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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27호
2012.11.27 (음10.14)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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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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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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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을 메뉴처럼 생각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 것을 먹을 수는 없다. - 카를로스 산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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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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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펴다와 피다
“허리를 쭉 피고 다녀라” “얼굴의 주름살을 피세요” 등에서와 같이 ‘펴다’를 써야 할 자리에 ‘피다’를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펴다’는 “어깨를 펴다” “구김살을 펴다”에서처럼 접히거나 굽은 것, 구김이나 주름 등을 반반하게 할 때 사용한다. “꿈을 펴다” “소신을 펴다”에서와 같이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또 “돗자리를 펴다”에서처럼 ‘늘어놓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피다’는 “벌써 개나리가 피었다”에서와 같이 ‘꽃봉오리가 벌어지다’, “요즘 얼굴이 확 피었네”에서처럼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아지다’, “가정 형편이 피었다”에서와 같이 ‘수입이 늘어 형편이 나아지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접히거나 구겨진 것을 반반하게 할 때는 ‘펴다’, 꽃이나 일 등이 벌어지거나 사정이 나아졌음을 의미할 땐 ‘피다’를 쓴다. 가슴은 펴고, 꽃이나 형편은 핀다고 기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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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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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남이 섬 - 전순영
은행잎들이 연어떼 되어 탯줄을 찾아가고 있다 망초꽃이며 들국화며 쑥부쟁이며 달맞이꽃이 끼리끼리 무리지어 살다가 흰 무덤으로 내려앉고 있다 갈대밭에는 물에다가 몸을 반쯤 담근 자갈들이 지나온 여름 흔적을 씻어내고 있다 기억의 저편 오월의 찔레 그 꽃술에 흠벅 젖었던 날들, 숨은 가시에 찔렸던 날들 보낸 멍 자국이며 받은 멍 자국 쌓을 줄만 알았던 손과 발 가슴까지 말갛게 씻어 내리고 있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내앉은 강물 앞에서 자갈들은 그걸 배우고 있다 그들은 몸이 동글동글 했다 마음이 동글동글 했다 어디선가 산그늘 내리는 소리에 귀를 모으는 가을 남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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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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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4. 가정과 가족을 위한 수프
엄마의 일생
네가 먹은 접시는 네가 싱크대에 갖다 놓아라. 제발 부탁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그걸 좀 갖고 내려가렴. 그걸 거기다 두면 어떡하니, 위층으로 가져가야지. 그게 네 거니? 네 거야? 너, 동생 때리지 마. 내 말 안 들리니? 가만히 좀 있어라. 엄마가 딴 사람과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이니? 엄마 방해하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이 닦았니? 너 여태껏 잠 안 자고 뭐하니? 어서 잠자리에 가서 누워. 아침부터 텔레비전 보는 거 아니다. 그런 말이 어딨니? 할 일이 그렇게도 없다는 거야? 밖에 좀 나가 놀아라. 책 좀 읽어라. 책 좀! 텔레비전 소리 좀 줄여라. 제발. 전화 그만 끊어라. 네 친구한테 네가 다음에 다시 건다고 그래, 어서! 여보세요. 그 앤 지금 집에 없는데. 그 애가 돌아오면 전화 걸라고 할게. 점퍼 입어야지, 넌 왜 스웨터를 안 입으려고 그렇게도 고집을 부리니? 아무거나 좀 입어라. 누가 여기다 신발을 벗어 놓았니? 그 장난감 좀 거실에서 치워라. 그 장난감 좀 욕조 안에다 집어 넣지 마라. 그 장난감 좀 계단에다 어질러 놓지 말라. 그러다가 딴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할래? 열을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너 떼어 놓고 우리끼리 간다. 정말이야. 하나, 둘... 너 화장실 갔었니? 화장실 안 가면 넌 이자리서 못 떠날 줄 알아. 내 말 우습게 듣지 마. 왜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 안 들렀니? 참을 수 있겠어? 너희들 뒤에서 무슨 짓 하고 있니? 그만 해. 그만 좀 하라니까! 더 이상 그 소리 듣고 싶지 않다. 넌 지겹지도 않니? 입 다물어. 안 그러면 당장 집으로 돌아갈 테다. 거짓말 아냐. 자, 집에 간다. 엄마한테 뽀뽀 좀 안 해 줄래? 엄마 한 번 껴안아 주라. 네 이불은 네가 개야지. 네 방 청소 좀 해라. 식탁 좀 차려라. 네가 식탁 좀 차리면 얻디가 덧나니? 네 차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니? 식탁에서 일어났으면 의자 좀 안으로 집어넣어라. 똑바로 앉아서 먹어라. 조금만 먹어 봐. 다 먹으라는 것도 아니잖니. 그만 놀고 밥 먹어라. 자기가 하는 행동을 잘 살펴야지. 유리컵 좀 안쪽으로 놔라. 너무 식탁 가장자리에다 놓았잖니. 조심! 그것 보라. 조심하라고 했잖니! 뭘 더 달라는 거니? 조금만 더 먹어라, 제발 부탁이다. 그래야 건강해지지. 