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비 내리고-편지 1 - 나희덕(1966~)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만해의 어떤 시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당신은 사랑하는 그 사람이기보다는 절대적 존재로 읽힙니다. 신을 인정하고, 그 '환한 그늘'에서 사는 삶은 연민과 배려의 삶입니다. 아프지도 못하고, 향기로울 수도 없는 삶이 도리어 충만해 보입니다. 눈이 부십니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