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908호
2012.9.26 (음8.11) / 발송인: |
|
nowmaster@nate.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대체로 인간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너무 선하거나 언제나 선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조지 오웰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우리말바루기] 귀향객, 귀성객
명절 고향 길은 으레 막히게 마련이지만 이번 설엔 폭설로 더욱 홍역을 치렀다. 교통 혼잡을 마다하지 않고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부모님을 뵙기 위함이다. 이처럼 부모를 뵙기 위해 객지에서 고향으로 가는 것을 귀성(歸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성(省)’은 ‘살필 성’자로 부모를 찾아뵙는 것을 뜻한다. 귀성을 하는 사람은 귀성객(歸省客)이라고 부른다.
귀성객 대신 귀향객(歸鄕客)이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귀향’은 ‘귀성’과 다르다. ‘귀향’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것을 뜻한다. 주거와 생활 터전을 완전히 옮기는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했다” “서울을 떠나 귀향한 지 어느새 일 년이 됐다” 등처럼 쓰인다.
이에 비해 ‘귀성’은 명절 등에 일시적으로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을 가리킨다. 잠시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지 주거와 생활 터전을 옮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명절에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에겐 ‘귀향객’보다 ‘귀성객’이란 말이 적절하다. 한자 성어이기 때문에 완전히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향객’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귀향 길’도 ‘귀성 길’이라 불러야 한다.
[우리말바루기] 일찌기, 일찍이 / 더우기, 더욱이
일찍이 최승자 시인은 노래했다.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1981년 펴낸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 실린 ‘일찌기 나는’이란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전의 인쇄물을 보면 ‘일찌기’라는 표기가 눈에 많이 띈다. 하지만 현재의 맞춤법 규정엔 ‘일찍이’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1988년 맞춤법이 개정되면서 ‘일찍이’로 쓰도록 했기 때문이다. 발음 습관에 따라, 혹은 감정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 독립적인 부사 형태에 ‘-이’가 결합된 경우엔 그 부사의 원형을 밝혀 적도록 하고 있다.
‘일정한 시간보다 이르게, 예전에’라는 뜻의 ‘일찍이’는 부사 ‘일찍’에 ‘-이’가 붙은 것이다. 맞춤법 개정 이전엔 ‘일찌기’가 표준말이어서 아직까지 혼동하는 사람이 많지만 “인상파 화가 세잔은 대상을 바라보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처럼 써야 한다.
‘그러한 데다가 더’란 뜻의 ‘더욱이’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더우기’로 적었지만 지금은 원형을 밝힌 ‘더욱이’가 바른말이다. ‘오뚝이, 곰곰이, 생긋이, 해죽이’ 등이 모두 그러한 예로 표기에 주의해야 한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
|
안개와 불 - 하재봉
한 뼘 내 가슴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산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매일 매일 해질녘의 가지 끝에서 따먹는 태양이 하나의 씨앗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리하여 아침마다 피어 오르는 꽃의 이마에 핏방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므로, 물의 전설을 믿고 골짜기 낮은 곳에 모여 보이지 않는 숲을 이루고 있는 그대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내 지나가는 걸음 뒤 저 어두운 산맥 속에 어떻게 쉬임없이 불의 씨앗이 심어지는지 어둠이 제 얼굴을 비춰볼 수도 없는 어둠이 와도 가슴 두근거리며 몰래 숨을 쉬다가 내가 손짓하면 왜 단 한 번 터지는 사랑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감싸안는지 그러나 지금은 내 가슴속 출렁이는 공기를 타고 태양이 그 예지를 살밖으로 뻗쳐가지 않도록 먼저 내 꿈의 고삐를 단단하게 잡아당겨야 한다. 그뒤에 튀어 오르는 팽팽한 힘으로 저 산맥 속에 잠자는 숯 한 낱을 꺼내 이슬무덤 그득한 네 나라를 다스리겠다. 수세기 전부터 내 꿈을 이루고 있는 투명한 밧줄 캄캄한 지층속으로 길게 내려보내 지금 내가 딛고 있는 땅 천 길 깊은 곳에 사는 불덩이를 불러들이고 아직도 거처없이 모래와 열병만이 사는 사막을 헤매고 있을 발목잘린 바람의 무리들을 손짓하여 그 끝없었던 네 나라, 이름 모를 눈물을 불사르겠다.
내가 눈썹 위로 횃불 한 묶음 켜들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질러가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목숨을 모두어 뜨락에 꽃 한 송이 피운 그대여, 잠깐 길을 잡아 내려오는 번개기둥을 붙잡고 묻노니 다함없이 솟아나는 샘물은 어디에 있는가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2.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프
인디언 로우
나는 그를 인디언 로우라고 부른다. 그가 내게 가나뱅이 인디언 로우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때는 2월,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보스톤의 전형적인 아침나절이었다. 차들이 어찌나 밀리는지 운전사들은 짜증이 나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불행한 표정들이었다. 그렇다.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행해 보였다. 그 한 사람이란 바로 내가 타고 있는 택시 운전사인 미스터 로우였다. 내가 물었다. "길이 이렇게 막히는데도 당신은 짜증을 내지 않는군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주차장처럼 변해 버린 도로의 차량 행렬을 손짓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린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어요. 그러니 흥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피우고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생도 골프를 치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칩니다만, 아직 초보자인걸요." "티(공을 치기 시작할 때 공을 올려놓는 자리)에 접근해서 보면 다른 경기자가 페어웨이(티와 그린 중간의 잔디 구역)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그 다음 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그의 얘기에 맞장구를 쳤다. "많은 경우에 그렇지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요. 여기서도 똑같은 상황이오." 그는 주변에 밀려 있는 차량을 가리켜 보이고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들였다. "그러니 흥분하거나 미치광이가 될 필요가 어디 있겠소? 누구도 이것에 대해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가 화를 내면서 속을 태우지요." "사람들 모두가 어딘가에 가야만 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나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나 역시 약속 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짐짓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부연 설명을 했다. "사업 약속이 있거나 비행기를 타야 하거나 그밖의 여러 이유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는 내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다들 택시에 타고 있겠지요. 모두가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하니까요. 택시 운전사를 제외하고는 말이오. 택시 운전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지요. 저 친구를 보시오." 그는 정장을 한 채 차에서 내려 교통 경관에게 항의하고 있는 한 남자를 손짓했다. 교통 경관은 뒤엉킨 차량 행렬 한가운데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저 친구는 사실상 교통 경관을 한 대 먹이고 싶은 겁니다." 내가 그 친구를 옹호하고 나섰다. "아마 출근 시간에 늦어서 저러겠지요." 그러자 미스터 로우가 말했다. "난 출근시간에 늦는 법이 없다오. 내 택시에 올라타기만하면 그것이 곧바로 출근이니까 말이오." 우리는 뒤엉킨 차량들을 정리하느라 애를 먹는 교통 경관을 바라보며 않아 있다가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내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택시 운전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내가 그에게 슬쩍 물었다.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해 봤지요. 한때는 해군의 통신계 하사관 노릇도 했고, 사무실 근무도 해 봤소. 한동안은 증권사에서 일한 적도 있지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소." 내가 다시 물었다. "다른 일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지 않겠어요?"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물론이지요. 내가 계속해서 증권사에 몸담고 일했다면 지금쯤 아마 백만장자가 되었을 거요. 누가 압니까? 하지만 난 그런 야망을 버렸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야망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건 왜죠?" 나는 약간 당황했다. 전에는 아무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묻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야망의 필요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법칙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운전사가 나한테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왜냐구요?" 나는 그의 질문을 따라한 다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야망을 갖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니까 그렇겠죠." 