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무나 하나」(시인 이상섭) 2009년 8월 10일(마지막 회) 내가 설희 아줌마를 만난 건 꼬치구이 공장에서였다. 당시 나는 제대를 하고 복학을 앞둔 때였다. 하필 아버지가 직장에서 밀려나 방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터라 등록금 마련이 막막했던 터였다. 해서 닭고기 꼬치구이를 만드는 소규모 공장에서 한시적으로 공돌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내가 한 일이란 냉동고에서 닭을 꺼내 해동을 시키거나, 해동된 닭은 해체 코너로, 꿰어진 꼬치는 다시 냉장실로 옮기는 단순노동이었다. 게다가 직원이랍시고 근무하는 치들은 거개가 아줌마 아니면 노파들이었다. 직원들이 아낙들이라 입이 걸었다. 꼬치만 만지니 집에 가면 서방 것도 만지고 싶지 생각이 없다거나, 꼬치는 양껏 주물러야 제 맛이 난다는 둥, 하여튼 내가 듣기에도 거북했으나 그런 농지거리 덕분에 지루함을 잊을 수 있었다. 직원 중에 홍일점은 단연 설희 아줌마였다. 그녀는 나이가 제일 젊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곱상해 자주 눈길이 갔다. 다만 흠이 있다면 혀짤배기란 점이었다. ‘오는은 난도 디독히 덥네, 이디 가오제 어디노 가가누.’ 처음 그녀의 말을 들을 때에는 무슨 모국어를 저리 엉망으로 만드나 싶어 웃음이 빵빵, 터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자주 접하다 보니 아, 그게 ‘오늘은 날이 지독히 덥네, 이리 갖고 오지 어디로 가져가느냐’ 하는 말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후부터 나는 부러 종종 말을 걸기도 했는데 덕분에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데 시절이 하 수상해지더니 날개 달린 것들이 수난을 당하는 계절이 닥치고야 말았다. 조류독감의 영향으로 공장 또한 꽁꽁 묶인 신세가 되자 제품은 냉동창고 속에 쌓여만 갔다. 자연 임시직인 나는 닭과 같이 모가지를 내놓아야 할 처지였다. 내가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자 ‘오뉴월 곁불도 쬐다 물러나면 서운하다’며 아낙들이 사장의 똥구멍을 긁었다. 좋습니다, 이왕 재고 쌓이는 거, 스트레스 확 풉시다. 인심 좋은 사장 덕분에 돼지갈비 집에서 연기를 덮어써 가며 배를 불렸다. 거나하게 취한 아낙들은 다시 사장의 옆구리를 찔러 가며 노래방 타령을 해댔다. 그러자 곁에 있던 설희 아줌마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취흥에 젖은 사장은 설희 아줌마를 무시한 채 소대장처럼 직원들을 노래방으로 이끌었다. 역시 소주 약발은 대단했다. 노래방에 들어선 그들은 깡통맥주 몇 개를 시키자마자 마이크를 싸쥔 땡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한데도 설희 아줌마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박수만 쳐대는 신세였다. 일행은 깜냥껏 노래를 하더니 기운이 꺾일 때쯤 되자 설희 아줌마를 배려하기 시작했다. 회식자리에 왔으면 한 곡조는 빼고 가야제, 설희 동생 노래를 안 듣고 어떻게 일어서? 그녀는 당황스러워 했다. 일행은 채근을 멈추지 않았다. 사태가 이상하게 꼬이자 그녀도 더 이상 꽁무니만 빼고 있을 순 없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덥석 싸쥐었다. 곡명은 태진아의 그 유명한 <사랑은 아무나 하나>. 노래의 전주가 나오자 그녀는 긴장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았기에 헛기침 몇 방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런 다음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대로 된 발음이 나오자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떴다. 뜨거운 격려와 박수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청중의 반응에 긴장했던지 그만 그녀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하는 부분에서 완전한 말썽을 부리고야 말았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흰소리를 쳤다. 아니, 사랑을 할 때는 씹 닦고 하지, 안 닦고 하는 년이 어딨어? 뒤질세라 다른 누군가가 또 말장단을 이었다. 아마, 설희 동생은 그거 할 때 안 닦고 하는 모양이제? 곁에서 듣고 있던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도 결코 말랑한 여자가 아니었다. 지가 공장서 맨난 늦으이 남편이 다랑하고 디퍼 그양 단녀드는데 닦은 새가 있겠두? 그제야 나도 대놓고 깔깔거릴 수 있었다. ■ 필자 소개 이상섭(시인) 1961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슬픔의 두께』『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가 있다.
