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가 길을 낸다 - 채필녀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한껏 차리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나를 쳐다보며 더할 수 없이 흐뭇한 미소를 퍼부었다
마치 젖과 꿀로 만든 향유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듯 했다
내가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에구,
이것아 고곳이 다 보인다, 고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엄마
는 나를 나무랄 줄 몰랐다 아마 내 고곳조차도 자랑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 너머에도 산, 속에 감추어진 우리
동네는 하루 몇차례 다니는 완행버스가 고작이었고 구멍
가게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남주기 아깝다며 어여쁜
처녀 하나를 공유하려 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수년,
동네 앞으로 길이 나고 다들 서울로, 더러 미국으로 동남
아로 드나들며 눈에도 길이 나고 이젠 아무도 내 치마를,
치마속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늙거나 죽고 엄마는
병들어 멍하니 쳐다보는 눈에서는 더이상 젖과 꿀이 흐르
지 않는다
생각이 지독한 날은 동네 앞 느티나무가 날 쳐다보는 것
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동네 사람들에게나 내게나 거목
이었던 나무는 애초에 길을 알고 있었을까 물끄러미 쳐다
보는 잎새가 나에게 난 길로 떨어져 구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