.(후에 묵언에 관해 쓴다.) 수도(修道)하는 자는 도(道)를 반드시 안내해야 한다. 그렇다고 나를 노자의 도가도비상도를 만끽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위하지 무위하지 않는다. 혼자 도를 닦다가 혼자 좋아서 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도인들 중에 후세를 위해 남긴 책들을 남긴 분들이 많다. 혼자 수도하다가 홀로 가면 책이 남겠나? 들은 이도 말함을 적는 이도 없는데? 간단하다. 남을 위하지 않으면 혼자 죽으면 된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면 된다. 아니라면, 그것이 아니라면 서로 누리다가 가는 삶이 좋다. 행복해야 하는 우리의 본능을 따라서 죄가 되는 언행 대신에 남을 살리는 언행은 어떤가? 시련으로 고통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입이나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야 그것이 도(道) 아닌가? 해보시라. 새로운 인연들이 생기며 가슴이 뿌듯해진다. 당신은 어떤가? 혹시 도(道)를 아십니까? 그건 그렇고, 요즘 느낀 건 선입견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진 일이다. 내가 보는 그 사람만 보지 사회가 규정짓는 사회 구성원 중 일부로 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이 말해주지 눈에 보이는 사람은 동물과 같다. 태어나 먹고 싸고 입고 떠들며 자다 죽는 게 사람이다. 사람임을 증명하는 건 마음뿐이다. 그 마음이 그르면 동물보다 못한 것이고 마음이 마음다우면 사람이다. 나쁜 마음이 행복을 추구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죄를 짓더라도 행복감이 든다면 그 행복은 나누지 못하는 외톨이 행복이 된다. 맑아지도록 닦으며 사는 마음이 행복을 추구하면 스스로 나누지 않아도 주변이 행복해지게 된다. 혈액형이나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책들이 나와 있다. 그 책을 통해 인간을 분석해서 사회에서 성공한단다. 믿는가? 얼마 전 믿을 수 있는,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공인 된 사람에게 속내를 털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어떻게 아나. 마음이 보이나? 그래서 맑고 정직한 깨끗해야만 한다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실망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떤 감정이 일까? ‘다시는 저 사람에겐 말하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탁해진다. 내 마음이 탁해지면 내 주변도 탁해진다.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이 미워지고 내 마음 한 곳에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 자리를 잡기 전에 털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을 갖췄다는 저 사람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저 사람과 같을까? 그런 생각이 선입견이 되기도 하지만 당연히 아니다. 지위가 뭐든 역할이 뭐든 사람들이다. 사람은 사람이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행여 내게 실망을 안겨준 그 사람이 탐탁지 않다고 해도 그 사람이 더 맑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내 행복을 그 사람이 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해야 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 행복이 방해를 받을 이유는 없다. 판단은 맑은 마음으로 말은 그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그래서 공부하는 게다. 조금 더 맑아지기를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공부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끝없이 글이 길어진다. 이러다 또 하루 간다. 오늘은 약속이 있다. 흔치 않은 일이다. 크게 구멍 난 양말들을 정리하고 나니 양말 찾기가 참 어려워 졌다. 부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한다. 지하철을 타본지가...... 생각나지 않는다. 몇 달 된 듯한데. 들으며 갈 음악 CD좀 만들고 만만한 책도 골라 가방에 넣고 면도도 좀 하고 간만에 양치질도 좀 하고...... 머리를 감을지는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뭐 그렇게 가렵지 않은 걸로 봐선 그냥 가도 될 듯하다. 겨울바람이 분다. 가을이 끝나가고 있다. 낙엽 좀 밟아보련다. 하늘도 한번 보고 숨도 크게 들이마셔 보러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 2010.10.27. 13:59 윤안젤로
風文  Aug 09 2022
그건 그렇고 - 웃고 살날을 기다리며 입 다물고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기도 하고 한숨도 내쉬는 불안한 좌태. 위 내시경검사를 앞둔 나였다. 목 마취 후 시커먼 뱀 한 마리가 목구멍을 통해 몸으로 들어갔다. 그걸 ‘환장한다.’고 하던가.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부턴 돈 아끼지 말고 수면내시경으로 하자.’ 나의 생쇼는 주변 의료진들에게 즐거움을 줬다. 역시 나는 덩칫값도 못했다. 열 달 전쯤 내시경을 한번 했었는데 그때보다는 견디기 좀 나은 듯하다. 의사는 젊지만 차분하다. 농도 잘하고 친절하다. 늘 그렇듯이 다시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 그건 그렇고, 집에 와 약국에서 건넨 봉투를 보는데 뒷면에 건강을 지켜줄 10가지 수칙이 인쇄되어있다. 1.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3. 반가운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한다. 4. 하루 세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5.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6. 누구라도 칭찬한다. 7. 약속시간엔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8.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9.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10. 때로는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잘 지켜지지 않는 게 있는데 6번과 8번이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다. 받는 것도 부담 가고 하는 것도 부담이다. 8번이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지으라는 건데 열 받는데 어떻게 웃나? 아마 열 받는 일이 없도록 잘 살라는 말 같다. 그건 그렇고, 저녁에 잠들어 아침에 일어날 때 대부분 인상을 찌푸린다. 피곤하고, 뻐근하고, 속 쓰리고, 더 자고 싶고 등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침에 눈을 떠 웃는 사람 거의 없다. 그런데 어떤 논문인지 책인지 모르겠는데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갓난아기 때부터 걷기 전 까지 아가들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 웃는다는 것이다. 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장땡이지 지가 뭔 걱정이 있겠는가. 불경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동학엔 어린이가 하늘님이라 하고 성경엔 어린아이와 같으면 천국행이라고 쓰여 있다.(물론 그 의미는 생각할만한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조직 안에 들어가며 국가에 소속 되어 주민등록번호를 받고 사회 속 일원이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하며 산다. 어떻게 사느냐가 아침 미소를 결정짓는다. 유교문화가 있어서 실실 웃고 있으면 또라이로 본다. 나도 길을 걷다가 혼자 웃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나 역시도 ‘저 사람 제정신인가?’하는 마음이 든다. 나야 뭐 무표정이든 인상을 쓰든 웃든 어차피 또라이 소리를 듣는데 그럴 바엔 웃고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을 일이 없는 건지 웃음이 습관 되지 않아서인지 어색한 건지 잘 웃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 중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그다지 웃을 일이 없다. 그러다가 내 인생이 뒤바뀌는 웃을 일이 생겼다. 웃고 산다. 앞으로도 쭈~욱~ 평생 웃고 살지 않겠나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건 그렇고, 부천에서 살던 때와 같이 이곳도 폐지나 재활용품을 찾아 돌아다니시는 어르신들이 있다. 그런데 그 수가 많아져 경쟁이 심하다. 