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뿌리 - 김점용
-꿈 31
꽃을 본다 꽃잎이 작고 단정한 진분홍색의 꽃기린이다 잎이 없는 줄기는
가늘다 뿌리가 보고 싶다, 생각하자마자 뿌리가 뽑혀 올라온다 뿌리 끝
마다 꽃이 매달려 있다 줄기에 매달린 꽃과 똑같이 생겼지만 아주 작다
그 꽃을 보자 까닭 없이 외롭고 슬프다 누군가 니체꽃이라 일러준다
니체가 맨 처음 발견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빈 화분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
꽃이 꽃에서 오듯
나도 내가 만든 거 아닐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가 잠시 빌린 거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기원이란
바람과 햇살과 물과 먼지가 아닐까
아버지, 호적을 파버리겠어요
대든 적도 있지만
뿌리 뽑힌 꽃을 알몸
알몸의 노래
자기가 세상 전부인 양 우는 어린아이의
저 어마어마한 목구멍
목구멍에 가득한 햇살과 바람
빈 화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