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밭에서 - 김석규
어느 날 연밭으로 가 연꽃 피는 것을 보았다면
전생의 모든 것도 보았다 하리.
구만 리 서방정토 갈 길은 아득하고
비록 진흙탕에 발을 묻고 섰을지라도
이슬 한 방울로 연잎에 앉을 수 있다면
저무는 이 세상 맑게 건너갈 수 있으리.
깊이도 알 수 없는 번뇌의 한가운데 바다
나무껍질 배 밀고 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
두 눈을 가린 진흙소는 연자매를 돌리고
소나기 지나는 연꽃에 기대던 잠자리
다시 뙤약볕 속을 풍덩풍덩 날아오를 때
온 고을의 앞 못 보는 이 눈 열리는 소리
잔치 갔다 오는 흰 두루마기 자락이 보이고
어느새 기별 가 닿았는지 손톱달 흐르는 서천
가는 바람에 밀리는 황후의 웃음도 들리리.
어느 날 하루 다 저물도록 연밭머리에 앉아
초록 물결 밀고 가는 연꽃을 보았다면
먼 훗날 처마 끝에 걸릴 연화등도 보았다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