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과 땅이름 땅이름에 나무를 뜻하는 말이 들어 있는 경우는 비교적 많다. 나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잣나무’와 ‘소나무’다. 잣바우덕·잣방산·잣밭등·잣밭골·잣고개 등은 ‘잣’을 고유어로 나타낸 것이며, 백촌리·백곡·백성동 등은 ‘잣’의 한자어 ‘백’(柏)을 쓴 것이다. 소나무와 관련된 땅이름도 비교적 많다. ‘솔고개·솔모루’ 등이 그것이며, ‘송악’(松嶽)에도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 ‘송’(松)이 들어 있다. 그러나 ‘송악’의 ‘송’이 ‘소나무’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괴산’(槐山)에 들어 있는 ‘괴’도 한자의 본뜻인 ‘홰나무’에서 온 말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땅이름의 유래를 확인하려면, 그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짐작할 만한 충분한 단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버들’와 관련된 이름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버드나무는 우리나라 각지에 분포하며, 민요나 옛시조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무인데도 그와 관련된 땅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한 추론 가운데 하나는 ‘버드나무’가 산스크리트어에서 왔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재집>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버들가지를 ‘비탁가지’라고 하였다고 풀이한 바 있다. 평양을 ‘유경’(柳京)이라 한 것과 충남 해미의 개심사 들머리 ‘버드실’처럼 일부 땅이름에 ‘버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라는 정감 어린 시조에도 나오는 버드나무가 땅이름에 덜 쓰이는 까닭은 땅이름의 발달 과정에서 외래어가 덜 쓰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밸과 마음 ‘밸’은 배알의 준말로, ‘창자’를 뜻한다. 또 ‘배짱’ 혹은 ‘속마음’을 일컫는다. 같은 뜻으로 쓰지만 실제 쓰임에서는 남북 차이가 있다. ‘배짱을 속되게 혹은 낮춰서 이른다’는 점에서는 남북이 같지만, 다른 뜻에서는 쓰임에 차이가 있다. 남녘에서는 ‘밸’을 ‘창자의 비속어’, ‘속마음의 낮춤말’로 쓰는데, 북녘에서는 비속어나 낮춤말로 쓰지 않는다. 다음에서 ‘밸’은 낮춤의 뜻 없이 ‘속마음’의 뜻으로 쓰였다. “사실 지금 둘의 밸은 서로 다르다. 리인수는 어떻게 하든지 유족한 사람들끼리만 따로 모여서 조합을 조직해보려는것이 진심이지만 서기표의 진심은 그렇지 않다.”(석개울의 새봄) “웃는 낯에 침을 못 뱉는다고 조봉애가 부드러우니 이 락후분자도 속밸과는 달리 말소리가 좀 순해졌다.”(축원) 또한, 북녘에서는 ‘밸’을 ‘노엽거나 분한 마음’의 뜻으로도 쓴다. 북녘에서는 ‘밸이 곤두서다, 밸이 동하다, 밸을 삭이다, 밸을 참다’ 등으로 쓴다. 반면, 남녘에서는 ‘밸이 뒤틀리다, 밸이 꼴리다’와 같이 동사와 함께 관용 표현으로 쓰인다. 이처럼 차이가 나게 된 원인은 ‘밸’이 북녘에서 많이 쓰이다가 ‘분한 마음’을 뜻하는 낱말로 정착했고, 남녘에서는 잘 쓰이지 않아서 관용 표현으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속밸’은 ‘속에 품고 있는 비뚤어진 마음씨’를 뜻한다. ‘똥밸’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버티는 성미’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젖밸, 울뚝밸’은 남북이 같이 쓴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일터 말 집안을 넘어서면 일터와 일자리와 일벗이 있다. 사회를 꾸리는 온갖 동아리가 여기 든다. 예나 오늘이나, 개인·경영자, 대선후보랄 것 없이 일자리 만들기를 첫손으로 꼽는데, 집안·사원·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인 까닭이다. 일자리·일터·일벗과 거래하는 이가 ‘손님’이다. 손님은 호칭·지칭 두루 쓰는 말이고, ‘고객’은 지칭일 뿐인데, 거기다 ‘님’을 붙여 부른다. ‘님’은 아무 말에나 붙어서도 그를 높이는 구실을 하는 부닥방망이와 같다. 일터 말은 비교적 쉽다. 직책·직위·이름을 부르면 되는 까닭이다. 일본 등 직책·직위만 생짜로 부르는 쪽도 있는데, 우리완 맞지 않아서 기분이 껄끄러워지고 정나미가 떨어진다. 일터에서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성명·직책·직위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게 자연스럽고 편하다. 