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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주의자의 꿈 - 장석주
1980년 12월 31일 오후 7시
모든 스윗치를 내리고, 석유스토브를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채 끝내지 못한 교정지와
빈 책상들만 어둠 속에 남아 있을
사무실과 내가 방금 내려온 어두운 계단들이
내 뒤에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이다.
나를 열기 위하여, 활짝 열려진 문처럼
혹은 나를 닫기 위하여, 쾅쾅 못질하여 닫아버린 문처럼
나는 일년을 살았다. 아니 일년을 죽었다.
극장 앞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표를 사기 위하여
긴 줄을 서고 있다. 커피잔에 담긴 無爲와
재떨이에 눌러꺼진 담배꽁초들과
신문가판대 옆에 붙어있는 소년들을 지나서
나를 묶고, 혹은 나를 풀어주는 이 모든 不自由
非本質들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참회하며 걷는다.
날은 쉽게 어두워졌다. 밤 9시
나는 이홉 소주 한 병에 발갛게 취한다.
자기에게 몰두해 있던 사람에 취하고
혈관의 피까지 결빙시키는 지독한 추위에 취하고
삶이 사소함과 우연에 얽매인 것임을 깨달으며 취하고
아니다, 아니야 라고 부정하며 취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모든 비본질의 노예인
우리가 온갖 우연과 사소함으로 출렁이며 흐른다.
밤 11시, 친구여 밤은 얼마나 깊었느냐.
서울 시민의 몇 퍼센트가 편안한 잠에 들었느냐.
지우리라, 이루어지지 않은 꿈과
종로 바닥의 어두운 골목들로 숨어드는 어린 여인들의
뒷모습과 만원인 호텔과 여관방들의 교합들을.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낯선 이들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걸까.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따뜻하게 무작정 허물어지고 싶은 걸까.
눈발은 자정 근처에서 잠시 흩날리고
통행금지가 해제된 이 밤의 자유는 편안하다.
느닷없는 종소리, 제야의 종소리?
침묵에 이르는 병과 근시안경을 버리고
나는 잠시 무엇인가를 소망하고 싶다.
서울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싶다.
깊은 밤거리의 한 모퉁이를 쌍쌍이 사라져 가는
저들에게 고통주소서, 동파된 수도꼭지를 바라보며
깨어있는 가난한 주부들과
아직 잠들지 않은 그들의 아이들과
새로 회임되는 미구의 태아들에게
고통주소서, 그들의 잠이 달콤한 마약이 되기 위하여.
우동국물에서 오르는 따뜻한 김과
낯선 여자와 두 번 부딪치며 걷는다.
나는 너무 취했다. 흐르는 세월, 술, 어둠에
내 혈관들은 너무 혹사 당했다.
이제까지 내 생명을 지켜주신 분이시여,
나는 아무 물에나 힘없이 붕괴하는 모래탑입니까?
이제 불켜진 집에 돌아가게 허락해 주십시요.
고통이신, 그리고 사랑이신
적막한 황혼의 하나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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