그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그래야 좋은 집과 차와 옷을 사고, 가족들에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인생의 발전 아닌가요?" 이때 그가 내게 말했다. "난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도 없다오." 난 그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건 필요하지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마치 인디언의 이야기처럼 들리는군요."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인디언이라구요? 무엇이 인디언 같다는 말인가요? 어떤 인디언?"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가난한 인디언 로우가 있었소. 내가 그 이야기를 당신한테 들려 주리다." 그는 운전석에 몸을 기대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않자 있는 인디언이 있었다오. 그러데 날마다 그가 그곳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백인 친구 하나가 사람들에게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했소. '로우, 저 가난뱅이 인디언을 말야('로우'는 '저길 좀 봐'라는 뜻)' 하루는 그 백인이 인디언에게로 다가가서 물었소. "자네,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인디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소. "보면 모르나. 낚시를 하고 있지.' 백인 친구가 다시 물었소. "자넨 어떻게 맨날 낚시만 하고 있나?" 인디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소. 그러자 백인 친구가 말했소. "자네도 뭔가 직장을 갖고 일을 시작해야지." 그러자 인디언이 물었소. '왜?" 백인 친구가 말했소. "왜냐구? 그래야 돈을 벌지." 인디언이 다시 물었소. "그래서?" 백인 친구가 말했소. "그래야 그 돈을 투자해서 더 많은 돈을 벌지." 그러자 인디언이 뭐라고 말했겠소? 인디언은 다만 또다시 물었소. "그래서?" 백인 친구는 화가 나서 소리쳤소. "그래야 부자가 돼서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 아냐." 그러자 인디언은 백인 친구를 흘끗 올려다보고는 다시 낚시찌로 시선을 돌렸소. "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그것이 그 인디언이 마지막으로 백인 친구애게 한 말이었소." 말을 마치고 택시 운전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차창 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로우, 가난뱅이 인디언! 그 인디언이 바로 나요." 나는 그가 들려 준 이야기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나요?" "물론이요." "그리고 만족합니까?" "물론이오. 다른 차에 탄 사람들을 보시오. 나를 제외하고는 그들 모두가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소. 그것은 그들이 지금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요. 그들은 지금 자기등이 원하는 장소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들은 시간과 돈과 다른 어떤 걸 낭비하고 있소. 난 그렇지 않아요. 난 어느 곳으로도 가고 있지 않소. 난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으니까 말이오. 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나 어떤 다른 걸 낭비하고 있는 것도 아니오. 그들은 이 추위 속으로 걸어나가 눈비를 맞거나 진창에 빠지기도 하지요. 나로 말할 것같으면 이 따뜻하고 편안한 택시 안에 앉아 있지요. 내가 언제 이 택시에서 내리는지 당신은 알겠소?" "아니오.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내가 내리고 싶을 때요.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거나 입이 심심할 때, 아니면 어딘가 가서 누군가와 얘길 나누고 싶을 때가 바로 그때라오. 난 원할 때면 언제라도 이 택시에서 내린다오. 어딘가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당연히 내려야 하기 때문에 내리는 게 아니오. 그런 거야 승객들의 해당 사항이지 난 상관없는 것이오." 난 그 말에 동의했다. "정말 그렇겠군요."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날씨가 좋아졌을 때를 생각해 보시오. 봄이나 여름처럼, 혹은 가을이 되어 낙엽들이 물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모두 주말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지요. 다들 차를 몰고 떠나기를 원하지요. 안 그렇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야외로 떠나고 싶어하지요. 저의 숙모님도 주말마다 떠난 답니다." 그가 말했다. "나무 이파리를들을 구경하고, 물가에도 내려가 보고, 국립공원에도 들르면서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 이겁니다. 어디 어른들만 그렇소? 아이들은 또 어떻고? 십대들이나 심지어 열 살짜리 아이들까지도 도시를 벗어나 좀 돌아다니고 싶어하지요." 그는 옆에 흐르는 찰스 강을 손짓해 보였다. "여름이 되면 당신은 창문을 내리고 이 강가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거요. 게다가 난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돈까지 벌지요."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난 당신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는지 모르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이 그 일을 좋아하기를 바라오.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서 빨리 백만장자가 돼서 나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소. 난 백만장자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백만장자가 될 필요가 없는 사람이요. 난 지금 그일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그가 택시를 몰고 떠난 뒤에소 나는 한참 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난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곧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야만 했고,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로우(저길 좀 봐), 저 가난뱅이 택시 운전사를.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총총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포스터 푸콜로
|
|
|
문학자료 → 철학 |
|
|
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4부 근세 철학 이야기
버클리 :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오로지 경험 세계이다. 아는 것은 감각뿐이므로 경험을 넘어선 불변하는 실재에 관해서 전혀 없으며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아일랜드의 다이저트 캐슬 출신으로, 특히 로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729년 영국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에 잠시 체류했기 때문에 미국 철학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는 아일랜드의 클로인 교회에서 신교 주교로 일하다가 옥스퍼드에서 생애를 마쳤다. 버클리는 베이컨, 로크 등과 달리 철저하게 경험적 원리를 관철함으로써, 경험만 있고 외부 대상은 없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또 그는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보편적 비물질주의의 극단적 입장을 대변한다.
감각만이 참다운 경험이다 버클리는 로크의 인식론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인식론을 전개한다. 그는 감각만이 참다운 경험이고 추상적 반성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표상(좁은 의미의 관념)은 구체적인 개별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구체적인 이 인간, 저 인간 그리고 저 삼각형, 이 삼각형 등을 느끼고 생각해 관념을 만들어 낼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와 같은 보편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일반적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인간, 저 인간과 같은 동일한 종류의 대상을 모아서 그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상 자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로크가 말한 불변하는 사물의 성질인 제1성질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주관적인 제2성질만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버클리의 입장은 철저한 경험론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관념 이외의 다른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므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살아 있으니까 모든 것이 있고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인 주관적 인식론의 색깔을 가진다.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 버클리에 의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오로지 경험 세계이다. 우리의 마음이 아는 것은 감각뿐이므로 만일 경험을 넘어서서 불변하는 실재 사물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 전혀 알 수 없고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우리에게 지각된 것으로서만 있다. 그래서 버클리는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버클리는 관념의 세계가 질서를 가지고 목적에 어울리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세계를 창조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관념적 존재, 곧 정신적 존재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의 질서는 정신적 존재와 비슷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존재는 모든 개별 정신에 목적과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정신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는 무한한 힘을 소유한 선한 정신으로서의 신이 아니면 안 된다. 버클리의 이러한 신 존재 증명은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이면서 동시에 심리학적,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버클리가 신을 직접 알 수 있다고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버클리의 신은 정신적인 것(관념)의 총체 개념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작용으로부터 신 개념을 추론하고, 우리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관한 관념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버클리는 그의 선배들처럼 경험론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또 한편으로 선배들의 유물론이나 무신론을 배격하고 관념론을 지지한다.
