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처럼 입원하면 되잖아요」(시인 유홍준) 2009년 7월 16일 정신병원 보호사 L씨는 시인이다. 그러나 제도권 안에서 공부를 많이 못한 까닭에 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산판일, 바느질, 밀링공, 과일행상, 갖가지 막노동, 이것저것 안해 본 게 없다. 심지어 남의 집 벼논이나 고추밭에 농약을 쳐 주고 얼마를 받는 일까지… 먹고사는 문제는 늘 문학 위에 있어서 그를 짓누르고 깔아뭉개고 너덜너덜 만신창이로 만들곤 했다. 이번에 구조조정으로 제지공장에서 잘린 L씨는 또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아는 사람의 소개로 정신병원 보호사 일을 하게 되었다. 환자들의 수발을 들어 주어야 하고 간호사들의 잔심부름을 해야 하는 말단직 중의 말단직이었다. 하지만 L씨는 즐거워했다. 고작 백만 원이 조금 넘는 보수에다 일요일도 없는 3교대 근무지만 나름 즐거움도 있었다. 특히나 L씨는 시인이므로 정신병자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L씨는 어떤 보호사보다도 그들을 잘 이해하고 어울려 놀았다. 정신병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 그게 시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L씨는 한때 모종의 일로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 정작 본인도 정신과를 찾아간 전력이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병원 측에 밝히진 않았지만 말이다. L씨는 병원 몰래 정신병동 이야기를 살짝살짝 비틀어 시로 쓰곤 했다. 나름 재미가 있었다. 자신의 삶이 늘 힘들고 고되지만 그래도 견디고 지탱하는 힘,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던 것이다. 문학의 눈으로 보면 조울증 환자의 조증도, 정신분열증 환자의 앞뒤가 잘 안 맞는 횡설수설도 얼마나 재밌고 신기한 일인가. 얼마 전의 일이었다. A동(棟)으로 라운딩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정수기 앞쯤에서 경석이란 놈이 불렀다. “보호사님!” “왜 임마!” L씨는 자기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경석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경석이는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입원한 친구. 더듬더듬 읽기는 하지만 쓰기는 잘 못하는 친구였다. 씨익~ 웃음을 쪼개 문 경석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덜 떨어진 경석이의 눈에도 L씨의 처지가 힘들고 고돼 보였을까. “그런데요, 있잖아요, 보호사 그만두세요.” “왜에?” “있잖아요, 보호사 그만두고요, 우리처럼 입원하면 되잖아요.” “이새끼가 콱!” 순간 L씨는 뜨끔했다. 경석이의 말뜻은 딴데 있었지만 한때 우울증을 앓았던 자신의 전력이 떠올라 퍼뜩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뒷짐을 지고 지나가던 오인술 씨가 경석이에게 주먹총을 놓으며 한술 더 떴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보호사가 입원을 하면 딴데를 하지 여기를 하겠냐. 이 멍청한 놈아, 히히히~ 히히히히~ ^ ^*” ■ 필자 소개 유홍준(시인) 196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1998년 《시와반시》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상가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가 있다.
