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1」(소설가 정영문) 2009년 6월 15일_서른네번째 사람을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구분지어 주는 것 중 하나가 웃음의 능력일 것이다. 다른 동물들이 웃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거나, 속으로 조용히 미소 짓지는 않는 것 같다. 동물들은 흡족한 나머지 기분좋은 소리를 내거나 꼬리를 치거나 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재미있는 경험을 할 때에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웃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소한 것에 대해서, 또 다른 때에는 엄청난 일 앞에서도, 또는 삶에 치를 떨면서도, 배가 아플 정도로 혹은 빙그레 혹은 하는 수 없이 웃기도 한다. 웃음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또는 경우에 따라 가장 멀리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람에게 너무도 익숙한 웃음은 사실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가령 웃음의 종류와 면모를 한번 보자. 너털웃음, 쓴웃음, 비웃음, 회심의 미소, 어이없는 웃음, 바보 같은 웃음, 히죽거림, 깔깔거림, 낄낄거림, 잔잔한 미소, 비굴한 웃음, 교활한 웃음, 누군가를 얕잡아 보거나 누군가가 고까울 때 짓는 웃음 등등,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 앞에 많은 형용어구를 거느릴 수 있는 웃음만큼 다양한 속성과 모습을 갖고 있는 인간의 감정도 없다. 웃음은 얼마든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발생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많은 웃음은 어떤 존재와 그가 처한 상황과의 불일치에서 솟아난다. 물론 웃음은 그 자체가 완전한 감정으로 기능하지도 않고, 감정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러 가지 감정들과 결합되며 복잡한 마음의 양상을 드러내고, 의식과 맞물려 사고작용을 구성하기도 한다. 또한 가장 복잡한 정서적 반응인 웃음은 다른 감정과 사고에 강한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가령 사람은 극심한 슬픔에 잠겨 있다가 웃을 수도, 근심이 극에 치닫는 순간에 웃을 수도 있으며, 그때의 웃음이 슬픔이나 근심을 변질시키거나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웃음은 가장 순수한 동시에 교활하기도 하고, 가장 경박한만큼 심오하기도 하며, 가장 천진한 한편 사악하기도 하다. 하지만 사악한 슬픔이나 경박한 공허나 교활한 고독은 생각하기 어렵다. 갓 태어난 아기의 웃음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일 테지만, 누군가를 학대하며 그것에서 쾌감을 얻는 자의 웃음은 더없이 사악한 것이다. 어쩌면 웃음이 이토록 쉽게 모습을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은 한번 빠지게 되면 그 상태에 한동안 처해 있을 수밖에 없는 공허와 권태 등에 비해 웃음 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기가 어렵기 때문일 수도, 웃음 자체가 스스로를 배반할 수도 있을 만큼 변덕스런 어떤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안면근육과 마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움직임인 웃음은 심리학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인류학적인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나는 유인원에서 결정적으로 인간으로 진화한 것은 인간이 웃게 되고, 자신의 웃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웃음은 철학적 주제이기도 하며, 그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와 베르그송 같은 많은 철학자들은 웃음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웃음을 둘러싼 문제 중 하나는 이 시대에 웃음이 과용되고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웃음은 이 시대의 지고한 가치가 되었다. 대중매체들은 사람들에게서 웃음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웃음의 전도사들이 웃음을 복음처럼 전파하고 있고, 웃길 줄 아는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회 전체가 웃어야 한다는, 그래야만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고통을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깊숙이 빠져 있는 것 같다. 공허와 권태와 고독과 수심과 슬픔과 불안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들은 되도록 회피해야 하는, 부정적인 것이 되었고, 그것들이 밀려난 자리에 웃음이 화려하게 군림하고 있다(나는 웃음이 자신이 몰아낸 감정들의 서글픈 모습을 내려다보며, 숨기지도 않고 징그럽게 웃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는데 그것은 어떤 점에서 이 시대의 자화상처럼 여겨진다). 한마디로, 웃음은 무조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미신처럼 만연해 있다. 그런데 과연 웃음이 단지 바람직한 것일 뿐일까? 물론 웃음은 어려운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커다란 힘을 갖고 있으며, 억압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하며, 심오한 슬픔만큼이나 마음을 정화시키고, 아름다운 뭔가를 경험할 때처럼 웃음의 대상에 동화시키기도 하며, 현재의 상황이 고통스러울수록 웃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웃음의 순기능만큼이나 그 역기능 또한 의외로 심각하다. 웃음은 그 생래적 특성상, 교활하게도 한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그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고, 생각을 덜 하게 하거나 포기하게 하며, 그에 따라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도 있다. 