아랫사람에겐 ‘님’자를 꺼리지만, 인색해야 할 아무 까닭이 없다. 다만 ‘성+씨’, ‘이름+직책·직위+님’은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분야에서 나이·지위·역량 따위가 앞선 이를 ‘선배’라 부른다. 격식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정답고 편한 느낌을 준다. ‘동지’는 이념이 실린 말로서 부를 때는 동급 이하에 쓰이며, ‘동무’(벗)는 걸림말이지만 북녘에서는 부름말로도 쓴다. 두루 주로 ‘성’과 어울린다. 일터에서 이제 ‘미스·미스터’는 우스개가 된 듯하고, 오히려 집안말 아씨·언니·형이 어울릴 때가 있다. ‘씨·군·양’은 ‘하게체’ 상대를 부를 때 어울린다. 호칭은 부르고 듣기에 편하면 된다.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껄끄럽게 되고, 껄끄러우면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고마미지’와 ‘강진’ ‘고마미지’(古馬彌知)는 전남 강진의 옛 이름이다. <난중일기>에 나타나는 ‘구미’가 ‘곶’과 같은 의미를 지녔음을 밝힌 바 있듯이, ‘고마미지’는 ‘구미’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마미지’ 이외에도 ‘송미지’(松彌知), ‘무동미지’(武冬彌知)가 더 나타난다. 최남선이 서문을 쓴 <동경통지>(東京通志)>에, ‘미지’는 바다의 물굽이가 처진 읍(灣邑)을 일컫는다고 하였다. ‘송미지’는 지금의 전북 고창이며, ‘무동미지’는 비안 북부(庇安北部·전북 군산)인데 ‘단밀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공양왕 때 지금의 경남 통영을 ‘고성’이라 부른 적이 있다. 이 고성의 옛이름이 ‘고자미동’(古資彌冬)이다. ‘미지’의 옛 발음이 ‘미디’였음을 고려한다면, ‘미디’와 ‘미동’은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형태의 말임이 틀림없다. ‘미지’는 간혹 ‘미치’로 읽히기도 하였다. <동경통지>에서는 ‘고자미동’의 ‘고자’는 ‘구지’로 바뀔 수 있으며, ‘구지’는 ‘반도’(半島)의 뜻을 갖는다고 풀이하였다. 이를 고려할 때 ‘구지’, ‘구미’, ‘미지’, ‘미치’ 등은 모두 중국 한자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토박이말 ‘곶’을 다양하게 표기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혀 무관해 보이는 말들이 어원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을 땅이름에서 찾아낼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안겨오다 ‘안겨오다’는 ‘안기다’와 ‘오다’가 합친 말이어서 남녘에서는 두 낱말로 보아 ‘안겨 오다’로 띄어 쓴다. 북녘에서는 ‘안겨오다’를 하나의 낱말로 보아서 사전에 싣고 있는데, ‘안기다’와 ‘오다’에서 온 뜻에서 파생된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그때의 오수동의 모습이 이 총각에게서 그대로 안겨오는것이다.”(갑오농민전쟁 1) “보고를 들으니 전면모가 뚜렷이 안겨오다.”(우리말글쓰기 연관어대사전) ‘오수동의 모습이 안겨온다’는 것은 오수동으로 착각할 만큼 총각의 모습이 오수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안겨온다’는 표현은 ‘이 총각을 보고 오수동의 모습을 떠올렸다’거나 ‘이 총각이 오수동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오수동을 떠올린 느낌’이 강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안겨온다’는 것은 총각의 모습에서 오수동의 모습이 떠오른 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 안기어 오는 것처럼, 인상적이면서도 뚜렷하게 연상되었다고 생각된다. ‘전면모’(全面貌)는 ‘전체의 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전면모가 안겨온다’는 것은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울창한 숲이 그림처럼 안겨온다”와 같이 어떤 풍경이 안겨온다면, ‘한눈에 환히 보이는 것’이다. “진한 감동이 마음에 안겨온다”와 같이 심적인 느낌이 안겨온다면,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것’이다. “찬바람이 안겨온다”와 같이 ‘바람이나 비, 냄새’ 등이 안겨온다면 ‘흠뻑 느껴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이름 부르기 명함 주고받기가 만남의 의례로 굳어진 지도 제법 된 성싶다. 아는 이도 신상·연락처 변동이 있다며 명함을 준다. 이름에 하는 일, 직장·직책, 전화번호·전자우편·주소가 곁들인다. 