「비명 소리」(시인 길상호) 2009년 7월 15일 대청호 가까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분이 있어 함께 꽃차의 재료로 쓸 인동꽃을 따기 위해 나선 적이 있다. 깨끗한 꽃을 찾아 우리는 숲 깊숙이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 보는 길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선택한 길은 꽃들이 많은 깊은 숲 속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중간중간 차를 세워놓고 꽃을 따는 재미도 좋았지만 도시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즐거운 아침이었다. 한참을 들어가니 시멘트 포장이 끝나고 울퉁불퉁 좁은 비포장길이 이어졌다. 말을 탄 기분으로 그렇게 또 한참을 들어갔는데, 그 깊은 숲 안에 예상치도 못한 넓은 공터가 보였다. 커다란 메타세쿼이아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게 커다란 건물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곳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공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싱싱하고 깨끗한 질경이들이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공간에 닿은 사람처럼 탄성을 지르면서 우리는 질경이를 뜯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준비해 간 비닐봉지들은 질경이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공터 옆으로 내리막길이 있어 내려가 보니 거기는 더 환상이었다. 그곳은 대청호 물가로 주변에는 메꽃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짐들을 한쪽에 풀어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숫가에서 거닐다 카페 열 시간이 되어 짐도 많으니까 사장님이 차를 가져오기로 하고 나는 그곳에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차 문을 닫고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또 있구나, 생각하면서 호숫가에 앉아 있는데 조금 지나자 여자의 비명 소리, 차 있는 곳에 사장님이 도착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겠지 했는데 그 소리는 조금씩 더 날카롭게, 선명하게 들려 왔다. 좋지 않은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쳐갔다. 방금 전에 들었던 차 문 닫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기까지의 시간 차와, 아침 시간 이 깊은 곳에 누가 들어올 것인가 하는 여러 정황이 끔찍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공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별 생각이 다 교차했다. 이러다 나까지 당하면 어쩌나,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할까, 그래도 나를 공터 쪽으로 뛰게 하는 건 손에 쥐고 있던 과도였다. 질경이를 뜯을 때 사용했던 과도가 나의 비겁한 마음을 간신히 꺾고 있었다. 공터에 거의 닿았을 때 차를 보니 다행히 그 안에는 사장님이 타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나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동을 거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봉고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인상이 좋지 않은 사내 둘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도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려 왔다. 공터 위쪽 숲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내가 차에 올라타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고, 이 비명 소리 안 들리느냐고, 저 사람들 수상하다고 다그치자 사장님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차를 몰았다. 호숫가에 두고 온 질경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가게까지 돌아오는 내내 둘은 봉고차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며 소름이 돋아 있었다. 며칠이 지나 안개가 짙은 아침, 사진을 찍기 위에 나는 카페에서 가까운 호숫가로 내려가 보았다. 멀리 그 공터가 있는 숲의 입구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마을과 가까워 그리 두려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 안개에 갇힌 호수의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그때 들려 오던 비명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발길을 돌려 마을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상했다. 이제는 머리 위 하늘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 사이로 새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동네 어르신께 여쭤 보니 그 비명의 주인공은 왜가리라 하였다. 긴 목을 다 긁고 나와서 그런지 꼭 사람 비명처럼 들린다고. 아, 두고 온 한 무더기의 질경이가 너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 필자 소개 길상호(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모르는 척』이 있다. 현대시 동인상과 이육사문학상 신인상, 천상병 시상을 수상했다.
「쌍둥이로 사는 일」(시인 길상호) 2009년 7월 14일 초등학교 시절 쌍둥이로 자란 우리 형제는 학교에서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얼굴이 똑같이 닮은 우리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같은 얼굴에, 늘 같은 옷을 입고 함께 다니니 그럴 만도 했다. 같은 학년에 여자 쌍둥이 한 쌍이 더 있었지만 그 친구들은 이란성이라 우리만큼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그렇게 구별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 형제는 늘 다른 반에 배치되기도 했다. 보통은 시험 성적에 의해 반이 나뉘었지만 우리는 늘 예외였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주변의 쌍둥이에 대한 관심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후배 중에 또 다른 한 쌍의 일란성 쌍둥이가 들어오면서 쌍둥이에 대한 신비감(?)도 반감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 말고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 쌍둥이들끼리 더 신기해했다. 