조금 웃는다고 달라질 것이 거의 없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식상한, 어설픈 웃음을 짓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허망한 웃음 뒤에 다시 자신의 본모습과 직면하게 되면 더욱 참담해질 수도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억압적인 제도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웃음은 어떤 점에서 이 시대에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 나는 조금의 교양이라도 갖고 본다면 차마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운,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많은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과 영화를 통해 이 사회가 행사하는 억지스런 웃음의 강요는 사회 성원 모두를 무감각과 마비 상태에 빠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웃으라고, 얼이 빠질 때까지 웃으라고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 웃기기는커녕 서글픔과 분노를 자아내는 그것들이 진정으로 유포하는 것은, 많이 웃어라, 그만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니까, 너의 난처한 상황은 웃음에 가려질 수 있고, 그만큼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테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웃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프로파겐다이다(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천박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웃으며 저녁식사를 하는 광경을 그려보면 그 이상 그로테스크한 것이 없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대중매체들이 자연스런 웃음을 선사하기에는 역부족이기에 거의 발악을 하듯 주접과 막무가내와 억지와 청승(나는 이것들이 지금 이 나라의 대중문화의 핵심부에 있는 어떤 코드라고 여겨진다)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납하기에는 너무도 처량하다. 진정한 웃음은 늘 제대로 된 유머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그것은 지성과, 지성의 반성적인 힘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진정한 웃음은 지속적인 힘을 갖고 있지만 저질 웃음은 휘발성이 강하며, 거기에는 유머가 실종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좋은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유머에서 피어나는 웃음은 여전히 이 사회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사회는 아직 그러한 웃음을 제대로 경험한 적도, 그것을 만들어낸 적도 거의 없으니까. 나는 하다못해(?) 만화영화 <심슨 가족들>이나 <사우스 파크>와 같은 프로그램이 이 나라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날은 너무도 멀었다고 본다. 유머야말로 한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이 성숙할 때에만 꽃 피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웃고 있는 순간, 자신의 웃음에 대해 한 번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그 웃음이 자신과 얼마나 밀착된 것인지 혹은 동떨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 웃음이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녕 지나친 바람일까? ■ 필자 소개 정영문(소설가) 1963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작가세계> 겨울호에 실린 장편소설『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웃음 배달부가 되어」(시인 천양희) 2009년 6월 12일_서른세번째 살아있는 것들 중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라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이나 웃을까. 어린아이들은 하루에 400번 정도 웃는데 나이들수록 웃음의 횟수가 줄어들어 어른이 되면 하루에 14번 정도밖에 웃지 않는다고 한다. 웃을 일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웃어야 행복해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까. 괴로움의 원인이 무지(無知)에 있듯이 웃음 또한 그런 것일까 생각해 본다. 웃고 나면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행복해지는데, 사람들은 행복해야만 웃는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웃음에 인색하게 되는 모양이다. 웃는 데는 안면근육을 13개 움직이면 되지만, 찡그리는 데는 60개의 안면근육을 움직여야 한다니, 미모의 찡그림보다 미소가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루에 15초씩만 웃어도 장수할 수 있는 것은 웃음이 울음을 달래 주는 명약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나는 ‘웃음이 보약’이라든가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을 하면서도 웃음(音)이 아름다운 음(音)이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음악이 아름답다 해도 아이의 맑고 밝은 웃음을 따를 수 없고 꽃이 화사하다 해도 활짝 핀 함박웃음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 쓴웃음이나 비웃음을 빼놓고는, 어떤 웃음도 울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때때로 울어 본 사람만이 진정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 보여주는 해맑은 미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시 배달부처럼 웃음 배달부가 되어 누군가에게 웃음 택배를 하고, 웃음 퀵서비스를 할 수 있다면, 그동안 많이 웃고 살지 못한 나도 크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고, 울음에서 웃음까지 가는 길일 것이다. ■ 필자 소개 천양희(시인)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다. 제4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누구였을까」(소설가 한창훈) 2009년 6월 11일_서른두번째 우리 마을에 초상이 났었다. 