이 두부 한 입만 먹어 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순 없는 거야. 그게 인생이라는 거다. 나하고 입씨름하려고 하지 마라. 난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너하고 토론하고 싶지 않다.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 넌 이 엄마가 아예 집을 나가 버렸으면 좋겠니? 아냐. 아직 10분 안 됐어. 1분만 더 기다려.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주의를 줬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가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지? 옆집 애들 좀 봐라. 얼마나 말 잘 듣고 착하니. 이 과자 누가 다먹어 치웠니? 새로 사온 과자를 먹기 전에 옛날에 사온 것부터 먹어 치워야지. 너도 한번 생각해 봐라. 버섯을 먹으라는 게 아냐. 봐라. 버섯은 다 덜어 냈잖니. 숙제 다 했니? 그만 좀 징징거려라. 귀가 따가워 죽겠다. 소리 좀 지르지 마라. 할 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해야지.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할 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해! 나중에 생각해 볼게. 지금은 말고. 네 아버지한테 부탁해 보렴. 기다려 봐야지. 그렇게 바싹 다가가서 텔레비전을 보면 어떡하니. 눈 나빠진다. 너 똑바로 앉아서 보지 않으면 텔레비전 꺼 버린다. 흥분하지 좀 마라. 흥분하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 봐. 그 거짓말 정말이니? 안전밸트 매야지. 모두들 안전밸트 맸지? 나도 내 인생이 지겹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미안해, 하지만 이건 규칙이야. 미안해, 하지만 이건 규칙이야. 미안해, 하지만 이건 규칙이다.
델리야 에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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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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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세계의 삼층 구조를 읽힌 레비 스트로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방법론은 언어 현상 및 친족 관계에서 큰 성과를 성취했다. 그는 사회학적이며 보편주의적인 방법으로 친족 관계의 기본구조가 무엇인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우리의 세계와 삶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는 자연과 인간 및 사회와 문화의 현상은 표면적인 것이고 그것들의 심층 구조는 항상 은폐되어 있다. 이 심층 구조를 드러낸 보편 법칙을 해명함으로써 보편 법칙에 의해서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은 1960년대 후반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에 의해서 새로운 철학적 방법으로 정립된다.
인간과 자연과 문화의 심층 구조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주의를 구상하게 된 밑바탕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 그리고 지질학이 깔려 있다. 그는 <슬픈 열대>에서 자신의 '세 가지 만남'에 관해서 기술한다. 첫째, 어떤 현실 유형을 다른 유형으로 환원시킬 때 참다운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참다운 현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진리란 본질상 스스로 은폐하려는 면밀성에서 암시된다고 하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무엇보다도 프라그 학파가 발전시킨 음운론의 방법과 성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그의 구조주의 방법론은 구조주의 언어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음운론이 우리들의 과학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언어학자는 낱말들을 분석하고 음운의 실재를 해명한다. 만일 언어학자가 여러 언어들 속에서 동일한 대립음소들의 적용을 확인한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개성적 언어들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른 대상들의 심층적 동일성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보장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상호 유사한 현상들이 아니타 동일한 사실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의식적 표면으로부터 무의식적 심층으로 이행하는데, 이 이행은 특수한 개성으로부터 보편적 절대성으로의 이행이다. 언어학에서 이 보편성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학에서도 똑같이 보편성이 중요하다. 우리는 언어에서 표현된 상징적 기능을 연구한 결과 모든 언어의 바탕에는 동일한 원리(또는 형상)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재료에 특정한 원리를 부여한다. 이 원리는 고대인과 현대인 그리고 원시인과 문명인에게 동일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모든 제도와 습관의 심층에 있는 무의식적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언어 현상과 아울러 친족 관계에서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큰 성과를 성취했다. 지금까지의 민속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사용했던 관찰 방법은 개별적이며 생물학적인 것이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러한 방법을 떠나서 사회학적이며 보편주의적인 방법에 의해서 친족 관계의 기본 구조가 무엇인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친족 관계의 기본 구조는 '교환'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 관계의 기본 구조>에서 어떤 형태의 결혼 제도이든 결혼 제도의 공통된 기초는 교환이라고 주장한다.