할머니들만 보였는데 근래 할아버지들이 활동하면서 골목이고 길거리고 종이 한장 떨어져 있지 않다. 얼마 전 포도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양이 많아 몇 송이를 들고 마침 폐지를 정리중이시던 할머니께 드렸다. 병이나 폐지는 모아서 그 할머니가 지나는 때나 만나서 전해드린다. 유독 그 할머니께 마음이 쓰인다. 종종 짐이 많아 애쓰시고 있을 때 리어카 끈을 폐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드리기도 한다. 허리가 심하게 굽어 있어서 허리를 펴고 계시는 모습을 본적도 없고 따뜻한 옷을 입은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옷도 없지만 보통 사람들도 내 옷을 입으면 이불에 가깝기 때문에 드릴만한 옷이 없다. 올 겨울 지켜 볼 일이지만 조금 더 돕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늘 있다. 동 지원센터에 복지과 면담은 해보셨는지 여쭤볼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말해주면 오해가 풀리는데 그 말은 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상대는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고, 간단히 짧게 말해주면 되는데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말을 못할 때 참으로 답답하다. 미안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한 사람 오해를 풀자고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폭풍을 몰고 올 필요는 없다. 억울한 면도 없지 않지만 너그러이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같은 경우를 역으로 당한 적도 있었는데 ‘말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하고 말았다. 때가 되면 알 수 있는 것이고 행여 모르고 지난다 해도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낫다면 모르는 것이 낫다. 마음으로 품을 수 밖에...... 그건 그렇고, 걱정은 했지만 상추씨를 좀 심었다. 날이 추워 싹이 트자마자 곧 말라 죽었다. 그렇다고 거실에 비닐하우스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년에 잘 키워 볼 생각이다. 며칠 전 병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오며 꽃가게 옆에 버려진 채송화들을 봤다. 대여섯 개 정도 화분이 버려졌는데 두 개를 들고 왔다. 넓은 곳으로 옮겨 흙을 골라 심었더니 바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날마다 이곳저곳에서 피고지고를 반복한다. 꽃잎 색깔도 피는 꽃마다 다르다. 꽃봉오리만 바라보다가 어느 날 활짝 핀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직접 씨를 심어 싹이 트고 한 달 가까이 지나 하얀 꽃을 피운 녀석이 하나있는데 꽃집에서 다 큰 꽃을 사오는 것보다는 더 기분이 좋다. 동네 사람들이 꽃을 좋아한다. 가로수 밑단에 국화를 수북이 심어 놓아서 가로수 마다 여러 색의 국화가 작은 숲들을 이루고 있다. 보통 차가 다니는 조금 넓은 곳에 가로수가 있는데 이곳은 골목길처럼 작은 길에도 가로수가 있다. 집집마다 화분이 많고 마당이 있는 집은 감나무에 감들이 주렁주렁하다. 그건 그렇고, 엄니께 겨울에 필요한 물품들을 좀 마련해서 보내드릴 생각으로 메모를 하고 있는데 마침 엄니한테 전화가 왔다. 그 작은 시골동네 그것도 엄니가 사는 단칸방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훔쳐간 품목이 참 거시기 하다. 고춧가루와 약재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약을 왜 가져갔는지...... 벼룩의 간을 빼먹지 도둑질할 집이 그리도 없던가? 도둑놈을 어쩌면 좋냐고 여쭈니 “잘 살것지 뭐.”하신다. 다치지 않으셨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같이 살 때 부엌으로 들어온 강도를 때려잡던 생각이 난다. 씁쓸하다. “도적님들이여! 독거노인의 집은 털지 맙시다. 이종격투기 좋아하시면 연장 챙기셔서 제게 오시길 바랍니다.” 2010.10.29. 13:22 윤안젤로
風文  Aug 09 2022
영화에 관한 잡설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가 ‘돌아이 3’이다. 그때는 성룡과 이소룡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가 심각한 토론 주제였는데 아무래도 이소룡이 근육도 멋있고 날래며 순식간에 나쁜 놈들을 해치우니 이소룡이 우세였던 것 같다. 술이나 먹고 비틀거리는 성룡의 익살취권은 멋있다기보다는 웃긴 쪽에 가까웠다. ‘돌아이’ 시리즈는 전영록이 주연했던 영화였고 입고 나온 옷도 이소룡의 유명한 노란색 트레이닝복이었다. 학교 앞 문구점 책받침도 이소룡 사진이 있는 것이 더 잘 팔렸다. 언젠가 ‘용쟁호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영화 속 한 장면의 브로마이드를 사서 집에 걸어 놨는데 엄니가 귀신같다면서 찢어 버린 적이 있었다. 결론은 없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이소룡이 우세인 것으로 암묵적 합의를 했다. 쌍절곤도 한참 유행해서 팔꿈치나 이곳저곳이 멍투성이였다. 영웅 중심의 홍콩영화나 ‘장군의 아들’이 개봉하고 TV에선 조폭드라마가 유행하면서 영웅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줬다. 그런 흐름은 시들해졌고 사람들은 보다 자극적이고 상상력을 충분히 동원 시켜주는 영화들을 찾았다. 할리우드영화가 영화시장을 뒤흔들었지만 한국영화가 유명영화제에서 수상하는 횟수가 늘면서 한국영화에 대해 관심을 두기도 했다. 요즘은 영화들이 그게 그거고 억지로 감동을 찾으려는, 즉 관객이 스스로 감동을 안 해주면 미안할 정도의 영화들이 많다. 의미 없는 잔인함으로 자극을 주는 모호한 영화들도 보인다. 그건 그렇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발리우드가 보였다. 인도영화는 로망이다. 할리우드의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처럼 늘 행복한 결말을 보여준다. 로맨스의 대표적인 예가 왕자와 공주 이야기다. 대부분 나쁜 놈(괴물, 악인, 마법사, 불을 뿜는 용)이 공주를 납치한다. 왕자는 공주를 구하기 위해 코딱지만 한 방패로 용의 불을 막으며 성탑에 갇혀 있는 공주를 구하고 뽀뽀하고 끝난다.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형식이다. 로망의 스토리가 대부분 이지경인 이유는 문자와 문자로 된 문학을 향유하는 계급층이 왕족, 귀족이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들어가 그들을 만족시켜야 소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나 들어와야 서민계층에 문자가 보급 됐다. 시민혁명 등 민중의 힘이 왕권을 향하고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이 확대 되면서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왕자나 공주 대신 천민이나 흔한 이웃들이 등장하게 된다. 춘향전, 홍길동전 등 지배계급에 대한 부조리를 고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불행을 정의로움으로 치유해주는 대리만족형 소설들은 천민이 쓴 것이아닌 양반이 쓴 것이다. 사형감이라 대부분 작자미상이다. 허균의 능지처참은 소설하나로 처해진 형벌은 아니지만 권력의 하향은 왕권위협이었다. 그건 그렇고, 구닥다리 스토리, 뻔한 이야기의 로망이 21세기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매트릭스, 슈퍼맨이나 아이언맨 등의 ‘맨’들, 아바타, 글래디에이터, 해리포터 등은 모두 로망이다. 할리우드는 이 로망을 철저하게 현대기술로 치장해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이런 영화는 우리가 영화가 상영되기 전부터 행복한 결말로 끝날 것을 알고 본다. 당연히 왕자는 공주를 구하고 행복하게 대대손손 잘 살아야하듯이 할리우드 흥행 주인공들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악인을 물리쳐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단순한 로망이다. 이런 형식의 영화는 혹시나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이용한 상술이다. 이미 행복을 전제로 영화관에 입장하는 이유는 불안해하기 싫기 때문이다. 어차피 행복해지지만 그 과정에 나오는 액션과 무기들 특수촬영을 즐기기 위함이다. 주인공이 죽더라도 평화는 온다. 나 하나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계에 평화가 온다면 기꺼이 죽는 주인공을 보고 관객은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이미 죽을 것이 암시 되어 있고 언제 죽나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는 어떻게 싸우며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며 어떻게 평화를 보장하는가가 주 내용이다. 근래엔 관객들이 고루한 내용이 아닌 색다른 이야기를 찾고 있고 이런 힘에 작은 독립영화가 성공하는 모습도 보인다. 