|
|
|
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
|
사기 열전 4 - 김병총
49. 이광장군열전(李廣將軍列傳)
적을 만나면 용감하였고 사졸들에게는 인애로웠으며 그의 호령은 명쾌하여 부하 장졸들이 심복했다. 그래서 제49에 <이광장군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이광 장군은 농서군 성기현(成紀縣:甘肅省 秦安縣) 출신이다. 그의 선조는 진(秦)나라 때 장군이 되어 연(燕)의 태자 단(丹)을 추적해 가서 사로잡은 이신(李信)이다. 그의 가족들은 괴리(槐里:狹西省 興平郡)에 살고 있었으나 훗일 성기현으로 이주했다. 이광의 가문에서는 대대로 그들 특유의 사법(射法)인 궁술이 전수되고 있었다. 효문제 14년이었다. 흉노가 대거 소관(蕭關)으로 침입했다. 이때 이광은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종군해 흉노를 쳤다. 말을 탄 채로 활쏘기에 뛰어나 수많은 적을 죽이고 또 포로도 많이 잡아 그 공로로 낭중(郎中:侍從)이 되었다. 이광의 사촌동생 이채(李蔡)의 공로도 혁혁해 낭관이 되어 두 사람 모두 무기상시(武騎常侍:侍從騎兵 武官)가 되어 봉록 8백 석씩 받았다. 언젠가 이광이 황제를 수행해 사냥을 하다가 위험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돌파하여 맨주먹으로 맹수와 격투해 때려잡자 효문제는 크게 한탄했다. "아깝다! 그대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게 억울하다. 만일 그대가 고제(高帝) 때 태어났더라면 어디 만호후(萬戶侯) 정도였겠는가!" 효경제가 즉위하자 이광은 농서군의 도위(都尉)가 되었다가 기랑장(騎郞將:侍從騎兵隊長)으로 승진했다. 오, 초 7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광은 효기도위(驍騎都尉:효기부대장)가 되어 태위 주아부를 따라 오, 초군을 쳤다. 이광은 적의 군기를 빼앗고 창읍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양왕(梁王)한테서 장군의 인수를 몰래 받은 것이 탄로나 개선한 뒤에도 상이 없었다. 이광은 상곡군(上谷郡:河北省 廷慶縣 일대) 태수로 인근을 전전했다. 그것은 분명한 좌천이었다.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매일같이 몸소 전쟁터로 나아가 흉노와 충돌했다. 전속국(典屬國:속국 관리장)인 공손곤사(公孫昆邪)가 그런 이광의 짓거리들을 보고 돌아가 울면서 황제에게 간했다. "이광의 재능과 용기는 당대에서 천하무쌍입니다. 그는 제 능력을 믿고 자주 흉노와 맞닥뜨려 싸워 이기고는 있지만 이러다가는 언젠가는 그를 잃을 게 뻔합니다. 폐하께선 그런 인재를 버리실 것입니까." 잠시 놀란 황제는 이광을 옮겨 상군(上郡:狹西省 綏德縣 일대)의 태수로 삼았다. 뒤에는 변군(邊郡)의 태수로 전출됐다가 다시 상군으로 돌아왔고, 그가 태수로 돌아다닌 것은 농서, 북지(北地:甘肅省 環縣 일대), 안문(雁門), 대군(代郡), 운중(雲中) 등지였는데 가는 곳마다 이름을 드날렸다. 그가 상군 태수로 있을 때 흉노가 크게 침입했다. 이광이 끊임없이 만용을 부렸으므로 황제가 중귀인(中貴人:宮中에서 총애하는 宦官)을 시켜 이광의 병사를 통제하도록 한 상태였다. 그때 중귀인은 제멋대로 수십 기(騎)의 병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흉노병사 3인에게 포위되었다. 흉노병 세 명은 원을 그리고 빙빙 돌면서 중귀인 일행들을 향해 활을 쏘아대었다. 그들은 명사수였던지 쏘는 화살에 중귀인의 기병들은 가차없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다. 중귀인은 몸에 상처를 입은 채 간신히 살아 본대로 돌아왔다. "전멸했소이다. 놈들의 활솜씨가 하도 귀신같던지......" "독수리를 쏘아맞힐 정도로 솜씨가 좋다면......!" 이광은 적개심이 일었다. 즉시 백여 기병을 이끌고 그 자들을 추적해 갔다. 그들 세 명은 말을 잃고 수십 리쯤 걸어가고 있던 상태였다. "자, 그대들은 좌우로 늘어서서 내가 놈들을 어떻게 잡는가 구경이나 하고 있거라." 그러면서 이광은 화살 세 대로 두 흉노병을 쏘아죽인 뒤 한 자는 상처만 입히면서 사로잡았다. "너희들은 무엇하는 자들이냐." 이광은 포로를 결박한 뒤에 물었다. "수리를 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군사들이 수리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그런데 사람을 쏘아?" 그때였다. 이광의 군사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장군님, 앞을 보십시오!" 건너편에는 수십 기의 흉노병들이 다가오다 말고 이광의 소대가 유인병이라 생각했는지 멈칫 놀라서 산으로 올라가 포진했다. "장군님, 적들의 본대가 뒤쪽에 있는 듯합니다. 우리도 피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다. 우리가 도망치면 대군이 뒤쫓아 올 게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의 본대는 수십 리나 떨어져 있다. 이런 상태로 도망치면 우리는 전멸한다. 그러니 이곳에서 적진 쪽으로 더 진격해 말안장을 풀고 머문다." "예에?" "유인병인 것처럼 행동해야 우리가 산다. 모두 전진!" 그래서 이광의 소대는 흉노의 본진에서 2리(里) 가량 떨어진 곳에다 말안장을 풀고 머물렀다. "적들이 급습해 올까 두렵습니다." "적들은 우리가 도망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가만히 있음으로 해서 유인병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흉노병들은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 대신 흉노병들도 이쪽의 허실을 엿볼 작정이었는지 백마 탄 장수 하나가 수십 기를 거느리고 와서 자주 기웃거렸다, "열 기만 나를 따라오너라." 이광은 흉노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백마 탄 장수를 사살한 뒤 다시 소대로 돌아와 태연하게 말안장을 풀었다. 부하들은 이광의 용기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얼마 후 해가 저물었다. 흉노병들은 시종 이상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감히 쳐들어오지는 못했다. "자, 가만히 야음을 타서 철수한다." 이광의 소대는 날이 밝을 무렵에 본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본대에서는 이광의 행방을 몰라 구원병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효무제가 즉위했다. 효무제의 좌우 근신들은 모두 이광을 명장이라 추켜 세웠다. 그래서 황제는 이광을 상군 태수인 채로 미앙궁(효무제의 거처)의 위위(衛尉:禁衛隊長)에 임명했다. 그리고 정불식(程不識)을 장락궁(長樂宮:太后의 거처)의 위위로 삼았다. 정불식은 본시 이광과 함께 변경군 태수로서 주둔군의 장군이었다. 그런데 흉노를 치러 나가는 두 장군의 태도는 판이했다. 이광은 출격시 부하들에게 부오행진(部伍行陣:군사를 隊伍로 나누고 陣法에 맞추어 행군하는 것) 따위를 강요하지 않았다. 사막이 대부분인 호지(胡地)이므로 때마침 좋은 물이나 풀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숙영하여 병사들을 휴식시켰으며, 밤에도 자유롭게 풀어주어 조두(구리로 만든 밥짓는 그릇.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이것을 쳐서 경비함)를 쳐서 방위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막부(幕府:장군의 사령부)에서도 형식적인 문서나 장부를 생략했다. 그렇지만 척후병을 멀리까지 세워 경계했기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정불식의 통솔방법은 달랐다. 그의 부곡(部曲:장군 밑에 五部가 있고 部 밑에 또 曲이 있다)은 대오와 진영이 항상 질서 정연했고, 밤에는 조두를 쳐서 경계를 엄히 했으며, 군리(軍吏)가 군의 장부를 지극히 밝게 정리하도록 요구했으므로 군은 휴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기 때문인지 여전히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언젠가 정불식은 이렇게 술회했다. "이광의 군규(軍規)는 지극히 간단 용이하다. 만약 흉노가 급습한다면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사졸들은 자유롭게 편히 지내는 탓으로 모두들 이광을 위해 죽기를 즐겁게 여긴다. 나의 군사는 군규가 번잡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흉노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당시 한나라 변경군(郡)에서는 이광, 정불식 모두 명장이었다. 그러나 흉노는 이광의 전략을 오히려 두려워했고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기를 즐거워한 반면 정불식을 따르기는 싫어했다.
정불식은 효경제 때 원칙을 존중해 자주 기탄없는 간언(諫言)을 했기 때문인지 태중대부(太中大夫:궁중 고문관)에 임명되었다. 그의 사람됨은 역시 청렴하고 법률과 규칙에 충실했다. 후에 한나라는 마읍성(馬邑城:山西省 朔縣 동북쪽)을 미끼로 삼아 선우를 유인한 뒤 마읍 부근 골짜기에다 대군을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그때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이었으며 호군장군 한안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우가 그 계획을 눈치채고 철수해 버렸으므로 한군으로서는 모두 아무런 공도 세울 수가 없었다. 그 후 4년이 지나서였다. 이광은 위위로서 장군이 되어 안문으로 나아가 흉노를 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이광은 흉노군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선우는 평소에 이광의 현명함을 듣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명령해 두고 있었다. "이광을 만나거든 가급적 산 채로 잡아오도록 해라." 그런데 흉노의 기병들이 이광을 잡았을 때는 마침 그는 부상을 당해 앓고있었다. 이광은 두 마리 말 사이에 얽어매여져 누워서 10여 리쯤 끌려갔다. 그는 죽은 척하고 곁눈질로 흘겨보자 흉노의 소년병 하나가 준마를 타고 가고 있었다. "바로 이때다!" 이광은 벌떡 일어나 느닷없이 소년병의 말 위로 뛰어오르며 소년병을 밀어뜨린 뒤 활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수백 기의 추격병들이 뒤따라왔다. 이광은 뺏은 활로 흉노들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남쪽으로 수십 리를 도망쳐 왔다. 그는 패잔병들을 만나 간신히 목숨을 구해 본대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는 한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는 형리의 손으로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많은 사졸들을 죽게 했고 또한 흉노에게 생포되었었다는 이유로 참형의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는 은퇴하여 수년 동안 집에 있었다. 영음후 관영의 손자 관강(灌强)과 함께 전야(田野)에 살면서 남전현(藍田縣)의 남산에서 사냥이나 하는 것이 소일거리였다.
