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여, 안녕 - 이윤훈
Ⅰ
더운 바람에 실려 비무장지대에서 온
한 통의 편지, 바싹 마른 그 입 속
피 묻은 침묵만이 고여있고
두꺼비 독보다 강한 독주는 이제
내 몸 아닌 슬픔의 것
잠재울 수 없는 피는
죽음의 암초를 격렬히 돌고
팔월의 한낮
투계처럼 헐떡거리는
붉디붉은 맨드라미
Ⅱ
나풀나풀
잡힐 듯 말듯
철조망 너머 푸릇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부전나비
숲속 미로에
어느 새
은방울꽃 하나 피워놓았다
저 너머 천둥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다고
붉은 목소리로 외치는
하얀 푯말
나는 끝내
맹금의 발톱이 돋은 그 선을 넘지 못했다
Ⅲ
그해 여름
샐비어는 끔찍하리만치 붉었다
불두화나무 아래서
담뱃불로 팔뚝을 지지고
개망초 피는 언덕에 서서
고요한 저수지에 물수제비를 떴다
한 차례 폭풍우가 몰아쳐 떡갈나무 숲을 흔들고
소나기가 여름의 정수리에 쏟아졌다
아랑곳없이 샐비어의 불길은 거세게 번져가고
길고 긴 그해 여름
기어이 지진 자국이 부풀어 터졌다
달빛 고인 한여름 밤은 농익은 백도(白挑)
벌레처럼 옹그린 나는 꿈인 듯
둔황의 어느 사창(紗窓) 골목을 뒤척이고 있었다
유난히도 환한 달밤이었다
Ⅳ
맨 처음 내게
붉은 입술로
장미의 불꽃을 옮긴
마농
심장이 세게 뛸수록 깊이
파고드는 가시
고통 없이는
하루하루 버틸 수 없었다
Ⅴ
바람이 웅얼대는 언덕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엉겅퀴 무리들이 들개처럼 왔다 사라졌다
가시덤불 속에서야
진보라 꽃이 피고
뿌리 가득 독 기운이 차는 것들
톱니 이빨에 물린 나는
한 족속이 되어
구름을 먹고 바람을 마시고
멈출 수 없는 내 생의 바퀴
가파른 내리막 비탈에 맡길 수 있었다
Ⅵ
눈이 무척 맑아 슬프기조차 한
유곽의 아가씨
이 세상 것이라기엔 너무나 하얀 살결
이른 아침 꿈밖으로 내 귀를 끌어당긴 건
실비 오는 소리
화병에 꽂아놓은 백합꽃이 썩으며 독한 냄새를 뿜었다
퇴폐적 순수는 맹독
갈변한 백합꽃에서 역한 분 냄새가 풍겼다
불현듯 자비(慈悲)에서
누황의 냄새가 났다
나는 온몸으로 썩은 향기를 빨아들였다
Ⅶ
풀밭에 누워 홀로 하늘을 보며
그 무엇이고 되는
구름이고 싶었다
낯선 곳에 가 홀로 거닐며
그 어디도 있으나
그 어디도 머물지 않는
구름이고 싶었다
떠돌다 홀로 비구름을 맞이하여
무엇으로 꽃이 피는지
애련함으로 알았다
단비에 흠뻑 젖은 나는
시든 백리향 곁을 오래도록 맴돌았다
여기저기 빛들이 되살아났다
Ⅷ
텃밭의 자두나무는 내게 나무 그 이상의 것이다
가지가 휘도록 달린 것들이
빛의 변주 속에 커 가기 시작하면
하늘 가까이 달린 것은 내게 늘 그리움 같은 것이다
몇몇은 서둘러 풋것들을 따가고
또 몇몇은 손에 닿는 것들을 입에 넣고
대나무 장대를 벗어난 것들은
날개 달린 풍뎅이나 찌르레기들의 오찬
이른 아침 젖은 풀 속
높이서 더는 견딜 수 없을 만치 익다
두려움 없이 땅에 입을 맞춘
검붉은 것
높이의 맛이 있다 참 달다
농익을 대로 익은 그
끝에 이르고 싶다
Ⅸ
겨울밤 내가 외로운 건
떡갈나무 숲을 헤치고 와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겨울밤 내가 외로운 건
오래 전 어느 병사의 쥐 오줌 번진 볼셰비키 혁명사 그 붉은 글씨 때문만은 아니다
혁명은 불 담은 청동화로를 가슴에 품는 링이라는 것
외로움이 있어
목숨의 불씨를 봄의 정령에게 넘겨줄 수 있는 것
꽃나무란 꽃나무 온갖 꽃나무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것
겨울밤 내가 외로운 건
전나무 자작나무들을 몰고 오는 시베리아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Ⅹ
휘몰아치는 눈보라여
더 무모하지 못한 내 청춘을
어리석음의 이름으로 불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