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로네시아 말겨레 태평양 넓은 지역에 흩어져 쓰이고 있는 일천여 언어들은 오스트로네시아 말겨레에 든다.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에 있는 마다가스카르섬에서부터 남태평양의 동쪽 끝 이스터섬에 이르는 지역에 2억7천만 명 정도가 쓰고 있다. 한때는 말레이-폴리네시아 말겨레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말겨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말이 말레이말인데,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브루나이 등 네 나라와 그 이웃지역에서 2억 명 이상이 사용한다. 말레이시아말과 인도네시아말은 물론 같은 말레이말이지만, 요즘 들어 낱말이나 문법구조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오스트로네시아 말겨레에 드는 몇몇 말을 살펴보자. 필리핀은 지금 영어를 주로 쓰지만, 그들의 토박이말은 오스트로네시아 말겨레에 든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타갈로그말인데, 영어와 함께 필리핀의 공용어이며, 현재 필리핀 학교교육에서 강조하고 있다. 뉴질랜드 하면 우리는 마오리족을 떠올린다. 이들이 쓰는 마오리말은 뉴질랜드의 토박이말로서 지금도 십만 명 가까이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바람이 치던 바다’로 시작하는〈연가〉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po karekare ana’는 바로 마오리말로 된 노래다.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하와이섬에서 쓰이는 토박이말이 하와이말이다. 이천 명 정도가 영어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하와이말은 다른 오스트로네시아말처럼 말소리가 매우 단순하다. 홀소리는 다섯 가지만 있고, 닿소리는 h, k, l, m, n, p, w만 있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큰 바위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은 산골짜기 어느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년과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을 한 위인은 장군도 아니었고 시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바위를 닮아 살아온 주인공 자신이었던 셈이다. 사람은 자신이 놓인 자연을 닮아가면서 살아간다. 경기도 두물머리(양수리) 사람들의 삶을 그린 시인 권대응은 “양수리 사람들은 강을 닮으며 살아간다”고 하였다. 땅이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금강산 기행>을 쓴 이광수는 구름과 안개가 걷힌 금강산 비로봉에 지극히 평범한 덕을 지닌 ‘배바위’를 보고는 소설가다운 상상을 자연스럽게 펼쳐낸다. 배바위는 뱃사람들이 바위를 기준으로 삼아 배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만장봉두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 푸른 바닷길을 열어주니 얼마나 큰 덕을 쌓는 일인가. 성인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한 덕이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평범한 덕이다.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큰 바위 이름은 모양이나 기능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우뚝 선 모습의 ‘선바위’, 병풍처럼 펼쳐 있는 ‘병풍바위’, 칼날처럼 날카로운 ‘칼바위’ 등이 그러하다. 특히 강원 산간 마을에는 이런 이름이 더 많다. 이런 이름들에는 큰 바위 얼굴처럼 자연을 닮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 배어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애기똥풀 풀꽃이름에 ‘똥/오줌’이 붙는 것은 좀 심하다 싶지만,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으면 노란색 젖 같은 액즙이 나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또한 오뉴월에 꽃이 피는데, 노란 꽃잎 넉 장이 붙어 있는 작은 꽃모양도 예쁘게 싸 놓은 애기똥을 연상시킨다. ‘젖풀/ 씨아똥/ 까치다리’라고도 부른다. 