어떤 날 밤이었다. 종자 하나만 데리고 야외로 나갔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패릉의 정(亭:파출소)에 이르자 마침 패릉의 위(尉:경찰서장)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리를 질러 이광을 정지시켰다. 이광을 대신해 종자가 대답했다. "이 분은 전날의 장군 이광이십니다." "무어? 전날의 장군이라고? 현직장군이라도 야간통행 위반을 묵과할 수 없다!" 그렇게 되어 이광은 정에 유치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흉노가 침범해 요서군(遼西郡:熱河省 朝陽 일대)의 태수를 죽이고 한안국까지 격파했다. 그 일로 한안국은 우북평군(右北平郡:河北省 北東에서 熱河省 南東에 걸쳐 있음)의 태수로 좌천되었다가 거기서 죽었다. 그래서 황제는 별 수 없이 다시 이광을 불러 우북평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이때 이광은 황제에게 패릉의 위와 함께 보내줄 것을 주청해 군영에 이르자마자 패릉 위를 베어 버렸다. 흉노는 이광이 우북평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의 비장군(飛將軍)이 여기로 온단다!" 그래서 흉노는 여러 해 동안 이광을 피해 감히 우북평으로는 침범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수풀 속에 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리고 살촉이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활을 바위에다 대고 쏘았으나 살촉은 바위를 뚫지 못했다. 이광은 부임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몸소 찾아나서서 그것을 쏘아 잡았다. 한번은 상처입은 호랑이가 달려들어 자신이 부상을 당했으나 결국은 그 호랑이를 쏘아 죽이기도 했다. 이광은 청렴했다.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버렸으며 음식도 사졸들의 것과 꼭 같은 것을 들었다. 그는 죽기까지 40여 년 동안 2천 석의 봉록을 받는 신분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남아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일생 동안 재물에 관해서 말한 적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그의 생김새의 특징은 큰 키에 원숭이처럼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활의 명수였던 이유가 그런 신체적 특성에 기인한 듯도 했다. 그의 자손이나 남들이 그에게서 아무리 궁술을 열심히 배워도 도저히 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는 말솜씨가 없었으며 그 때문인지 말수도 적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거의가 땅에다 군진(軍陣)을 그리고 즐기거나 작은 표적으로 활쏘기를 해서 술내기 유희를 즐기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활을 가지고 놀면서 생애를 마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광이 군사를 거느리고 황야를 건너다가 물을 발견하게 되면 사졸들이 모두 물을 마시기 전까지는 결코 물가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의 군령 또한 관대하고 가혹하지 않았으므로 사졸들은 그를 경애하였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바를 즐겁게 여겼다. 그가 활을 쏠 때, 적의 급습이 있더라도 수십 보 사정거리 안으로 적이 근접하지 않으면 결코 발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쏘는 화살에 적은 백발백중으로 맞아 죽었다. 그는 근접사격을 즐겼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병사들이 곤경에 빠지기도 했으며 맹수를 잡는 경우에도 자주 부상을 입곤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석건(石建)이 죽었으므로 효무제는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해 낭중령에 임명했다. 원삭(元朔) 6년에 이광은 다시 후위군(後衛軍)의 장군이 되어 대장군 위청의 군에 소속되었다. 정양(定襄:山西省 大同市 북서(北西)쪽)으로 나가 흉노를 쳤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적병을 베든가 포로로 잡는 숫자가 행상의 기준치에 도달해 후작(侯爵)이 되는 자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이광에게는 공훈이 없었다. 그 후 3년이 지나 이광은 낭중령으로서 4천 기(騎)를 이끌고 우북평으로 출격했다.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도 1만 기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각각 다른 길로 갔다. 수백 리 가량 진격했을 때였다.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4만 기를 이끌고 와서 이광을 포위했다. 그 엄청난 군사들의 위세에 이광의 군사들은 모두들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이광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아들 이감(李敢)에게 명령했다. "네가 앞장서서 돌격해라!" 이감이 수십 기만을 데리고 일직선으로 흉노군을 돌파해 나가 다시 포위군을 뚫고 본대로 돌아와서는 이광에게 복명했다. "오랑캐놈들 별 거 아닙니다." 군사들이 그제서야 안심했다. 이광은 원형진을 쳤다. 그런 진형으로 밖으로 쳐나가자 흉노가 쏘는 화살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전사자가 절반이 넘고 화살은 거의 다했다. "활줄을 끌어당긴 채 발사하지 말라. 화살을 아껴야 살아남는다!" 이광은 선두에 서서 자신의 황색 대궁(大弓)으로 적의 비장(裨將:副將) 몇 명을 쏘아 죽였다. 그제서야 흉노의 포위망이 약간 풀렸다. 때마침 해가 저물었다. 군사들은 죽을 상을 하고 있었으나 이광의 의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층 더 군사들을 독려하며 군진을 정비했다. 군사들은 이광의 용기에 경복하여 사기가 되살아났다. 이튿날도 용전 분투하는 중 박망후의 군사가 도착해 흉노군의 포위망이 풀렸다. 그렇지만 한군은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그들을 추격할 수는 없었다. 그때 이광의 군사는 거의 전멸할 뻔했다. 전쟁을 끝내고 귀환했다. 장건은 지체하여 합류기일을 어겼다 해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이광은 군공은 있었지만 많은 부하를 잃었으므로 공죄(功罪)가 상쇄되어 상은 없었다. 전날 이광의 종제 이채(李蔡)는 이광과 함께 효문제를 섬겼다. 이채는 효경제 때 공로를 쌓아 봉록 2천 석의 지위에 올랐다가 효무제 시대에는 대국(代國)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또 원삭 5년에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을 쳤다. 그 공로가 행상기준에 도달하여 봉을 받아 낙안후(樂安侯)가 되었다. 원수(元狩) 2년에 이채는 공손홍(公孫弘)에 대신하여 한의 승상이 되었다. 이채의 사람됨은 하급에서 중 정도로 대단할 것이 없었으며 그의 명성 또한 이광에 비하면 어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이 작위도 봉령(封領)도 얻지 못하고 관위도 구경(九卿)에 불과했는데 이채는 열후가 되고 최고 관위인 삼공(三公)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이광의 부하였던 여러 군리, 사졸들 중에서 후작에 봉해진 자들까지 있었으니 벼슬이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이광은 낙담하면서 망기(望氣:雲氣의 움직임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예언자)하는 왕삭(王朔)에게 물었다. "한나라가 흉노 토벌을 개시한 이래 나는 종군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리고 각 부대의 장교 이하 중에서 재능이 보통도 못 되는데도 흉노 토벌의 군공이 후작에 이르른 자가 수십 인이나 된단 말이오. 문제는 내가 남보다 그 군공이 결코 떨어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나는 한 치의 군공도 봉읍도 얻지 못하게 되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소. 혹시 내 관상이 후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겠소, 아니면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겠소." "장군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여 보십시오. 지금까지 후회되는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까." "글쎄 말이오. 내가 농서군의 태수로 있을 때 강족(羌族:티베트족, 즉 西藏族)이 반란을 일으켜 내가 투항권고를 하자 8백 명이 항복해 왔었소. 그런데 내가 그 자들을 속여 모조리 죽여버린 적이 있소. 가슴에 걸린다면 그것밖에 없소."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왕에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일은 없습니다. 장군께서 작위를 얻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다시 2년이 지났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이 흉노로 대거 출격했다. 이광도 종군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간청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광이 재삼재사 간청하자 황제는 할 수 없이 그를 전위장군(前衛將軍)에 임명했다. 그 해가 원수 4년이었다. 이광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와 접전하려고 이미 요새에서 나와 있었다. 그런데 위청은 이광에게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의 군사와 함께 동쪽으로 진군케 했다. 동쪽길은 멀리 돌아가는 길인데다 물과 풀밭도 없어 대군이 쉽사리 진군하기에는 몹시 어려운 행로였다. 이광은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 내 부대와 부서는 분명히 전위부대입니다. 나는 소시때부터 흉노와 싸워왔습니다. 이번만은 선우와 멋지게 맞부닥쳐 싸우고 싶은데 먼 길을 돌아서 가라 하시니 무슨 이유입니까. 내가 전위장군임을 기억하시고 부디 앞장서 선우와 대결토록 해 주시오!" "아니 됩니다. 조장군과 함께 명령대로 동도로 나가시오." 별 수 없었다. 사실 대장군 위청은 황제로부터 은밀한 훈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광은 연로하다. 또한 흉노와의 싸움에서는 항상 불운했으니 절대로 선우와 맞서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위청은 이미 포로를 심문해 선우의 거처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광을 결코 직진시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위청의 은인인 공손오가 전번의 패전으로 후작위를 잃고 중장군(中將軍)으로 따라나선 중이었으므로 선우와 부딪치게 하여 공을 세우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이광도 그런저런 사정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대장군에게 떼를 썼던 것이다. 대장군은 이광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사(長史)를 시켜 봉서(封書)를 이광에게 다시 전달하게 했다.
-서면에 적힌 대로 부대를 이끌고 나가라.
