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뭉스러운 이야기 1」(시인 이재무) 2009년 8월 4일 한여름 주말 오후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였다. 어느 주말 오후 충청도 예산 출신 L씨는 모처럼 고향의 부름을 받고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데만 무려 시간 반을 넘기고 있었다. 마음이 까닭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이상 기온으로 사람의 체온에 육박하는 섭씨 34도에 이른 기온에 아스팔트는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L씨의 고물차는 에어컨이 고장난 상태였다. 차 안의 열기는 찜질방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울컥, 몸 속 울화라는 짐승이 몸 밖으로 자꾸 뛰어나오려 발광을 해대고 있었다. 가뜩이나, 정체에다가 몰려드는 더위로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인데 아까부터 자꾸 뒤차가 클랙슨을 눌러 대고 있었다. 눈구멍이 막히지 않았다면 저도 뻔한 도로 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저 작자의 머릿속은 무엇이 들었길래 저리도 속알머리 없이 잔망을 떨어내는 것일까. 그러거니 말거니 L씨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애써 길이 뚫리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차는 그런 L씨의 심사는 아는지 모르는지 거듭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눌러 대며 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L씨는 차를 갓길에 세워 두고 뒤차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앞문을 열게 한 후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자를 향해 금강 하류처럼 느려 터진 말투로 한 마디 일갈하였다. “여보슈, 보면 몰러, 왜 그렇게 보채는 거유,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잖유,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씨근벌떡하며 웃통을 벗고 손부채로 더위를 쫓는 연방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후 L씨는 한결 느긋한 자세로 운전대를 잡았다. 거짓말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막히고 얽혔던 찻길이 시나브로 풀려 가고 있었다. ■ 필자 소개 이재무(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3년 《삶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벌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푸른 고집』『저녁 6시』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생의 변방에서』『우리 시대의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공저)『사람들 사이에 꽃이 핀다면-이재무의 시 읽기』 등이 있다. 난고(김삿갓)문학상과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개업식장이 헷갈려」(시인 이대의) 2009년 8월 3일 무슨 일이 있어도 개업식엔 가봐야 한다.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친구들까지 동원해 축하해 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의 일같이 도와 준 친구의 개업식이니 말이다. 몇 년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개업한다고 하니 기쁘기도 하고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내 일정이 문제다. 개업식이 토요일 오후 4시이긴 하지만 하필 중요한 일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 문학 행사는 내가 빠져도 크게 지장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덜한데, 문제는 일요일 산악회 행사가 문제다. 모처럼 만에 준비물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산악회 모임에는 참석해야 한다. 개업식 장소가 안중이기에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기왕 마음먹은 거 속 시원하게 다녀오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에 산악회 준비를 대강 마치고, 시간이 되어 황급히 평택 가는 전철을 타고 갔다. 평택에서 다시 안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간 개업식. 예측한 시간보다 약간 늦게 도착해 서둘러 갔다. 전화로 일러준 대로 초등학교 정문 앞이라 했으니 찾기는 쉬웠다. 큰 건물 앞에 개업을 알리는 풍선 아치가 있고 앰프에서는 개업을 알리는 흥겨운 음악이 크게 흘러 나왔다. 개업식장엔 친구들이 많이 있을 거로 알고 설레면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개업식 참석자로 알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친구의 이름을 대며 어딨냐고 물었다. 그런데 친구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물어 보고 머뭇거리며 오더니 잠시 일보러 나갔다는 거였다. 나는 잠시 실내를 둘러보았다. 헬스 기구들이 꽤 많이 놓여 있었다. 