언어의 시초를 상징적 사유라고 할 것 같으면 자연으로부터 순화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교환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의 금지를 비롯해 다양한 결혼 제도를 설명하면서 교환의 의미를 밝힌다. 같은 씨족이나 부족에 속하는 여자를 자연적 본능 충족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일종의 교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여자를 사회라는 관계 체계의 기호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의 사회적 삶은 기호의 교환이다. 또한 문화는 상징의 해석이므로 문화는 곧 언어생활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 관계를 연구한 후 토테미즘을 연구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심층에 깔려 있는 원리들을 한층 더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 종교 사학자들 및 인류학자들이 설명한 토테미즘의 현상은 항상 경멸하고 멸시하려는 문명인들의 관습이 날조해 낸 것에 불과하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을 연구하기 위한 구조주의적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가설적 모델을 제시한다.
1. 연구해야 할 현상을 둘 또는 그 이상의 여러 가지 표현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한다. 2. 이러한 표현들 사이에 가능한 모든 교환 관계의 도식을 작성한다. 3. 우선 연구 대상으로 드러난 경험적 현상을 여러 가지 교환 관계들 중 하나의 결합으로 여기고 그것을 전체 체계의 일부로 설명한다.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토테미즘이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성립하는 관계들에 관한 현상이다. 자연은 범주와 개체를 그리고 문화는 집단과 개인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토테미즘이란 대립되는 반대 개념들인 문화나 자연의 개념이 특정한 형식으로 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토테미즘이란 멸시나 경멸의 대상도 아니고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며 단지 보편적 법칙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레비 스트로스는 아메리카의 토인 부족들의 상하 관계. 전쟁과 평화 등 대립 개념들과 중국의 음양의 조화로운 대립적 요소들을 연구해 심층의 보편적 구조를 해명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신화와 음악의 구조도 연구해. 공간적 신화로부터 시간적 신화로의 변천, 그리고 감성적 성격의 논리로부터 심층적 현상을 향한 논리의 변천을 연구함으로써 자신의 구조주의적 탐구의 심도를 깊게 했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탐구 방법은 특히 오늘날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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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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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底游魚(부저유어) 釜(가마 부) 底(밑 저) 游(헤엄칠 유) 魚(고기 어)
후한서(後漢書) 장강(張綱)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순제(順帝) 때, 조정에는 장강이라는 하급 관리가 있었다. 그는 충실하고 강직하여 아부를 몰랐다. 당시 대장군으로 양기(梁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후인 누이를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장강은 공개적으로 황제에게 양기의 불법 행위를 밝혀 조정의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후, 광릉(廣陵)에서 장영(張 )이 사람들을 모아 자사(刺史)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평소 장강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양기는 이 틈을 이용하여 장강을 제거하고자 그를 광릉의 태수로 임명하였다. 장강은 양기의 계략을 이미 눈치챘지만, 곧 광릉자사로 부임하여 장영을 설득하였다. 장영은 믿음이 가는 장강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저희들은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이, 잠시 숨만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若魚游釜中, 喘息須臾間耳). 이처럼 대인께서 명철하시니 저희들은 기꺼이 조정에 귀순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釜底游魚란 상황이 극히 위험한 상태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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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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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18. 방패가 된 나의 수줍음
나는 채식회의 집행위원으로 뽑혔다. 그래서 회의가 있을 때는 꼭꼭 나갔지만, 언제나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올드필드 박사는 언제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나에게는 말을 썩 잘하는데, 위원회에서는 왜 도무지 입을 열지않나? 자네는 수펄이야.
