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2부 기묘한 천직 - 2.(2/2)
프랜치스는 전에도 외할아버지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다니엘 성자'라는 별명으로 읍내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는 이러한 그의 신념에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모한 결심을 하고 있는 현재의 그로서는 설교의 의미가 한층 뼈에 사무치며 잔학과 증오가 없는 세계에의 동경에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문득 조선소의 리벳반 반장인 조 모어가 청중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조의 뒤에는 달로 주점에 드나드는 노름꾼들이 각각 손에 벽돌과 썩은 과일, 보일러 공장에서 버린 기름투성이 걸레 조각 등을 쥐고 따르고 있었다. 조 모어는 입버릇은 좋지 않지만 근본은 괜찮은 사람으로 취하면 구세군이나 성당의 행렬 뒤를 따라다니며 빈정대길 잘했다. 그런 그가 지금 기름걸레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다니엘 성자! 춤추며 노래를 불러보라구!"
프랜치스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들은 집회를 망쳐 놓을 작정인 것이다. 그는 순간 미세스 그레니의 머리에 썩은 토마토가 날아가고 말캄의 그 보기 싫은 얼굴에 기름투성이의 걸레가 뒤집어 씌워지는 꼴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온몸에 고소한 기쁨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프랜치스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영혼의 강렬한 열변으로 심취된 채 신념에 찬 말들을 전신을 떨면서 외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모어에게 뛰어가서 그의 팔을 잡고 신음하듯이 애원을 했다.
"안돼, 조, 그런 짓 하지 마. 우린 서로 친구가 아냐?"
"어떤 놈이야?"
조가 프랜치스를 보자 술 취한 사나운 얼굴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아니, 프랜치스 아냐?" 그리고 조용한 말로 중얼거렸다. "난 네 할아버지라는 것을 깜박 잊었어. 미안해."
그는 잠시 잠자코 있더니 마침내 명령하듯이 부하들에게 호령했다.
"야, 우리 저쪽 광장에 가서 구세군 여자들이나 골려 주자."
그 패거리들이 가버리자 올간 소리가 갑자기 활기를 띠며 울려 퍼졌다. 윌리 탈록 이외에는 왜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금 후에 그들은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윌리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감동적인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지, 프랜치스?"
프랜치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그렇지만 할아버지의 설교는 모두 옳은 말이었어......난 지난 4년간 인간의 증오라고 하는 것을 싫증이 나도록 맛보았어.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의 미움만 사지 않았더라면 익사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부끄러운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윌리는 그대로 잠자코 프랜치스를 거실로 안내했다. 어두컴컴한 밖에서 들어와 보니 그곳은 너무나 밝았다. 더구나 방안이 너절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갈색 벽지를 바른 천장이 높은 길다란 방에는 다 낡은 소파와 다리가 부서진 의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커다란 탁자는 칠이 다 벗겨지고 그 위에 아교로 붙여 놓은 꽃병이 놓여 있으며, 손잡이가 떨어진 초인종과 물약병과 환약 상자가 벽난로 위에, 그리고 그림책과 장난감 등이 잉크 얼룩투성이인 융단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미 아홉 시가 가까운데도 윌리네 집 식구들은 아직 누구 한 사람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윌리의 일곱 남매는 진, 톰, 리차드 등-너무나 우굴우굴 했으므로 그 아버지마저도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고 했지만-프랜치스도 그 이름들을 잘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은 책을 읽거나 쓰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씨름을 하거나 방금 구어낸 빵과 우유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매력적인 모습을 한 모친 아그네스 탈록이 반쯤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앞가슴을 드러낸 채 난로 옆의 요람에서 아기를 안아 젖을 먹이며 기쁜 얼굴로 프랜치스를 맞아 주었다.
