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 - 노향림 (1942~ )
언덕에 오르면 몇 량의 낡은 시간들을 떼어놓고
달아나는 화물차가 보였네
풀섶 끝 사르비어 꽃들이 시뻘건 피를 억억 토해내고
저 아래 골짜기로만 주택들은 한 무더기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고
어디선가 창백한 햇볕 하나가 걸려서 제 뼈가
마르는 소리를 듣네
김광균의 1938년 신춘문예 당선작 ‘설야(雪夜)’에 “어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나온다.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1939)에 실린 ‘외인촌(外人村)’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로 끝난다. 김광균 다음에 노향림이 온 것이 아닐까. 메시지 없는 이미지 시들. ‘메시지 없는 이미지’가 메시지라면 메시지리라. “달아나는 화물차”와 “시뻘건 피를 억억 토해내”는 “사르비어”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는 “주택”들이 대도시에 흔히 나타나는 공감각들이다. 여기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공존이다. 대도시에는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다. 공감각이 즐겨 쓰이는 이유다. <박찬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