나는 그 농담이 옳다고 생각했다. 벌이란 놈은 언제나 분주히 일하는데 수펄만은 천하의 게으름쟁이다. 그러나 남들이 다 모임에서 제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전혀 잠자코 있다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면 내 속을 표현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내 눈에는 나만 제외하고 다 나보다 잘들 알고 있는 것 같이만 보였다. 또 번번히 모처럼 용기를 내서 말을 끄집어내려 하면 바로 그때 새 안건이 시작되곤 했다. 이러기를 오랫동안 계속했다. 그러는 동안에 중대한 문제가 하나 토론되게 되었다. 나는 결석하는 것은 잘못이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비겁이라고 생각했다. 논쟁의 경위는 대개 이러했다. 회장은 템스 철공장의 주인인 힐스 씨였는데, 그는 청교도였다. 회장는 사실상 그의 재정적 원조로 유지되어 가는 것이라 하여야 옳을 것이다. 다수의 위원이 다소간에 그의 부하였다. 채식주의자로 이름 있었던 알린슨 박사도 위원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당시 새로 일어난 산아제한 운동의 주창자로서, 노동계급 사이에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힐스 씨는 그 방법을 도덕의 뿌리를 잘라 버리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채식회는 단지 음식만이아니라, 바로 도덕을 개조하자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린슨 같은 반청교도적인 견해를 가지는 사람을 회 안에 머물러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나는 거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알린슨 박사의 인공 산아제한 방법의 견해는 위험한 것이라 생각했고, 힐스씨가 한 사람의 청교도로 그때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다. 나는 또 힐스 씨와 그의 관대함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단지 청교도 도덕을 채식회의 목적의 하나라고 인정하기를 거절한다고 해서, 그를 채식회에서 쫓아낸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반청교도적인 사람을 회에서 쫓아내자는 힐스 씨의 생각은 자기의 개인적인 문제요, 회가 공공연히 표방하는 목적과는 상관이 없다. 회의 목적은 다만 채식의 보급에 있지, 어느 도덕체계의 보급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나 채식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도덕관의 견해를 가졌거나 그것에는 상관없이 모두 회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원회 안에는 나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접 내 의견을 발표할 것이 요청되고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나는 말할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내 생각을 글로 쓰기로 했다. 나는 원고를 주머니에 넣고 모임으로 갔다. 지금 돌이켜 보지만, 읽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회장은 다른 사람을 시켜 읽게 했다. 알린슨 박사는 그날 졌다. 그렇게 해서 그런 종류의 첫싸움에서부터 나는 지는 쪽을 지지하게 됐다. 그러나 내편이 옳다는 데 나는 쾌감을 느꼈다. 희미하게 기억하지만, 그 사건 후 나는 그 위원회에서 나왔다. 이 수줍음은 내가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끝까지 계속됐다. 사교적인 방문에서조차도 사람이 6,7명만 있으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나는 한번은 마즈무다르 씨와 함께 벤트너에 간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채식 가정에 머물게 됐다. 음식의 윤리 의 저자 하워드 씨도 같은 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가 그를 만났더니 그는 우리에게 어떤 채식주의 선전강연회에서 말을 해달라고 청했다. 나는 연설을 글로 써 가지고 읽어도 그것이 실수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조리있고 간결하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즉흥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내게 말도 안된다. 그래서 나는 연설문을 썼다. 읽으려고 일어섰는데, 할 수가 없었다. 적은 것이라야 큰종이 한장도 안되는데, 눈이 어지럽고 몸이 떨렸다. 마즈무다르 씨가 대신 읽어야 했다. 그의 연설은 물론 훌륭했고 박수를 받았다. 나는 부끄럽고 나의 무능으로 인해 마음이 슬펐다.