"어서 와요, 프랜치스. 진, 너는 가서 수프를 2인분 더 가져와야겠다. 리차드, 소피아를 건드리지 말아요. 아, 그리고 진, 아기 기저귀 좀 갖다 다오. 그리고 아버지 드릴 토디(위스키에 설탕 끓인 물을 섞어서 만든 술)를 만들어야 하니까 주전자에 물이 끓는지 보렴. 참으로 좋은 날씨야. 그렇지만 선생님은 폐렴이 많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시더군. 프랜치스, 앉아요, 토마스,아무 옆에나 그렇게 앉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
의사 아버지는 이 달은 홍역, 다음 달은 수두, 이렇게 무엇이나 병균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 그 희생이 되는 것은 여섯 살 난 토마스였다. 이 꼬마 환자는 또 다른 동생에게 병을 전염시키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를 제일 많이 받았다. 프랜치스는 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는 여러 사람이 앉았기 때문에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올해 열네 살이 된 진은 어머니를 꼭 닮았고, 크림색 피부를 가진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프랜치스는 빵과 고기와 우유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는 아까 공원에서의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를 않았고 가슴 속에 뭔가 큰 덩어리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착잡하고 혼란된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집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집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친절하고 그리고 그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그것이 그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하는 것 같은 아무런 신앙마저도 갖지 않은 합리주의자에게 교육받은 이 집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하고 지옥의 불길이 이미 그 발목을 핥고 있어야 할 터인데. 아홉 시가 지나고 십오 분쯤 되어 문 밖에 마차 멈추는 소리가 울렸다. 탈록 박사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환성을 질렀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박사는 아내에게 사랑에 넘치는 키스를 하고 나서 겨우 의자에 앉았다. 구두를 슬리퍼로 바꿔 신고 한 손에 술잔을 들고 무릎에는 젖먹이를 올려놓았다. 그런 그가 문득 프랜치스의 눈과 마주치자 김이 일고 있는 술잔을 쳐들며 놀리듯 말했다.
"언젠가 내가 말했었지, 독도 약에 쓸데가 있다고 말이야. 이런 독한 술도 좋은 때가 있어. 알코올 중독만 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단 말이야. 그렇지, 프랜치스?"
아버지가 기분 좋아하는 것을 보자 윌리는 공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박사는 무릎을 치면서 프랜치스에게 미소를 던졌다.
"참 좋은 일을 했구나. 카톨릭에서도 너 같은 작은 천사가 있구나. 하긴 네 신앙에는 나는 어디까지나 반대지만. 그러나 신앙의 자유는 존중한단 말이야. 진, 그런 눈으로 프랜치스를 보는 게 아니야. 간호사가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조숙하다간 난 마흔도 되기 전에 손자를 볼 것 같구나. 뭐 그것도 나쁠 건 없지."
그렇게 말하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아내를 향하여 건배를 했다.
"우리들은 비록 천국엔 절대 가지 못하겠지만-그러나 당분간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잠시 후 프랜치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문 밖까지 따라 나온 윌리가 프랜치스의 손을 힘껏 잡았다.
"성공을 빌겠어.......거기에 도착하면 꼭 편지해."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조선소의 기적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잠이 덜 깬 프랜치스는 침대에서 구르듯 빠져나와 황급히 작업복을 입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개를 움츠리고 몸을 떨면서 조선소로 향한 행렬에 끼었다 .아직 어두컴컴하고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아침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수위실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골조만 세워진 선체가 주위의 조선대 위에 여러 개 솟아 있었다. 반쯤 조립된 철갑선의 선체 옆에서 조 모어반의 점호가 시작되었다. 조와 조수인 철공, 철판을 자르는 철판공, 거기에 두 사람의 소년 리벳공과 프랜치스 자신이었다. 프랜치스는 불을 지피고 화덕 밑에서 풀무질을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싫으면서도 모두 열심히 각자의 작업에 착수했다. 모어가 큰 해머를 들어올려 내려치자 일제히 해머 소리가 높아지면서 조선소 일대에 울려 퍼졌다. 프랜치스는 화덕 속에서 시뻘겋게 달은 리벳을 꺼내 들고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골조의 볼트 구멍에 재빠르게 던져 넣었다. 그것은 배의 동체가 될 커다란 철판을 달구어 해머로 편편하게 두들겨 맞춘다. 이 작업은 대단히 괴로운 일이었다. 화덕 옆에서는 타 죽을 것같이 뜨겁지만 사닥다리를 올라가면 얼어붙을 것같이 추웠다. 