「진수성찬」(시인 이상섭) 2009년 8월 7일 탈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표백제로 세수를 한 듯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스르륵 녹아 바닥으로 물처럼 스며들 것 같았다. 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참다 못한 그는 조기 퇴근을 허락받은 후 집으로 향했다. 아내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아내는 나름 오늘도 직장에서 바쁘게 나부대는 모양이었다. 이런 날, 내조라도 받으며 편하게 쉬면 좀 좋을까. 하지만 맞벌이를 하면서 다섯 살, 네 살 연년생 오누이에, 아파트까지 장만하는 기염을 토한 아내이니 딱히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안방에 들어섰을 때,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렁각시도 아니고 그의 마음을 어찌 알고 집에 와 있단 말인가. 아니, 당신이 이 시각에 웬일이야? 그의 물음에 아내 또한 눈망울을 키우며 되물었다. 당신이야말로 끄응, 왜 이리 일찍 들어온 거야? 응, 몸이 너무 아파서. 그래? 나도 감기몸살이 났나 봐, 끄응. 어디 많이 아픈 거야?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편도선까지 왕창 부었어. 그럼, 아이들은 어떡하지? 아, 모르겠어, 끄응, 더 이상 말도 하기 힘들어. 마음에 켕기긴 했지만 그딴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픈 몸부터 조리하고 보자 싶어 침대로 파고들었다. 얼마 뒤였다. 다녀왔습니다, 하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방문이 부러질 듯 몸을 떨었다. 역시 대책 없는 작은 녀석이었다. 어, 아빠도 아픈 거야? 아내가 앓는 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끄응, 아빠도 오늘 많이 아프신가봐. 그러자 뒤따라 들어온 큰딸마저 난감한 상황인지 침대 주변을 맴돌았다. 그나저나 니네들, 저녁도 챙겨야 하는데 끄응, 어쩐다니? 기다렸다는 듯이 큰애가 대답했다. 엄마, 우리 걱정은 말고 푹 쉬어. 세상에, 저 돌콩만 한 것이 언제 저리 철이 든 것일까. 이게 다 돈 들인 사교육 덕인가. 근데, 이어지는 말은 또 뭐람. 저녁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준비하겠다니. 아내 또한 어이가 없는지, 몸이 아파 성가셔서 그런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지들 손으로 냉장고에 있는 반찬통 하나 꺼내본 적이 없잖은가.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자 두고 보라는 듯 아이들은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일단 두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녁 준비는커녕 작은 방으로 들어간 두 녀석은 한참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없었다. 대신 싫어, 못해, 하는 작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릴 뿐. 그럼 그렇지, 오늘 따라 왜 안 싸우나 했다. 조금 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밥은커녕 이제 놀러 나가는 게 급해진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졸음이 몰려왔다. 약기운을 참지 못한 아내는 벌써 코를 고는 중이었다. 그도 아내 뒤를 따랐다. 얼마나 잤을까. 엄마, 아빠. 식사하세요, 하는 소리가 났다. 엉, 이게 무슨 소린가. 그와 아내는 멍한 눈으로 물음표를 교신했다. 빨랑 일어나서 식사하시라니깐요. 도대체 얼마나 멋진 저녁을 준비했기에 이 난리일까 싶어 아픈 몸을 일으켰다. 한데 이게 뭐란 말인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찬은커녕 밥공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거기 놓인 건 딸랑 컵라면 네 개뿐! 이게 니들이 차린 저녁이야? 놀란 아내가 묻자 작은 아이가 응, 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앓는 부모를 위해 생애 처음으로 장만한 식사. 거기에 의미를 두는지 아내는 감격에 겨워 와, 진짜 맛있다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물의 양이 모자라 짜고 면발마저 팅팅 분 것이었지만 젓가락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먹다 보니 궁금했다. 5분이면 족할 이걸 갖고 왜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거냐? 그러자 또 작은 녀석이 그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메뉴는 빨리 정했는데 누나가 라면 값을 반반씩 내자잖아, 용돈도 많이 받으면서. 그래서 네가 적게 내려고 떼쓴 거구나, 요 녀석, 손해 안 보려는 건 영판 제 엄마네? 그러자 곁에 있던 아내가 되쏘며 나섰다. 그래도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당신 닮은걸? 언제 아팠냐는 듯 아내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필자 소개 이상섭(시인) 1961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슬픔의 두께』『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가 있다.
