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0. 사랑
관계에 있어서 안전하고자 하는 요구는 필연적으로 슬픔과 공포를 키운다. 이 안전을 찾는 것이 불안전을 부르는 것이다. 당신의 어떤 관계에서든 당신은 안전을 찾은 일이 있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의 안전함을 원하지만, 그러나 우리들 각자가 그자신의 독특한 길을 찾을 때 사랑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말은 짊어진 게 너무 많고 너무 썩어서 나는 그 말을 선뜻 사용하고 싶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말한다-모든 잡지와 신문 그리고 모든 선교사가 끊임없이 사랑을 말한다.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고, 나는 나의 왕을 사랑하고, 나는 어떤 책을 사랑하고, 나는 재산을 사랑하고, 나는 쾌락을 사랑하고,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나는 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관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 좋을대로 기르고, 키우고, 품고, 난폭하게 취급되고, 뒤틀려질 수 있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걸 뜻하며, 당신이 고상하고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거한 어떤 형태의 존경할 만함을 걸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당신이 신을 경배할 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며-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인간적인 것을 풀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추상 속으로 도망친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와 진통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일 터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할 것인가? 그것을 다만 정의함으로써? 교회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했고, 사회는 또 그렇게 정의했으며, 그리고 온갖 종류의 일탈과 남용이 있다. 누구를 숭배하는 것, 누구와 같이 자는 것, 정서의 교환, 사귐-그것들이 우리가 사랑으로서 뜻하고자하는 것인가? 그것은 규범이요, 패턴이었고, 또 그것은 엄청나게 개인적이고 감각적이고 제한되게 된 나머지 종교인들은 사랑이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들이 인간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그들은 쾌락, 경쟁, 질투, 소유욕, 유지하려는 욕망, 구속하고 지배하려는 욕망, 다른 생각으로 간섭하려는 욕망 등을 보며, 이 모든 것의 복합성을 아는 나머지 그들은 신성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썩지 않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어디에서나, 이른바 신성한 사람들은,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완전히 나쁜 것이라는 주장을 견제해왔다. 그들은 만일 당신이 성에 탐닉하면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그래서 그들은 비록 자기들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쳐 놓는다. 그러나 성욕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두 눈을 빼버리고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굶주리게 하고 쇠약하게 했다. 그들은 인간을 탈수시켰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자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인멸했다. 사랑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사랑이 있을 뿐인가? 하나에 대한 사랑이고 많이에 대한 사랑은 아닌가? 만일 내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는 것인가? 사랑은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개인적인 것인가? 도덕적인가 부도덕한가? 가족적인가 비가족적인가? 만일 당신이 인류를 사랑하면 당신은 특수한 걸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감정인가? 사랑은 정서인가? 사랑은 쾌락이고 욕망인가? 이 모든 질문은 우리가 사랑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사랑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뜻하고, 문화-그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에 의해 발전되어 온 패턴이나 관례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규명하려면 우리는 우선 그것을 여러 세기 동안 싸여온 껍데기로부터 해방해야 하며, 그것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한 모든 관념(이상)과 이데올로기들을 제거해야 한다. 어떤 것을 그래야 하는 것(당위)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나누는 것은 삶을 다루는 가장 기만적인 방법이다.
