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3. 의식 - 삶의 전체성 - 앎
당신이 제약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당신은 당신의 의식 전부를 이해하게 된다. 의식은 사고가 기능하고 관계들이 존재하는 전적인 장이다. 모든 동기, 의도, 쾌락, 공포, 영감, 그리움, 희망, 슬픔, 기쁨들이 그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식을 활동적인 것과 휴면상태에 있는 것, 상부에 있는 것과 하부에 있는 것으로 나누게 되었다-즉 표면에서 움직이는 나날의 모든 생각, 감정, 활동과 그 밑에 있는 이른바 잠재의식, 말하자면 우리에게 낯익지 않고 때때로 어떤 암시, 직관, 꿈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의식의 아주 작은 구석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삶의 거의 전부이다. 그 나머지, 즉 그것의 동기, 공포, 인종적 내지 유전적 성질들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잠재의식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겠는데, 도대체 잠재의식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 말을 아주 자유롭게 사용한다. 우리는 그런 것이 있음을 받아들였고, 분석가들과 심리학자들의 모든 구절과 전문용어는 그 말속에 스며 있다-그러나 그런 게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것에게 그런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것 역시 의식적 마음과 마찬가지로 보잘 것 없고 우둔하다-즉 의식과 마찬가지로 좁고, 옹졸하고, 제약되어 있고, 불안하며, 야하다. 그렇다면 의식의 한 부분이나 조각이 아니라 그것의 전영역을 완전히 알 수 있을까? 만일 그 전체를 알 수 있다면, 당신은 부분적 주의가 아니라 항상 전적인 주의를 기울이며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는 일을 위해 퍽 중요한데, 왜냐하면 당신이 의식의 전영역을 완전히 알 때 거기엔 알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의식-이것은 생각, 감정, 행동 모두인데-을 각각 다른 수준들로 나눌 때 알력이 있다.
우리는 파편들 속에서 산다. 당신은 사무실에서는 이렇고 집에서는 저렇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해도 마음으로는 독재적이다. 당신은 이웃 사랑에 관해 말하지만, 경쟁으로 그를 죽인다. 당신 자신 속에 있는 이 파편적 존재를 아는가? 한 두뇌에게 있어서 그 기능과 그 자체의 사고가 파편으로 부서져 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두뇌에게 있어서 전영역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인가? 의식 전부를 완전히,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것은 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거니와-은 가능한 일인가? <나>의 구조, 자아의 구조를, 그것의 엄청난 복잡성과 함께,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만일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한 겹 한 겹 벗기면서 모든 생각, 감정, 동기들을 점검한다면, 당신은 몇 주일,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 있는 분석적 과정에 이를 수 있을 터이다-그리고 당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 시간을 들일 때 당신은 모든 형태의 왜곡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왜냐하면 자아란 끊임없이 온갖 억압과 긴장과 영향을 받으면서 움직이고, 살고, 싸우고, 원하고, 거부하는 복잡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방법이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당신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또하나의 길, 시간 걸리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보는 길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터이다-그리고 마음이 조각나지 않았을 때에만 당신은 당신의 전체성을 볼 수 있다. 당신이 전체성 속에서 보는 것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걸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 문제에 아주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정말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걸 할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사물을 간단히 설명해 치우거나 아니면 똑바로 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당신이 전적으로 볼 때 당신은 당신의 전주의력, 전존재, 당신의 눈, 귀, 신경 등 당신의 모든 것을 주게 될 것이다-완전한 자기포기를 수반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공포의 여지도, 모순의 여지도 없을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 갈등도 없게 될 것이다.
