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밭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慣習)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苦悶)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1978〉
이기철 시집"청산행"[민음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