전자명함도 유행이다. ‘이름’(성명)이 사람에 버금가는 존재가 된 셈이다. 이름은 지칭·호칭으로 두루 쓰인다. 사람을 부르는 방식에는, 성과 이름 따로 부를 때, 성명을 아울러 부를 때 등 셋이 있고, 어이·야·여보 … 따위로 부르기도 한다. “홍길동·길동·홍, 홍길동씨·길동씨·홍씨, 홍길동 과장님·(길동 과장님)·홍 과장님, 홍길동 선생님·(길동 선생님)·홍 선생님.” 아이들 기준으로는 이름만 부르는 게 제일 자연스럽다. 부름토 ‘아/야’나 ‘이’는 이름만 떼어 부를 때 붙인다. ‘씨’를 붙여 직접 사람을 부를 때는 맞먹는 사이나 아랫사람이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다. 성만으로는 부름말이 못되고, ‘씨’를 붙여도 낮잡는 느낌을 주므로 삼가야 한다. 성만 쓸 때는 직함·존칭을 넣어 불러야 한다. 성만 쓰는 방식은 서양식이다. 제3자를 일컬을 때나 글에서는 성에 씨를 붙인 말도 가끔 쓰기는 한다. 부장님·선생님은 ‘성명·성’과 어울리고 ‘이름+직함, 이름+존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세기 이전에는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 택호를 지어 불렀다. ‘씨’(氏)는 20세기 이전에는 쓰이지 않던 혹 같은 존재로, 소리도 뜻도 재미가 없다. 이를 대체할 좋은 말이 ‘님’이다. 아무튼 평생 이름 하나로 불리는 시대가 됐으니 이름을 잘 짓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해오라기난초 풀꽃이나 이를 박은 사진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날 때가 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예술품도 신의 수준을 절대 따라가지 못하나니, 어쩜 이렇게 생길 수가! 할 정도로 빛깔·모양이 멋지고 신기한 것 중에 ‘해오라기난초’가 있다. 활짝 핀 모습이 날개를 펴고 나는 해오라기를 닮았다. ‘해오라비난초’라고도 하는데, ‘해오라비’는 ‘해오라기’의 경상도 고장말이다. ‘해오라기’의 ‘해’는 ‘희다’와 통한다. 이는 ‘풀’에서 ‘푸르다’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해’에서 ‘희다’가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라기’는 해오라기가 ‘해오리’로도 불린 것을 보면, ‘오리’와 연관된 말일 수 있겠다. ‘해오라기’를 백로(白鷺)로 일컫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백로·해오라기·왜가리는 다르다. 백로는 이 셋을 통틀어 이르며, 흔히 까마귀와 맞견주는 백로가 실은 중백로인데, 이 꽃은 해오라기보다는 중백로를 닮았다. 날아가는 해오라기보다 꽃이름이 더 멋진데, 실제로 그 모습까지 금방이라도 꽃대에서 날아오를 듯한 까닭이다. “해오라비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는 백석의 시 ‘늙은 갈대의 독백’처럼 동물과 식물이 소통하는 자연의 어울림을 여기서 본다. [해오라기난초]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내와 가린내 <열녀춘향수절가>에는 암행어사 이몽룡이 전라도 초읍인 여산에서 일행을 세 갈래로 나누어 떠나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한 갈래는 진산·금산·무주·용담·진안·장수·운봉·구례로 돌아드는 서리패들의 전라 좌도고, 또 한 갈래는 용안·함열·임피·옥구·김제·만경·고부·부안·흥덕·고창·장성 등을 거치는 중방 역졸패의 우도다. 그리고 한 패는 종사들로 익산·금구·태인·정읍·순창·옥과·광주·나주·창평 등지를 거치도록 하였다. 자신은 헌 파립과 망건을 의뭉하게 차리고 삼례를 거쳐 완산 팔경을 구경하며 남원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암행어사가 거쳐 간 땅이름 가운데 “한내 쥬엽졩이, 가린내 싱금졍, 숩졍이, 공북누”가 있다. 얼핏 보기에는 쥬엽졩이, 싱금졍, 숩졍이도 땅이름처럼 보이나 이들은 ‘공북누’와 함께 정자이거나 누각임이 틀림없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 나오는 ‘한내’와 ‘가린내’다. ‘한내’는 ‘크다’의 뜻을 지닌 ‘한’에 ‘내’가 붙은 말로 ‘대천’에 해당한다. 지금의 대천은 충남 보령이므로 춘향가에 나오는 대천과는 관련이 없다. 달리 말해 ‘큰 내’를 뜻하는 ‘한내’도 보편적으로 널리 쓰인 땅이름이다. ‘가린내’는 ‘한내’와는 대립적인 뜻을 갖는 말이다. 이 말은 ‘가늘다’의 다른 형태인 ‘가ㄹ.다’(‘가루’의 어원)에 ‘내’가 붙은 말이다. 곧 ‘가는내’ 또는 ‘가ㄹ.ㄴ내’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런 뜻의 ‘가린내’는 제주도 한림읍 금악리에도 있다. 비슷한 형태로 좁고 가는 골짜기를 뜻하는 ‘가는골’도 산골 마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