건강 기구와 관련된 사업이라더니 웬 헬스장 같은 분위기인가 하고 잠시 의아해했다. 실내 중앙에는 돼지머리와 고사떡이 놓여 있었다. 벌써 몇몇 사람이 다녀갔는지 돼지 입에 봉투가 물려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친구에게 핸드폰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개업식으로 바쁠 텐데 사무실을 비워 두고 나갔을 정도면 무척 바쁜 일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그냥 개업 축원을 위해 돼지 입에 축의금을 꽂고 친구가 부탁한 책을 두고 절을 했다. 일보는 사람들은 준비된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에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권해야 하는데 서울까지 가는 것이 부담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죽치고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내일 산악회 준비도 있고 해서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개업식에 참석하고 와서 아무래도 친구를 보지 못하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산행을 하며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내가 다녀간 걸 까마득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친구는 개업식장을 비우지 않고 계속 있었다고 했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갔었던 곳을 이야기했더니 거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거기는 헬스장 개업이고 친구는 옆 건물 초등학교 바로 앞이라 했다. 그걸 모르고 엄한 곳에 가서 돼지머리에 절하고 축의금 내고 책까지 주고 왔으니! 그러나 그걸 다시 가서 찾기도 뭐하고 어쩔 수 없잖은가? 무엇보다도 바쁜 시간을 내어 찾아간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으니 차라리 안 가느니만 못했다. 산행 내내 엉뚱한 개업식에 참석하고 온 자신을 책망했다. 아무리 바빠도 확인해 보고 행동으로 옮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축의금과 책이 아까워 눈에 아른거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려 했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개업식 인사를 못한 꼴이 되어 버렸으니 그게 오히려 미안했다. 다음날, 월요일 결재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 개업식 장소 하나 딱딱 못 찾아 오냐고 운을 뗐다. 그러고는 네 이야기 들어 보니 헷갈릴 만도 하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제 거기 가서 네 축의금하고 책 찾았어. 거기 가보니 방명록에 네 사인도 있더라. 멋있던데? 고마워…” ■ 필자 소개 이대의(시인) 1960년 경기 평택 출생. 1997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현재 방송대 학보사 근무.
「신부(神父)님의 뒷담화」(시인 유종인) 2009년 7월 31일 오래간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인천에 갔다 왔다. 동창이라기보다 그냥 친구다.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것이 우리들의 공통점이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고등학교 때는 아웃사이더로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엔 비정규직으로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차이라면 친구는 좀 말랐고 나는 좀 통통한 편이고, 친구는 좀 까다로운 편이고 나는 좀 무던한 편이다. 속이야 어쩔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이는 인상은 대충 그렇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늘 허점이 있게 마련이어서 하느님이 부처님의 친구였다는 말처럼 믿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는 얘기와 같다. 친구와는 토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으므로 아내한테는 당일 늦게 새벽에라도 집에 오겠다고 했다. “괜히 몇 만 원씩 길거리에 뿌리지 말고 정 못하면 자고 아침 일찍 와요.” 아내는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친구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새벽에 와 봐야 식구들 잠만 깨울 게 뻔하다 여긴 듯했다. 그렇게 외박 안하고 달려왔댔자 겨우 몇 시간 후면 아침인데, 그 아침은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성당에 얼굴 도장 찍어야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가 좋아하실 텐데…’ 차마 그런 돈냄새도 안 나는 얘기는 아내한테 여지없이 지청구를 당할 게 뻔하다. 하기사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의 술자리가 깊어지다 보면 무주공산(無主空山) 같은 일요일이 한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20대 시절 자주 다니던 술집까지 두 군데 들러 우리의 술자리는 4차까지 간 후에야 끝이 났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친구는 편의점에서 병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자신의 오피스텔까지 들어가서야 먹지도 못하고 침대에 고꾸라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시계를 봤다. 