직공들의 도급작업이었기 때문에 소년공은 아무리 재빨리 몸을 움직여도 언제나 느리다는 잔소리를 들었다. 더구나 리벳은 완전히 백열상태가 될 때까지 달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사닥다리를 오르내리고 불 옆을 우왕좌왕하다가 화상을 입거나 연기에 눈이 충혈 되어 끙끙거리면서도 프랜치스는 하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갑철공에게 리벳을 날라다 주어야 했다. 오후가 되면 더욱더 재촉이 심했다. 직공들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소년공을 인정사정없이 혹사한다. 퇴근 한 시간 전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오직 퇴근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만이 빨리 울렸으면 하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프랜치스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 기뻐했다. 그른 부르튼 입술을 핥으면서 모든 소리가 그친 조용함에 오히려 귀가 먹은 것처럼 그 자리에 잠시 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이윽고 귀가길에 오른 프랜치스는 땀흘린 피곤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일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눈동자가 희망으로 빛나며 문득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그날 밤, 그는 쓰지 않는 가마솥 속에 감추어 둔 나무상자에서 몇 년 동안 모아 둔 은화와 동전을 꺼내서 10실링의 금화로 바꾸어 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금화를 꼭 쥐어 보았을 때는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미세스 그레니에게 가서 바늘과 실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무엇에 쓰느냐고 야단을 쳤으나 돌연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그 위의 서랍에 실꾸리가 있다. 바늘도 꽂혀 있으니 가져가려무나."
그녀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프랜치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헐렁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기 방으로 돌아온 프랜치스는 금화를 정성 들여 종이에 싸서 저고리의 속주머니에 단단히 꿰맸다. 실꾸리를 돌려주려고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이젠 안심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내쉬었다. 이튿날은 토요일이고 조선소도 열두 시에 파했다. 두번 다시 이 문을 드나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뻐서 점심밥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했으므로 미세스 그레니로부터 꾸중이나 듣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외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식사를 마치고 아무도 모르게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달음박질을 하듯이 걸음을 재촉했다. 읍내를 벗어나자 달음박질하는 것을 그쳤으나 잔걸음은 여전했다. 프랜치스의 가슴은 노래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꽉 차 있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흔해빠진 불행한 소년의 가출이라고 하는 평범한 사건이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자유의 길인 것이다. 그는 맨체스타에 닿기만 하면 어느 방직공장이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거장까지 15마일을 네 시간에 걸었다. 알스테드 역 건물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여섯 시를 치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플랫폼의 불빛도 희미하게 졸고 있었다. 그는 대합실 의자에 걸터앉자 칼로 속주머니에 꿰맨 자리를 뜯어 소중히 간직한 빛나는 금화를 꺼냈다. 열차 시간이 되어 가자 매표소의 창문이 열렸다. 프랜치스는 얼른 창구로 가서 표를 사려고 했다.
"맨체스타 표 한 장 주세요."
"9실링 6펜스."
매표소 직원은 녹색 표를 일부인 기계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그는 이젠 살았다는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생각했던 차비와 꼭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내밀었다. 직원은 잠시 잠자코 앉아 있더니
"이거 뭐야? 9실링 6펜스라니까" 하고 말했다.
"10실링 드렸잖아요."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파출소에 넘겨 버릴 테다!"
직원은 화를 내며 돈을 프랜치스 앞으로 내던졌다. 그것은 반짝반짝 하기는 하나 10실링 짜리 금화가 아니라 1파징(4분의 1 페니)짜리 동전이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에 멍청해진 채 프랜치스는 열차가 홈에 들어와서 승객을 태우고 다시 기적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불현듯 스치는 것이있었다. 칼로 꿰맨 데를 뜯었을 때 조금 이상하다 하고 생각하긴 했으나 역시 그것은 자기의 서투른 솜씨가 아닌 아주 솜씨 있게 꿰맨 것이었다. 피가 가셔 버릴 것 같은 머리에 금화를 훔친 사람의 머리가 떠올랐다. 미세스 그레니였다.