그러면 나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불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내려고 하는가-그걸 달리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그것 자체에 있어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걸 어떻게 알아낼까? 나는 먼저 교회, 사회, 부모와 친구들, 모든 사람과 모든 책이 말한 것을 거부하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게 무엇인지를 나 스스로 찾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인류가 연관되는 엄청난 문제가 있고, 그것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어 왔으며, 나는 이 순간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바에 따라 어떤 패턴이나 다른 틀에 붙잡혀 있다-그러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자신의 편향과 편견으로부터 해방해야 되지 않는가? 나는 혼란되어 있고, 나 자신의 욕망에 찢겨 있으며, 그래서 자신에게 말한다-<먼저 너 자신의 혼란을 정돈하라. 아마 너는 사랑이 아닌 것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정부는 <나라 사랑을 위해 가서 죽이라>고 말한다. 그게 사랑인가? 종교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섹스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게 사랑인가? 사랑은 욕망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그렇기 때문이다-쾌락을 누리려는 욕망, 즉 감각들을 통해서, 성적 접촉과 만족을 통해서 얻어진 쾌락 말이다. 나는 성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안다. 성이 당신에게 순간적으로 주는 것은 당신 자신의 완전한 포기이며,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 혼란과 더불어 원상태로 되돌아오는데, 그리하여 당신은 아무 걱정도, 아무 문제도 자아도 없는 그 상태가 자꾸 되풀이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사랑 속에는 성적 쾌락, 당신의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하는 사람을 집안에 갖고 있다는 쾌락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은 그녀에게 의존한다-그녀는 당신에게 그녀의 몸을 주었고, 그녀의 정서, 그녀의 고무, 어떤 안전감과 행복감에 의존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당신을 떠난다-그녀는 싫증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과 도망가며, 그러면 당신의 정서적 균형은 깨지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 교란이 질투라고 불리운다. 그 속에는 고통, 불안, 증오, 폭력이 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하고 있는 말은 이렇다. <네가 나한테 속해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그렇지 않는 순간 나는 너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내가 성적 요구나 다른 요구들을 만족 시키기 위해 너한테 의존하는 한 나는 너를 싫어한다.> 그러니까 당신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고, 분리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모든 대립 상태, 당신 자신 속에서의 끝없는 말다툼(불평) 없이 당신의 아내와 살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아마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자유롭고 그래서 그녀도 자유로우며, 반면에 당신이 당신의 모든 쾌락을 위해 그녀에게 의존한다면 당신은 그녀에 대해 노예이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렇게 남에게 속해 있는 것, 다른 사람에 의해 심리적으로 키워지는 것,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모든 것 속에는 언제나 불안, 공포, 질투, 죄의식이 있으며, 공포가 있는 한 사랑은 없다. 슬픔으로 찌든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감상벽이나 주정주의는 사랑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쾌락이나 욕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랑은 과거의 것인 생각의 산물이 아니다. 생각은 사랑을 심어 기를 수 없다. 사랑은 질투와 양립하거나 질투에 사로잡힐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질투는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능동적인 현재이다. 그것은 <나는 사랑할 것이다>이거나 <나는 사랑했었다>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알면 당신은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 사랑은 복종하지 않는다. 당신이 사랑할 때 거기엔 존경도 무례도 없다.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은 모르는가-증오 없이, 질투 없이, 분노 없이, 그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바에 간섭하고자 하는 바 없이, 비난 없이, 비교 없이 사랑하는 것-당신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비교가 있는가? 당신이 어떤 사람을 당신의 온마음을 다해, 온심장을 다해, 온몸을 다해, 당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랑할 때, 거기에 비교가 있는가? 당신이 그 사랑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바칠 때 거기엔 다른 사랑이 없다.
