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 살리기 - 신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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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건반이 올라오지 않는 이유는 시가 되지 못했다
솔,도 아니고 라,도 아닌 반음
음을 높이는 과정에서 무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옥타브에서 소리가 꺼지곤 했다 이른 봄 서리에 탄력을 잃은 피아노
건반 뚜껑을 활짝 열어놓았다 햇볕을 좋아하는 음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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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유리 속의 불빛
사철 꽃이 피는 부지런하고 예쁜 제라늄은 추위가 치명적이다
시든 제라늄을 살리고자 애를 쓰면서 그린 일기 형식의 그림은 아크릴 캔버스에 배어있다
둥근 얼굴과 화폭 귀퉁이의 주홍빛 꽃잎은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닌 분명한 불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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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켜놓고 퇴근한 가게는 어둠을 견디지 못한다, 널 지켜보겠어
보여질 수 있을 뿐인 영역은 언제나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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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부녀자의 손발과 눈을 빼앗는 나비지뢰도 결국 시가 되지 못했다
알듯, 모를 듯
살 처분된 돼지떼와 찢어진 비닐 그리고 붉은 침출수에 대한 발굴금지령이 내렸다
울음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솔#의 매몰, 생매장
움푹 꺼진 건반을 돼지들의 비명소리가 잡아당기고 있다
콘트라베이스의 독주를 듣고 있는 내게 또 다른 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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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후에야 인정을 받는 화가들, 이라고 썼다가 많은 미술가라고 고쳐썼다
시들고 있는 꽃을 살리는 화가를 알아보지 못한 건 나쁜 시력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서야 알게 된 세상의 반음들, 내가 예쁘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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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금지 기간 3년은 너무 짧다 침출수가 되어 지하수로 스며드는 돼지들의 음역
하지만 나는 반음의 건반이 올라오길 무작정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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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런던행 보딩브릿지에서의 키스는 조만간 시가 될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의 키스, 이륙시간을 20분간 지연시킨 사랑에 아무런 항의 없이
모두들 기다려주었다는 얘기는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