영화시장에 자신만의 색으로 뛰어드는 감독들이 늘고 있지만 양적으로 작품이 많아지는 것과 질적으로 성공하는 건 다르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들 중 하나가 관객과 일치했을 때 흥행이 되며 요즘 관객이 무엇을 요구하는 지도 참고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발리우드 역시 로망이다. 난리 벚꽃 장을 치러도 끝에는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대부분인데 특이하게도 음악과 춤 그리고 노래가 들어간다. 갑자기 군무가 나오기도 하는데 얼마나 연습들을 했는지 그 많은 사람들의 동작이 군인과 같다. 인도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 뮤지컬에 있다. 그들의 정서, 전통예술, 미, 생활 속 문화의식이 두루 포함 된다. 지루하다면 지루한데 전 세계에서 그들만의 영화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칭찬하고 싶다. 어떤 건 상영시간이 4시간 가까운 것도 있지만 대화나 플롯이 빠르게 진행 되서 졸리지는 않다. 여러 작품이 세계적으로 흥행됐고 이젠 할리우드가 직접 나서서 발리우드를 제작한다. 대여섯 편 본 것 같은데 아직 많이 남아있다. 옛날 홍콩영화처럼 어느 순간 질리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는데 중세 로망의 스토리는 수천 년 지난 오늘도 효과가 있잖은가? 그건 그렇고, 스릴러, 공포, 범죄, SF, 멜로, 드라마 등 많은 갈래가 있다. 요즘은 대부분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를 섞어 만든다. 공포감도 주고 긴장, 사랑, 코미디까지 들어가다 보니 개념 없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며칠 전 ‘이끼’라는 영화를 봤는데 만족스럽다. 그 뒤로 ‘윈터스 본(Winter's Bone)’을 봤는데 긴장감의 흐름이 이끼와 흡사하다. 영화가 끝나고 멍하니 생각하게 되는 건 중세 로망의 뻔한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결말이 궁금한 영화들이 영화 같고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하나 있는데 ‘블라인드 (Blind : 2007)'라는 영화다. 영화 전체가 뮤직비디오다. 선율과 영상이 잘 어우러진 말 그대로 작품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충격적인 결말 이후 참 사랑에 대해 반성하게 만든다. 참 감동적인 영화다. 그건 그렇고, 영화든 소설이든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해도 다큐멘터리나 논픽션이 붙지 않는 한 허구를 전제로 한다. 소설에 대해 역사적 사실 관계를 따지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불과 1분전의 일도 정확히 영화로 소설로 구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큐멘터리는 1분 1초를 계속 찍는 것이고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그나마(?) 적합하다. 왜냐하면 CCTV가 아닌 이상 다큐멘터리도 영화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보여주고 싶은 영상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잘 선택하고 즐기면 된다. 그러나 제작자가 아닌 독자나 관객이 한 갈래만 고집해서 탐미하려 한다면 문화영양이 결핍된다. 되도록 다양한 모습들 새로운 것들을 찾는 것이 내게도 좋고 많은 작가들에게도 좋다. 그건 그렇고, 이 주에 탈고 분량이 늘고 있다. 앞으로 좀처럼 글을 쓸 짬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문화를 소비할 시간은 될 것 같지만 만들 시간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소비는 쉬워도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고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다. 매달릴만한 여건이 안 된다. 그래서 요새 머리가 좀 복잡하다. 2010.11.27 15:16 윤안젤로.
風文  Aug 09 2022
행복과 고통사이 나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살아 온 사람 또는 살고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정작 그 고통은 타인이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그 누가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내 고통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내가 고통스러우면 타인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바닥을 치게 된다. 발등에 불부터 꺼야 남을 볼 수 있다. 본능과 직결 된다. 공중화장실에서 두 손을 꼭 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서있던 사람이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데 뒷사람에게 양보하기엔 힘든 것이다. 고통은 본능이 먼저 반응한다. 고통에 제 아무리 단련된 사람도 고통은 반갑지 않다. 그건 그렇고, 한 삶 속에 필수적으로 겪는 고통은 동물의 허물과 같다. 지혜가 넘치면 그릇을 바꿔야 한다. 허물을 벗는 고통이 클수록 나는 더 커짐을 알고 정신 차려서 남이 아닌 나를 또렷이 봐야만 한다. 그저 그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싫어서 강박관념을 갖거나 나쁜 습관이 생긴다면 그릇을 넓힌 것이 아니라 그릇을 부숴버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고통의 허물을 잘 벗는 법은 책 속에 있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저 먼지 쌓인 법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마음으로 흡수할 필요는 없다. 내게 맞는 옷을 찾듯이 맞는 책을 입으면 된다. 책이 만든 옷은 고통이 접근할 때 경보음도 들려주며 대처방안도 내놓는다. 심지어 건강신호에 대한 처방전도 내놓는다. 그건 그렇고, 좋은 지식과 지혜의 옷을 잘 입었으면 아직 헐벗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일이다. 온전한 공감은 아니더라도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가 얼어 굳어버린 사람의 마음을 찰나에 녹일 수 있다. 삶을 포기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때 따뜻한 말들이 나를 살렸다. 그들은 내 고통을 모두 느낄 수는 없었지만 내가 고통스러워함을 알기에 마음 한편을 나눴고 나는 받았고 고통의 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내 경우는 주위에 아무도 없어 나 스스로 도움말을 얻으러 직접 걸어 찾아간 경우다. 공부가 부족해서 찾아간 것이 아니라 공부가 됐기에 스스로 나쁜 판단을 내리지 않고 도움 주실 분을 찾아간 것이다. 툭하면 나오는 자살사건 속에 나도 어울려 묻혀갔을 것이지만 나는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 그릇을 던져 깨버리지 않았고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있다. 더 큰 고통이 온다면 온몸으로 받아야 할 것이지만 오기도 전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큰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내 그릇이 바뀐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린 고통에 늘 노출되어있고 언제 고통이 나를 덮칠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불안해하면서 산다면 고통의 노예가 되고 만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위험을 느끼면서 자기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느냐의 여부를 저울질해 자신의 무력을 자인할 때 나타나는 상태"를 ‘불안’으로 정의하고 있다. 고통이 다가 올 때 또는 맞이할 때 나는 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무력감을 스스로가 인정해버리면 불안이 시작되는 것이다. 제때에 고통으로 인한 허물을 벗어 내면서 더 큰 지혜의 옷을 입지 못하면 늘 불안하다. 헐벗은 채로 세상 속에 홀로 서있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옷을 입고 있어도 벗고 있다고 생각하고 입고 있는 옷도 스스로 벗어버리려 하고 옷을 줘도 거절하니 대책이 없는 것 아닌가. 어디에 옷이 있는지도 알면서 접근도 못하니 홀로 떨 수밖에 없다. 불안을 떨쳐버리려면 스스로 충분히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갖아야하고 부족하면 사방 천지엔 저 고통을 이겨낼 갑옷이 수도 없다는 걸 인식하면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고, 남이 나를 한심한 눈으로 볼 것 같고, 도움 받은 걸 갚아야 할 것 같고, 내 초라한 이 모습이 소문 날 것 같다는 둥 허섭스레기 같은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당신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적극적으로 당신을 찾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할 사람은 고통을 겪으며 불안에 떠는 당신이다. 