장성한 네 딸이 모여 아버지 초상을 쳤다. 딸자식이 많은 집 초상은 유난히 슬프다고 했는데 그 집이 그랬다. 사흘 동안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발인하는 날. 상여로 옮기기 직전, 집에서 망자의 마지막 식사 시간이었다. 많이 잡수고 가십시오. 네 딸은 고봉으로 담은 제삿밥을 올리고 나서 꿇어앉았다. 함지박만 한 엉덩이를 뒤로 내민 채 짜내는 울음을 쉰 목소리로 이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뿌우웅. 네 딸 사이에서 적잖은 방귀가 터져나와 버렸다. 줄지어 서 있던 문상객들은 쿡쿡, 웃음 참느라 곤욕을 보는데 정작 괴로운 이는 딸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있자니 모양새나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형국 변환 시도로 큰딸이 무작정 몸을 날렸다. 짝, 소리가 나게 방바닥을 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소리요. 아부지 가시는 길에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요.” 이러다가 뒤집어쓰겠구나 싶은 둘째가 언니의 자세를 뒤따르며 외쳤다. “나는 아니요, 아부지. 나는 아니요.” 그럼 셋째인들 가만 있겠는가. “이런 경우는 없소. 아부지 가시는 길에 이래서는 안 되는 법이요.” 코너에 밀린 막내까지도 바닥을 치며 악 쓰듯 외쳤다. “아부지는 아실 것이요, 아부지는 정녕 아실 것이요.” 우울했던 초상의 끝이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상여 나가는 내내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울음과 웃음이 한장소 같은 시간대에 뒤범벅되어 버린 것이다. 이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떠나는 자리에 웃음 소리 돋아났다면 그 인생도 괜찮은 인생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곤란한 상황은 벗어났는데 누가 끼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 필자 소개 한창훈(소설가) 1963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던 새 본다』『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청춘가를 불러요』가 있다. 산문소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와 장편소설『홍합』『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열 여섯의 섬』등이 있다. 동화 『검은섬의 전설』과 공동 산문집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를 펴냈다. 제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부모님께 큰절 하고」(소설가 정미경) 2009년 6월 10일_서른한번째 “많이 울었지?” 아들을 훈련소로 보낸 날, 선배 Y가 전화를 했다. 울긴요, 했지만 말과 달리 눈물이 금새 주르르 흘러내렸다. “밥은 안 넘어갈 테고 칼국수 사 줄 테니 나와.” 해가 설핏하게 지는 시간이었다. 자식놈 생각하니, 국수는커녕 물 한 모금 삼킬 마음이 없었다. 몇 번이나 권하는 걸 마다하고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쳐냈다. 월말이 되자 카드 대금청구서가 날아오는데 술집으로 추정되는 상호들이 줄줄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입대가 충격이로되 엄마 카드에 손을 대다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아오는 청구서마다 찍힌 걸 다 합하니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다. 슬픔을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구나. 원래 수업 빠지고 도망가면 남은 녀석들이 혼나는 것처럼, 집에 있는 나머지 하나를 불러 앉혔다. “얘. 무슨 이런 법이 있니? 얘네들은 빈손으로 친구 송별회 나와서 진탕 마시고 간 거야?” “다들 바쁜데 나와 주는 것만도 고맙죠. 원래 그런 법이에요.” 그것도 몰랐느냐는 투다. 별 쓰잘데기 없는 법을 하나 배운 비용치고는 너무 과하다. 눈물로 써서 특급우편으로 부치던 편지를, 이를 갈며 써서 보통우표를 붙여 보냈다. 아가, 그 안에서 홍익인간이 되어 나오너라…. 교훈조의 편지를 쓰다 보니, 슬픔에 눈 멀어 잠시 잊고 있던 풍경들이 영화처럼 떠올랐다. 양말 뒤집어 벗어놓기, 속옷 아무데나 던져놓기, 한 번도 닫은 적이 없는 치약 뚜껑, 컵라면 먹은 빈 그릇 침대 밑에 감춰 두기, 벽지에 코딱지 붙여 놓기, 서랍은 빼놓고 장롱 문은 죄다 열어 놓고 학교로 달아나기….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그래. 군대 안 갔으면 어쩔 뻔했냐. 빡세게 고생하고 철들어 나오너라. 네가 긁어 놓고 간 술값은 국립대학 수업료 낸 셈 치겠다.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당사자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제대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저로선 소회가 남달랐는지 ‘사랑하는 부모님’으로 시작하는 긴 편지를 써서 보내왔다. 비싼 수업료 내가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외치고 싶었던 내 소박한 꿈은 이대로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인가. 대략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엄마 손에 꼭 롤스로이스 키를 쥐어 드릴게요.(이런 약속이 적힌 편지가 서랍에 도대체 몇 장이던가. 이미 명차가 다섯 대, 노후를 보장해 줄 빌딩이 두 채, 완두콩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철없이 좋아했는데, 확정일자가 없는 이런 약속보다 오늘 홍삼 캔디라도 한 통 받아 먹는 게 낫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쳤다) …병장이 되고 보니 저도 많이 편해졌어요. 내무반에서 내 맘대로 방귀를 뀌다 보니, 늘 춥고 어두운 복도로 나가 해결해야 했던 이등병 시절이 떠오르네요. 참, 후임들이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누워 있으면 얼음을 동동 띄운 물에 스트로를 꽂아서 입에 대주고 양말을 거꾸로 벗어던져 놓으면 가지런히 개켜 놓는답니다.(엄습하는 이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요즘 저는 거의 산유국의 왕자처럼 지내고 있어요. 사랑하는 엄마. 그러니 저에 대해선 너무 걱정 마세요…. ■ 필자 소개 정미경(소설가) 1960년에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2006년『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