반백의 머리가 인상적인 성당 신부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신부님의 유머러스한 강론이 한창 신자들의 침묵에 만첩조팝꽃 같은 하얀 웃음을 심어 주실 때다. 그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더 지끈거리고 아파서 갈증이 몰려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지난 밤 얼마나 취했는지, 냉장 칸에 넣었어야 할 맥주가 냉동 칸에서 꽝꽝 언 채로 동태처럼 누워 있었다. 친구는 그제서야 일어나 눈을 찡그리며 말한다. “…물 거기 냉장고 안쪽에 결명자차 있어.” 사람의 눈[眼]에 좋다는 결명자차(茶)지만 깊은 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지 않은가. 속이 꽝꽝 언 맥주를 들어 보이자, 친구는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 인상을 쓰던 중에도 잠시 말없이 웃었다. 집에 돌아오자 점심 때가 조금 넘었다. 아이들은 아파트 단지 그늘에서 훌라후프를 하거나 비눗방울을 허공으로 후후 날리느라 정신이 없다. 투명한 비눗방울이 저 어린것의 입바람에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다닌다. 저걸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면, 하느님의 친구인 부처님도 좋으실 것 같고, 알라이신 마호메트께서도 좋아하실 게 뻔하다. 나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마치 내 보이지 않는 주변에 그런 성인(聖人)들께서 말없이 숨어 보실 것만 같다. 어디 외출이 깊으신 게지, 나는 한편 그렇게도 생각한다. 허기진 속에 해장국처럼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고 있는데, 아내가 괜히 실실 웃는다. “당신, 성경 중에 ‘돌아온 탕자’ 얘기 알지?” 나는 밥을 만 된장국 한 숟갈을 입에 넣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신부님 강론 중에 그 부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추가됐어.” 말도 다 하기 전에 지레 먼저 웃어 버리는 아내를 보자니 신부님의 간명하고 재치 있는 재해석이 짐짓 궁금해졌다. “…항상 집안을 굳건히 지키면서 아버지를 잘 보필하고 집안일을 성실히 수행한 첫째에게는 평소 염소 한 마리 상으로 안 내렸잖아?” “그렇지. 그런데 집안 재물을 가지고 나가 창기와 놀아나고 방탕한 생활로 거지꼴이 돼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염소를 몇 마리나 잡아 잔치를 벌여 주었다는 성경 내용 말이잖아.” 나는 맞장구를 치듯 아내가 들은 신부님의 강론 뒷부분이 궁금해졌다. “그래, 그런 성경 내용이 하느님의 한없는 품을 드러내는 비유로 흔히 해석되곤 했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어쨌다는 게 아니구, 그렇더라도 인간적으로 봤을 때 첫째 아들은 여전히 그런 아버지와 탕자가 돼 돌아온 동생이 섭섭할 수밖에 없었을 거 아냐?”“그랬겠지.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 바로 거기까지 얘기를 진전시킨 신부님이 갑자기 신자들을 향해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섭섭한 것이 따로 있는데,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하고 물으시는 거야.”아내는, 그런 신부님의 질문에 신자들은 당연히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웅성거리더란 것이다. “그때, 신부님이 강단을 손바닥으로 탁 치시면서, ‘아, 염소가 제일 섭섭하지. 첫째 아들이야 마음만 섭섭하지만 염소가 무슨 죄가 있어 죽어? 그냥 말없이 풀 뜯은 죄밖에 더 있어!’ 하시는 거야.” 신부님의 성경 속 ‘돌아온 탕자’ 뒷담화에 신자들은, 특히 여자 신자들은 하얀 미사포가 벗겨질 정도로 웃어 젖혔다고 한다. 나도 입 안에 든 된장국 속 밥알 몇 개가 기어이 다문 입술을 비집고 허공 중으로 튀어 나가는 걸 어쩌지 못했다. 나는 튀어 나간 밥알을 줍다 말고 문득 지난 밤 친구가 자신과 이혼한 여자에 대한 섭섭함을 말하던 때를 떠올렸다. 나는 속으로 친구에게 그런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신부님 뒷담화 말씀에, 항상 너(나) 자신보다 억울하고 섭섭한 이가 숨어 있다. 그러니 굳이 슬픔이나 우울은 우리 몫만은 아닌가 보다. 그러니 친구야, 그냥 한번 웃자. ■ 필자 소개 유종인(시인)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이 있음.
「웃음꽃이 넝쿨째!」(시인 손정순) 2009년 7월 30일 비온 뒤 불쑥 자란 호박 넝쿨을 보면 여기저기 웃음꽃이 터진다. 밤새 엄마가 된 암꽃들은 어린 생명을 줄줄이 등에 업었다.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서도 당당하게 미소 짓는 저 호박꽃! 고향의 어머니 같다. 어머니의 어머니 같다. 도대체 누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핀잔했을까? 꽃, 씨, 열매, 줄기, 잎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매력 만점 호박의 속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의 아둔함이다. 호박꽃은 나에게 아름다움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다. 