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마흔은 누구나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숱한 시인들이 마흔을 건너가는 심경을 시로 쓰곤 했다. 일찍이 마흔 무렵에 요절한 고정희 시인은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아는 때이며, 길가에 침을 뱉어도 외롭다」라고 40대를 맞는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나 또한 지난 날「갓 마흔」이란 시에서 「눈 바로 뜨고 세상살기가 웬일인지 저리 두렵고/ 아침이면 찾아오던 성욕마저 끊긴 육탄을 껴안고/ 너는 지금 발끈거린다/ 아아 나는 갓 마흔 살/ 한없이 저 스스로가 못 미더워지고/ 더없이 허전한 퇴근길 어디서나/ 고개숙인 벗들의 안쓰러운 뒷그림자뿐」이라고 나이 마흔을 맞는 사십대 남성의 육체의 슬픔을 노래한 바 있다.
공자가 왜 마흔(四十)을 불혹(不惑)의 시절이라고 했던가. 나이 마흔이 되면 진정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나는 그 말의 참뜻을 나이 마흔이면 세상 잡사에 그 어느 때보다 유혹과 흔들림이 많기에 그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손세실리아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 역시 마흔이 되니, 어느 날 공복과 허기(먹어도 먹어도 허리가 줄고) 속에 때론 그의 몸과 마음이 서로 분열, 거역하는 이중적 삶(갈팡질팡하거나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과 관계에 홀려 휘청대는)을 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울러 시인은 세상일에 의연한 척, 무연한 척하지만 실은 그 자신이 그 옛날과 달리 속물적 근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허나 속물적 근성의 삶은 어린 무녀가 맨발바닥으로 작둣날을 탄 듯 아찔하고, 위태로울 뿐이다. 또한 돈본주의(자본주의) 사회에서 마흔의 삶을 건너간다는 것은 생의 한 자락 한 자락이 다름 아닌 벼랑 끝이며, 낙타도 수통도 없이(자본주의를 건너가는 별다른 생산수단도 없이) 인생이라는 무간지옥을 건너가는 자의 슬픈 단독자의 몸부림일 뿐이다. 아울러 시인은 그 자신이 어느덧 허방과 진창의 삶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때문에 그는 마흔에 대해 규정하기를 인생이라는 길에서 꽃 한 송이를 피울 수 있는 뿌리(花根)가 될 수도 있고, 혹은 통렬한 자기비극을 몰고 올 수 있는 불벼락의 근원(火根)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진단한다.
달빛에 흔들리는 시누대 소리만 들어도 외롭다던 그 마흔살의 삶, 그것은 또한 의지가지할 마음의 처방전을 제 스스로 찾아야 하고, 쑥대머리 구신형용으로 내팽개쳐진 몸부림 속에서 오늘 또 하루를 산다는 것의 참혹함과 외로움을 저마다 가슴 한켠에 되삭인 채 건너가야 한다. 또한 나이 마흔 넘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석양빛 붉은 울음을 제 뼛속마다 고이 개켜 넣는 슬픈 열대의 시절이기도 하다.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상처의 불꽃을 껴안은 채 때론 절마당 한 켠 빗자루의 삶을 꿈꾸며, 당신과 나는 이제 생의 후반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시인/이승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