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없네 - 정철훈
도시는 얼마나 불온한가
도시는 얼마나 우울한가
도시는 음란한 꿈이요, 음란한 교환가치여서
낡은 시민아파트가 매일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 사이 초등학교 교정은
뜨거운 모래알 위로 꾸벅꾸벅 졸고
길은 온통 아스팔트에 덮여
죽음을 죽음보다 무겁게 누르네
우리는 도시에서 성장하지 않고
다만 이사 몇번을 갔을 뿐
일곱 평에서 열여덟 평으로
스물세 평에서 서른두 평으로
너덧 번의 이사가 나이처럼, 나이의 성장처럼
우리 생활의 전부였으니
몇번의 전출과 전입, 몇번의 이직과 전직
몇번의 사랑과 이별이 우리 삶의 전부였으니
하! 역사가 없네
부유하는 것은 역사가 아닌데
달리지 않는 철마는 철마가 아닌데
우리는 몇번이나 역사가 아니어야 하나
하! 유구한 흐름이 없네
눈빛이 없네, 고뇌가 없네
뼈와 살이 녹는 내통이 없네
이사와 이전과 이주와 전이의 역사에는
생활이 없네, 생명이 없네, 거주가 없네
유랑하는 삶은 가벼운 발걸음만큼
스쳐가는 일상은 가벼운 보행만큼 역사가 아닌데
거리에도, 방안에도, 농짝에도, 책상에도
도청에도, 민원실에도, 우리들의 심장에도
하! 역사가 없네, 눈물이 없네
이제 어린 두 발을 감쌌던
배내옷에서부터 역사는 다시 쓰자
낡은 사진첩의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부터
역사는 다시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