주의 attention는 집중 concentration과 같은 게 아니다. 집중은 배제이다. 전적인 앎인 주의는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말하는 바에 관해서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경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즉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색깔들, 사람들, 나무들의 생김새, 구름, 물의 운동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다지도 관심을 갖는 이유요, 우리 자신의 작고 보잘 것 없는 문제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쾌락, 추구하는 것 및 야심-위의 것들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거니와-에 대해 몹시 마음을 쓰는 이유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앎에 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 인도에서 나는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다. 운전사가 운전을 하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뒷자리에는 세 신사가 앎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면서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순간 운전사가 한눈을 팔다가 양 한 마리를 치었고, 세 신사는 그것도 모르고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그들이 양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주의력의 결핍을 지적하면서 그 얘기를 하자 그들은 그랬었던가 하면서 크게 놀랐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가 그와 같다. 우리는 외적 사물과 내적 사물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한 마리 새의 아름다움, 파리 한 마리, 나뭇잎 하나, 혹은 여러 복합성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의력 전부-이것이 앎이다-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당신이 관심을 가질 때에만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신이 참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면 당신을 발견하기 위해 당신의 온 마음을 기울인다. 그러한 앎은 방 안에서 뱀과 더불어 사는 것과 같다-즉 당신은 그것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이 내는 가장 작은 소리에 대해서도 아주 민감하다. 그런 주의력의 상태가 온힘 total energy이다-그런 앎 속에서 당신 자신의 전체성이 한 순간에 드러난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아주 깊이 보았을 때 당신은 더욱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더 깊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비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비교하면서 생각한다-깊고 얕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등등. 우리는 언제나 저울질하고 비교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얕다든가 깊다는 것 같은 상태가 있을까? 내가 <내 마음은 얕고, 작고, 좁고, 제한돼 있다>고 말할 때, 나는 그런 걸 모두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내가 당신의 마음-즉 보다 더 총명하고, 더 능력 있고, 더 지적이며, 더 기민한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비교하지 않고 나의 작음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배고플 때, 나는 이 배고픔은 하나의 관념이며, 기억이다. 만일 내가 항상 너와 대비해서 저울질하고, 너와 같이 되려고 싸운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환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어떤 형태의 비교이든지 간에 그것은 더 큰 망상과 더 큰 불행으로 이끌 뿐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때, 다시 말해서 마치 내가 나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조금씩 보태고, 혹은 나와 나 바깥의 어떤 것-그것이 국가이든 구세주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이든-을 동일시할 때,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오직 더 큰 순응과 따라서 더 큰 갈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 때, 나는 그것(비교)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그러면 내 마음은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 내 마음은 더 이상 더듬고, 찾고, 묻지 않는다. 이것은 내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만족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이라야 환영을 갖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그런 마음은 그리하여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갈 수가 있다. 우리가 보통 살고 있는 차원, 괴로움인 나날의 삶, 쾌락과 공포는 마음을 제약하고, 마음의 본질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러한 고통과 쾌락 및 공포가 사라졌을 때(이것은 당신이 더 이상 기쁨을 갖지 않는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기쁨은 쾌락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마음은 갈등 없고, <다름>의 느낌이 없는 다른 차원에서 기능한다.
말로는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다-그 너머에 있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말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진술하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말이나 설명도 문을 열지는 못한다. 문을 열어줄 것은 나날의 앎과 주의력이다-즉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걷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앎이 그것이다. 그것은 방을 소제하고 정돈해 두는 것과 같다. 방을 정돈해 두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중요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방은 정돈되어 있겠지만 그러나 정돈은 문이나 창을 열지 않을 것이다. 문을 여는 것은 당신의 의욕이나 욕망이 아니다. 당신은 필경 타자를 초대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을 정돈해 두는 것일 따름이며, 이것은 그것 자체로서 미덕이요, 그것이 가져올 바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제 정신으로, 이성적으로, 질서있게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당신이 다행하다면, 창은 열려서 미풍이 들어올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상태는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그것을 주시하되 만들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편 들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음으로써-이것은 선택하지 않고 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선택 없는 앎으로 해서 혹시 문은 열릴는지 모르고 또 갈등도 시간도 없는 그 차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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