내가 영국에서 연설을 해보려고 마지막으로 애쓴 것은 집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 저녁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롱거리만 됐을 뿐이었다. 나는 내 채식 친구들을 전에 말한 홀본 식당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채식 만찬은 물론 채식 식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채식 식당 아닌 곳에서라고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홀본 식당 지배인과 의논하여 순전한 채식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채식가들은 모두 이 새 기도를 기뻐하며 칭찬했다. 모든 만찬은 즐겨 먹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서양에서는 그것을 예술로까지 발전시켰다. 따라서 굉장한 호화로움과 음악과 연설로 꾸며진다. 그러니 내가 베푸는 이 조그만 만찬에도 다소 그런 것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도 연설이 있어야 했다. 내가 말할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일어섰다. 나는 공들여 생각해 짤막한 연설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첫마디 이상을 나갈 수 없었다. 나는 애디슨이 하원에서 처녀연설을 하다가, 아이 컨시브(I Conceive :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기를 밴다의 두가지의 뜻이 있음)를 세번씩이나 반복하고 더 나아가지 못하자 한 짖궂은 사람이 일어나, 저 신사는 아기를 세번이나 배면서 아무것도 낳은 것이 없습니다. 했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나는 이 일화를 밑천으로 해서, 익살섞인 연설을 짜내려 하며 시작을 했던 것인데, 거기서 그만 입술이 붙어 버렸다.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우스운 연설을 하려다가 나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신사여러분, 초대에 친절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마디 불쑥 하고는 앉아버렸다.
내가 이 수줍음을 비로소 극복한 것은 남아프리카에서였다. 하지만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나는 즉흥적으로는 도무지 말할 수가 없었다. 낯선 청중 앞에서는 언제나 주저하곤 했다. 그래서 될수만 있으면 말을 피해버린다. 지금까지도 나는 친구들과 잡담하는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도, 그렇게 하자는 생각이 들 것 같지도 않다. 이따금 나는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나의 타고난 이 수줍음이 조금도 손해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내게는 아주 유익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한때는 고민거리였지만, 지금은 나의 즐거움이다. 가장 큰 유익함은 내게 말을 경계하기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자연 나는 생각을 제어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의 생각없는 말이 새어 나오는 일은 혀로나 붓으로나 별로 없었다는 증명서를 써줄 수 있다. 나는 내 말이나 글에 별로 후회했던 기억이 없다. 나는 그렇게 해서 많은 화를 면하고 시간의 낭비를 피할 수 있었다. 경험은 나에게 진리의 숭배자에게는 침묵이 정신적 훈련의 한 부분이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진리를 과장하고, 감추고, 변경시키는 버릇은 사람의 자연적인 약점이므로, 그것을 이기기 위해 침묵은 필요하다. 과묵한 사람은 생각없는 말을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를 측정하여 말한다. 허다한 사람이 말을 참지 못한다. 모임의 의장치고 발언 허락에 골치 안 앓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언제나 발언의 허락을 받으면, 대개는 정해진 시간을 넘기고, 시간을 더 달라는 요청도 없이 말을 계속한다. 이런 모든 말이 세상에 유익이 되는 수는 거의 없다. 그것은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나의 수줍음은 사실 나의 큰 방패와 작은 방패가 되었다. 그것이 나를 자라게 했다. 그것이 나를 도와 진리를 알아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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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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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2. 아스클레피오스
플레슈아스의 딸 코로니스는 아폴론과 신의를 저버리고 이스큐스와 관계 하였다. 이것을 전해들은 아폴론은 백조 크로우(Crow)에게 그녀를 감시하라고 지시하였으나 허사로 돌아가자 감시를 소홀히 한 이유를 물어 백설 같은 크로우를 까만색의 까마귀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스큐스는 아폴론이, 코로니스는 아르테미스가 사살하였는데, 화장할 때 코로니스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을 안 아폴론은 태에서 아들은 구해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 Aesculapius)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켄타우로스족의 케이론에 맡겨 길렀다. 아스쿨레피오스는 커 가면서 약초와 치료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또 다른 탄생설도 있다. 즉 에피다우로스 사람들에 따르면, 코로니스의 아비 폴레규아스는 그리스의 용맹한 무사들을 모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고 다시 에피다우로스를 넘보기 위하여 딸을 데리고 신분을 감춘 채 지세와 군력을 염탐하였다. 