하얀 이빨이 튕겨 나올 것만 같은 아버지의 환한 웃음, 그 웃음꽃이 넝쿨 속에 송두리째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고향에는 담장이 따로 없었다. 호박 넝쿨이 자연스레 울타리를 이루며 담장 몫을 했다. 이른 아침, 집이 무너질 듯 호탕한 웃음 소리에 눈을 뜨면 담장과 지붕에 넝쿨째 매달린 호박덩이가 쿵, 하고 떨어져 있었다. 그런 날이면 윗집 아랫집 담 너머로 호박전과 수제비 그릇이 오가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도시로 나와서도 고향의 정서를 버리지 못한 부모님은 봄이면 늘 화단에 호박씨를 심으셨다. 생명력이 강한 호박은 넝쿨을 이루며 도회의 지붕 위에서도 초롱불을 밝히는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호박 넝쿨에 줄줄이 매달린 호박꽃처럼 절로 입가에 웃음보가 터진 아버지는 여름에는 싱싱한 애호박을, 가을에는 잘 여문 황금빛 호박을 들고 담장 높은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과묵했으며, 훤칠하게 키가 크셨던 아버지,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많으셨던 아버지, ‘울면서 한세상’이라던 아버지께서 잇몸마저 드러내며 환하게 웃으실 땐, 어린 마음에도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 뭉클해졌다. 서울 생활이 힘들 때도 아버지의 이 웃음은 나를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 IMF 이후 인문학과 사회과학 시장은 거의 폐업 상태로 문을 닫거나, 주종을 바꾸는 출판사들이 많았다. 출판사들이 단합하여 파주출판단지로 이전할 때도,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문학출판 10년 세월에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고, 그 심신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 준 것은 우리 동네에서 바라 보이는 안산이었다. 나는 북아현동에서 안산이 가장 잘 바라 보이는 주택가로 출판사를 옮겼다. 이곳은 30년 이상 된 낡은 주택이라,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엄청난 비용 때문에 리모델링도 그만두었다. 봄이 되자 아랫집은 온통 개나리꽃이 담장 높이 울타리를 만들어 눈이 부셨다. 개나리가 질 무렵이면 안산에는 펑, 펑, 쉴 새 없이 산벚꽃이 터졌고, 산벚꽃이 지면 윗집에서는 탐스런 장미 넝쿨이 우리 담장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장미의 숨겨진 가시처럼, 철조망으로 굳게 닫힌 이웃의 대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2년 동안 저택 사이에 끼어 묵은 책장만 넘기던 어느 날, 나는 호박꽃이 지천인 고향 담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아하, 이거야!” 나는 어머니가 식용으로 보내주신 조선호박의 속을 타서 그 씨를 군데군데 나눠 심었다. 6월이 되자 마른 땅에서 호박 새순이 나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출판사의 작은 텃밭은 호박꽃 둔덕이 되었다. 향나무 위로 올라간 넝쿨은 다시 담쟁이 넝쿨을 타고 사무실 창문을 침범하더니, 담장 위 아래로 급속도로 번졌다. 그러자 이웃 회장님께서 지나가다 드디어 자동차 문을 열었다. “이사 오셨죠? 인사가 늦었네요. 근데 이 동네 토양은 호박 넝쿨만 무성하지 열매는 절대 안 열린답니다.”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 안타까운 듯 일러 주는 토박이 이웃의 씁쓸한 경험담이 벌에게 한 방 쏘인 것처럼 얼얼했지만 나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처럼 수박껍질 등 거름 될 만한 것들을 땅 속에 파묻으며 열매가 맺히길 기도했다. 기도 덕분일까? 며칠 짧은 장마가 지나자마자 하나 둘도 아니고, 꽃마다 애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급기야 담장 밖 길가에도 호박꽃이 열매를 맺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 탄성을 질렀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담장에 탐스런 호박을 주렁주렁 매단 꽃 넝쿨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돈 한 푼 안 든 웰빙 리모델링이다. 나는 대문을 활짝 열고 방을 붙였다. “무공해 호박을 드립니다. 누구든지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 그러자 서먹하던 이웃은 물론이고, 출판사 필자들,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찾아와 호박과 호박꽃, 호박잎들을 따갔다. 어떤 분은 호박으로 칼국수를 끓였다며 가져다 주시기도 하고, 정성스레 빚은 호박꽃 만두를 보내 주셨다. 호박으로 움츠렸던 출판사는 다시 기지개를 켰다. 이웃과 닫혔던 문도 활짝 열고 늘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윗집 회장님은 “참 이상하네! 우리 집에는 호박이 안 열리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올해도 출판사에는 넝쿨째 환한 웃음을 매단 아버지의 호박꽃이 한창이다. 그런데 웬일이지? 옆집 옥상에도, 윗집 정원에도 호박 넝쿨이 살짝 웃음꽃을 피웠다. 올해는 이웃에게도 웃음과 행운 가득한 호박들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길! ■ 필자 소개 손정순(시인) 1970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1년 《문학사상》에 「개심사 거울못」 외 2편으로 등단. 문화계간지 《쿨투라》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