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뇌리·물퉁게 몸이 피곤하면 입술 주위에 물집이 생길 때가 있다. 이 물집을 ‘구순포진’(口脣疱疹)이라고 한다. 참 어려운 말인데, 바로 ‘입술 물집’이다. 한 낱말로 붙여서 쓸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입술 물집’에 해당되는 남녘말로 ‘입치리’, 북녘말로 ‘입뇌리·물퉁게’가 있다. ‘입술물집’은 두 낱말이 연결되어 한 낱말로 쓰기에 좀 이상하다면, 이들 말을 써 보면 어떨까? ‘입치리·입뇌리·물퉁게’의 원인은 ‘헤르페스 바이러스’로 알려졌다. ‘헤르페스’(herpes)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온 영어인데 ‘포진, 물집’을 뜻한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물집균’이라고 하겠다. ‘바이러스’는 워낙 익숙하기 때문에 ‘균’으로 바꾸기 곤란하다면, ‘물집 바이러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집균’은 치료된 뒤에도 감각 신경에 남아 있다가 몸의 면역 기능이 떨어지면 활동을 시작해 물집을 만든다고 한다. 입술 주변이 아닌 가슴이나 등에 물집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대상포진’이라고 한다. ‘대상’(帶狀)은 ‘띠 모양’을 뜻한다. 그러니 ‘대상포진’은 ‘띠처럼 물집이 여럿 난 것’을 말한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지석묘’(支石墓)를 ‘고인돌’로 바꾸었는데, 고인돌이 ‘돌로 돌을 고였다’는 뜻으로 ‘고이다, 괴다’와 관계가 있다는 것만 알면, 욀 필요도 없고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익숙지 않은 말을 쉬운 말로 고쳐서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와 외국어를 섞어서 씀으로써 얻는 이득이 적은 까닭이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집 ‘집’은 사는 집, 가족이란 뜻에다, 지아비·지어미(집아비·집어미)처럼 부부, 집사람·안사람처럼 아내를 일컫는 말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집안이나 그 집 사람을 부르는 말에 택호·가호가 있다. 흔히 안주인의 친정 마을 이름을 따 ○○댁·○○양반처럼 안·바깥 주인을 일컫고 불렀다. 삼대가 사는 집이라면 택호만도 셋은 된다. ‘마실댁·싹실댁·한들댁’이 그런데, 새댁·새사람 시절을 지나야 택호가 붙는다. 나아가 월남댁·태국댁·연변댁·새터댁 …으로도 부를 만한데, 공동체나 두레가 사라지고 아파트살이, 맞벌이 부부가 많아진 요즘엔 마냥 사람 이름이나 멋없는 직업·직책 이름만 나돈다. ‘집안’이 곧 가문인데, 이를 이르는 말이 숱하다. 본디 자신이 놓인 처지 따라 쓸 말이 달라지는 까닭에 생긴 이름들이다. 본집, 작은집, 큰집, 친정집, 시집·시갓집, 사돈집/사가, 처갓집/가시집, 외갓집, 고모집, 이모집들이 그것이다. 집은 무리(黨)를 이루므로 본당·친당·모당·시당·처당·척당·취객당으로 일컫기도 한다. 여기서 척당(戚黨)은 성이 다른 가까운 핏줄을 이른다. 척당·척속에는 모당, 곧 외갓집·이모집은 물론 고모집과 진외가·증외가(할머니 쪽 친정)처럼 외척·내척을 싸잡는 까닭에 무리가 많게 된다. ‘사돈의 팔촌’이란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는 얘긴데, 전날 무척 번성한 집안이어도 두루 삼백을, 요즘엔 백 사람을 넘기기도 어렵다. 친척이라면 같은 성 곧 일가(친)와 성이 다른 피붙이(척)를 아우르고, 인척(姻戚)은 혼인으로 맺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빌레와 바위 제주의 땅이름 형태는 뭍과 다른 점이 많다. ‘빌레’는 제주말로 ‘너럭바위’를 뜻한다. 남제주 대정 지역의 ‘넙은빌레·빌레못·답단빌레’ 등은 너럭바위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빌레’의 표준형은 ‘별내’다. 별내는 비탈을 뜻하는 ‘별’에 ‘장소’ 또는 ‘물’을 뜻하는 ‘내’가 합쳐 된 말이다. 제주에서만 ‘빌레’가 나타나 낯선 땅이름처럼 보인다. 땅이름 변화에는 지역에 따른 말소리 차이가 큰 영향을 끼친다. 고개를 뜻하는 ‘모르’나 ‘머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뭍을 뜻하는 ‘고지·코지’와 같은 말들도 받침이 없는 형태인데, 이는 제주말의 소리마디에 받침을 잘 안 쓰거나 유성음을 많이 쓰는 경향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제주 방언에는 ‘르·앙·엉’으로 끝나는 명사가 많다. 