이광은 원한과 분노를 품은 채 조이기의 군과 합류해 대장군에게는 출발한다는 인사도 없이 길을 떠났다. 속절없이 동쪽길로 돌아나가게 된 것이다. 이광의 군대에는 제대로 길을 안내할 만한 안내자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고 헤매기만 하다가 대장군과 합류해야 될 날짜에 뒤늦고 말았다. 한편 대장군은 선우와 접전했다. 그러나 선우가 도망쳐 버렸으므로 잡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남진하여 사막지대를 건너다가 이광과 조이기를 만날 수 있었다. 이광은 위청을 이미 만났기 때문에 안심하고 본대로 귀환했다. 그러나 위청은 군공없는 싸움의 결과를 두고 난처한 책임을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청은 또다시 장사를 시켜 건반(乾飯)과 술을 보내면서 이광과 조이기가 길을 잃게 된 상황을 문책하게 했다. "무어냐!" 이광은 장사를 보자 화가 날대로 났다. "질문은 여기 있습니다. 답신서를 제출하라십니다." "내가 네깐놈에게 중언부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답신서는 내가 직접 꾸며서 사령부로 가져가겠다. 어서 꺼져 버려라. 다른 장교들한테는 죄가 없으니 물을 것도 없다." 장사가 나간 뒤 이광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흉노와 싸우기를 70여 차례나 했다. 이번에 다행히도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선우와 싸워 그를 목베려 했었다. 전위장군이어서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겠나. 그런데도 대장군은 내 부서를 멋대로 옮겨 먼 길을 돌아가게 해서는 길을 잃게 만들었다. 어찌 이것이 나의 죄이겠는가. 그러나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천명(天命)일 테니까. 내 나이 벌써 60을 넘겼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내가 저 따위 도필(刀筆)의 사(史:文書를 취급하는 말단관리) 따위에게 곡절을 대꾸하고 앉아있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 변명이다." 드디어 이광은 칼을 잡아 스스로 목을 찔렀다. 이광의 군대는 사대부를 비롯한 전군이 이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까지도 그를 알거나 모르거나 노인이나 장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우장군 조이기는 형리에게 넘겨져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이광에게는 당호(當戶), 초(椒), 감(敢)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모두 낭(郎:侍從)으로 있었다. 한번은 황제가 한언(寵臣)과 장난말을 주고받았는데 이당호가 느끼기에는 한언이 몹시 불경, 불손했다. 그래서 단칼에 그를 쳐버리고는 도망했다. 황제는 이당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이초는 대군(代郡)의 태수가 되었으나 아버지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이당호의 유복자에 이능(李陵)이 있었다. 이광이 군중에서 자살했을 때 이감은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고 있었다. 이채는 이광이 죽은 다음해에 승상의 신분으로 있었는데 효경제의 어릉 외원(外垣) 안 공지를 불법 점유한 죄로 형리에게 넘겨져 취조를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미리 자살하여 취조는 면했다. 그의 봉령은 몰수되었다. 이감은 교위(校尉)가 되어 표기장군을 따라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해 군기(軍旗)를 탈취하고 수많은 적의 목을 베었으며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봉령이 없는 후작)의 작위와 2백 호의 식읍을 받고 아버지 이광을 대신하여 낭중령이 되었다. 이감은 대장군 위청이 자신의 부친을 냉대해 죽게 만든 사실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위청을 쳐서 몸에 상처를 입혔다. 위청은 그런 사건이 밝혀져서 명예로울 것도 없거니와 이광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어 모른 척 덮어 두었다. 얼마 후 이감이 황제를 모시고 옹(雍)의 감천궁으로 가서 사냥을 할 때였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위청과 친했다. 위청에 대한 이감의 부손을 알고 있었으므로 곽거병은 실수한 척 이감을 사살해 버렸다. 곽거병은 당시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일이 난처하여 이감이 '사슴의 뿔에 받혀 죽었다'는 식으로 처리해 버렸다. 곽거병 역시 그로부터 일 년 후에 죽었다. 이감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황태자의 시녀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이감의 아들 이우(李禹)도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利)를 좋아하는 인품이었다. 모쪼록 이씨 가문은 점차로 쇠미해져 갔다.
[이하의 이능전(李陵傳)은 후세 사람이 가필한 것인 듯하다.]
이능이 장년이 되자 건장궁(建章宮)의 감(監:경호관)으로 뽑혀 기사(騎士)들을 감독했다. 궁술에 뛰어났으며 사졸들을 아껴주었다. 황제는 그가 이씨 가문에서 대대로 장군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8백 기(騎)의 장(將)으로 삼았다. 한때 이능은 흉노땅 깊숙히 2천여 리나 침입해 들어가 거연현(居延縣:甘肅省)의 지형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 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단양(丹陽)의 초나라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주천군(酒泉郡), 장액군(張掖郡:甘肅省) 등지에서 궁술을 가르치며 흉노땅에 수년 간 주둔, 경비했다.
천한(天漢) 2년 가을이었다.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군사 3만 기(騎)를 이끌고 기련산(祁連山:감숙성 장액현의 남서쪽, 흉노의 말로 '하늘'을 뜻하며 南山, 雪山, 白山이라고도 함)과 천산(天山:新疆省)에서 흉노의 우현왕을 쳤다. 이때 이광리는 이능에게 사사(射士)와 보병 5천 명을 주어 거연지방 이북으로 천여 리를 쳐나가게 했다. 이것은 이광리가 흉노군을 분산시켜 자신에게만 도전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었다. 이능은 약속한 기일이 되어 본대로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선우가 8만 대군으로 이능의 군사를 에워싸버렸다. 이능의 군사는 용전분투해 군사의 절반이 전사하면서도 1만의 흉노병을 살상했다. 화살이 다하도록 연전연투한 지가 8일이었다. 거연에서 백 리 못미친 곳까지 후퇴해 왔을 때 흉노는 길목 좁은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능군의 식량이 다했고 구원군 역시 오지 않았다. 흉노는 이능의 군을 외목 틀어쥐듯 하고서는 항복을 요구했다. "이쯤 되어서는 폐하에게 보고할 면목도 없다." 이능도 드디어 흉노에게 항복했다.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전사하고 흩어져 한나라로 귀환한 병사는 겨우 4백 명이었다. 선우는 이능 가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능을 사로잡아 자기 딸을 이능에게 시집보내어 그를 존중했다. 한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이능의 모친과 처자를 몰살했다. 그로부터 이씨 일가의 명성은 실추되어 농서의 선비들은 그의 문하였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자기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자기 몸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해도 따르지 않는다[<논어>의 '자로(子路)편']'고 한다. 이것은 이광 장군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내가 이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시골 사람처럼 말은 잘 못했지만 성실 소박한 인품이었다. 그가 죽자 천하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모두들 그를 위해 충심으로 슬퍼했다. 그의 충실한 마음씨가 진정으로 사대부를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속담에 보면, '복숭아나 오얏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나무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고 돼 있다. 이 속담은 비록 적은 것을 말했으나 실상은 큰 비유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聲東擊西(성동격서) 聲(소리낼 성) 東(동녘 동) 擊(칠 격) 西(서녘 서)
통전(通典)의 병전(兵典)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서로 다투던 시기, 위왕(魏王) 표(豹)의 투항으로 한나라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위왕 표의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 되어 매우 위험한 형세에 처하였다. 그는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한신(韓信)을 보내어 정벌에 나섰다. 이에 위왕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황하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의 도하(渡河)를 저지하였다. 한신은 포판의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나, 사병들로 하여금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게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강공의 의사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백직은 한나라 군대의 동태를 살펴보고 그들의 어리석은 작전을 비웃었다. 한편으로 한신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으로 황하를 건넌 한나라 군사들은 신속하게 진군하여 위왕 표의 후방 요지인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그를 사로 잡았다.
