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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4호
2012.4.19 (음 3.29)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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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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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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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책이 있다. 어떤 책이든지 읽는 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신의 불꽃이 불 붙기까지는 그 책은 사물(死物)에 불과하다. ─ H.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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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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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
엊그제 뜬금없는 광안리 바람이 불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던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일어난 바람이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2동에 있는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의 발음이 [광:알리]냐 [광:안니]냐 하는 설왕설래가 진원이었다. ‘[광:알리]가 맞다’는 쪽과 ‘[광:안니]라 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섰다. 부산 사람에게 급전 띄워 물으니 “(실제 발음은)[강알리]가 우세하다”는 뜻밖의 답을 하기도 했다. 관련 규정을 뒤적여 봐도 ‘이것도 맞고 저것 또한 맞을 수 있다’는 어정쩡한 규정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광:알리]의 근거는 ‘ㄴ’은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발음한다는 표준발음법 5장 20항에 있다. ‘광안리(해수욕장)’의 “로마자 표기법이 ‘Gwangalli’이므로, [광알리]로 볼 수 있다”는 국어원 누리집의 자료도 [광:알리]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고 [광:안니]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ㄹㄹ]로 발음되지 않고 [ㄴㄴ]으로 발음되는 보기가 있기 때문이다. 의견란[의:견난], 이원론[이:원논], 공권력[공꿘녁]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경우는 ‘실제 발음을 고려하여 정한 것’이며 ‘개별적으로 사전에 발음을 표시해야 한다’는 관련 규정에 따른 것이다.(표준발음법 20항 ‘다만’ 항목) 이 설명은 참으로 모호하다. ‘당인리’, ‘탄천로’ 따위의 발음을 따로 다루어 표시하지 않으면 [당일리], [탄철로]처럼 [ㄹㄹ]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발음을 반영하려면 “‘리’(里), ‘로’(路), ‘릉’(陵)처럼 뜻이 분명한 접미사가 붙는 복합어는 [ㄴㄴ]으로 발음한다”를 관련 규정에 담으면 어떨까 싶다.
그나저나 뜬금없는 광안리 바람은 왜 불었을까. 오늘 저녁 부산역 광장에서 열리는 언론노조 부산지역 집중집회 논의를 하던 중에 나온 얘기였다. 방송인들은 스튜디오를 떠나 있어도 말글살이에 대한 생각의 끈은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네가지
“신인 때는 ‘네가지’가 있는데, 유명해지면 그게 없어지는 연예인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가 옆 사람에게 물었다. “연예인이 갖추어야 할 ‘네가지’는 겸손, 예의… 이런 거겠지?” 돌아온 답은 뜻밖에 “‘네가지’는 가짓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싸가지’를 ‘사(四)가지’로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네가지 없는’은 곧 ‘싸가지 없는’을 뜻한다”였다. 물어본 이는 어머니, 답한 사람은 십대 딸이었다. 이처럼 요즘에는 ‘싸가지’를 ‘네가지’라 한다기에 인터넷 공간을 뒤져보았다. 누구는 ‘양심, 신의, 겸손, 인본’을 갖추어야 ‘사(싸)가지 있는 사람’이라 했고, 어떤 이는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 곧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싸가지의 어원’이라 했다. 이런 제멋대로 풀이가 그럴듯하게 포장돼 널리 퍼져 있으니 코미디 제목 ‘네가지’에서 ‘사(싸)가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 같다.