사랑은 책임이나 의무를 갖고 있으며, 거기에 그 말들이 합당한가? 당신이 무슨 일을 의무적으로 할 때, 거기에 사랑이 들어 있는가? 의무 속에 사랑은 없다. 사람이 묶여 있는 의무의 구조는 그를 파괴한다. 어떤 일을 의무이기 때문에 강제로 하는 한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엔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책임감이 나타나는 형식은 아이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되어야 할 것과 되지 말아야 할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이 사회에서 안전한 자리에 있기를 원한다. 그들이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숭상하는 그 지위의 일부이다. 그들은 오직 완전한 부르조아가 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사회에 맞도록 준비시킬 때 그들은 영속하는 전쟁, 갈등 및 잔인성에 다름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보살핌과 사랑이라고 부르는가? 정말 보살핀다는 것은 당신이 나무나 식물을 보살피듯 하는 것, 즉 물을 주고, 그것이 필요한 것을 예의 검토하고, 그것을 위해 가장 좋은 토양을 조사하고, 친절과 부드러움으로 그것을 보살피는 것이다-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아이들을 사회에 맞도록 준비시킬 때, 그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전쟁을 하지 않을 터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당신은 눈물을 흘린다-당신의 눈물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인가?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우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전장에서 죽은 당신의 아들을 위해 운 적이 있는가? 당신은 울었지만, 그러나 그 눈물은 자기연민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살해되었기 때문인가? 만일 당신이 자기연민 때문에 운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 관해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커다란 애정을 준 사람을 여의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 애정이 아니었다. 당신이 죽은 형제를 위해서 울 때 그를 위해서 울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우는 건 아주 쉬운데, 왜냐하면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당신은 당신의 가슴이 감동되었기 때문에 우는 것일 텐데, 그러나 그건 그를 위해 감동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연민에 의해 감동된 것인데, 자기연민은 당신을 굳어지게 하고, 당신을 가두고, 당신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든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 때, 그것이 사랑인가-외롭기 때문에, 잊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우는 것-팔자 한탄을 하고, 환경 탓을 하며, 눈물 속에 항상 당신이 있을 울음-그것이 사랑인가? 당신이 이것을 이해할 때, 즉 당신이 마치 나무나 기둥이나 손을 만지듯 그것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때, 그때 당신은 슬픔이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슬픔은 생각이 낳은 것이라는 것, 슬픔은 시간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3년 전에 형이 있었고, 지금은 죽고 없으며, 그래서 나는 외롭고 괴로운데, 내가 위안과 우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눈에는 눈물이 난다.
당신이 관찰해 보면 당신은 자신 속에서 그 모든 사태를 볼 수 있다. 당신은 그것을 분석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않고 충분히, 완전히, 한눈에 그걸 볼 수 있다. 당신은 <나>라고 불리우는 이 거짓되고 보잘 것 없는 것의 전구조와 본질을 한 순간에 볼 수 있으며, 나의 눈물, 내 가족, 내 나라, 나의 믿음, 나의 종교의 본질을 순식간에 볼 수 있다-그 모든 추함이 당신 속에 들어 있다. 당신이 그것을 마인드 mind(기억, 생각, 의도, 의견, 느낌 등의 기능을 하는것-역자)가 아니라 하아트 heart(정서, 특히 사랑의 중심-역자)로서 볼 때, 당신이 그것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볼 때, 비로소 당신은 슬픔을 끝나게 할 열쇠를 가진 것이다. 슬픔과 사랑은 병행할 수 없는데,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에서는 고난을 이상화했고, 그것을 십자가에 얹어 놓고 예배하며, 그 특별한 문을 통하지 않고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암시를 하는데, 이것이 약점을 이용하는 종교 사회의 전구조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당신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대답을 찾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완전한 대변동을 뜻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가족을 깨뜨려 버릴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아내나 남편이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그렇지 않은가?-당신이 지어놓은 집을 산산히 부셔야 할는지 모르며, 다시는 사원에 가지 않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찾아내고자 한다면 당신은 공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의존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질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소유하기와 지배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책임과 의무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자기 연민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사랑 받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겸손이 자만의 반대인 것만큼 사랑이 증오의 반대는 아니라는 것 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없앨 수 있다면, 즉 강제로가 아니라 비가 잎에서 여러날 쌓인 먼지를 씻어내듯이 그것들을 씻어낼 수 있다면, 비로소 당신은 인간이 항상 목마르게 찾는 그 기묘한 꽃을 만나게 될는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얼마 안되는 사랑이 아니라 아주 풍성한 사랑을 얻지 못했다면, 만일 당신이 그것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다면, 세계는 불행(재앙)에 빠질 것이다. 