관심은 줄어들었지만 쌍둥이를 같은 반에 배치하지 않는다는 학교 원칙은 중학교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방과 후 청소 시간의 일이다. 종례가 늦어져 우리 반만 늦게까지 청소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복도 청소를 맡은 나는 열심히 바닥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한 시간 간격이었기 때문에 앞 시간의 버스를 타려면 빨리 끝내야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긴 막대 하나를 들고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평소 인자하시기로 소문난 분인데 그 날의 얼굴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어떤 놈인지 오늘 크게 걸렸구나. 그나저나 단체기합 받게 되면 안 되는데.'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하던 청소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발소리는 내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드는 순간 선생님은 내 귀를 사정없이 잡아당기시더니 당장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하셨다. 하루 일과를 천천히 떠올려 봐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내가 끌려가자 친구들도 다들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날따라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임 선생님은 교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종아리를 걷으라 하시더니 들고 있던 막대로 매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종아리가 붉어지도록 매를 맞았다. 막대를 내려놓은 선생님께서는 그때서야 입을 여셨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행동해야지. 어디 담임 선생님한테 대들어! 그렇지 않아도 너희 선생님 이제 갓 오셔서 적응하기도 힘드실 텐데." "선생님, 전 그 반 아닌데요. 동생하고 착각하셨던 모양인데요." 그럼 그렇지! 나는 그때서야 선생님의 화난 이유를 알아차렸다. 전날 동생이 선생님과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굉장히 난감한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그리고 집에 가서 동생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라고 이르시고는 나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그것으로 사건이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쉬는 시간 복도에서 마주친 주임 선생님은 내 머리를 툭 치면서 화를 내셨다. "어제 네놈 때문에 형 맞은 거 알아?" 아, 닮은 것도 죄라면 어쩌겠는가? 나는 선생님께 조용히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제가 어제 맞았던 그놈인데요." 선생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억울한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피식, 웃음만 났다. ■ 필자 소개 길상호(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모르는 척』이 있다. 현대시 동인상과 이육사문학상 신인상, 천상병 시상을 수상했다.
「추어탕의 맛」(시인 조용미) 2009년 7월 13일 아버지는 추어탕을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다녀와 마당의 넓적한 다라에 빽빽하게 담겨 꼬리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미끈미끈한 미꾸라지들을 보게 되는 날이면 그 날 저녁은 밥상에 추어탕이 올라왔다. 그 날은 대개 외할머니나 삼촌, 고모가 오는 날과 겹쳤다. 추어탕은 뭔가 특별한 날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직접 끓여 주시는 추어탕을 먹는 일은 우리 가족이 지방의 도시에 살던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였고, 서울로 오게 되면서 추어탕을 밥상에서 만나게 되는 일은 사라졌다. 대신 친구의 집에 가서 무가 떠 있는 맑은 닭국과 밀가루 수제비가 들어간 이상한 서울식 매운탕을 처음 맛보았다. 음식에 대한 기호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맛이 아닌 기억에 의해 좌우되는 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다, 기억이 먼저고 맛이 다음이다. 맛은 기억을 당해 낼 수 없다. 어릴 때 추어탕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어릴 때는 싫어했던 청국장이며 비지찌개, 그리고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매운 청양고추가 듬뿍 들어간 부추전 같은 음식을 찾게 되었다. 모두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것들이다. 내 혀와 코와 눈에 각인된 추어탕의 맛은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 되살아난 것 같다. 아버지를 모시고 여기저기 추어탕을 먹으러 다녔지만 제대로 된 경상도식 추어탕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음식점을 나설 때면 늘 옛 맛을 그리워하는 아쉬운 소리를 입에 담았다. 추어탕 맛에 대한 나의 까다로움은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였다. 그때부터 어지간히 이름 있는 추어탕집은 물론 허름한 식당도 추어탕이란 메뉴가 들어 있으면 다 가보게 되었다. 한때는 매콤하고 걸쭉한 맛이 나는 남원식 추어탕을 자주 먹기도 했다. 그러나 맛으로 정평이 나 있는 원주식 추어탕, 남원식 추어탕도 그저 좋은 정도일 뿐 내 입맛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그래서 경상도식 추어탕이 그리울 때면 고향에 들렀다가 추어탕을 먹기 위해 청도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 이건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해 주시던 바로 그 맛이야! 기억을 만난 것이다. 내 혀에 각인된 추억이 맛을 통해 확 살아나는 순간, 그때 우리는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몸이 많이 아파 밥을 차려먹기가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좋은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왠지 함께 먹어 보아야 할 것 같은, 어떤 이와 함께 먹으면 목이 메는, 그러나 들키지 않으려고 헛헛한 숟가락질을 하다 보면 한 그릇을 다 비우게 되는 음식. 이 정도면 추어탕 예찬이다. ■ 필자 소개 조용미(시인) 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