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가난 / 김재진(1955~ )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흥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지 말고 그냥 발길 따라만 가면 된다.'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도 무섭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눌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부지 그림자가 내 그림자보다 더 커요.'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지.'
그날 밤 아버지가 지고 오던 궁핍과 달리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조금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달빛 쏟아지는 가을 밤. 공동묘지를 지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생생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또한 또렷이 들려온다. 아들은 그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쭈뼛할 정도로 무서웠겠지만, 아버지의 큰 그림자와 눌변 때문에 평생 인생을 무서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크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기며, 아들은 가난할 때마다 가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