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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1945∼ ), ‘그 불빛’
그 불빛
회현동 굴다리 밑에서 새어나오던 그 불빛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
내 늦은 귀가 길을 멈추게 하던,
흐린 진열창에 비쳐진 그 책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던 그 불빛
그렇게 망설이다가 지고 있던 지게를 벗어 굴다리 벽에 세워두고
유리문을 들어서면,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
언제나 내가 보고 싶던 그 달의 문예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곤 했었다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
기어코 책을 사, 그날 지불해야 할 양동의 방세와 밥값 걱정 때문에 더 무거워진
등에, 다시 지게를 얹고 저만큼 걸어가면
그런 내 뒷모습을 무슨 회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
언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시 글을 쓰세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하고 물어와
나를 당황하게 했던-, 그리고 그날은 눈이 내렸던가?
거리마다 송년의 불빛들로 반짝이던 그날
청계천 노점에서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돌아오는 길
꼭 거쳐야 할 경유지인 것처럼 그 불빛을 찾아들어, 글만 쓰면 배가 고파진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제에 글을 써야 하느냐고-, 술주정 같은 푸념을 했을 때
그 서점의 여자는 묵은 책의 먼지들 털 듯 말했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 왔었고
눈앞이 아득히 흐려졌었다
그 불빛,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라는-,그 傳言.
마치 죽비처럼 내 등짝을 후려쳐, 부끄럼으로 눈 내린 밤길을 더 비틀거리게 했던-,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히 흐려질 때, 꺼내보곤 하는
회현동 굴다리 밑의
그 불빛
일용직 잡부로 나날의 연명에만도 힘에 부쳤을 그에게 시를 쓰게 했던 그 서점의 여자가 왜 나는 까닭도 없이 보고 싶은 것일까? 은유의 달팽이로 세상의 배춧잎을 기어오르며 살아야 했던 한국의 랭보 시인. 물컹, 슬픔의 덩어리가 마음의 손 가득 안겨오는 그의 시편들에는 우리가 애써 지운 아픈 근대의 시간들이 들어있다. 시인이여, 아프지 마라, 부디 더 오래 살아남아 모래알 서걱이는 시안(詩眼)을 자극해다오.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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