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13. 마침내 런던에
나는 배멀미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감에 따라 불안해졌다. 선원에게 말을 하기조차 부끄러웠다. 나는 영어 회화는 전혀 익숙하지 못했는데, 마즈무다를 씨를 제외하면 2등칸의 손님은 모두가 영국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에 그 요지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고, 설령 알아들었다 하여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입밖에 내기 전에 우선 일일이 마음속에서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칼과 포크를 쓸줄도 전혀 몰랐고, 메뉴중에 어떤 요리가 고기가 들지 않은 것인지 물어볼 용기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언제나 내 객실속에서 했다. 그리고 먹는 것은 주로 내가 가지고 온 단것과 과일들 뿐이었다. 마즈무다르씨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누구하고나 잘 어울렸다. 그는 갑판위를 마음대로 돌아다녔는데, 나는 온종일 객실속에서 있다가 갑판위에 사람이 없을 때만 용기를 내어 나갔었다. 마즈무다르씨는 나에게 손님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되도록 마음놓고 말도 해보라고 계속 일러 주었다. 그는 내게 법률가는 입담이 좋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법조계의 경험을 말해 주었다. 그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영어를 해보라고 하며, 틀리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외국 사람으로서는 피치 못하는 일이니 걱정말라고 일러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부끄러움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한 영국 손님이 매우 친절히 자기와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나보고 무엇을 먹으며, 무엇하는 사람이며, 어디를 가며, 왜 수줍어하느냐, 그런 등등의 것을 물었다. 그는 또 테이블로 오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절대로 고기를 안 먹는 것을 보고 웃었고, 우리가 홍해에 오자 친절히 말했다.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러나 비스케이만에 가면 당신도 결심을 고쳐야 할 겁니다. 영국은 춥기 때문에 고기를 안 먹고는 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들으니 거기서도 고기를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던데요 하고나는 말했다. 틀림없이 허튼소리입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고기를 안먹으면서 거기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보셔요,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당신보고는 술 마시란 말은 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고기는 정말 먹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지 못할 거요. 친절히 말씀해 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게 고기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러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차라리 인도로 돌아가면 돌아갔지, 남아있기 위해 고기를 먹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비스케이 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고기나 술을 먹어야겠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모아 보라는 권고를 받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영국인 친구를 보고 하나 써 달라 했더니 그는 쾌히 승낙하고 써주었다. 그래서 얼마동안 가지고 있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후에 보니 고기를 먹으면서도 그런 증명서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흥미가 없어졌다. 말을 믿을 수 없는 데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쨌든 시우샘프턴에 도착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느 토요일이었다. 배에서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친구들이 마련해 준 흰 플란넬 옷은 육지에 내린 후 입으려고 특별히 간직해 두었었다. 육지에 내리면 흰옷이 가장 잘 어울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흰 플란넬 옷을 입은 것이었다. 그때가 9월말이라, 알고보니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린들래이 회사 대리인에게 짐을 맡기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에 내 모든 짐을 거기에 맡겼는데, 열쇠까지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소개장을 네장 가지고 있었다. 메타(P.J.Mehta)박사에게와 달파트람 슈클라 씨에게와, 프린스 란지트신지 선생께와, 다다바이 나오로지 선생께 각각 드릴 것이었다. 갑판 위에서 누가 런던 빅토리아 호텔에 드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마즈무다르씨와 나는 그 말대로 그리로 갔다. 흰옷입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부끄러움을 이제는 이이상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호텔에 가서 들으니 이튿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그린들래이 회사에서 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났다. 메타박사께 사우샘프턴에서 전보를 쳤더니 그날 저녁 여덟시에 찾아오셨다. 그는 내게 정답게 인사를 해주셨다. 내가 플란넬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셨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나는 별 생각없이 그의 예모를 들어 그것이 어마나 보드라운가를 보려고 하다가 손길을 잘못된 편으로 쓸어서 털을 거슬러 놓았다. 메타 박사는 약간 노한 듯한 얼굴로 내가 하는 짓을 보시면서 그것을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잘못은 이미 저질러졌다. 이 일은 나의 미래에 대한 경고가 됐다. 이것은 나의 유럽 사람의 예의에 대한 첫 교과였다. 메타 박사는 익살 섞인 말로 거기에 대한 자세한 것을 말해 주셨다. 남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 것,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고 우리 인도에서 하듯 질문을 하지 말것, 떠드는 소리로 말하지 말것, 남에게 말할 때 보통 인도에서 하는 것처럼 서어(Sir) 라는 말을 쓰지 말것, 그것은 사환이나 아랫사람이 제 주인 보고만 하는 말이다. 그런 등등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호텔은 비용이 많이 드니 민박을 하라는 말도 해주었다. 우리는 그 문제를 월요일까지 미루기로 했다.
마즈무다르씨와 나는 호텔에 드는 것이 골치 아픈 일임을 알게 됐다. 또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몰타에서부터 배를 같이 타고 왔던 신디 사람은 마즈무다르씨와 서로 친구가 됐는데, 그는 런던이 처음이 아니므로 우리에게 방을 얻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월요일에 짐을 찾은 다음, 곧 호텔에 돈을 치르고 신디 사람이 얻어준 방으로 갔다. 그때 호텔비용이 3파운드였던 것을 기억하지만 참말 놀랐다. 돈을 그렇게 많이 문 대신 나는 사실상 굶었었다. 아무것도 입에 맞지 않았다. 하나가 맞지 않아서 다른 것을 청하면 그 두가지 값을 다 물어야 했다. 사실상 그 동안에 내가 먹은 양식은 봄베이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새 방에 가서도 나는 몹시 불안했다. 자꾸 집과 고국 생각만났다. 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밤이면 눈물이 두뺨에 흐르고 고향의 천만가지 생각이 다 나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나의 설움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또 말한다손 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리 해도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다. 사람도, 그들의 풍속도, 그들의 집조차도 다 낯선 것 뿐이었다. 영국의 예의에 대하여는 온전히 백치였으므로 끊임없이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채식 맹세 때문에 한층 더 불편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요리까지도 맛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진퇴양난이 되었다. 영국도 견딜 수 없고, 그렇다고 인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그러나 이왕 왔으니, 3년은 마쳐야 한다고 내속의 소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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