한자말로는 ‘백굴채’(白屈菜)라고 하여 배가 아플 때 진통제로 쓰거나 짓무른 살갗에 발랐는데,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젖풀을 바르면 사마귀가 줄어든다는 말도 들어봤을 것이다. 요즘 들어 음식이나 새집증후군 따위 갖가지 환경문제로 말미암아 ‘아토피’란 병증이 극성을 부리는데, 이 풀이 치료재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애기들의 아토피를 치료하는 데 이 풀이 긴요하게 쓰이는 것을 보면 이름을 붙인 옛 어른들이 선견지명이 있는 것도 같다. 시골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우리가 관심도 없던 풀꽃이어서 동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풀이름이다. 시 소재로도 흔히 쓰인다.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안도현 ‘애기똥풀’) 하찮은 것 같아도 당당하다고 노래한다. “시궁창 물가에 서서도/ 앙증스레 꽃 피워 문/ 애기똥풀 보아라/ 어디 연꽃만이 연꽃이겠느냐.”(복효근 ‘애기똥풀꽃’) 그렇다. 장미나 백합만 꽃이 아니고, 애기똥풀이나 할미꽃의 아름다움마저 깨닫게 되는 것이 철들고 나이 드는 것의 소중함 아닐까.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애기똥풀]
슬기와 설미 우리 토박이말에는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에 쓸 낱말이 모자라 그 자리를 숱하게 중국 한자말로 메운다. 이런 형편은 우리말이 본디 그렇게 돼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머리를 써서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우리말을 팽개치고 한자말만 쓴 까닭이다. 마음이 있으면 말은 생기는 법인데 그들은 우리말에 마음을 주지 않았다. ‘슬기’와 ‘설미’는 그런 역사를 뚫고 이치를 밝히며 올바름을 가리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토박이말이다. ‘슬기’는 임진왜란 뒤로 가끔 글말에 적힌 덕분에 무서운 한자말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살아남아 우리 품까지 안겨왔다. 아직도 ‘슬기’보다는 ‘지혜’를 즐겨 쓰는 이가 많지만 국어사전들이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으며 사물을 처리하는 방도를 옳게 잘 생각해내는 재간이나 능력”이라고 뜻풀이를 똑똑히 달아 올림말로 실어놓아서 갈수록 널리 쓰일 것이다. ‘설미’는 15세기 끝 무렵에 엮은 〈악학궤범〉에 한 차례 글말로 적힌 바가 있지만 여태 국어사전에는 오르지 못한 말이다. 다만 ‘눈’의 매김을 받으면서 ‘눈썰미’로만 국어사전에 올라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설미’는 “이런저런 사정을 두루 살펴서 올바르고 그릇된 바를 제대로 가늠하는 마음의 힘”이라는 뜻을 지닌 빼어난 우리 토박이말이다. 악학궤범에는 나쁜 것을 쫓는 서낭 ‘처용’의 모습을 추켜세우면서 “설 모도와 有德신 가매”라 했다. “처용이 ‘설미’를 모아 가지고 있어서 가슴이 유덕하다”는 뜻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쓰겁다 맛을 나타내는 말로 ‘쓰다, 달다, 짜다, 시다, 맵다’가 있다. 생물에서는 맛감각을 넷으로 나누고 ‘맵다’를 포함하지 않지만 우리 느낌으로는 ‘맵다’도 맛감각에 넣는다. ‘매운맛’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들 말에 ‘-갑, -겁, -굽’을 결합하면 ‘어떤 느낌이 있다’는 뜻이 더해진다. ‘차다’와 ‘차갑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갑, -겁, -굽’의 뜻은 남북이 같지만 결합 됨됨이는 차이가 있다. 남북에서 쓰이는 말을 견줘보자. 쓰겁다, 달갑다, 짜갑다, 짜굽다, 시굽다(북) 쓰굽다, 달갑다, 짜겁다, 짜굽다, 시굽다, 매굽다(남) ‘달갑다’는 좀 다른 뜻으로 쓰이는데, 남북 모두 ‘미각으로 단맛이 있다’는 뜻으로는 쓰이지 않고, ‘마음으로 달게 느끼다’, ‘마음에 들다’는 뜻으로 쓰인다. ‘쓰겁다’를 ‘쓴맛이 있다’는 뜻으로 쓰는 것은 남북이 같지만, 북녘에서는 ‘달갑다’의 반대말로도 쓴다. “쓰거운 얼굴을 했다”에서 ‘쓰겁다’는 ‘마음에 달갑지 않고 언짢다’는 뜻이다. ‘쓰다’도 비슷한 뜻이 있어서 그 차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쓴소리’와 ‘쓰거운 소리’를 비교해 보면 역시 ‘-겁’에서 차이가 나는데, 쓴소리는 ‘마음에 달갑지 않은 소리’, ‘쓰거운 소리’는 ‘마음에 달갑지 않은 느낌이 드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쓰다’가 확정적인 것에 비해 ‘쓰겁다’는 ‘어떠한 것 같다’는 정도로 확정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아메리카 토박이말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로 쓰는 언어는 영어다. 