또 뭍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탓에 이 지역 말에는 옛말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특징이다. 비탈의 ‘별’과 낭떠러지의 ‘낭’이 합쳐져 ‘벼랑’을 이루듯, 비탈진 곳의 바위만을 별도로 ‘빌레’라고 부른 것은 땅이름의 지리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셈이다. 제주에서 빌레와 바위는 유의어로 쓰이는데, 바위는 간혹 ‘방구·방귀’로 불리기도 한다. 바위가 많은 마을인 남원읍 신흥리는 ‘방구령’이라고 불렸다. 이 말은 생리현상인 방귀를 연상하게 하므로, 한자 표기에 거북 구를 쓰다가, 아예 신흥리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마을 서남쪽에 앞빌레가 서 있는데도 생소한 땅이름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보여준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따발/따발총 6월25일이다. 최근 남북관계가 많이 좋아졌고 교류도 활발하지만, 57년 전 이날을 생각하면 우리는 겨레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따발총’이 쓰였다. 따발총은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소련제 기관 단총이다. 따발총에서 ‘따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일부 남녘 사전에서는 따발총과 비슷한 말로 ‘다발총’(多發銃)을 들기도 하는데 ‘따발’과 ‘다발’(多發)은 관련이 없다. 따발총이 처음 실린 남녘 사전은 1961년 12월 발행된 〈국어 대사전〉(이희승 편)이다. 최신 낱말을 상당히 빨리 실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북녘 사전에서는 62년 10월 발행된 〈조선말 사전〉(5)에서 확인된다. ‘따발’은 ‘똬리, 또아리’의 함경도 방언이다. 따발총에는 총알을 길게 연결한 꾸러미를 넣을 수 있도록 둥글납작한 탄창이 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똬리, 또아리’와 닮았다고 해서 따발총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따발총이라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말을 빨리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말하는 것을 입에서 말을 발사하는 것으로 보면, 그 속도가 빠르고 연속적이라는 점에서 따발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똬리와 또아리는 ‘물동이와 같은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얹는 물건’, ‘구렁이가 몸통을 둥글게 빙빙 틀어 놓은 모양’을 뜻한다. 현재 ‘똬리’는 표준어로, ‘또아리’는 비표준어로 치는데, 발음으로 잘 구별되지 않고 둘 다 널리 쓰인다는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촌수 갈라져 나온 곁쪽(방계)과 피마디를 따질 때 쓰는 말이 촌수다. 직계 위아래는 촌수 아닌 대수로 따진다. 방계는 애초 한집안이었다가 딴살림을 차려 새 집안을 이룬다. 가야·백제·신라·고구려가 맞서던 서기 500년대에 산 어른을 시조로 모신 집안이라면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아 50대 남짓에다, 그 아들이 여럿이라면 지금까지 갈라진 촌수가 100촌 안팎일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어미와 지아비는 무촌이고, 아비와 아들딸 또는 어미와 아들딸 사이가 1촌, 형제자매 사이가 2촌이다. 가까운 촌수라면 ‘삼·사·오·육·칠·팔·구·십’촌 정도인데, 두루 걸림말이 있다. 그 씨앗은 종(從·때론 당)이고, ‘재(再)·삼(三)·사(四)’를 앞에, ‘조(祖)·숙(叔)·형·제 …’를 뒤에 두어 관계를 구분한다. ‘종’ 앞에 ‘고(姑)·외(外)·이(姨)’를 둔 말이 고종·외종 들이다. 요즘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촌수말을 부름말이나 걸림말로 쓰는 사람이 적잖다. 특히 ‘삼촌’을 부름말로, ‘사촌’을 걸림말로 쓰는 경향이 그렇다. 아저씨나 친근하게 아재·외아재(외숙)로, ○○아버지(백·숙), 형님·아우( 종형·종제)로 할 것을 촌수로 부르고 일컫는 사람을 어른들은 난 데 없고 본 데 없다고 했다. ‘ 삼촌!’이란다면 ‘세 치야!, 세 마디야!’