그날 밤 아홉 시 경, 선다스톤 탄광촌의 교외를 달리는 한 대의 마차가 축축이 내린 안개 때문에 램프 불빛이 흐려져서 길 한가운데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자칫 잘못했으면 칠 뻔했다. 이런 밤 이런 장소에 마차를 몰고 가야 할 사람은 탈록 박사 이외에는 없었다. 박사는 놀라 앞발굽을 쳐들은 말을 진정시키고 안개 속의 앞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금방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참았다.
"아니. 너였구나! 정말 놀랐는걸. 자, 빨리 타거라. 그러고 있으면 내 팔이 빠져 버린단 말이다."
탈록 박사는 프랜치스의 몸을 모포로 싸 주고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열 시 반경 프랜치스는 박사집의 거실에서 뜨거운 수프를 먹고 있었다. 이미 모두 잠자리에 들어 무척 조용했다. 어쩐지 낯선 집에 온 것같이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머리를 따 내리고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윌리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남편의 옆에 서서 몹시 허탈 상태에 빠져 있는 피곤에 지쳐 버린 프랜치스를 지켜보았다. 소년은 그 두 사람이 있는 것도 뭔가 작은 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프랜치스는 웃으려고 했으나 웃어지지가 않았다. 그러자 탈록 박사가 다가와서 이상한 제스처로 청진기를 꺼내면서 말했다.
"네 그 기침은 심상치 않아. 자, 진찰을 해보자."
프랜치스는 앞가슴을 열고 박사가 가슴을 두들기며 진찰을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탈록은 진찰을 끝내고 어색한 얼굴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때의 유머는 어디로 갔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아내 쪽을 보며 두툼한 입술을 깨물었는가 싶더니 난로 옆에 자고 있는 고양이를 느닷없이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어린애를 군함 만드는 중노동을 시키고, 탄광이나 방직공장에서 혹사시키면서도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진짜 그리스도교 국가가 보면 질색을 할거야. 아니, 나는 자신이 이교도인 것을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단 말이다. 제기랄!"
그는 거칠게 프랜치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너 타인카슬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이름이 뭐지? 뭐 바논? 유니온 주점? 좋아, 그럼 빨리 집으로 가서 쉬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폐렴에 걸릴 거야, 알겠니?"
프랜치스는 이젠 거역할 기력도 없어 시키는 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일주일간 미세스 그레니는 줄곧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캄이 입고 있는 새로 산 스웨터에는 10실링의 정가표가 붙어 있었다. 그 일주일 동안은 프랜치스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나날이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왼쪽 옆구리가 아팠으나 그 몸을 이끌고 조선소에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여러 가지로 애써 자기를 감싸주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가끔 체리 케이크를 몰래 만들어 갔다 주곤 했으나 프랜치스는 그것조차 먹을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가 왔으나 프랜치스는 밖으로 나갈 원기가 없어서 이층 자기 방 침대에서 거의 혼수상태가 된 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믿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심장의 파동을 느꼈다. 창 밖의 길거리에 그 잊을 수 없는 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지의 위험한 해역을 지나가는 기선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는 하나, 둘도 없는 바로 그 모자였으므로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금빛 자루가 달린 양산, 거기에 짧은 실크 코트. 그는 창백한 입술을 움직여 약하디 약한 목소리로 외쳤다.
"폴리 아주머니!"
아래층에서 가게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으나 반만 유리를 낀 문 뒤에서 멈춰서 버렸다. 폴리 아주머니는 입을 꼭 다문 채 가게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었다. 미세스 그레니도 이에 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어났다. 카운터에 기댄 채말캄이 반쯤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폴리 아주머니의 시선이 이윽고 빵집 노파에게로 돌려졌다.
"확실히 미세스 그레니죠?"
미세스 그레니는 전에 없이 몰골이 사나웠다. 아직 잠옷 위에 더러운 앞치마를 두르고, 어깨가 다 드러난 이상한 블라우스는 깃이 오그라들었고 끈이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요?"
폴리 아주머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프랜치스 치셤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애는 지금 없습니다."