그런데 딸 코로니스가 아폴론의 아이를 가진 뒤 아비 몰래 아기를 낳고 티티온 산에 내버렸다. 그러나 버려진 아기는 암산양의 젖을 먹고 살아났으며 이것을 목격한 목동 아레스타나스가 아기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광채가 사방으로 비치니 놀라 손을 대지 못하였다. 목동은 신비한 일에 참견하는 것을 삼가고 겸손히 물러났다. 아기는 아폴론의 가호 아래 성장하여 아폴론과 케이론으로부터 질병의 치료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메세네 사람은 아스클레피오스가 트리카 출신이라 하고, 아르카 출신이라 하고, 아르카디아 사람은 텔푸사 출신이라고도 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외과처치와 약처방이 신묘하여 의술의 창시자로 존경받고 있다. 병치료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아테나가 준 고르곤 자매 메두사의 피가 들어 있는 두 개의 약병도 지니고 있었다. 우측 정맥에서 받은 피는 죽음에서 생명을 소생시키는 효력이 있었으며 좌측에서 받은 피는 사람을 즉사 시키는 효력을 갖고 있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아테나와 함께 메두사의 피를 나누어 가졌는데 아스클레피오스는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하고 아테나는 죽이는 데 사용하여 싸움을 부추겼다고 한다. 아테나는 이미 피 두 방울을 에릭토니움에게 주어 한 번은 죽이고 또 한 번은 살렸다고 한다. 이 약병은 데리고 있는 뱀의 몸에 황금끈으로 매어져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예로는 류쿠르고스, 오아파네오스, 튠다레오스, 글라우코스, 히폴류토스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명계의 하데스는 제우스에게 아스클레피오스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았고, 결국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일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제우스는 그를 벼락으로 쳐서 죽게 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안 아폴론은 격분하여 제우스에게 벼락을 만들어 죽게 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안 아폴론은 격분하여 제우스에게 벼락을 만들어 준 큐클로페스를 참살하여 복수하였다. 그러나 아폴론은 이 일에 대한 속죄로서 아드메토스 왕의 양치기로 9년간을 일하였다. 제우스는 그 후 아스클레피오스를 다시 살려내었고 일찍이 케이론의 딸 에우이페가 예언한 바와 같이 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에피오네와 결혼하여 마카온과 포달레이리오스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 다 의술을 익혀 트로이 공략 때 그리스측에 참가하여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후기에는 그의 소생으로 휴기에이아, 파나케이아, 이아소 및 아케소도 첨가되었다. 휴기에이아와 파나케이아는 원래 만물에 젖을 주는 모신 레아의 두 쪽 유방을 지칭하는 명칭인데 아스클레피오스의 숭배자가 이를 화신시켜 의신의 딸로 추앙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그리스 세계에 널리 세워졌고 에피다우스에는 기원전 8세기부터 신전과 극장 및 경기장이 건립되어 병치료와 건강을 위한 축제 및 행사가 대를 이어 거행되었다. 뱀을 성스러운 동물로 믿어 아스클레피오스의 단장에는 뱀이 감겨 있고 현재도 의학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에피다우로스에서 로마로 건너갔을 때 뱀을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여 뱀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원래 의미는 끊임없이 자비롭다는 말이다. 소아시아 페르가몬에서는 나라 최고의 주신으로 모셨다.
마카온과 포달레이리오스 마카온과 포달레이리오스(Machaon & Podaleirius)는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 형제이다.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메로페의 딸 에피오네라고 하지만 다른 설에는 아르시노에, 크산테, 람페티아(헬리오스의 딸) 혹은 심지어 코로노스라고도 한다. 테살리아의 세 도시, 즉 트리카.이토네.오이칼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이들 형제는 모두 헬레나의 구혼자였으므로 트로이 원정에 동조하여 30척의 병선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아비로부터 치료술을 전수받은 형제는 전쟁중에 의료 활동으로 더 많은 기여를 하여 부상병과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테레포스의 상처, 판다로스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한 메넬라오스도 치료해 주었다.
마카온도 파리스가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부상을 당하여 곧 네스토르 진영으로 부축되어 헤카메데의 간호를 받았다. 헤카메데는 아킬레스가 테네도스에서 포로로 끌고 와 후에 네스토로에게 배신당한 낭자로 간호술에 뛰어난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마카온은 필록테테스의 상처(헤라클레스의 유언을 어긴 벌로 발에 큰 부상을 입었다)도 포달레이리오스와 함께 치료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전투에서도 용감성을 발휘하여 목마용사 명단에 끼여 있었는데 트로이 전쟁 막바지에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 혹은 텔레포스의 아들 에우류퓰로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도 한다. 후에 네스토르가 그 유골을 메세니아 마을 게레니아로 가져가 매장해 주었다. 트리카에는 포달레이리오스와 합동으로 추모하는 사당이 세워졌다. 마카온은 디오클레스의 딸 안티클레이아와의 사이에 니코마코스의 고르가소스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의업을 계승하였다. 그 밖의 아들로는 알렉사노르, 폴레모크라테스, 스퓨로스 및 알콘 등이 알려져 있다.