聲東擊西(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란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 는 뜻으로, 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함 을 비유한 말이다. 개인이나 정치인들의 처세, 또는 운동 경기 등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
|
|
|
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
|
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47. 천고마비의 생물학적 근거
우리들은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거나 국향지절이라 하여 윤기 나는 육살과 향기 그윽한 국화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어째서 말은 가을에 살이 찌는 것일까. 사람도 다름없이 피하지방이 도톰해진다. 웬 가을 타령이냐 하겠지만 가을 없는 겨울 없듯이 원인 없는 결과도 없는 법이니 동물들이 가을에 더 많이 먹고 살이 쪄서 몸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게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모질게도 차가운 엄동설한에 살아남기 위해 몸에 양분을 비축하는 일이니 이보다 중요한 일도 없을 듯싶다. 앞에서 기름이란 표현을 했는데, 이 지방은 탄수화물이나 단백질(1그램에서 각각 4칼로리의 열이 난다)보다 훨씬 많은 열(1그램에서 약 9칼로리)을 내기 때문에 저장물질로는 그 이상 효과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지방을 많이 저장한 가을 고기들이 우리 입에도 맛있으며 추운 날에는 돼지 비계 같은 지방을 많이 먹어 몸에 열을 내게 하여 추위를 덜 타게 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아마도 살이 쪄서 피하지방이 두꺼운 뚱뚱보들은 비계가 찬 기운을 막아주고 또 급하면 분해되어 많은 열을 내기에 겨울 추위가 두렵지 않겠으나 대신 여름 한철을 죽을 맛이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서 뭇 생물은 어떤 식으로 멀쩡하게 겨울나기를 하고 있을까. 동물들도 극한의 경우 세포 속에 당이나 아미노산 글리세린(롤)과 같은 물질(부동액이라 해두자)을 많이 저장함으로써 물이 잘 얼지 않고 얼더라도 작은 얼음결정체밖에 형성되지 않아 세포막을 터뜨리지 않도록 대비한다. 물이란 없어도 탈이지만 너무 많아도 탈이라 겨울에 얼어서 물의 부피가 늘어나면 세포막을 파괴하고 결국 세포를 죽게 만든다. 때문에 식물의 씨앗들은 바싹 말라 물을 아주 적게 가지고 있어서 얼어 터지지 않아 채송화, 봉숭아 씨가 담 밑 가랑잎 속에서도 월동이 가능한 것이다. 풀 중에서 추위에 가장 약한 1년생 식물(초본)은 씨앗으로 겨울을 넘기고 다년생 초본은 뿌리로 그 한기를 이겨내는 것을 보면 그들의 월동 전략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말은 난세가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 뚜렷이 나타난다는 뜻이고 "겨울 화롯불은 어머니보다 낫다"고 하니 옛날에 겨울보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나를 엿볼 수 있다. 겨울나기는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숨쉬는 놈들 모두의 일이고 보면 춥고 더운 것 하나까지도 생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제한요소가 된다. 그래서 한세상 살기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 같은 겨울이라도 강이나 바다처럼 물에 사는 놈들은 큰 어려움이 없이 보이나 땅위에 사는 놈들은 정말로 심각해진다. 기온이 내려갈수록 대사기능이 떨어지고(섭씨 10도 떨어질 때 기능은 2~3배 저하) 섭씨 0도 가까이에 접어들면 세포 자체가 얼어 터질 위험에 놓이게 된다. 한마디로 죽는다는 말이다. 동물은 등뼈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나누고 온도 변화에 따라 체온이 일정한 정온동물과 변온동물로 나누는데 이는 온혈동물, 냉혈동물로 부르기도 한다.
다양한 모습의 겨울나기 지구상에서 정온동물은 조류(새)와 포유류(젖빨이동물)뿐 나머지 동물은 모두 수온이나 기온이 변할 때 체온도 바뀌는 변온동물(냉혈동물)이다. 따라서 추운 겨울날 주변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동물은 모두 새 무리거나 포유류뿐이다. 이들은 일정한 체온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먹이를 계속 섭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동면이라는 겨울잠을 자게 된다. 변온동물들은 만일 영하 10도 이하에 놓이게 되면 체온도 그만큼 내려가고 얼어죽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겨울나기를 한다. 나비는 번데기로 메뚜기는 땅속에서 알로 파리, 모기는 지하실 구석에서 추위를 피한다. 다람쥐, 박쥐, 고슴도치들이 겨울잠을 자는데 깊은 잠이 들어 있을 때는 건드려도 꿈쩍 않고 잠을 자나 그것들이 꿈을 꾸며 느긋하게 다리 뻗고 자는 잠이 아니라 초죽음이 되어 의식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추위와 싸우고 있다. 사람을 냉동실에 집어넣은 꼴인 처참한 겨울잠인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의 생리를 한 번 보자. 다람쥐는 보통 때 박쥐, 고슴도치처럼 1분에 200번 가량 숨을 쉬지만 굴참나무 밑둥치 틈새에서 동면중인 녀석들은 4~5 회 숨을 쉬고 심장박동은 150 회였던 것이 5 회로 줄어든 채 체온도 꽤 떨어진 최악의 상태에서 생명만 겨우 부지하고 있다. 그러나 곰의 겨울잠은 약간 다르다. 이들 역시 여기저기 배회하는 대신 굴에서 몸을 움츠리고 가능한 몸움직이기를 줄이며 심장박동도 분당 40회 뛰던 것이 10회로 줄어드나 체온은 조금밖에 내려가지 않은 섭씨 29도에 머문다고 한다. 사람의 정상 체온은 섭씨 36.5도이나 이는 몸 안의 온도(실은 피의 온도)일 뿐 몸 바깥쪽은 그보다 훨씬 낮아 귓바퀴나 코끝 손발은 섭씨 0도 이하까지 내려가 동상에 걸리기도 한다. 동상은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체온이 내려가 세포 속의 물이 얼어 부피가 팽창해서 세포막이 터져 상처를 입는 것이며 신체의 생리적 반응으로 최악의 경우 손, 발, 귀 등 끝부분을 희생시켜서라도 심장, 허파 등 몸통 부분의 중요한 기관은 살아남게 하려는 본능적인 현상이다. 한파가 심했던 겨울을 지낸 나무를 보면 밑둥치는 온전한데 가지 끝 부분들이 죽어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사람이나 정온동물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여러 가지 생리적 반응을 일으킨다. 추우면 제일 먼저 몸을 움츠려 표면적을 줄여 열의 발산을 줄이니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이 그것이고, 근육을 떨어 저장된 글리코겐을 빨리 분해해서 열을 내게 한다. "간이 떨린다"는 말은 간에 저장해놓은 글리코겐을 분해해서 몸안에 열을 공급하기 위해 떠는 현상을 말한다. 한겨울에 내복을 입지 않는 이들은 독하기도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그래도 습관이라 내복을 입으면 답답해서 못 견딘다고한다.
지금까지는 정온동물을 봤는데 변온동물인 지렁이, 달팽이, 개구리, 뱀들은 어떻게 월동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지렁이는 땅속 1미터 깊이에서 지열을 받으며 봄내음을 기다리고 있고 물개구리는 냇가 돌 밑에서 몬도가네들의 침입에 전전긍긍하고 참개구리는 강이나 호수 진흙 밑에서 배어드는 찬기에 몹시도 등이 시리고 청개구리는 나무에서 뛰어내려와 숲속 층층이 쌍인 가랑잎 속에서 지기를 느끼며 겨울나기를 한다. 명이란 모질고 끈질긴 것이라 뱀들은 들쥐들이 파놓은 양지바른 돌무덤 저 깊숙이 떼를 지어 체온을 나누면서 가끔 깊은 숨을 들이쉬면서 지낸다. 뱀은 굴을 팔 수가 없어 쥐가 파놓은 쥐굴에서 겨울을 보낸다니 먹이 되고 집까지 마련해주는 들쥐의 은혜를 잊지 못하리라. 기막힌 생물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개구리나 뱀, 달팽이 모두 월동하기 좋은 양지 바른 곳에서 모여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땅꾼들이 뱀굴 하나를 찾으면 부대로 잡는다 하고 필자 역시 같은 꾼으로 자리 하나만 잘 만나면 수십마리 아니 수백 마리의 달팽이를 단번에 쓸어 담는다. 눈 위에 서리치는 칼날 같은 겨울 추위에도 채집을 나가는 것은 바로 이 재미 때문이다.