"그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폴리 아주머니는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듯이 재빨리 카운터 옆의 의자에 앉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미세스 그레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캄, 공장에 가서 아버지를 빨리 오시라고 해"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공회당에 가신다고 5분 전 쯤에 나가셨어요.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폴리는 천장을 보고 있던 눈을 돌려 남의 흉이라도 들추어낼 것처럼 말캄을 쏘아보았다. 그가 얼굴이 빨개졌으므로 그녀는 약간 미소를 지었다가 그대로 그를 외면해 버렸다. 미세스 그레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노기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바빠요.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 말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그 애는 밖에 나가고 없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못된 친구들하고 놀아나고 있을 거예요. 언제나 늦게 집에 돌아오고, 버릇은 나쁘고, 정말로 돌보기 성가신 애예요. 그렇지,말캄?"
말캄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이고말고" 하고 미세스 그레니는 말을 계속했다. "모두 털어놓으면 당신도 놀랄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우리들은 그리스도 교도니까 얼마든지 돌봐 줄 작정이에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그 애는 대단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건 잘된 일이군요" 하고 폴리는 장갑 낀 손으로 품위 있게 하품을 막으면서 시치미를 딱 떼고 말했다.
"저는 그 애를 데리러 왔습니다."
"뭐라고요!"
느닷없는 말에 미세스 그레니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외쳤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여기에 의사 선생님의 진단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폴리는 그 결정적인 말을 음미라도 하듯이 차근차근 힘주어 말했다.
"그 애는 영양부족과 과로로 늑막염에 걸린 거랍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폴리는 지갑 속에서 진단서를 꺼내어 의미있는 듯이 양산 끝으로 툭툭 쳐보였다.
"미세스 그레니, 당신도 이 진단서 정도는 읽을 수 있을 텐데요."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애는 내 자식과 마찬가지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고 있어요."
그녀는 일순 말을 중단했다. 문에 바싹 몸을 기댄 채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와들와들 떨면서 그 자리의 광경을 보고 있던 프랜치스가 헐렁거리는 손잡이에 너무 바싹 기댔기 때문에 문이 덜컹하고 열려 튕겨 나오듯이 가게 한가운데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아연실색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침내 폴리 아주머니가 침착성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자아, 프랜치스, 이리 와. 그렇게 떨지만 말고. 너 거기에 있었구나?"
"네, 있었습니다."
프랜치스의 몰골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폴리는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가서 짐을 챙겨 가지고 오너라."
"챙길 것이 없습니다."
폴리는 다시 장갑을 끼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빨리 가자."
미세스 그레니는 노기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당신 맘대로는 안 될 거예요. 법에 고발해서라도......."
"고발하겠으면 하세요."
폴리는 의미 있는 듯 진단서를 지갑 속에 넣었다.
"그렇게 되면 불쌍한 엘리자벳의 가재도구를 판돈이 얼마만큼 이 애를 위하여 쓰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의 아들을 위하여 쓰였는지 그것이 확실해질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세스 그레니는 공박을 당하여 얼굴이 새빨개져서 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쥔 채 표독스러운 눈으로 폴리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어머니, 가게 내버려두세요" 하고 말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됐지 뭐예요. 성가신 존재를 내쫓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폴리 아주머니는 양산을 팔로 안으며 그렇게 말하는 말캄을 아래위로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바보로군, 네 놈은" 그리고는 몸을 돌려 미세스 그레니에게 "당신도 역시 그래요." 그리고 의기양양한 듯이 프랜치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모자를 쓰지 않은 그를 지체할 것도 없이 데리고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은 역을 향해 말했다. 장갑을 낀 폴리의 손이 그의 윗저고리를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은 흡사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사랑스런 새라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역 앞에까지 와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스켓 한 봉지와 기침약 그리고 모자를 사주었다. 기차를 타고 마주 앉아서야 폴리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모자를 귀까지 덮일 정도로 눌러쓰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비스켓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반쯤 감으면서 그래도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얼굴만 보아도 알지. 그런 사람들한테 너를 맡겨 놓았다니, 참으로 멍청한 짓을 했지 뭐냐. 프랜치스야, 도착하면 당장 그 머리부터 깎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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