가 되고, 그 촌수에 드는 이만도 종조·백·숙·조카 등 위아래로 여럿인 까닭이다. ‘사촌’도 ‘종형제/동당형제, 내종/고종·외종·이종’처럼 걸림말을 갖추고 있으나 쉬운말은 아닌 게 문제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삿갓봉과 관악산 삿갓처럼 생긴 봉우리는 보통 ‘삿갓봉’이라 불린다. 우리나라 갓은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였다. 신분이 높은 이는 ‘감투’를 썼으며, 별감이나 서리, 또는 광대들은 ‘초립’을 썼다. 또한 떠돌이는 ‘패랭이’를, 군졸들은 ‘전립’을 썼다. 경기 여주의 삿갓봉은 스님이나 유랑인들이 쓰는 넓은 모양의 삿갓을 닮은 봉우리다. 또한 경북 문경의 옛이름이 ‘관문현’(冠文縣)인데, ‘고사갈이’(高思曷伊)라고도 하였다. 갓의 유래를 성호 이익은 ‘고깔’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 바 있다. 고깔은 뾰족함을 뜻하는 ‘곶’에 모자를 뜻하는 ‘갈’이 붙어 된 말로 알려졌다. 고깔은 불교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중에는 무당·풍물꾼·나장·급창들도 이를 썼다. 그런데 실학자 이덕무는 고깔과 갓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고깔과 갓은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갓’은 단지 비를 피하고자 푸나무로 만든 도구였는데, 그것이 점점 높아지고 넓어져 여러 가지 형태로 변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갓’의 쓰임이 변하면서 땅이름에도 새 의미가 덧붙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관악산’이다. 풍수를 따르는 이들은 ‘관악산’에 ‘갓’이 들었으니, 그 기슭에 국립대학이 들어서고, 또 남쪽으로는 정부 청사가 설 수 있다는 말을 즐겨 한다. 그런데 이덕무는 “갓이 너무 크면 항우라도 짜부라지고, 갓이 망가지면 학자라도 망신스럽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벼슬아치·학자님들 두루 새겨들을 말일 듯하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가시집 '가시집’은 ‘아내의 집’, ‘처가’를 일컫는다. 북녘에서는 ‘가시집’이 처가와 같은 말이고, 한자말인 처가보다는 고유어인 가시집을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반면 남녘에서 ‘가시집’은 ‘처가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 여기고,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도 않는다. 남녘에서 잘 쓰이지 않는 까닭은 ‘낮춤’의 뜻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시집에서 ‘낮춤’의 느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가시내, 가시나’의 영향으로 보인다. ‘가시’에서 ‘가시내’가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시’는 조선 초에도 쓰이던 말로 ‘아내’를 뜻한다. “처(妻)는 가시라”와 같이 본디는 명사였지만 점차 쓰임이 줄어들어 이제는 앞가지로 쓰인다. 가시집을 ‘처가의 낮은 말’로 본 것은〈큰사전〉(1947년)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조선말 사전〉(1960년)에서 ‘처가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풀이했다가〈현대조선말사전〉(제2판·1981년)에서는 ‘안해의 친정집’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사이 북녘에서 인식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해’는 ‘아내’의 옛말이면서 북녘에서는 ‘문화어’(표준말)로 쓰인다. ‘가시-’가 들어간 남북 지역어를 보면, 중부를 제외한 북부와 남부 지역에서 두루 확인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녘 사전에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가 있는데 남녘 사전에 없는 것은 ‘가시-’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이를 보여준다. 상황에 따라 ‘가시내, 가시나’도 ‘낮춤’의 뜻 없이 쓰이기도 하므로, 앞가지 ‘가시-’를 살려 써 보면 어떨까?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