생물들의 뜨거운 여름나기 겨울에 대죽순을 찾는 일이 그렇듯이 여름 하루살이에게 겨울 이야기를 해도 말이 통할 리 없다. 그러나 생물들의 겨울나기를 설명하면서 여름나기의 어려움 또한 엿보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여름은 높은 온도도 문제려니와 한발에 따른 건조함 또한 문제라 이럴 때 동물들은 겨울과 매한가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서늘하고 촉촉한 흙에서 활동을 중지하고 그 무서운 더위를 피하며 여름잠(하면)을 잔다. 달팽이는 몸에서 수분이 날아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점액을 분비해 굳어진 흰막을 주둥아리에 막고 쥐죽은 듯이 한여름을 지낸다. 그러다가 소낙비라도 뿌리게 되면 침으로 막을 녹여 몸뚱어리 쑥 내밀고 먹이를 찾아나서거나 짝짓기에 몰입한다. 장장하일, 머리털이 벗겨질 만큼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동물들이 '쥐구멍'을 찾아 숨는 것은 물론이요, 식물조차 광합성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광합성은 원반 모양의 엽록체의 몫인 이것들도 강한 빛이 비치면 세포 속에서 빛을 피해 숨바꼭질을 한다고 하니 빛은 꼭 필요한 것이나 너무 세어도 엽록체를 해치게 한다. 식물도 낮잠을 잔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생물들이 살아남으려면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한 번도 편할 때가 없는 것이니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삶을 산다. 월동 이야기의 끝에 미기후에 대해 설명을 덧붙여둔다. 그해 겨울 눈이 많으면 분명히 보리농사가 풍작이라는 것은 쌓인 눈이 보리 뿌리를 덮어줬기에 그렇다. 한켜 두꺼운 따뜻한 눈 이불이 보리를 덮으면 공기 온도는 영하 20도라도 눈 속은 영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기후의 한 단면인데 아마도 이 미기후의 장점을 잘 이용한 생물들이 이 땅에 더 잘 적응했다고 봐야 하겠다. 백설 속에 파묻힌 보리 잎사귀도 물알 익어 가는 봄볕의 따뜻한 봄꿈을 꾸고 있으리라. 모두가 꿈을 먹고 사는 것이니 말이다.
|
|
|
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2장 동방신화
4. 신성과 종교
이집트의 산과 신앙은 물론 그 고대문명은 어떠한 세계 문명보다도 선행한다. 아득한 옛날 기원전 2500년에 건립한 쿠푸의 피라미드는 오늘날의 기술로도 능가할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하는 고도의 과학문명이다. 세월이 흐르자 신과 신성의 변천이 일어나고 신의 계보는 매우 혼란해지게 되었다. 초기 기록은 망실되어 남은 자료는 충분하지 않으나 후세에 발굴을 통해 옛 신전이 밝혀지고 피라미드(세계 7대 불가사의 중 가장 오래 되고 또한 현존하는 유일한 구조물이다)에 보존된 왕조 기록, 묘비명, 파피루스 문서, 많은 석상과 조각에서 이끌어 낸 사료와 그리스인들(역사가 헤로도트스 등)이 남긴 기록이 주요 재료이다. 유구한 문화를 가진 이집트인은 독특한 신앙과 종교를 창출해 냈으며 신의 수효 또한 엄청나 발굴 초에만도 기록상 800 이상이 산정되었다. 시초에는 여러 부족집단이 각각의 지역신을 갖고 있었으나 부족들의 정치적 통합으로 각 부족신 사이에 합동이 일어났으며, 기원전 3100년경에는 최종 통합이 달성되어 나일 계곡신들과 남부신들이 손을 맞잡고 만신전에 자리잡았다. 시대가 지나자 일부 지역신은 권위와 세력이 커지고 한 주 전체, 혹은 나이가 나라 전체의 주신으로 존경되기도 하였다. 우주신은 외부에서 이집트로 유입되어 공존하였는데 지역신과는 달리 동물이나 물신 형태는 없고 또한 인간 생활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경외되었다. 나라의 위대한 신이 된 천공신, 대지신, 태양신, 달신, 위대한 강신은 외경하지만 제의는 올리지 않았다. 후기에는 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신들의 이름과 신성도 적지 않게 융합되면서 혼란스러워졌지만, 개개의 숭배자는 습관상 지역신과 지역신에 동반하는 신들 및 물신에만 친근하게 되었다. 신화상으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혼돈이 있을 뿐 물(바다)이 대지를 덮고 암흑이 우세하며, 신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물에서 만물의 생성요소와 정이 태동하고 최초의 모신이 출현하였다. 구왕구시대에 이미 세 도시(헤리오폴리스, 멤피스, 헤르모폴리스)에 종교 중심지가 조성 발전되고, 각 지역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사제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신과 동반 신들이 우주 창조를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과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창세 과정은 모두 비슷하게 전진적.진화적인 창조적을 제시하였지만 단 한 군데 '첫 시작'에 차이가 있으며 창조 역할을 연출한 시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의견을 달리하였다. 여신 마예트는 황금시대가 되자 모든 법전과 윤리 및 제도를 인류에게 만들어 주었다. 천지창조설은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의 것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널리 받아들여진다. 창조신은 모두 아홉 주신 엔네아드로 아툼이 원초신이다. 그는 원초섬의 물 위에서 현현하여 공기신 슈를 내뿜고 증기의 여신 테프누트를 토해 냈다. 이 두 신은 결합하여 대지의 신 게브와 천공여신 누트를 낳았다. 다시 이 두 신이 결혼하여 낳은 신들이 바로 천지신이 아닌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와 및 네프티스 형제자매들이다. 멤피스에서는 도시의 최고신 프타가 현현하여 나우네트를 출현시키고 그녀에게서 아들 아툼을 낳았다고 한다. 아툼에게서는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주신이 출현하였다. 이와 같이 멤피스에서는 그들의 신이 처음으로 창조를 시작하였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프타는 솜씨 좋은 장인신이며 세상을 구축한 창조신으로 숭앙되었다. 프타의 한 아들 임호테프는 제3왕조 조세로 왕의 묘를 사카라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건립한 최초의 인물이며, 또한 의료의 신(그리스의 아스클레피오스)으로 존중되었다. 헤르모폴리스에서는 여덟 주신 오그도아드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원초의 바다신 눈, 내세의 신 후, 암흑의 신 쿠크와 대기신 아문과 그 각각이 낳은 나우네트, 하우헤트, 카우케트 및 아마우네트가 그들이다. 다른 설에서는 세상은 껍질 없는 우주알 혹은 연꽃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태양숭배는 일찍이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것 같다. 고왕국시대(기원전 2686~2181)에는 온(헬리오폴리스)에서 태양신이 왕의 비호신으로서 공적으로 숭배를 받았다. 태양신 레는 지역 창조신 아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대한 신전에 모셔지고 특히 제5대왕조 때는 그 숭배가 절정에 달하였다. 레 신앙은 왕실과 접목되어 왕실종교로 발전하고 이집트 왕은 공식적으로 레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레를 모시는 신관 사제들의 세력도 커졌으며 종교신학도 정립되었다. 제4왕조 때부터는 모시는 으레 왕은 하늘나라의 태양에 오른다는 내세관이 발전하고 이에 연유한 구조물인 피라미드에 매장되었다. 고왕국 말기에는 왕실세력이 쇠퇴하면서 태양신앙은 주춤하게 되는데, 왕실이 약화되는 반면 레 사제의 세력은 계속 커져 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분란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와중에 서민적으며 민주적인 오시리스 신앙이 두드러지면서 숭배대상의 교체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장례의식과 부활은 태양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신왕국시대(기원전 1552~1069)가 되자 제18대 왕조 때 그 전까지는 지역신이던 아문을 '신중의 신'으로 올리고 레 숭배와 통합하여 나라의 위대한 신 아멘 레를 창출하였다. 여기에서 염두에 둘 것은 이집트 신들의 경우 합체는 하지만 원 모습과 특성을 포기하고 융합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제18대 왕조 말 아케나텐 왕은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태양신 아텐 숭배에 집중하였으나 유일신앙의 성립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케나텐의 아텐 숭배는 초기의 태양숭배와는 여러 모로 다르면서도 초기의 이집트 통치자처럼 왕실과 태양신 간의 일체성을 시도하여 공통점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태양숭배는 어는 때나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관련성이 적어 원칙적으로 왕실과 나라의 신앙으로 존속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테베의 사제들은 신왕국시대 후기에 와서 그들의 신 아문에 전지전능성을 부여하고 아문 신이 비밀리에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신을 창출하였으며 또한 천지창조를 이룩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또 다른 설에서는 나일 강의 작은 섬 엘레판티네의 염소머리 신 크눔이 아문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그 고장 흙을 재료로 녹로를 돌려 인간을 만들었다고도 주자하였다. 이집트 사람은 신들을 세상에 실존하는 성스러운 동물의 형태로 표출시켰다. 호루스는 매, 바스트(그리스의 아르테미스)는 고양이, 사랑의 신 하토르(그리스의 아프로디테)는 암소로 나타났다. 또한 몸은 사람이고 머리만 동물현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예컨대 아누비스는 개 또는 재칼, 토트(신의 대변인, 그리스의 헤르메스)는 따오기다. 원시시대 토템 신앙의 유풍일 것이며, 기이하고 신비성이 풍겨 이집트 신성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물 신들은 신성시되는 짐승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다양한 형태의 동물적 생명력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로 전파된 이집트 신 중 중요한 신으로는 헤리오폴리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멤피스의 세라피스를 꼽을 수 있다.