「의뭉스러운 이야기 3」(시인 이재무) 2009년 8월 6일 한내댁은 후닥닥 냉물에 찬밥 말아 텃밭에서 따 온 깻잎과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고 사립을 나섰다.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산 날멩이 산밭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 중으로 콩밭을 다 매놓고 내일부터 동서네 버섯 일을 도우러 갈 참이었다. 곡식들은 농사꾼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그것들도 생명이라고 정성 들인 만큼 표를 내는 것들이라 한시도 소홀할 수가 없었다. 소출 때가 되면 허망한 것이 농사일인지라 그 생각만 하면 이까짓 거름값도 못 건지는 밭일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디 그게 맘같이 되는 일이던가. 농사짓는 이에게 땅 놀리는 일처럼 콘 죄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쇠못이 되어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햇살을, 동여맨 수건으로 간신히 버텨내며 고랑을 타고 앉아 콩밭 매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부릉부릉 하는 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냥 지나가는 차려니 하고 별 괘념하지 않고 밭 매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는데 어라, 이 차가 밭가에 세워진 채 도통 움직이질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슬그머니 호기심이 동해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밭고랑을 빠져나와 다가가 보았던 한내댁은 못 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슴이 벌렁벌렁 콩닥콩닥 숫처녀로 돌아간 것처럼 마구 뛰었고 얼굴은 번철처럼 달아올랐다. 차 안에서 새파랗게 젊은것들이 뱀처럼 엉켜 자반뒤집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말로만 듣던 ‘카섹스’란 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런 숭악한 것들을 봤나, 벌건 대낮에 저게 무슨 벼락맞을 짓이랴, 하면서도 한내댁은 소주 먹은 듯 마음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호미를 밭고랑에 팽개치고 급한 일이나 만난 것처럼 발걸음을 재게 놀려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남편은 한갓지게 대청에서 대자로 누워 서까래가 들썩이도록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한내댁은 자는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여보, 여보, 저기 우리 밭길서 젊은것들이 차 안에 누워 그 짓을 하고 있슈. 그게 서울것들 유행이라든디 우리도 한번 해 봐유.” “아니, 이 여편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여, 뭐이 어째, 카섹스 그걸 해 달라고, 미쳤나.” 하면서도 남편은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임자, 그게 그렇게 부러워, 까짓것 하지 못할 것 뭐 있어, 하자구 그런디 어디서 혀, 경운기서 할까. 가마니나 두어 장 깔아 봐.” 염천의 햇볕이 벌겋게 마을의 지붕을 달구고 있었다. ■ 필자 소개 이재무(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3년 《삶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벌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푸른 고집』『저녁 6시』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생의 변방에서』『우리 시대의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공저)『사람들 사이에 꽃이 핀다면-이재무의 시 읽기』 등이 있다. 난고(김삿갓)문학상과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의뭉스러운 이야기 2」(시인 이재무) 2009년 8월 5일 보령댁은 일 년 한두 번 서울에 있는 딸네 집에 갈 때마다 버릇처럼 큰 보따리를 이고 간다. 보따리 속에는 고향 산천에서 난 온갖 나물이 들어 있다. 산도라지며 더덕, 고사리, 곰취, 냉이, 달래, 머위, 산미나리, 씀바귀, 엉겅퀴, 느릅치, 두릅, 삿갓나물 등속 그때그때 철 따라 나는 산지 나물을 뜯어 싸가지고 가는 것이다. 딸 내외는 그때마다 몇 푼이나 한다고 그 고생이냐고 질색이지만 어찌 이것을 값으로만 매길 수 있겠는가. 불쑥 고까운 마음이 어나 아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령댁은 아직 한 번도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걸 딸네 집에 가기 전에 지하철 지하도에 좌판으로 깔아 놓고 팔기로 하였다. 외손주 외손녀 주전부리값이나 할 요량이었다. 오후 내내 쭈그려 앉아 있자니 무릎 팔다리가 쑤셔 오고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래도 애쓴 보람이 있어 저녁 퇴근 시간 즈음해서는 거의 절반가량이 팔려 나갔다. 이제 좌판을 거둬들여야 하나 기왕 벌인 판인데 더 기다려 마저 팔아야 하나 하고 속으로 셈하고 있을 때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한 청년이 다가와 흥정을 붙여 왔다. “저기, 할머니 여기 있는 나물 전부 사 드릴게요. 값이 얼마에요?” 아니 요즘 세상에도 이런 건강한 싸가지가 다 있나? 보령댁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올려다보니 깎아놓은 배처럼 잘생긴 청년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총각이 알아서 주셔유.” “아니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할머니 보기에 안돼 보여서 사 드리는 거예요.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총각이 알아서 달랑게요. 냄새스럽게 워치게 값을 말한댜 떨이를 가지고.” “알았어요. 할머니 오천 원이면 되겠어요? 오천 원 드릴게 여기 있는 거 전부 싸 주세요.” 보령댁은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니, 이런 괘씸한 싸가지를 봤나. 이게 오천 원밖에 안 돼 보인단 말여, 아무리 떨이라도 그렇지. 늙은 삭신으로 저걸 캐오고 다듬느라 사흘이나 걸렸구먼. 사흘 품삯이 겨우 오천 원이란 말여. 생긴 것은 기생오래비같이 멀쩡해가지고 말은 똥구녕같이 냄새나게 헌다냐. 보령댁은 자신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냅둬유, 개나 주게.” 서울 청년은 멀뚱멀뚱 보령댁을 쳐다보며 어안이 벙벙하고 있었다. ■ 필자 소개 이재무(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3년 《삶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벌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푸른 고집』『저녁 6시』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생의 변방에서』『우리 시대의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공저)『사람들 사이에 꽃이 핀다면-이재무의 시 읽기』 등이 있다. 난고(김삿갓)문학상과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