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 - 강희안
지나간 슬픔은 물매화 한 잎
강물이 보고 싶을 때
이미 져 버린 자운영 꽃길을 지나
저물어 가파른 산길을 간다.
달빛 파란 기슭 옛 절터에서
더는 굽을 수 없는 세간의 길을 물으면
강은 험한 물굽이로 첩첩히 흘러
이 세상 처음인 곳으로 가는구나.
누워야만 비로소 보이는 별
캄캄한 혼돈으로 막힌 물레새가
물 이랑 속 저 혼자 낮아지는
강물의 빈 가슴으로 앉았을 때
문득, 가슴만 뛰어라.
산의 빈터로 귀 대이던 그리움처럼
저기 소리없는 물과 달빛
지나간 것은 무명의 덫이었다.
서서 바라보는 탑으로 높아가
별빛과 만날 수 있기를,
나이테로 감아들인 속울음으로
이 땅 어느 길에서나
벙어리처럼 죽은 듯이 살기를 바랐다.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
빈 하늘을 인 두견꽃 가슴으로
그대에게 닿을 때
아름드리 고로쇠 뿌리를 뻗듯
수풀 속 밭 디딘 사랑은
아름답다고 아름답다고
물결 같은 손으로 잡아 주던
안개의 강 소백의 산줄기
부엉새 울음이 산굽이 돌아
이 세상 모다 저문 소리로 설 때
높은 만큼 푸른 만큼
제 깊이를 만드는 하늘 아래
길은 산에 들고
산은 강으로 드는데
그대, 몽유의 눈 속으로만 비쳐오는
꽃 청산 가는 길은 어드메냐.
사람의 길은 사람으로 막히고
산의 길은 덤불로 막아 서듯
용암이 휘감아 올린 종유석 기슭
동서를 가로질러 뜻을 낳는
강과 산은 얼마나 크고 깊은
믿음으로 무너지기에
저렇게 깊어만 가는 것이냐
갈수록 어깨를 세우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