외과 의술에 능한 마카온에 비해 포달레이리오스는 유능한 내과의사로 전해지며 특히 10년 전쟁 중에 매우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추측된다. 아킬레스 장례식의 추모경기에서 벌어진 권투시합으로 심한 상처를 받은 아카마스와 에페이오스(목마를 조립한 파노페오스의 아들로 월등한 역사였으나 전사로는 시원찮았다)의 응급처치를 해준 것도 바로 그였다. 형보다 더 오래 살았던 그는 후에 형의 죽음에 대해서도 복수하였다. 트로이 함락 후에는 원정군 최대의 예언자 칼카스와 암필로코스, 라피테스족의 용사 레온테오스(목마에 들어간 용사)와 폴류포이테스(피리투스의 아들로 수백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 목마에도 참가한 용사)와 함께 육로를 택하여 이오니아의 콜로폰에 와서 머물렀다. 그 곳에서 칼카스는 죽음을 맞이하는데, 원래 칼카스에게는 자신보다 현명한 예언자를 만나게 되면 죽게 될 것이라는 계시가 있었다. 칼카스는 그 고장에서 테이레시아스의 딸 만토의 아들인 몹소스의 초대를 받았다가 알아맞추기에서 뒤지고 다시 예언에서도 패배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포달레이리오스가 그리스에 와서 델포이에 정착할 고장을 물었더니 신탁이 내려준 답은 "하늘이 그대의 주위를 둘러싼 지역이면 아무 어려움 없는 곳"이라 하였다. 그러한 고장이 바로 산 언덕이 둘러앉아 하늘과 땅의 지평선이 주위를 둥글게 에워싼 카리아의 케르소네소스 반도였고 그는 여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카리아 해안에서 만난 폭풍에 날려 해안으로 떨어진 포달레이리오스를 양치기가 구하여 그 지역의 왕 다마이토스에게 데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마침 지붕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왕의 딸 슈르나 공주를 포달레이리오스가 치료해 주어 왕은 기쁘게 그를 왕실에 받아들였다. 공주의 상처가 완치되자 왕은 그를 딸과 결혼시켰고, 포달레이리오스는 카리아 반도를 할애받아 부인의 이름을 붙인 도시 슈르노스를 건설하였다 한다. 포달레이리오스는 소아시아와 테살리아에서 명의로 이름을 떨치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이탈리아 드리온 산록에는 이 포달레이리오스의 사원이, 산마루에는 칼카스 사원이 있는데, 이 두 성소에서는 검은 숫양을 공양하고 양피를 덮고 자면 꿈에 예언을 받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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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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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누구나 둥근 하늘 밑에 산다.
버스가 어찌나 만원인지 그대로 있다간 질식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일자 콧수염 기른 인도 남자와 코걸이를 두 개씩이나 한 아줌마가 바로 옆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더 숨 쉬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는 차라리 버스 지붕에 앉아서 가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버스가 차이 스톱(차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라고 잠시 정차하는 것)을 한 틈에 나는 사다리를 타고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이미 열 명이 넘는 인도인들과 닭 몇 마리가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가 간혹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서, 나는 지붕 한 가운데의 쌀자리 위에 걸터앉았다. 나 말고도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계집아이, 흑염소 두 마리가 버스 위 지붕 위로 더 올라왔다. 뒤따라 올라온 노랑머리의 서양인 친구는 지붕 위로 쓰윽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건 말도 안 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내려갔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가 이리저리 곡예를 부려도 지붕 위에 탄 사람들은 이골이 났는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당의 평상에 앉아 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런 자세들이었다. 나 혼자만 아래로 굴러 떨어질까봐 쌀자리를 부둥켜안고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지붕 난간에 걸터앉은 청년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요?" '코리아'라고 대답하자, 청년은 내 말을 얼른 옆사람에게 전달했다. 그 사람은 다시 그 옆사람에게 전하고, 마침내 버스 지붕에 올라탄 사람들 전부가 "코리아!"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계집아이도 고개를 끄덕이고, 흑염소 두 마리는 노란 테두리가 있는 눈동자로 뚫어져라고 코리언을 응시했다. 청년은 또 물었다. "인도엔 처음 온 겁니까?" 내가 네번째라고 대답하자. 다시 똑같은 순서로 지붕 위의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들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네번째!" 하고 합창을 했다. 손가락을 펴 보일 수 없는 염소만 부동자세를 한 채로 날 쳐다보았다. 