불안은 가정도 사회생활도 쉽게 포기시켜주는 마약과 같다. 마음이 허하면 불안의 스승도 만날 수 있다. 늘 뿌듯한 것들로 채우며 살 일이다. 뿌듯한 것이 뭔지 모르면 사무실이나 머무는 곳의 담배꽁초나 휴지라도 줏어보라. 뿌듯함은 간단하다. 그건 그렇고, 고통과 불안이 뭔지 잘 알면 행복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그 어떤 사람도 고통스럽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추구하는 행복이 타인의 고통을 수반한다면 그건 불행이다. 내 행복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면 서로 어깨동무할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본지상주의, 1등, 금메달, 상위권, 최선이 아닌 최고, 과정이 아닌 결과로 세상이 돌고 있다. 내가 포함 된 자연을 공부하기 보다는 돈과 권력을 공부한다. 무엇이 우선인지 알면서도 돈과 권력이 주는 맛이 좋은 것이다. 우린 누구나 “거짓말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지만 그게 쉽던가? 효도가 당연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쉽던가? 그건 그렇고, 어느 날, 몸이 아픈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와서 자신은 그보다 더 아픈 적도 있었고 대수술도 겪었다며 별 일 아니라며 비웃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울화가 치밀었다. 한 겨울 일가족이 길바닥으로 나 앉은 것을 보고 그 사람들에게 “나는 예전엔 더 힘들었지만 지금 잘 살고 있다.”는 말이 도움이 될까? 고통을 알고 있다면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잘 알 텐데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뱉는 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고통을 더 얹어 줌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되레 힘을 준다고 믿는다. 자기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보다 작고 내 고통이 더 심했으니 타인의 고통은 그에겐 고통도 아닌 것이다. 그는 잘못했다고 인식도 못하기에 고칠 일도 없다. 항문이 할 일을 입이 하며 살도록 둘 뿐이다. 그건 그렇고, 고통을 벗는 가장 최선의 처방전은 많다. 그 중 생각이 나서 적고 싶은 말이 있다. 공자가 참으로 싫어하는 자가 있는데 “잘못을 했다고 인식을 했는데도 고치지 않는 자”다. 뉘우침이 없으면 고통 속에 살다 가는 게다. 슬쩍 넘기고 자기합리화 속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고통은 숨어 제 일을 한다. 죽기 전 뉘우쳐도 평생 저지른 잘못은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집어 넣고 만 셈이다. 잘못을 잘못 된 것이라고 느끼는 즉시 고치지 않으면 참 행복도 아름다운 죽음도 오지 않는다. 병원이 해결 못하는 것이 마음의 병이다. 마음의 병을 병원에 의지하니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의사는 당신이고 처방전은 널려있다. 고통과 행복은 극히 가깝다. 내가 행복한가를 생각하는 것과 나는 고통스럽지 않은가를 생각하는 일은 차이는 있지만 멀지 않다. 만족을 모르니 헛갈리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루를 사르며 많은 유혹이 주변을 휘감는다. 당장 저 일을 하고 싶고, 먹고 싶고, 사고 싶다. 하면 내 마음이 만족할 것 같다. 그래서 참 즐거운 경우를 종종 맞는다. 그런 것들이 내 욕망을 부채질하면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걷어차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걷어찬 경우다. 걷어차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쉽게 방금 전의 유혹을 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새로운 유혹들이 주변에 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다. 만병의 근원은 마음이고, 마음의 병을 예방하는 것이 최고의 처방이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잘 사르기를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루를 잘 살라버렸는지 생각한 후 잠자리에 든다. 왜냐면 하루를 잘 살았는지 나쁜 생각은 했는지 안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기 때문이다. 삶이 시금 털털 개살구 같았던 건 단순하고 짧은 성찰인데도 그렇게 살지 않아서였다. 오늘도 잘 살았고 천지에 날아다니는 고통은 범접하지 못했다. 면역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언제든 튀어나와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처지지만 나는 세상을 구원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롭다. 모든 것에 손을 대려 하고 고민하려 들면 널려있던 고통들이 한번에 몰려 온다. 나는 여전히 늘 어리석고 덜 컸으니, 세계평화를 외치기 전에 제 앞가림이나 잘 할 일이다. 201011.28 18:03 윤안젤로
風文  Aug 09 2022
싫어하는 軍 "나는, 혈서를 쓰며 일본군 장교로 입대한 박정희를 더럽게 생각해. 일황(?)이라자칭하는 자를 아버지처럼 좋아했잖아. 그러니 혈서를 썼지. 모가지를 바친다고 하니 뭔 말을 해. 바로 장교로 갔지. 아, 지금 2011년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가 가장 존경하는 전 대통령이 박정희라잖아." 대한민국의 역사는 뭔가? 그건 그렇고, 셋째형 및 분위기 따라 친일파행적을 떨어내고 남로당에 심취한 박정희가 또 공산당이 싫다네? 아 쓰벌 월남이 오네? 그래서 만든 우리나라 해병대를 나는 싫어해. 왜냐고?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할 해병대의 이미지가 있어. 명찰 떼! 사람으로 와! 해병대임을 말하지마. 군부독재의 희생물이 해병대라는 걸 알라. You Love 고엽제? 이 문장을 당신은 이해하나? 넌 쌀과 상관도 없는 저런 역사를 아니? 과거의 역사는 나와 네가 쓰는 거야. 지난 날을 읊을 수 있는 건 우리들이야. 무덤에 대고 물어봐봐! 답변 하디? 그건 그렇고, 내가 이글을 쓰는 건 해병대와 어제 싸워서 그래. 그는 오래 전 전역했겠지. 그도 외로웠을 거야. 꼼장어 집에 모든 손님을 나가게 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나가지 않았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거든. 나는 기도 했어. 제발 나는 건드리지 말라고. 경찰이 오더니 별 피해가 없다고 그냥 가데? 경찰은 나를 보지도 않았지. 나는 조용히 술만 마셨으니까. 끌려갔던 그 해병이 또 왔어. 나는 기도 했어. 저 외로운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우린 다 외로워. 힘들고. 다들 스스로 묵상하며 힘든 삶을 웃고 행복한 삶으로 바꾸려고 숨쉬는 거야. 웃고 사는 게 좋지 않니? 그러나 그는 끝내 나를 건드렸어. 미안했어. 혹 만나면 어디 부러진 곳이 없나 안부를 묻고 싶어. 꼼장어집 사장은 서둘러 피하라고 했는데 나는 피하지 않았어. 내가 때린 거니까. 그건 죄 잖아. 왜 사람 때리고 도망가? 난 안가. 우리 사회에서 해병대 전역한 사람들이 만든 승합차가 많이 돌아다니지? 그 차에 개념좀 탑재했으면 해. 붉은 명찰은 시비걸라고 달아주는 것이 아니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라고 달아주는 거야.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 사람들이 개병대라고 부르는 거야. 군에서나 사회에서나 추악하게 보이지 말자. 뿌리가 슬픈 역사 아니니? 육군 소장의 희생물들이었잖아. 해병대의 반댓말이 겸손이다. 해병은 겸손도 예절도 없다. 일반화의 오류는 우리나라 해병에게서 적용된다. 북파공작원은 모두 죽었거나 8~90대 노인들이다. 지금 설치고 다니는 것들은 북파공작원이 아니다. 100%! 사익을 위해 공익을 해치지 말라. 부탁이다. 그건 그렇고, 우린 삶을 살며 별 개같은, 별 꽃같은 일들을 겪지? 그게 사는 거야. 모든 인간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전자지. 뜻도 아니게 태어난 놈도 있어. 실수로...... 어쨌든 모든 인간은 스스로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야. 알겠니? 태어났고 살고 있으면 웃어. 우는 사람을 안아줘. 나처럼 때리지는 말고. 얼굴이 작살 난 그도 내가 안아주기를 원했을거야. 그건 그렇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없다. 사실을 말해줘야 하는데...... 그건 그렇고, 화분들이 다 죽었다. 꽃은 하나 뿐. 다 죽었다. 수돗물이 독약인가? 정수기물이 정수가 않됐나? 꽃을 보고 싶다. 환한 꽃. 아버지가 혼을 빼며 때렸었다. 머스메가 꽃 좋아한다고. 늘 학교 끝나고 꽃을 꺾어오거나 뿌리를 뽑아 집 주변에 심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나. 나는 내 자식이 꽃을 좋아하면 더 이뻐하겠는데. 그건 그렇고, 대통령이나 정치인이나 예술인이나 너나 나나 엿같이 외로운거지. 내 마음은 이런데 알아주지 않으니까. 군인들은 어떻것어? 나는 5년을 군생활 했어. 20년, 30년 한 놈이나 다르지 않아. 먹고 살려고 총질이지. 그게 좋니? 사람이 표적이 되는 무기가 좋니? 국가 보호? 나라 사랑? 사람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軍이야. 그 집단에 무슨 철학이 있고 사랑이 있어. 손에 든 게 수류탄인데. 듣지마 내 이야기. 술 주정이거든. 그건 그렇고, 나가고 싶다. 오늘은 어느 선술집을 기웃거릴까. 미친놈이 설렌다. 글은 밤이 새도록 쓴다. 얼마든지 폭이다. 그 폭발을 못하니 미치는 거다. 왜 문인들은 가난이 벗인가. 풍족한 인간은 삶을 쓸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롭다면 너의 삶을 정확히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로움이 고독으로 전환 될 때 나는 문학을 한다. 그건그렇고 : 2011.7.10. 14:16 윤영환