이시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는 파라오 만신전의 주신으로 이 여신에 대한 숭배와 신화는 그리스와 로마 세계로 널리 퍼졌다. 대지의 신 게브와 천상의 여신 누트는 두 아들 오시리스와 세트와 쌍둥이 딸 이시스와 네프티스를 두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아내가 되고 네프티스는 세트(그리스 사람은 튜폰이라 한다)와 결혼하였다. 오시리스는 왕권으로 통치하고 이시스는 왕비가 되어 아들 호루스를 낳았다. 원래 이시스의 뜻은 '왕좌'로서, 오시리스의 왕권이 의인시으로 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시리스는 후에 동생 세트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하는데 그 내력을 보면 이렇다. 왕이 출타했다가 돌아와 세트의 환영 만찬회에 참석하였는데 세트는 왕에게 딱 맞는 우아한 장식상자를 내놓고 누구든 상자 안에 누워서 맞으면 선물로 주겠다고 여흥 삼아 말하였따. 여러 내빈들이 시험해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세트는 오시리스에게 은근히 권하였다. 이에 오시리스가 장난 삼아 들어갔더니 세트를 추종하는 반역자들이 바로 상자의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한 후 상자에 무거운 돌을 달아 나일 강에 던져 버렸다. 이 소문을 듣고 상자를 찾아나선 이시스는 오랜 세월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상자를 찾아내 오시리스의 시신을 챙겨 부토 근방의 델타 풀밭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세트의 눈길을 피해 살면서 유복자의 출산을 기다렸다. 그러나 달밤에 사냥 나온 세트에 발각되어 오시리스의 시신은 발기발기 14토막으로 해체되어 다시 나일 강 속에 던져지고 이집트 땅 널리 흩어져 떠내려갔다. 이시스는 또다시 오시리스를 찾아나섰고 그 슬픔에 찬 통곡 때문에 유복자 호루스는 어미의 원수를 갚게 된다.
오시리스는 하이집트의 영주로 신격화한 왕이고, 세트는 원래 상이집트의 영주로 마찬가지로 신격화된 왕이니 이는 나일 강 상부지역과 하부지역 간의 세력갈등을 표현한 신화이다. 모든 신들의 어미로 세트의 세력을 꺾어 승리를 거둔 이시스에 대한 신앙은 급속도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스 종교의 많은 여신들이 이시스와 동격신성을 나타내는데, 이오의 이야기나 지하계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된 자신의 딸을 찾아나선 곡물의 증식을 가져오는 지모신 데메테르의 유명한 설화가 모두 이시스 신화와 융합된 것들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통치시대에는 그리스와 이집트 종교 간에 병합이 일어나면서 이시스 여신의 모습은 헬레니즘 요소를 지니게 되어, 머리에만 옛 파라오의 상징인 왕관을 썼을 뿐 그리스식 의상을 걸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집트 성전의 첫장은 "오래 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신에 이시스가 있고, 이시스는 생명과 변화하는 모든 것을 탄생시킨 여신이다"라고 적혀있다. 창조의 여신으로서 이시스는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양을 탄생시켰다. 로마시대에 이시스를 숭배하는 비교에서는 여신을 '만물의 여신'으로 호칭하였고, 철학자이자 시인인 파트라이의 루키우스는 이시스 여신을 '신성하고 영원한 인류의 구세주'로 극진히 찬양하는 시문을 남겼으며, 경건한 이시스 숭배자 아풀레이우스는 수많은 여신이름을 부르면서 이시스의 응답으로 찬양하였다. 이처럼 이시스는 가장 고귀하며 자비로운 만물의 모신으로서 높은 신성을 획득하고 특히 증식을 가져오는 여신으로서 자애와 환희를 주는 영험이 있어 화류계 여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는 애가로 남아 있다.
[ 이시스와 마아트(진리와 정의의 여신) ]
이집트 사람은 이시스를 모든 신의 여왕이며 지상에서 명계에까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지고의 신으로 찬양하였다. 바다에 길을 냈다는 모세의 기적이나 태양을 정지시켰다는 그 후계자 여호수아의 기적도 그 원형은 이시스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원전 80년경 로마에 도래한 이시스 숭배는 서기 4세기 그리스도교에 밀려날 때까지 대단히 성행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시스 여신은 배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 내지 융합되어 성모 숭배를 촉진하였다. 호루스의 어미 이시스 및 사이스(기원전 7세기경 이집트의 수도)의 여신 네이트의 속성은 그리스도의 어미 마리아의 속성과 동일하다.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교도 중에는 자신들을 '양치기'로서 '이시스의 시종'의 호칭인 파리토포리라고 자칭한 자도 있었으며 목사라는 뜻의 파스터(Pastor)라는 낱말은 여기에서 연유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시리스 오시리스(Osiris)는 그를 시기하는 형제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 신체는 조각내어 나일 강에 던져졌다. 정숙한 부인 이시스는 쌍둥이로 태어난 자매 네티프스(세트의 부인)와 아누비스의 협력을 받아 신체 조각들을 모았다. 이시스는 그의 생명을 다시 되찾아 부부로 결합하고 그 결합으로 태어난 호루스는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 그런데 이 오시리스는 헬레니즘에서는 이시스계의 신이 아니었다. 즉 이집트의 일부 지역에서 사자의 세계를 다스리며 장례신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나일 강 유역 밖으로는 그 숭배가 퍼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세라피스가 이시스의 옆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명확히 이시스 종교과 그 '비의'가 성행하고 사후 세계의 삶을 약속받기 위해 오시리스에 대한 관심이 재현되었다. 이에 따라 오시리스는 나일 강의 성스러운 물과 풍요의 상징이자 생에 상응하는 존재로서 로마제국의 이시스 신전 의식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신전에는 성수를 담은 저수지와 수조가 있었고 제기로는 휴드리아와 시툴라이가 사용되었다. 오시리스 카노푸스신 의 조각상 중에는 그러한 그릇을 머리에 올려 놓은 모습을 묘사한 것도 있다. 11월의 중요한 이시스 축제는 로마 수도에서도 올려졌고, 신의 수난 및 죽음과 부활을 되새겼다. 폼페이의 이시스 신전에는 여러 장식 외에 두 점의 오시리스 수난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증식의 신으로 계속 다시 태어나므로 때로는 디오뉴소스와도 결부되었다. 로마에 오시리스 '비의'가 존재했음은 익히 아는 바이나 오시리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수많은 동으로 만든 조상이 로마제국 전역과 무덤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의 오시리스는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형으로 휜 홀과 도리깨를 지니고 측면에 깃털 장식이 달린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리스인은 오시리스의 어미를 세멜레와 동일시 하였다.
[오시리스]
세라피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시스 숭배가 퍼진 초기에 이시스 여신에 동반하는 신은 오시리스가 아니라 바로 이 세라피스(Serapis)이다. 오시리스와 아피스(성스러운 소)의 합일신으로(멤피스에 장엄한 세라피스 신전이 있다) 그리스.이집트의 신이지만 그 출현을 둘러싸고는 의견 차이가 있다. 즉 고전 작가는 세라피스 숭배를 기원전 3세기 초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연유한다 하고, 다른 설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스스로 세라피스 숭배를 창출시켰다 하는데 이 견해가 유력하다. 세라피스 신전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것이 유명한데, 라코티스 언덕에서 나온 여러 유물들을 살펴보건데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세 때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공식 신으로서 숭배되었음이 확실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의 이름난 신상과 초상의 기원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세라피스는 오시리스에서 기원하여 죽음과 번식과 재산의 신으로서 지하의 신과 풍요의 신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만, 헬레니즘에서는 심각한 표정에 풍부한 머리 및 수염, 가운과 겉옷 매무새가 완전히 그리스 명계의 신 하데스를 상기시킨다. 이 지하의 신이 거느리는 괴물도 명계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로, 시간(영겁)의 신인 아이온의 상장인 개의 머리, 늑대머리 및 사자머리를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세라피스는 시간과 영원의 주인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쓰고 있는 두관은 농사의 풍요를 표시하는 것으로 세라피스가 풍요를 나누어 주는 신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원래 이시스와는 달래 프톨레마이오스 치세에는 환영받지 못하였던 세라피스는 헬레니즘 시대에 전파되어 이시스 신전에 봉안되었으나 이시스 여신의 배우자 역에서 좌천되었다. 콤모두스, 카라칼라 및 셉티무스와 세베루스 황제시대에는 풍요의 신, 치료의 신으로 존숭되었고, 점차 태양신 헬리오스와 동일시되어 신의 머리에서 관선이 비치는 조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 전에 이미 그의 위신은 실추되었고,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은 파괴되었다.
[세리피스 신전 부조]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