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시편 1 - 고진하
스물거리는 안개가
악양 들판의 고요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새벽 ,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들판을 바라보니
들판 또한 나를 바라보네.
(오, 들판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다니 !)
반 뼘쯤 자란 논보리도 초록초록 눈을 떠
나를 바라보네.
논보리밭 사잇길 말뚝에 매인
흑염소 두 마리도 고개를 갸웃대며
낯선 나를 바라보네.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어린 뿔로 들이받을 듯 달려들기에
뿔 없는 나도 손가락뿔 세워 저를 받는 시늉을 하며
흥에 겨워 한참을 노는데,
어디서 갑자기 불어온 돌개바람에
보리밭이 흔들리고
냇가의 억새가 흔들리고
어린 흑염소 뿔이 흔들리고
흑염소와 놀던 나도 휘청, 흔들리네
문득
중심을 잃은 황홀에 몸 비비다
다시 눈을 들어 들판을 바라보네.
오늘 같은 날은,
악양 들판이 일으키는
초록 지진에 흔들리다 파묻혀도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