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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21~25) - 이해인
21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22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꽃아 둔 장미꽃 몇 송이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어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료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23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은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갑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24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 보듯이 -
25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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