청년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직업이 뭐예요? 뭘 해서 먹고 살아요?" 작가라는 내 대답에, 청년이 손바닥에 글씨 쓰는 시늉을 하며 옆사람들에게 전달하자 마침내 모두가 "작가!" 하면서 손바닥에 글씨 쓰는 시늉을 했다. 월수입은 얼마냐? 부모는 살아 계시며, 형제는 몇이냐?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었느냐? 목에 걸고 있는 것은 칼이냐, 볼펜이냐? 인도에 오는데 비행기표는 얼마 주고 끊었느냐? 이건 버스 여행이 아니라, 숫제 버스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신원조회나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어찌나 호기심이 강한지 단 한 차례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따라 일제히 탄성을 지르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유채밭도 지니고 다리도 지나면서 히말라야 산 기슭을 꼬불꼬불 달려갔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는 히말라야에서 녹아내린 물이 차갑게 흐르고 있었다. 청년은 또 한차례 질문을 던졌다. "왜 머리를 길렀지요? 수행자인가요?" 나는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머리를 깎으면 몸이 아파오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어렵사리 옆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그 사람도 이해가 안 가는 듯 그 옆사람에게 복잡하게 설명하고, 그래서 버스 지붕에 탄 사람들 모두가 개구리처럼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노인이 자기도 예전에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을 목격한 적이 있노라고 선언했다. 구자라트 주에 살던 때였는데, 마을에 희귀한 병에 걸린 사람이 둘씩이나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머리를 자르면 삭신이 쑤셔오는 병이고, 또 한 사람은 타인의 병에 대해서 들으면 자기도 똑같은 병을 앓게 되는 이상한 알레르기에 걸린 사람이었다. 누가 배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 사람도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다들 한 마디도 놓칠세라 노인의 설명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노인의 얘기에 따르면, 머리를 깎으면 몸이 아픈 사람은 결국 머리 깎는 것을 포기하고 장발을 한 채 걸인이 되어 떠났다고 했다. 희귀한 알레르기에 걸린 또다른 사람은 누가 위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그도 그만 위암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기가 그들을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라고 애매하게 덧붙였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수백 년 전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 한 청년이 자기도 그런 비슷한 증세를 가졌던 남자를 알고 있는데, 그는 자이나교인이었으며, 너무 예민한 나머지 머리카락이 하나만 빠져도 몸에 기운이 없고 열이 올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장가를 가서 애를 낳았더니 애까지도 비슷한 증세가 있어서 머리를 잔뜩 기른 채로 학교를 보내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머리의 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과 신체의 진화 현상'이 일부인 것으로 '사료'된다고 청년은 제법 학술적으로 설명했다. 우리보다 진화한 외계인들이 머리카락이 없는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노인 옆에 앉은 계집아이까지 참견했다. 자기도 머리를 깎으면 몸이 아파 오는 어떤 남자아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머리를 깎기 싫어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정곡을 찔렀다. 그렇게 해서 버스 지붕은 머리를 깎는 것이 과연 인체에 해로운가 아닌가에 대한 의학적이고 신학적인 토론으로 어지러웠다. 아유르 베다(인도의 자연 의학)와 크리쉬나 신이 등장하고, 전설과 신화가 인용되는가 하면, 염소는 난데없이 음메 울고 닭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순진한 인도 사람들!
푸른색 버스는 그렇게 북인도의 따사로운 햇살 속을 염소와 닭과 손님들을 가득 싣고 털털거리며 달려갔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히말라야, 내 피부에 와 닿는 햇빛, 그리고 버스 지붕 위에 탄 동화나라의 사람들, 그것만으로도 나는 부족함 없이 행복했다. 그 무렵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었다. 별일 없이 잘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기에 아무도 내 마음의 구석진 다락방을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그 다락방 속에서 나는 무척이나 외롭고 사람이 그리웠었다. 그날 버스 지붕 위에서 만난 인도인들, 그들이 그 그리움을 구석구석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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