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후 - 이성선
해지는 시간에는 시를 쓰지 않는다
스러지는 빛이 쓸쓸히 내 목숨을 비치다 떠나고
나무 사이로 그분의 젖은 눈빛도
한참이나 나를 보다가 돌아서면
나는 혼자다. 다른 약속도 없다.
내게 연결된 이름들이 모두 이렇게 제 길을 갔다.
망가진 악기처럼 나는 버려졌다.
그리운 소리는 다시
내 악기 줄로 길을 물으러 오지 않는다.
가슴의 문풍지만 고독히 운다.
물을 긷는 자도 돌아갔다.
산이 비어 더 크게 나를 안는다.
이런 시간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해지고 나서는 사람을 맞지 않는다.
문을 열어 놓고 빈 산과 벌레 소리만
집 안 가득 맞아들인다.
혼자 있는 악기만 운다.
이성선 시집" 벌레시인"[고려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