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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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선생 약력
시인, 번역가. 1952년 충남 연기 출생. 고려대 독문과 졸업. 1979년 『문학과지성』 가을호에 시 「이 시대의 사랑」외 4편 발표.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즐거운 일기』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침묵의 세계』 등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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