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별곡(鐘路別曲)
―이상과 현실, 너와 나의 따뜻한 나날을 위하여
왜 가는 것일까, 너는
또 바람은 왜 내 머릿속을
발통을 달고 지나가는 것일까
우리 걸어온 종로에서 멀리
오늘은 어제보다도 더 멀리
너를 앞세우고 가는 이 바람을
나는 왜 붙들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힘찬 날개가 없는 것일까
너와 나
어깨를 나란히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직 종로를 걷지만
종로에……
종은 이제 종각을 믿지 않기에,
옛 등걸을 헐고 콘크리트 기둥에 얹혀 사는
종각을 믿을 수 없기에
“내 이제 울기를 잊었노라”
금이 간 가슴에는 녹이 슬고
마음은 종각을 떠나 있기에, 떠난 마음이
오늘 저녁에는 종묘에 가서
죽은 황들을 왕처럼 꾸짖다가, 산보하는 길에
삼일빌딩에 이마를 부딪히고 풀이 죽어
종로 하늘에 떠 있다
바라건대 머물 숲은 없을는지
이마에 혹을 붙이고
혼자 싼 술집을 찾아가는 마음에게도,
빌딩 뒤에서 잠깐 만나 속삭이고
인적 뜸한 골목을 따라 걷는 젊은 연인에게도,
무엇보다도 아직 우리가
서로 쳐다볼 수 있을 때, 아직 우리가
젊음의 새끼줄을 붙들고 있을 때,
쉬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에게도
쉬지 않고 불어가는 바람에게도,
우리는
종각이 내려다보이는 찻집에 마주 앉아
차를
못 마시고
찻잔 위를
바람에 쫒겨 다니는 민들레 꽃씨를
메마른 눈으로 쫒는다
―내일 올 기쁨을
오늘 이미 잃었으니
갈 곳이 어딘가
밤이 오는 종로에
바라건대 머물 숲은 없을는지
생각할수록 아늑하여
숲보다 더 나은 집이 없는 것을,
이 숲에는 다만
나무 몇그루, 지금도 너는
미친바람을 만나면
종로 밖으로 날아오를 것을,
우리 함께 따뜻이
머물 숲은 없을는지
창 밖에는
싼 술에 취한 마음 혼자
종각 지붕을 타고 앉아
병소주를 켜고 있다
“해볼 테면 해봐라”
내가 만일
바람을 한 손에 쥔다면,
달리는 차들의 꽁무니에 매달려 지나가는
시간을 붙들어 세운다면,
한 손에
큰 숲을 들고 와 푸른 천지를 만든다면,
내가 만일 내가 만일
미친바람의 덜미를 붙들어
하수구에 쓸어넣어 버린다면……
“껌 하나 팔아줍쇼, 젊은 양반들”
옛노래는 식은 찻잔 위를 맴돌다
창 밖으로 나가고, 새는
텅 빈 눈에 가득
뿌옇게 번져 떠오르는 숲과 정액과
인적 뜸한 골목, 흐린 형광불빛에 떠는
아크릴 여관간판과
침침한 통로, 흰 요 위에
빨갛게 피어오르는 장미를 보고 놀라
재빨리 껌을 산다
“고맙소, 행복하게 사시우”
그러나 나는
언제나 늦는다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하고
공중 높이 떠오르지만, 그건 언제나 몽상이고
거꾸로 처박히는 내 곁을
시간은 어김없이 지나간다
빌어먹을, 행복하게 사시우?