당신은 인류의 조화와 통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과 사랑이 유일한 길이라는 걸 머리로 알지만, 그러나 누가 당신에게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가르치려고 하는가? 어떤 권위, 어떤 방법, 어떤 체계가 당신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칠 것인가? 만일 누가 당신에게 말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당신은 <나는 사랑을 연습할 거야. 나는 날마다 앉아서 그것에 관해 생각할 거야. 나는 친절하고 부드러워지도록 연습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의하도록 나를 다그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 스스로 사랑하는 훈련을 할 수 있고, 사랑에의 의지를 연습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당신이 사랑에의 단련과 의지를 연습할 때, 사랑은 창 밖으로 나가버린다. 사랑의 방법과 체계를 연습함으로써 당신은 엄청나게 영리해지거나 좀더 친절해지거나 또는 비폭력의 상태에 이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쾌락과 욕망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찢기고 황폐한 세계에는 사랑이 없는데, 그럼에도 사랑 없이는 당신의 일상 생활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없다면 당신은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아름다움은 당신이 보는 어떤 것이 아니다-즉 아름다운 나무,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건물, 혹은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다. 당신의 가슴과 마음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만 아름다움은 있다. 사랑과 그런 의미의 아름다움 없이는 미덕이 없으며, 또한 당신은 사회를 개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등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할 때, 당신은 더 많은 불행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데,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당신의 마음에 오직 추함과 가난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아름다움이 있을 때, 당신이 하는 일은 모두 옳고 질서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법을 안다면,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바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사랑)이 모든 다른 문제를 해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점에 이르렀다-즉 마음은 연습 없이, 생각 없이, 강제 없이, 책 없이, 선생이나 지도자 없이 사랑을 만날 수 있는가-말하자면 아름다운 황혼을 만나듯 그걸 만날 수 있는가?
내 생각에는 한 가지가 절대로 필요한데, 그것은 동기 없는 정열이다-즉 어떤 개입이나 집착의 결과가 아닌 정열, 탐욕이 아닌 정열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알 수 없을 터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완전한 자기포기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얻으려고 하는 마음은 정열적인 마음이 아니며, 그것(사랑)을 얻으려는 노력 없이 사랑과 만나는 것이 그것을 찾는 유일한 길이다-즉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만나며 어떤 노력이나 체험의 결과로서 그걸 발견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런 사랑은 시간의 그것이 아님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런 사랑은 개인적인 동시에 비개인적이며,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다. 향기로운 꽃처럼 당신은 그걸 냄새 맡을 수 있고 또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있다. 그 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깊이 들여마시려 애쓰고 기쁨을 가지고 그걸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누가 정원에 아주 가까이 있든 아니면 아주 멀리 있든 그게 꽃에게는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향기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과 나누기 때문이다. 사랑은 새롭고, 신선하고, 살아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것은 생각의 혼란 저쪽에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천진한 마음뿐이며, 이 천진한 마음은 천진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 사람이 희생, 경배, 관계, 섹스 및 모든 종류의 쾌락과 고통을 통해서 끊임없이 찾아온 그 비범한 것을 발견하는 일은 생각이 그것 자체를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며 그래서 자연스럽게 끝날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대립을 갖지 않고, 또 사랑은 갈등을 갖지 않는다.
당신은 물을는지도 모른다-<내가 그런 사랑을 발견하면 내 아내와 내 아이들과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안전해야 하는데>라고. 당신이 그런 물음을 묻는다면 당신은 생각의 영역, 의식의 영역 바깥으로 나간 일이 없는 것이다. 당신이 일찍이 그 영역 바깥에 있었다면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터인데, 왜냐하면 그랬을 때 당신은 사랑-그 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따라서 시간도 없는-이 무엇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것을 매혹되고 흘려서 읽을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참으로 생각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것은 슬픔을 초월하는 걸 뜻하는데-이 사랑이라는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비상한 샘을 어떻게 찾아낼지 알지 못한다-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당신이 무엇을 할는지 알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전혀 아무것도. 그러면 당신은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한다. 그게 무얼 뜻하는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은 당신이 찾지 않고, 원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거기엔 전혀 중심이 없다. 그러면 거기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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