그러나 캐나다 일부 지역에는 프랑스말도 공용어로 쓰인다. 미국은 영어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여러 언어들이 쓰인다. 스페인말, 프랑스말, 독일말, 중국말을 쓰는 인구가 많으며, 우리 동포들은 한국말을 쓴다. 한때 펜실베이니아주는 독일말을, 뉴멕시코주는 스페인말을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토박이말이 있다. 흔히 아메리카 인디언말이라 한다. 먼저 북극 가까운 지역의 에스키모-얼류트 말겨레를 들 수 있다. 에스키모말은 한 문장이 한 낱말로 되어 있는 매우 특징적인 말로 알려져 있다. awlisautissarsiniarpunga라는 낱말은 ‘나는 낚시줄에 알맞은 것을 찾고 있다’라는 뜻이다. 아메리카 토박이말은 학자마다 분류하는 방법이 갖가지다. 말 가짓수도 몇 백에서 몇 천 가지라 할 정도로 많거니와 문법구조도 각각 다르고, 또한 서로 친족관계를 밝히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간혹 이들을 아시아 지역의 말들과 계통이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이렇다고 내세울 증거가 없다. 문제는 이 말들이 영어에 눌려 거의 소멸했으며, 몇몇 남아 있는 말마저도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인류의 귀중한 문화를 품고 있는 언어유산이 없어진다는 것은 안타깝다. 북아메리카 지역의 대표적인 토박이 말겨레에는 알곤키 말겨레가 있다. 그리고 나-데네 말겨레도 있는데, 나바호말이 널리 알려진 편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엄리대수와 아시 ‘호태왕비문’에서, “(추모왕이 하늘의) 시킴을 따라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순행하여 내려오는데, 부여 땅 엄리대수를 지나가게 되었다”라는 기록은 흥미로운 풀이를 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안시성의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엄리대수’와 ‘안시’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은 황윤석의 <이재집>에 나타난다. ‘화음방언자의해’에서 황윤석은 신라 옛말에 ‘아시새’, 곧 ‘어시새’가 있다고 하였다. 그가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해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가요 <사모곡>에도 나타나듯이 우리말에서 ‘어시’는 ‘어머니’, 또는 ‘부모’란 뜻을 지닌다. 또한 경남 함안의 옛이름이 ‘아시량’이다. 안시성을 봉황성이라 부른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윤석은 ‘봉황’은 ‘부헝’(부엉이)을 한자음으로 적은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풀이는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어머니’나 ‘부모’ 또는 ‘크고 평안함’을 뜻하는 토박이말 ‘아시’를 ‘안시’라는 한자음으로 적었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적이다. 또한 <삼국사기> 동명성왕 조에서는 이 강의 이름을 ‘엄사수’ 또는 ‘개사수’라고 표현하였다. ‘엄사’는 ‘엄리’보다 ‘어시’에 더 가깝다. 이처럼 ‘엄리대수’와 ‘아시’가 동일계 어휘라고 한다면, 삼국의 언어가 매우 동질적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비록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 세력은 달랐다고 할지라도 우리 조상들의 말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땅이름이 보여주는 셈이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원추리 산과 들에 흔히 나서 봄나물로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는 ‘원추리’는 한자이름 ‘훤초’(萱草)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곧 ‘훤초’에서 편한 발음인 ‘원초’로, 모음조화로 ‘원추’로, 여기에 ‘나리/ 싸리/ 보리 …’들과 같이 ‘리’가 붙어 원추리로 부른 것이 아닐까 한다. 