그러나 시간을 붙들어 세운다면,
차를 마시고
찻집 골목을 따라 나가
종각 네거리
주위에 돌을 모아
돌과 함께
바람의 심장을 향해 날아간다면,
그러나 바람 옆에 허공이 있다
허공을 다친다면
허공보다는
허공에 노는 다른 새들을,
다른 새들을 찾아가는
즐거운 새들을,
그 뒤를 졸랑졸랑 따라가는
새끼들을 나는 안다
그 눈망울 눈망울에
그지없이 반짝이는 황금별들을……
“누가 우리를 복 있는 것 같아요”
새는 찻잔을 들었다 도로 놓고
고개를 짐짓 창 밖으로 돌린다
벽에는 눈이 지워진 모나리자, 그 아래
자기 항아리, 이름 모를 플라스틱 물빛 꽃 한 다발
길 건너 불빛 환한 안경가게 앞에는
방망이를 찬 사내 둘, 가로수처럼 서 있고
밤은 그 옆에서도 무심히 자리를 잡는다
아직 자리를 못 잡은 사람들은
먼 곳을, 또는
가까운 곳을 보며
바쁘게 굴러다닌다
나는 이미 보고 있었다
기다려라……기다려라
내가 보건대 종로에 길이 있다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너는 말해오지 않았는가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굴러다니는 사람들 틈에 끼어
덤으로 굴러다니는 그 무엇
용기랄까 희망이랄까
온몸으로 굴러다니다보면
종로에 길은 있으리라
너에게도
나에게도, 괴로우나 바쁘게 굴러다니는
돌들에게도
숲과
숲 속의 신선한 공기와
활기찬 악수, 아직 우리가
서로 쳐다볼 수 있을 때
아직 우리가 젊음의 새끼줄을 붙들고 있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서
지하도를 건너서, 큰길을 따라
큰길에서 어수룩히 밀려난 골목으로 들어가면
방이 있다, 골목보다 더 깊은
거기에 세상옷 다 벗고
수정으로 내 근심 달래볼까
안경 쓴 친구새는
고향을 찾아갔어요, 여러 해 소설을 썼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런데 누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편한 노릇은 다 보여주는 거야
어리석고 무기력한 머리
그래, 난 떠돌이새니까, 하지만
힘차게 바람의 심장을 향해 날아갈 테지
그게 언제죠?
쉽지 않아, 떠돌이새는
보호색이 없으니까
보호색이 없으니까, 보호색이 없으니까
이러니 어떻게 같이 있겠어요
너는 있고
나는 없다
바람 속을 넘나드는 날개 달린 자유로움
이것이 사람 죽인다
너는 있고
나는 없다, 알몸의
한창 피어오르는 네 흰 몸매는
정말 우아하다
우리가 주고 받는 말의
마디 마디에서도
네 말 속에는 언제나
냇물소리가 들린다
미루나무숲에서
솔숲에서, 내 절로
푸르게 누워 하늘을 보던 때
상쾌한 새소리가
내 귀를 울리던 때
그땐 내 생각에도
맑은 냇물소리가 들렸으나
어리석고 무기력한 머리
금이 간 내 목소리
이 숲에는 다만
나무 몇그루,
그러나 내가
시간을 붙들어 세운다면,
차를 마시고
찻집 골목을 따라 나가
종각 네거리
주위에 돌을 모아
돌과 함께
바람의 심장을 향해 날아간다면
“더 참을 수가 없군요”
찻집을 나와
허름한 빌딩들 사이, 밑바닥에 나 있는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무엇을 더 생각할 것인가
먼지 낀 눈을 닦는 사이
비틀거리며 회의가 찾아온다
이상과
현실, 너와 나
생각과
행동, 비행동
날아다니는 것은 무엇이며
굴러다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왜 이럴까, 갑자기
왜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상해졌어, 앞이 안 보여
정전이에요
정전이라고는 생각 안 돼
새가 먼저 손을 내밀어
둥지를 더듬어 찾는다, 체온을 잃었군요
어서 불 있는 데를 찾아야겠어요
불 있는 데, 정전이거나 눈멀었거나
우리 함께 신세질 데, 거기가
불 옆이거나 천막술집이거나
우리 거쳐가는 것을
누구도 막지 않는 곳, 수정(授精) 다음
네 옆에 누워 있는 무덤 속을
거꾸로 쳐박히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는 할 텐데
왜 가는 것일까, 너는
또 바람은 왜 내 머릿속을
발통을 달고 지나가는 것일까
나는 왜 힘찬 날개가 없는 것일까
조심하세요, 바람이 다시 오고 있어요
앞이 안 보여
느낄 수도 없어요?
저 부서지고 부딪히는 소리는 무엇이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힘없는 깡통, 쓰레기, 담배꽁초
문짝과 간판들이 서로 부딪히고 부서지고
어디론가 끌려가고, 큰일났어요
빌딩 하나가 이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요
빌딩 하나가…… 그리고는
아무 생각도 느낌도 가질 수 없다
발 밑으로 갈라지는 땅 속을
새 하나가
한없이 굴러 떨어진다
詩/감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