風文  Aug 05 2022
삶 길 모든 길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 만든 것이다. 생명체가 만들지 않은 길은 없다. 흔히 보는 시멘트나 보도블록 촘촘한 길도 살아있는 사람이, 쇠똥구리가 지나다니며 만든 좁은 길도 살아있는 쇠똥구리가, 지각의 뒤틀림으로 만들어진 험한 절벽 같은 길도 살아있는 지구가 만든 길이다. 개미집이나 벌집을 반으로 쪼개보라. 수많은 생명길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건 그렇고, 인생길은 죽은 자는 걷지 못한다. 살아 숨 쉬는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삶 길이다. 혹 저승길이 있다 해도 살아있는 자가 걸을 길도 아니고 걷지도 못한다. 삶 길은 산자만의 길이다. 그러나 당신이나 나나 다른 삶 길을 걸으며 산다. 한 배에서 난 형제도 서로 길이 다르다. 하물며 당신이 걷는 길과 내 길이 같을까.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의 삶 길은 몇 갈래나 될까? 사람 수만큼? 아니면 그 이상? 그런 그렇고, 각자 걷던 삶 길을 걷다가 도반이 되고 사랑을 말하며 같은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평생을 사는 부부는 길이 같을까? 다른 배 다른 유전자가 다른 삶 속에서 자라나 서로가 손잡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건 잠재의식 속에 있던 가고 싶은 길 때문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같은 길을 걷던 당신을 만난 게다. 외로웠고, 덜 힘들게 걷고 싶었고, 손도 잡고 힘 따라 서로 업어 줄 수 있고, 지름길을 서로 논하기도 하고, 때 아닌 우울한 비를 만나면 나란히 그 우울한 비를 피해앉아 서로를 토닥이며 마저 걷고 싶은 것은 당신의 길이 좋아 보여서다. 당신과 같이 걸으면 행복한 삶 길이 될 것 같아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걷는 길이 좋아서 나의 길을 포기하고 당신이 걷던 길을 같이 걷고 싶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당신이 걷는 길을 통해 내 길을 가고 싶은 것일 게다. 누구든 같이 걸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길은 따로 있다. 삶 길 속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언제든 따로 걷거나 반대로 걸을 수 있다. 또는 지금껏 당신이 걷는 길이 좋아 보였지만 더 좋은 길을 가는 사람을 보고 그를 따라가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좋은 참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걷는 길에 올라타며 사는가. 그도 아니면 외길 인생인가. 길 위에 내동댕이쳐져 이리저리 뒹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길은 알기는 알고 있는가. 혹 가고 싶은 길도 없는 것은 아닌가. 어디에 서있는지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새 길은 닦기 힘들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남들이 갔던 길 따라감은 창피한가? “난 소중하니까! 난 나야! 난 특별해! 난 내 길이 있고 꿈이 있어. 난 내가 걷는 길을 지금 후회하지 않아!” 발버둥치거나 힘겨워할 필요 없다. 무엇하러 새로운 길을 닦는가. 왜 특별한 길을 걸으려 애쓰는가. 남들 걷는 그 길이 다 그 길 같아서? 그건 그렇고, 당신과 똑같은 시공간에 살다 간 인간은 없다. 바로 당신이 사는 지금, 이 순간 이 길이 새 길이다. 초침을 보라. 매 초 당신은 새로운 삶 길을 걷고 있다.어느 누구도 당신과 같은 삶 길을 같이 걸어 온 이는 없다. 내가 숨 쉬는 찰라가 늘 내가 가고 있는 새 길이며 특별한 내 길이다. 왜 자연스레 새로 만들며 걷는 이 길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가. 내 삶은 나 말고 그 누구도 살아 본적 없음에 기뻐할 줄 알자. 그 짜릿한 고통과 눈물 나던 행복을 참 아는 사람 나뿐임에 벅차지 않은가? 내가 걸어 온 길은 나뿐이었고 걷는 지금도 나뿐이다. 다 속았어도 내가 했던 거짓말을 아는 것도 나뿐이다. 가는 길에 도반이 있어도 발이 네 개임을 잊지 말자. 그건 그렇고, 걸음을 멈추게 되고 더 이상 걷지 못할 때 나 외의 길도 사라진다. 그것이 유아독존이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내 길이며 그 길을 ‘참 나가 걸음’을 알면 유아독존이다. 그래야만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단어를 ‘남’으로 받지 말자. 유아독존을 보편적인 불교 경전해석에서 떠나 보자.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 내가 없으면 부모도 없는 것이고 부모가 없으면 나도 없다. 이 세상에 나는 나뿐이다. 그걸 알아야 ‘너’가 보이는 게다. 내가 걷는 내 삶 길도 나 홀로 걷는 것이지 잘난 과학이 나를 복제한들 같이 걷겠나? 우리는 숨 쉬고 있는 지금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너무 많은 걸음을 쉰다. 내가 걷는 이 길을 ‘참 나가 걸음’을 알기에도 벅차다. 그건 그렇고, 주변 노동하는 동료에게 물으니 “먹고사느라 하지 누가 이런 일 하고 싶어 하겠어요?”란다. 이 말은 잘 걷고 있는데도 모르거나 저 길을 걷기 싫어하는 말이 된다. 그럼 왜 걷나? 어쨌든 지금 걷고 있는 삶 길이 싫은 게다. 좋은 길만 갔던 인간 오라해보라. 한 놈도 없다. 지금 기쁘지 않으니 오늘도 이달도, 올해도 억지로 걷는 게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걸어가야 하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진실로 나는 기뻐 까무러치고 있나? 허허 참. 아 지금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건 그렇고, 나는 잘 걷고 있다. 교만하다. 의뭉스럽게 잘 산다. 그렇게 믿고 내 길을 가는 게 삶 길이다. 혹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홀대말자. 내 길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혹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홀대하자. 내 길이 곧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혹 걷다가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내 길을 가자. 대신 그의 길도 축복해주자. 혹 걷다가 쓰러진 사람을 만나면 돕자. 나도 쓰러질 수 있으니. 누구나 걷다가 반드시 길이 막힌다. 지혜의 눈을 닦으면 보인다. 걷는 건 다리요 보는 건 눈이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내 지혜가 닦는다. 나는 지혜그릇이 넓지 않아 힘들게 힘들게 봐야 보이는 삶 길이다. 그건 그렇고, 얼마나 좋은 길을 걷고 있는가는 나밖에 모른다. 내가 가는 길에 대해 누구든 말할 수 있어도 저울질은 못한다. 제 길도 평하기 버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바르게 걸어 마음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람을 나는 봤다. 찾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보이는데 보는 눈을 내가 못가진 것이다. 타인의 삶 길은 내 삶 길을 어떻게 걷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내가 행복하면 모든 것이 예뻐 보이듯 내가 우울하면 모든 것이 밉다. 삶 길이 좀 험할 뿐 숨 쉬니 걸어야 하고 걷다보면 시야가 트인다. 죽음이 나를 맞지 않아 내겐 삶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높낮이는 없다.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무한한 트랙이다. 어떻게 뛰고 어떻게 걷느냐는 내 몫이지 남을 노려보지 말라. 금매달 따서 마음이 호화로운자와 떨어져 걷자. 시상식은 어느 날 어느 때 각자 열리며 홀로 맞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취한다. 많이도 마셨다. 잘란다. 아~ 이노래 좋다. "하얀 나비". 그런데 조관우가 부른다. 그래서 더 좋다. 살아 있어야 이렇게 행복하다. 부귀공명이 이 노래 한자락과 막걸리에 비하겠는가. 그건 그렇고 : 2011.07.17. 22:26 風磬 윤영환.
