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꽃이 피어나다 - 유미애
패랭이를 보고 울다가 백일홍을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세상 모든 꽃의 중심인 어머니, 나는 지금 어둠이 내리는
호숫가에 앉아 있습니다. 맞은 편 능선을 돌아온 사람들은
제 그림자를 털어내며 집으로 가고 운동복 차림의 몇 사람만
남아 달리거나 걷기를 반복합니다. 큰 거울을 보듯 호수를
들여다봅니다. 물의 거울은 내 얼굴보다 먼저, 어머니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거울 속 어머니는 내가 알 수 없는 먼
곳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먹이를 물고 둥지를
찾아가는 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다홍 보라 노랑, 일생을
품어온 생각을 펴듯, 꽃들이 한 번 더 치마를 들어 올립니다.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사라지고 하나의
달과, 달 속에 사는 오리와, 물오리가 만드는 이랑을 따라
흔들리는 내가 보입니다. 이 땅에 족적을 남길 무엇이 있어
이 꽃들은 왔다가는 것일까요? 전해줄 어떤 말이 있기에
그곳의 노루는 또 마을까지 내려와 우짖는 것일까요?
어쩌면 어머니도 저 달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요. 산을
등에 진 노루가 자줏빛 눈을 씻고 간 우물, 그 한쪽에
놓인 평상에 동그마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신 건
아닌지요. 먼 곳을 떠돌다온 사람처럼, 노루가 다가와
물 한 그릇을 청하던가요? 숨을 돌린 노루와 눈을 맞추며
어머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그날, 수척해진 어머니를 보고 온 후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지를 막 보내고, 그의 생전에 있었던
부당한 일들에 대한 인식 이후였지요? 어머니가 치마를
벗어던지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기 시작했던 것이.
그때부터 우리 집 꽃밭도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화단 밖으로 쫓겨난 식물들, 그 중엔 꽃부리가 젖혀진
백일홍과 눈물이 날만큼 붉은 패랭이가 허리 꺾인 채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꽃말들,
고 기특하고 갸륵한 것들이 일제히 얼굴을 지워버린 듯
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와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었을 때,
낯익은 치마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겁니다. 그 모습은 마치
만개한 꽃송이들이 하르륵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내가, 낡은 치마에 활짝 꽃을 피워 놓던 어머니,
딸에게 그 치마를 입혀놓고 흐뭇해하던 당신의 모습을
잊을 수 있겠는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꽃과 여자는 끊어낼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사이 인가 봅니다. 당태종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칭했다는 양귀비를 비롯하여, 사임당, 이매창과의
인연은 물론, 먼 이란의 여인들도 사막에서 자란 장미로
화장수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특히 감샤르 라는 지방에서
만들어진 장미수는 그 향기와 효능이 탁월하여 전 세계
여성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우리
할머니들도 그러셨지요. 꽃지짐 해 먹으며 시름을 잊기도
하고 술을 담가 그 맛과 향을 지키고자 했으며 손톱에 물을
들이며 미래를 기약하기도 했었지요. 어머닌 또 어떠셨어요?
치마마다 색색의 꽃을 수놓으며 맵고 추운 밤들을 홀로
건너가셨잖아요? 꽃들의 생명력, 그건 누구보다 어머니가
잘 아실 거예요. 뽑을수록 자라나는 들꽃처럼, 늙은 몸 한
쪽에도 연홍 무늬가 돋아나 있더라고 볼을 붉히셨잖아요.
한 생을 생각해보면 귀가 서늘해집니다. 아득합니다.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거리겠지만 어머니에겐들 물앵두꽃,
분홍 시절이 없었겠어요? 신비로운 고래를 찾아 동쪽 바다를
향해가던 푸른 열망의 순간이 없었겠어요? 꽃의 시간이
잠깐이듯 열매의 날들도 금방 저물고 말겠지요. 그러니
어께의 짐은 그만 내려놓으세요. 나는 어머니를 닮은
백일홍이 좋아서, 꽃을 가꾸는 어머니 모습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 준 꽃은 예쁘거나 향기롭기보다 강인하고
끈질겨야 한다는 것. 저녁이 점점 차가워집니다. 새로운
바람에 물의 거울이 뒤집히고 생각도 출렁거립니다.
다음 봄에는 고향집 담장 밑이며 마당 빈 곳마다 아껴
두었던 씨앗을 뿌려야겠어요. 건강해진 어머니가 다시
옛 꽃들 속에 폭 싸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꽃은 잠깐
머물다 가겠지만 사연 없는 무덤이 없다고, 뜻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어요? 바람이 꽃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제 안의 격정이 꽃대를 출렁이게 한다는 말 나는 믿습니다.
벌 나비 없어도 꽃은 그대로의 꽃, 살아 있는 한 계속 피어
나야 하잖아요. 그러니, 오래된 치마는 잘 간직하다가 딸에게
줄게요. 그 딸은 또 딸에게 넘겨주고...그렇게 어머니와 저의
역사도 이어지겠지요. 우리들의 화단이 그윽해질, 그 좋은
날에는 제 손톱에 꽃물을 들여 주세요. 다시 내가 꿈을 꿀 수
있게요. 오리가 달 속으로 들어가려 하네요. 이제 저도,
저녁 패랭이의 눈물을 닦고 일어서렵니다.
어머니, 세상 모든 꽃의 시작인 어머니, 이 밤 부디,
향기로운 잠 속에서 편안하세요. 새로운 아침, 젖은 치마
가득 꽃들이 피어날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