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방 - 김명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적멸의 파문이 손끝에 와 닿았죠. 그
파문을 살며시 걷어내고 침대에 눕자 창틀에 낀 적멸이 나를 힐끗, 훔쳐
보았죠. 한때 나도 무언(無言)을 사랑한 적 있었으나, 지금은 누군가의
독백이나마 엿듣고 싶네요.
나, 비밀한 방 한 칸 들여놓고, 인터넷 쇼핑몰에 근육질의 남자를 주
문했지요.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창문에는 환한 미소를 걸어두고,
천장에는 I LOVE라는 모빌을 걸었죠. 배달된 그 남자를 침실로 밀어
넣고, 가슴을 열자 아, 커다란 분화구가 뚫려 있었죠. 진한 페르몬향이
몸을 풀고 있었어요. 고개를 돌렸으나 음화처럼 자꾸 뒤엉키지 뭐예요.
그곳으로 여자들이 들락거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죠. 비 그쳐도
흔적은 남아 있잖아요. 내 가슴은 끌로 긁어낸 듯 아팠어요.(집착하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사랑이란 환상 아니냐?) 지글지글 끓어오를 때
마다 달빛 한 스푼 넣어 만든 칵테일로 마음을 눌러 두었죠.
날이 갈수록 그 남자의 방은 넓어졌죠. 내 침실엔 여전히 이끼 같은
불안이 자라고, 모멸이 서러운 알을 슬기 시작했죠. 낯설은 언어들만
기름처럼 고였어요.
비를 좋아한 사람은 추억이 많다죠? 젖은 시간을 걷어올리고 물끄
러미 서 있는 그의 등에 추억들이 걸어다니고 있네요. 추억이란 그리
움과 아픔이 집을 짓는 것 아닌가요?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추억을
삭제해버렸죠. 셀프컨트롤을 입력시키고, 다시는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게 서버용 백신도 주사했죠. 진실과 거짓의 회로가 서로
충돌하는지 그는 머리를 싸매곤 하네요. 이곳저곳에서 따와서 카피한
문장처럼 들떠있는데, 그쪽으로 주파수를 맞추어놓고 살 수 없잖아요.
차라리 그 남자의 방을 폐쇄해버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