風文  Aug 05 2022
70억 “7,002,885,627” 2011년 11월 15일 00:03분 쯤 세계 인구다. 70억이든 999억이든 각자 산다. 그건 그렇고, 뛰어난 화가에게 어제 봤던 붉은 노을 그려 달라고 부탁해봐야 내가 봤던 붉은 노을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에 존재하는 카메라 중 가장 비싼 카메라로 찍어봐야 어제 본 내 붉은 노을은 찍지 못한다. 그 카메라를 내가 직접 들고 찍어도 내가 본 순간은 찍지 못한다. 그 노을은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 노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각정보가 뇌로 오는 시간과 셔터를 누른 후 영상이 입력되는 시간은 각각 존재한다. 참으로 내가 본 붉은 노을은 내 눈 말고는 입력이 불가능하고 훗날 아무리 자세히 말해도 재현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찍힌 노을은 정말 그 시간에 찍힌 걸까? 셔터가 신호를 보내고 렌즈가 영상을 담는 찰나의 노력은 인간과학으론 참 볼만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나노기술이 카메라에 적용 되어도 그때 그 장면을 인간이 촬영하는 건 불가능 하다.그렇다면 동영상은 어떤가? 더욱 불가능하다. 프레임의 원리 때문이다. 자연을 고스란히 담는 카메라는 지구엔 존재하지 않는다. 초고속카메라라면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역시불가능하다. 그건 그렇고, 10억 명이 붉은 노을을 같이 봤다면 그들이 바라본 붉은 노을이 10억 명 모두 일치할까? 아니, 본 그대로 표현은 가능할까? “인간은 언어로 자연을 표현할 수 없다.” ‘늘 푸른 소나무’라는 말은 이해하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다르다. 10억 명이 한그루의 소나무를 똑같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 소나무 한그루를 본 사람이 A4용지 수 만 장 또는 그 이상으로 글로 표현해도 읽는 이는 글쓴이와 공감할 수 있겠나? 눈과 흡사하게 사물을 보는 카메라는 있어도 눈과 똑같이 보는 카메라는 지구엔 없다. 70억 명이든 999억 명이든 모두 다르게 자연을 보고 산다. 짜릿하지 않나? 그건 그렇고, 나와 당신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곯아가고 있다. 너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다르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만족하는 방송, 언론, 단체, 개인이 득실득실하다. 70억 명이 사상이 같으면 동물이지 인간인가. 대한민국인구는 이미 5천만 명이 넘었다. 5천만의 생각을 존중 없이 자기의 뜻을 기준으로 잡으려고만 하고 내 뜻과 반대라는 이유로 남을 죽이는 인간은 스스로 죽어야 마땅하다. 내가 바라지 않아도 늘 역사는 그런 인간의 파멸을 철저히 기록해왔다. 그건 그렇고, 아름다운 길은 뭔가? 행복이 다다. 정치하는 인간들의 눈이 외눈이면 힘든 사람들은 정치를 하지 않는 국민들뿐이다. 왜냐면 정치하는 자들은 노후가 보장되어 남이 욕을 하든 말든 편히 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이 정치판을 흔들고 있고 윗놈이 민본을 세우지 않아도 아래서 민본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격정기다. 언젠가 힘들게 사는 퇴역 국회의원이 TV에 나온 때가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국회의원들의 연금을 올린 사실로 여론이 들끓었다. 불쌍하게 사는 늙은 전직 국회의원을 보여 준 방송분인데 구역질이 났다. 나보다 잘살았다. 나의 서너 배는 더 잘살았다. 저 정도로 노후를 살면 나는 원이 없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전직 국회의원의 김치와 한두 가지뿐인 반찬? 참으로 웃기지 않나? 나는 그 방송 볼 때 쌀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난 지금 배는 곯지 않는다. 그럼 배 채우고 남은 건 어떻게 하지? 70억 명 중 배를 못 채운 사람에게 주면 된다. 더 좁은 우리 안에서 나누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동네에서 나누면 된다. 모두 나누는 일은 어렵다. 당장 내가 또 고프니까. 굶는 사람보다 굶지 않는 사람이 더 많으니 굶지 않는 사람들이 조금 덜어 모으면 된다. 이를 실천 하고 있는가가 우리들이 앞으로 고민할 ‘삶일’이다. 당신은 실천하고 있는가가 나의 물음이며 나는 실천하고 있는가가 내 양심의 물음이다. 답은 천편일률일 것이다. 단, 文章의 패와 패가 나뉠 뿐이지 70억 개의 문장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누구나 자신을 상심케 한 사람 또는 얼마 전 나를 슬프게 한 사람, 정을 주거나 믿었는데 떠나거나 배신한 사람을 떠올려보면 답답할 게다. 그러나 장시간 철학해보면 그 서운함이나 배신감 그리고 슬픔은 나의 생각일 뿐임을 알게다. 그들은 나와 똑같이 아파하지 못한다. “절대로”. 70억 명이 70억 개의 감정을 갖고 살고 있다는 걸 모르면 70억 개의 슬픔이 한 번에 내게 밀려온다. 그러나 긍정의 힘은 70억 명을 동시에 웃길 수 있다. 슬픔, 괴로움, 억울함처럼 아픈 감정은 70억 명이 공감 못하지만 평화, 사랑, 미소, 즐거움, 행복, 아늑함, 만족처럼 본능이 원하는 행복을 향한 감정은 70억 명이 충분히 공감가능하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내가 줄 때만 가능하다.”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해본다. 흔히들 좋은 언행보다 나쁜 언행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다.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70억 명 모두가 슬픔을 전달하는 것보다 70억 명 모두가 미소를 전달하는 일이 더 빠름을 확신한다. 미소는 슬픔을 씹어 먹는다. 살면서 울다가 웃는 경우는 있는데 웃다가 우는 경우는 거의 없음을 인정하자. 이를 구비문학적으로 말해보면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이 난데요!”라는 아이들의 음률이 있으나 반대로 웃다가 울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 이야기는 없다. 미소는 울음을 멈추게 하며 반드시 2인 이상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한다. 뭐 요즘은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울다가 웃는 사람들도 많다지만 그래도 미소는 눈물을 이긴다고 믿는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70억 명이 동시에 웃는 일은 가능한가? 불가능할까? 우는 사람들에게 미소와 희망을 줘야하는 책임이 있기에 늘 우는 사람은 존재해야만 한다? 맞는 말이다. 반드시 우는 사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존재해야만 한다. 영육으로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고 평화롭다면 나눔이란 단어도 평화라는 단어도 의미가 없다. “인간은 울고 웃는 감정의 동물이다?” <- 울거나 웃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가? 그 중간은 뉴스에는 없는 겐가? 낡은 문장 같아 보인다.늘 우는 사람은 드물어도 늘 웃는 사람은 있다. 병신이 그렇다.(내가 존경하는 병신도 있다.) 정신병자만 늘 웃는다. 무표정, 고심의 얼굴, 괴로움의 얼굴, 뭔가를 선택하기 전의 얼굴 등은 문학이 그리는 얼굴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늘 웃는 사람은 정말 즐거워 웃나?’