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옳다 - 이동재
아내가 옳다!
젊어선 세상의 정의가 공자나 맹자
예수나 부처의 말씀에 있는 줄 알았다
조금 더 젊었을 땐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에게 있는 줄 알았고
한창 땐 레닌이나 모택동 체 게바라
루카치 마르쿠제 아드르노 벤야민 라깡이나 지젝
자유주의이니 자본주의, 사회주의니 공산주의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리얼리즘 혹은 모더니즘
하다못해 신자유주의가 옳은 줄 알았다
독수공방, 아내가 외롭게 지새우는 긴 밤
그래도 세상의 정의는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책상 앞에서 헤매던 시절
세상의 옳고 그름이 그 어디쯤에 있는 줄 알았다
마지못해 내는 학회지나 창비나 문지 같은 잡지에 숭고한 뭔가가 있다거나
요사스런 사설私設邪說로 가득찬 신문지 쪼가리 속에
찾아야 할 진실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의 진리가 그 어디쯤에 서성이고 있을 줄 알았다
허나 찍히고 짤리고 미끄러지고 터지고 뭉개져
돌아와 식탁 앞에 앉은 어느 저녁
아내는 옳았다
아내가 옳다, 아내가 옳다
아내가 항상 옳다
라고 수없이 되뇌어 보는 중년의 어떤 나,
아내가 역시 옳다, 아내는 여전히 옳다, 무조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