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1954~), '사과씨' 전문
사과는 대한을 지나면서 늙었다. 껍질이 말라서 잘 드는 칼이 잘 들지 않는다. 나무가 사과를 키울 때 이렇게 되도록 하셨다. 사과 속에 아이가 젖을 빨고 있다. 사과가 떠나온 저 남쪽 사과밭, 가지에 빨갛고 파란 봄이 돋고 있지만, 사과 속에 대춧빛 아이가, 호오 소용없는 봄을 만들고 계셨다.
시든 사과를 깎을 때 쭈글쭈글해진 껍질이 살을 꽉 붙들고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는데, 이게 사과 속에서 사과젖을 빠는 아이의 짓이었구나. 밖에서 물과 양분이 들어오지 못하니 제 어미가 저장한 젖을 먹고 있었구나. 사과의 달고 풍만한 과육은 나무가 사과 속의 아이인 사과씨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구나. 그 많은 아이는 사과나무가 되지 못하고 어디로 갔나.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