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 김충규
대나무 잎과 잎이 서로의 귀를 갈아준다
어린 새가 그 사이에서 퍼덕거린다
퍼덕거린 만큼의 전율이 대숲에 좌악 펼쳐진다
대숲을 품고 있던 산이
울컥 토해놓은 놀 찌꺼기
찌꺼기가 잎마다 반점처럼 묻어 있다
그 아래에서
나는 귀신처럼 서성거렸다
대숲에 들어가면
내 생을 애태웠던 시간이 흐름을 멈추고
제 몸 속에 깊은 우물을 판다
우물 속으로 들어간 시간을 불러내면 안 된다,
그러면 대나무 잎들이 날카로운 칼로 변해
내 몸을 베려고 덤빌 것이다
무엇을 완성하려고 하면 안 된다,
대숲에선 속에 든 것을 울컥울컥
토해놓아야 한다 토해놓을 것이 없으면
내장이라도 토해놓아야 한다
나날이 비우고 비우기 위하여
사는 대나무들,
비운 만큼 하늘과 가까워진다
하늘을 보라,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
어찌 저토록 당당하게 푸르를 수 있겠는가
다 비운 자들만이 죽어 하늘로 간다
뭐든 채우려고 버둥거리는 자들은
당장,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