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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천 - 원구식
이 개울의 주인은 아마도 흰뺨검둥오리일 것이다.
나는 사람이 아둔해서
최근에야 겨우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녀석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물과 물고기들을 먹고
새끼들을 낳으며
멋대로 날고 헤엄을 치고
아주 느긋하게 목욕을 해왔던 것이다.
자신이 이곳의 주인인 줄 아는
인간들의 뻔뻔함을 오히려 비웃으면서
주인처럼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최근에
비가 내리는 천변을 걷다가
바로 이곳에
천국으로 가는 길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라 머리를 탁 친 적이 있다.
“아이고, 이 바보야!”
희디흰 망초꽃들이 오래전부터 턱을 들어
그 방향을 수도 없이 일러 주었는데
이제야 겨우 깨닫다니!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니,
그곳엔 과연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화강암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쯤 되어서야 나는
천만 시민들이 아귀처럼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이 도시에
하늘이 내려준 기막힌 선물이
두 개씩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물의 어머니인 한강이요,
다른 하나는 바람의 아버지인 북한산이었던 것이다.
불광천은 이 둘을 이어주는
자식들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막내,
정말 보잘 것 없는 실개천이지만
비와 천둥이 휘몰아칠 때면
엄청난 물을 순식간에 정액처럼 쏟아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멀리 태백에서 발원한 한강이
성산대교 아래인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참았던 몸을 풀고
궁극의 오르가즘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주대교 아래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물이
온통 우윳빛으로 허옇게 물들고,
흰뺨검둥오리들이 갑자기 우당탕탕하며
물을 박차고 올라
미친 듯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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