라는 의문이 이는 것이다. 인류(인간이 지어낸 문자지만)가 생긴 이래 감정을 느끼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했던 시절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슬펐을까? 슬펐다고 가정은 하지만 그들이 슬펐는지는 2011년 지금 누구도 모른다. 오로지 상상이다. 과학의 한계라고 믿었지만 그 직립보행인들이 만든 조상의 무덤이 나타면서, 슬픔은 인류가 아닌 동물까지 느껴왔음이 증명 됐다. 시간나면 정시뉴스를 보라. 전파가 생긴 이후로 우는 사람은 매일 보지 않나? 우는 뉴스는 특종이라고 우대를 받아 살인이나 학살을 보도한 기자는 상을 받는다. 그러나 웃고 행복한 사람들을 보도하는 기자는 개털이다. 사고가 나서 울고, 통곡에 합동장례식에……. 늘 지겹도록 죽어나간다. 왜 죽이고 죽는 일들이 방송분량에 더 많이 등장하는지 참 거시기 하다. [승합차가 골짜기에서 뒤집어져 탑승자가 죽은 걸 400Km이상 떨어진 성도 이름도 모르는 내가 왜 알아야 하나? 내가 그들의 죽음을 알아서 무엇에 쓸 겐가? 울산 공장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 8명이 죽었고 몇 명이 중태라는 사실을 왜 안산에 사는 내가 알아야 하나. 한마디 더할까? 내 아버지 죽은 건 왜 방송 안하니? 썩은 미디어에 중독된 썩어가는 뇌들. 미디어의 구분이 힘든 뇌들. 소소한 죽음까지 전 국민이 왜 알아야하나. 남들은 안 죽는데 그들만 죽었나?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도울 수 있거나 공감이 갈만한 죽음은 없다.] 그건 그렇고, 윗글들이 어떤가? 우는 사람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 되는 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오는 날, 당신도 삶의 청사진은 전면 재설계로 들어설 게다. 2011년 지금도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통계가 나오잖나. 동병상련과는 거리가 멀다. 참으로 싫어하는 단어가 이 시대에 쓰는 동병상련이다. 나는 그들과 같이 병을 앓고 있지도 않고 같은 상황도 아니고 같은 성도 아니고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로 바꿔 생각해 “서로 다르지만 서로 위하는 일”로 바뀌어야 한다. 동병상련은 유래와 달리 퍼졌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이야기지 2011년에 쓸 말은 아니다. ‘오자서’가 오면 좀 물으련다. 몰려들라나? 자야것다. 그건그렇고 : 2011.11.15. 00:03 윤영환
風文  Aug 05 2022
즐김 내일이 걱정되는 오늘이 있다. 우려하던 일은 내일 벌어지지만 그래도 내일 하루가 우울할지 아니면 무사히 넘어갈지 걱정이 되는 오늘이 있다. 그렇게 걱정되는 내일의 일을 오늘 해결해 두면 좋겠지만 인간이 하는 그 생각 그대로 오는 내일도 없고 내일을 오늘 살 수도 없다. 1초 후 당신의 집이 무너질 수도 있다. 갑자기 집이 무너지는 일은 지구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오늘을 잘 살면 된다. 무너졌어도 오늘을 잘 살아야한다. 내일을 걱정하는 건 오늘을 버리는 일이다. 왜 오지도 않는 내일 때문에 하루를 십년으로 살면서 폭삭 늙으려하는가.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내일 때문에 오늘을 버리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본다. 지금을 잘 살자. 오늘 근심으로 내일 잘사는 사람 없다. 내일은 내일을 사는 내일 속에 있을 나에게 맡기자. 원하는 미래를 꿈꾸는 건 오늘이고 내일은 곧 오늘이 된다. 오늘 할 수 있는 건 ‘꿈그림’뿐이다. 매일 쓰고 지우는 것이 ‘삶之道’다. 그건 그렇고, 어제가 걱정되는 오늘이 있다. 보통 ‘후회’한다고 말들 한다. 지난일이 걱정되면 오늘 마음 편하도록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후회감이 드는 즉시 해결해야 가장 좋다. 앞만 보고 달리는 초침은 되돌릴 수 없다. 어제 미안했으면 오늘 사과하면 되고 어제 못한 일은 오늘 하면 된다. 왜 지난 잘못을 걱정하고 후회하며 소중한 지금을 버리나. 그렇다고 교만하란 말은 아니다. 잘못된 과거가 있으면 하늘 보며 가슴 활짝 피고 웃을 만큼 충분히 성찰하고 오늘을 잘 살면 된다. 과거가 오늘을 살면 삶 길은 우울하다. 과거라는 사슬을 스스로 만들고 내손으로 족쇄를 채우며 오늘을 살던 내가 변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기차를 타고 창밖풍경에 젖어있는데 갑자기 기차가 천천히 달리며 선다. 정거장이다. 인연을 태우고 인연이 내리는 곳. 달리고 달리다가 언제 그리고 어떤 곳에 서는지 이미 알고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기차가 얼마나 정거장에 머무는지 안내 방송도 해준다. 그러나 삶 길은 다르다. 삶 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나를 떠났고 나를 만났던가. 내리지 말라고 붙잡기도, 내 삶 길 위로 올라서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인연들은 정해지지도 미리 알고 있지도 않은 채 내게로 왔었다. 삶 길은 안내책자나 안내방송이 없다. 설레는 길이 삶 길 아닌가? 그건 그렇고, 인연이라고 말하기도 싫은 악연을 본다. 아니면 개념이 안드로메다에 가있는 무식자도 본다. 하지만 존경할 만한 어른도 본다. 그 분의 삶 길 동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걸어도 본다. 여기서 삶의 철학 일부를 보자. 사실 내 삶 길 안에 그 분이 계시는 것이지 내 삶 길을 포기하고 남의 삶 길로 뛰어 드는 일은 아니다. 스승은 내 삶 길의 지배자가 아니라 내 삶 길 속에 있는 길라잡이일 뿐이다. 그 누구도 내 삶 길을 휘젓지 못한다. 다만 참고할 뿐이다. ‘삶철학자’는 당신인 동시에 나다. 당신과 나의 철학이 손잡고 공존하는 것을 나는 ‘같이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와 같이 내 삶 길을 같이 갈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나는 요즘 묘한 느낌을 받는다. 나와 다르면 같이 못 걷나? 왜 같이 걸을 수 없나? 도가 통하지 않으면 참으로 모를 일이다. 내 삶 길에 들어서서 답이 않나오는 사람을 만난다면 내 삶 길은 내가 주인이니 무사통과시키는 것이 좋다. 그를 설득하려 애쓰지 말자. 그 사람 때문에 신경 쓰고 설득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실행하고 매달리는 짓은 정말 중요한 나만의 오늘을 말아먹는 날이 된다. 그건 그렇고, 삶 길은 육신의 욕망이 좌우지한다. 먹고 싶은 것들 사고 싶은 것들……. 싸잡아서 말하면 하고 싶은 것들이 대부분 육신이 원하는 것들이다. 정신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야 좋다. 그러려면 배운 대로 닦은 대로 맑고 밝은 길을 보며 진보를 추구해야한다. 현실보다 더 나은,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을 꿈꾸는 정신의 욕망이 육신의 욕망을 누를 줄 알아야한다. 우린 정신보다 육신을 위해 재물을 훨씬 많이 소비한다. 내 주변에도 널렸다. 어디에선가 마음을 줄 때 육신을 위한 것인가 정신을 위한 것인가 생각해보고 매월 정산할 때 마음을 위해 소비한 돈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기 두드려보면 반성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비가 줄고 재물이 쌓인다. 수도修道는 마음을 평화로 적시며 돈 따위도 필요 없고 이득은 셈을 불허한다. 그건 그렇고, - 바빠. - 짬이 않나. - 글쎄...... 피곤해서. - 요즘 그럴 시간이...... 예전 중학교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은 금이다.” 