이는 마치 백일홍(百日紅)이 변해서 ‘배롱’으로, 한자말 백채(白寀)의 중국 발음 ‘바이차이’가 ‘배추’로 변한 것과 같이 풀이할 수 있는데, 더 거슬러 오르면 그 반대일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원추리의 순우리말은 ‘넘나물’이다. 입이 넓고 길게 퍼진 것으로 말미암아 ‘넓〉넘’의 과정을 거친 듯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광채(廣菜)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넙치’를 ‘광어’로 부르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이다. 이미 16세기 〈훈몽자회〉에서는 훤(萱)은 ‘넘B믈’로 쓴 적이 있건만, 17세기 〈산림경제〉에는 ‘원츄리/ 업?믈’로 나온다. 원추리 꽃은 진한 노란색인데, 산수유나 개나리의 노랑이 그렇듯 강력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아이를 밴 부인이 사내아이 고추 모양을 한 원추리 꽃봉오리를 지니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의남초’(宜男草)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근심을 잊게 하는 꽃이라 하여 ‘망우초’(忘憂草)라 일컫기도 했다. 이처럼 꽃도 보고, 나물로 먹고, 아들도 낳게 해 주고, 걱정도 없애 주니 예전에 장독대와 뒤뜰에 그렇게 심었나 보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원추리]
한글과 우리말 철든 사람이면 ‘한글’과 ‘우리말’의 뜻을 가리지 못할 리는 없다. 한글과 우리말은 그만큼 뜻이 아주 다른 말이다. 그러나 요즘 알 만한 이들이 이들 낱말을 자주 뒤섞어 쓴다. 무엇보다 한글과 우리말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빛나게 갈고닦아야 한다고 소매를 걷고 나선 이들 가운데서 그런 사람을 자주 만나니 안타깝다. 한글은 우리 글자 이름이다. 본디 ‘백성 가르치는 바른 소리’(훈민정음)라 불렀으나 줄여서 ‘바른 소리’(정음)라 했는데, 중국 글자를 우러르는 선비들이 사백 년 동안 ‘상스러운 글자’(언자·언문)라 부르며 업신여겼다. 대한제국에 와서 ‘나라 글자’(국자·국문)라 했는데, 주시경 선생이 ‘한글’이라 부르자 제자들이 1927년에 <한글>이라는 잡지를 펴낸 뒤부터 널리 퍼졌다. 남북이 갈라지자 북에서는 한글이 ‘한국글자’로 들린다면서 굳이 ‘조선글자’라 한다. ‘우리말’은 우리 겨레에게서 나고 자란 토박이말이다. 우리 겨레의 마음에서 씨앗이 생겨 겨레의 삶에서 움이 트고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기에 그대로 우리 얼의 집이다. 그러나 토박이말로만 살아갈 수는 없어 오가며 삶을 주고받는 이웃 겨레의 말도 들여오게 마련이고, 이렇게 들온 남의 말도 제대로 길이 들면 ‘들온말’(외래어)로서 우리말이 된다. 이런 우리말의 이름을 남에서는 ‘한국어’라 하고 북에서는 ‘조선말’이라 하지만 예로부터 배달겨레의 말이란 뜻으로 ‘배달말’이라 했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남새 ‘남새’는 북녘말이 아니다. 대체로 북녘말이라면 ‘북녘에서 쓰임이 확인되거나 북녘 사전에 있는 말 가운데 남녘 사전에서 확인되지 않는 말’이다. 남새는 남북 두루 쓰고 사전에도 실렸으므로 북녘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다루는 까닭은 그만큼 남새가 남녘에서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 거리에는 ‘남새 상점’이란 간판이 흔히 보이고, ‘남새국, 남새닭알말이, 남새말이빵, 남새볶음, 남새비빔국수, 남새전골, 남새지짐’처럼 각종 음식 이름에도 두루 쓴다. ‘채소·야채’도 〈조선말대사전〉에 있으나 토박이말인 남새를 쓰도록 권장하고, ‘채소·야채’에서는 뜻풀이를 하거나 예문을 달지 않았다. 남녘에서도 남새를 안 쓰는 것은 아니지만 간판이나 교과서·공문서·언론 등 공식적인 곳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채소에서 뜻풀이를 하고, 남새는 채소 풀이를 보도록 하는 식이다. 채소를 기본 단어로 본 것이다. 교과서와 일상생활에서 잘 볼 수 없으니 점차 남새를 안 쓰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남새가 북녘에만 남을 것은 시간문제다. 남새와 채소는 뜻과 쓰임이 같아 결국 하나만 남게 될 것이다. 남새를 살리자면 단어 쓰임에서 구별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일본식 한자말 ‘야채’라는 말이 최근 요리 이름에 많이 쓰이는데, 음식 이름에서 야채 대신 남새를 써 보면 어떨까? ‘남새샐러드, 남새수프, 소시지남새볶음’처럼 말이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