그런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두 문장을 삼삼히 생각했었다. 시간에 대해 감상은 해도 조바심은 없이 살았다. 그러나 ‘짬’의 개념이 생겼다. 짬나는 대로 나는 뭔가를 한다. 그 뭔가는 먼 산을 바라보며 입을 해~ 하고 벌리고 있든, 독서든, 공부든, 꽃구경이든, 술을 마시며 문학을 씹어대든 뭐든 짬나면 한다는 뜻이다. 당신이나 나나 같다. 쉬는 것도 쉰다는 의미 안에서 뭔가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잠들지 않는 한 무엇이든지 짬나는 대로한다. 들꽃을 뚫어져라 바라본다든지, 바람이 흙먼지를 이용한, 마치 뒤집힌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행위예술을 본다든지, 폐공장터 장작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첫 외출을 시작한 새끼고양이를 본다든지, ‘알을 깼나?’ 하고 회사 지붕에 튼 참새둥지를 본다든지, 시멘트사이로 나온 잡초에 물을 준다든지……. 흔히 ‘멍 때리는 짓’을 실제 멍 때리면 시체다. ‘멍 때리는 짓’처럼 보이지만 머리가 꿈을 꾸면 살아있는 것이다. 육감이 뇌로 침착하게 세세히 전달되면 삶 길 잘 걷고 있는 게다. 미소를 동반하면 기가 막히게 잘 걷는 것이다. 바쁘고, 시간 없고, 피곤하고……. 험한 일을 해도 짬은 내고 산다. 적어도 개망초 노란 술을 눈으로 접사할 시간은 있다. ‘짬’없는 바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지 않아서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짬’을 억지로 내는 경우다. 의무적으로 아니면 자기압박감으로 나를 진보시키기 위해 쫓기듯 ‘짬’을 내면 결과는 심신의 허약뿐이다. ‘짬’에는 반드시 ‘즐김’이 있어야 한다. 모든 창작과 밥벌이 그리고 휴식은 ‘즐김’을 동반해야 심신이 건강하다. 즐김은 만족과 동의어다. 세속적인 말을 쓰자면 죽도록 일해 돈 벌어 만족하지 말고 즐겁게 일해서 돈 벌어 만족할 줄 알아야한다. 즐기지도 못하고 죽도록 일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즐김이 없는 짬은 영과 육 단명으로 간다. 창작의 고통? 창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에 왜 고통을 덧대어 창작을 죽이는가. 나는 왜 창작을 고통 안에서 말아먹고 있었고 왜 즐기지 못했었는지 성찰해본다. 부끄럽다. 그건 그렇고, 오늘 잘 자야 내일이 좋다. 오늘을 잘 살아야 잘 잔다. 죄를 짓거나 언행으로 남에게 해를 끼쳤거나 내 양심이 오늘을 못살았다 선고하면 잠이 잘 안 온다. 오므라들어 곤하다. 도둑놈이 제 발 저리다고 하지 않던가. 늘 오늘을 잘 살아야 잠도 잘 오고 내일도 좋게 온다. 잠들기 전에만 오늘 잘 살았는지 살피지 말고 때때로 살펴야 잘 때 좋다. 그래야 잠들기 전 살필 성찰이 적다. 결코 피곤한 삶 길이 아니다. 딱 하나다. 오늘을 참으로 살면 된다. 우울하거나 기분 나쁜 날이 거의 없다. 참살이는 웃음이고 즐김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되도록 웃고 살려한다고 하고 웃음을 되찾는다고들 하는데 웃음이 늘 내 주변에 있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옆에 있는데 못보고 울고 산 게다. 그렇다고 울적함, 고독, 외로움을 어둡게만 보지말자. 예술 속에선 ‘즐김’이다. 역시나 웃음도 즐김이고 일도 즐김 안에 있어야한다. 그건 그렇고, 다시 보자. 나는 웃는가를. 웃고 살고 있는가를. 웃고 살았는가를. 웃으며 살 것인가를. 준비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다. 웃을 준비! 앞을 미리보고 계획하고 웃을 준비가 없어 우는 게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나처럼 세상 무너져도 하던 짓하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나는 언제든 웃을 준비가 돼있다.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늘 웃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자. 나는 왜 우울한지 생각 말고 저 사람은 형편도 어렵고 힘들 텐데 왜 늘 웃는가를 묻자. 홀로 웃으면 서럽다. 같이 웃자. 사람들과 같이 웃는 것이 배나 즐겁다. 마음이 웃어야 얼굴이 웃는다. 그건그렇고 : 2011.11.17. 23:52 윤영환
風文  Aug 04 2022
마음만 급해 분리수거 그물에 꽃꽂이 하듯 잘 꽂아진 막걸리 빈병이 한 이십여 개가 부엌문 앞 작은 골목에 있는데 며칠째 어떤 우라질 놈이 저걸 차고 가는 거요. 골목이래야 막다른 골목이고 대여섯 걸음이면 끝나는 골목인데 어떤 놈이 저걸 걷어차는지 궁금해 죽것더란 말요. 소리가 안 나는 걸 보면 은밀한 짓거리 같기도 하고 이웃들은 다들 좋은 분들이니 아닐 것이고 이틀째 골목에 널브러진 빈병 주워 담자니 울화통이 치미는 거요. 잠복을 해, 말어. 하다가 부스럭 소리를 듣고 잽싸고 조용하게 부엌문을 빵끗 열고 범인을 봤는디 고양이더란 말요. 뭐 어쩌것수. 근데 고양이가 막걸리를 좋아하나? 그건 그렇고... 회사를 예로 새로운 사업계획이나 업무가 기획되면 분위기가 싱숭생숭합니다. 갑자기 서류들이 밀려들고, 없던 서류양식들도 만들어야 하고, 신규업무를 담당할 사원들도 면접을 봐야 하고, 여러모로 뭔가 활력이 돋는 분위기 속에 허둥지둥하는 일이 생깁니다. 상부에서 지시는 떨어졌는데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오는 경우죠. 예전 상사였던 노부장님이 계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죠. 리스트를 만들고 가장 급히 처리해야 할 것들을 엄선해서 등급과 날짜를 기입하라 하셨죠. 1등급은 급히 서둘러야 하고 낮은 등급일수록 천천히 해도 되는 일들로 나누었고, 내 일정에 맞춰 업무종료 예정일을 써넣고 하나씩 처리하니 일사천리더란 말요. 살아가며 집을 장만하고 이사를 할 때나, 경조사가 벌어지거나, 뜬금 없는 소식에 내가 뭘 해야 할지 허둥댈 때도 차분히 넓게 보며 하나씩 행동에 옮기면 인상 쓸 일이나 예절머리 없다는 소리는 없을 겝니다. 요즘 이래저래 묶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분류와 가짓수가 많아 자잘한 노동의 연속입니다. 몽땅 쓰레기통에 넣어버릴 수도 없고 시간은 오래 걸릴 듯하고... 쪽지도 사방팔방 책만 펼치면, 가방만 열면, 주머니만 뒤지면 곳곳에서 튀어 나오고, 포스트잇이랑 뒤엉켜 있는 지저분한 것들도 있고 개판이더란 말요. 평상시에 얼마나 정리하는 버릇이 없었으면 이지경이냔 말요. 건망증을 스스로 키우는 모습을 나를 통해 보게 되더란 거요. 그러나 깨달았으면 고치면 되는 거요. 급하게 고치면 부작용이 있으니 차근차근 고치면 되는 거요. 그건 그렇고... 요즘 잠을 설칩니다. 콜록거림도 잦고. 자다가 깨서는 두리번거리다 병든 달구새끼 마냥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드러눕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또 일어나고... 그러니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질 않아요. 잘 자는 것도 복이요. 신경 쓸 일은 많고 마음만 급해서 그러려니 하는 게죠. 혼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념 속에 그 소리와 그 냄새 그 푸름을 느끼고 싶은 지금이요. 그리움 나는 무엇을 그리워 하는가 어설픈 해변의 정취가 아닌 정작 보고 싶은 것은 나 아닌가 본다면 보고 난다면 어쩌겠는가 답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답을 구하려는 어리석은 그리움 아니던가 아니, 이미 그 그리움의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사무친다는 거짓부렁을 되씹지 어쩌겠는가 그립다는데. 2008.01.29 20:02 風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