싸가지’는 ‘싹수’의 강원·전남 방언이다. ‘싹수’는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로 ‘싹수 있다, 싹수 없다, 싹수 노랗다, 싹수 보인다, 싹수 틀렸다’처럼 활용한다.(표준국어대사전) ‘싸가지→소갈머리’(우리말큰사전)에 기대어 ‘싸가지 없다’는 ‘소갈머리 없다’와 한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싸가지’를 ‘속+아지’의 원말로 볼 근거는 없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싸가지’는 ‘싹+아지’의 형태로 보는 게 정설이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싫어하는 조건(인기없음, 촌티, 뚱뚱함, 키 작음)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네가지’. 겉보기와 다른 자신들의 본모습을 드러내며 세상을 풍자하는 이 코미디의 주인공들이 총선에 나온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쭉정이 본디 모습에 겉만 번드르르한 ‘싸가지 없는 정치인’을 가려낼 줄 아는 유권자의 안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현수막, 펼침막
총선, 잔치는 끝났다. 삶만큼이나 말글살이의 무게가 중요함을 깨닫게 한 19대 총선이 끝나면서 ‘사찰 바람’과 ‘막말 시비’로 선거 기간 동안 휘몰아치던 여론몰이도 수그러들었다. 선거 결과를 놓고 분분했던 논란과 해석도 잦아들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네거리, 시장 들머리, 대중교통 타는 곳 등에 걸려 ‘날 좀 보소’ 하는 듯 공약을 담아 나부꼈던 선거 홍보 현수막이 사라질 것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홍보 현수막과 선거 공보, 홍보 인쇄물 수요가 늘어 관련 업계가 반짝 호황을 누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전국을 뒤덮었던 그 많은 현수막은 어떻게 처리될까. 선거관리위원회는 ‘홍보 현수막은 각 후보가 지체 없이 회수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업계 호황의 그림자는 후보들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원순환사회연대는 이번 선거에서 사용된 현수막을 모두 태워 버릴 경우 28억원이 들 것이라며 ‘폐현수막을 장바구니나 신발주머니, 마대, 농사용 덮개 등으로 재활용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튼튼한 재질로 만든 현수막은 재활용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현수막은 ‘매달아(懸, 매달 현) 늘어뜨린(垂, 드리울 수) 막(幕)’으로 ‘선전문·구호문 따위를 적어 드리운 막’(표준국어대사전)이다. ‘드리우다’는 ‘한쪽이 위에 고정된 천이나 줄 따위가 아래로 늘어지다’이니 현수막은 세로쓰기 시대에 어울리는 말이다. 가로쓰기가 대세인 시대에 걸맞은 표현으로 ‘펼침막’이 있다. 이 말은 인터넷에 15만여건(구글 검색 기준) 나오는 것에서 보듯이 꽤 널리 쓰이고 있는 표현이다. ‘손펼침막’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2005년 신어자료집, 국립국어원) 1980년대 대학가 등에 등장해 인정받은 ‘걸개그림’처럼 ‘펼침막’도 사전에 제자리를 찾아줄 때가 되었다. ‘손펼침막’보다 검색 빈도가 4배 정도 높은 ‘손팻말’과 함께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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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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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으로 - 김상미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넌덜머리가 난다 우리는 우리끼리 만났다 우리끼리 떼 지어 다녔다 핑크 플로이드를 듣고 재니스 조플린을 듣고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를 따라 불렀다 까마귀 떼처럼 백로가 노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가 슬픈 뮤지션들 온몸이 서러움으로 만들어진 사람들 어느 곳을 건드려도 툭, 하고 푸른 눈물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노래 가사와 똑같은 꺾인 길, 굽어진 길, 막다른 길들을 돌아다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무릎에 붉은 상처가 생겼다 오오, 붉은 상처는 훈장 같아! 우리는 서로의 무릎에 난 상처를 따뜻한 혀로 핥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소박하고 소박한 청춘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소박함이야말로 지혜의 꽃이라는 진실 앞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만큼 나누어줘야 할지 몰라 광란의 속도로 달리는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느릿느릿 에릭 사티를 듣고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소리쳐 불렀다 새파랗게 젊은 정의는 한낱 꿈!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다가와 구애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 아무리 목갈기를 휘날려도 그중 가장 으뜸은 돈이라고, 돈다발이라고 우리는 다시 굽은 길, 꺾인 길,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 그러나 침묵하는 자가 있으면 노래하는 자도 있는 법 우리는 온몸으로 노래하며 더 멀리, 더 먼 곳으로 나아갔다 자유의 속옷을 열어제친들 무엇하랴? 이마에 찍힌 청춘의 이름표를 도려낸들 무엇하랴? 우리는 누구와도 우리들의 삶 흥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끼리 떼 지어 놀았다 비 오고 바람 불고 폭풍우 치는 이런 시대, 너무 멀리 나간다는 건 미친 짓이지만 우리는 노란 해바라기, 불타는 태양 달리는 풀잎처럼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 눈을 찌르는 일광, 그 노래를 움직일 거대한 폭풍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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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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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 노인숙
지쳐 놓은 지게문에 소리 없이 지는 그늘
진종일 마루 끝에 빈 바람 걸터앉아
벽으로 나뉜 저 너머 건너 갈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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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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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는 놀고 싶어요 2 - 김종만
점심을 먹고도 나가서 놀 수 없어요. 땀 냄새를 싫어하시는 선생님은 볕에서 뛰놀다 들어오면 땀 냄새가 난다고 점심 시간 종이 울리면 곧 칠판에 문제를 내시고 "점심 다 먹은 사람은 이거 풀어요." 하시고 휑하니 교무실로 갓고 우리들은 반장의 수첩에 이름이 적히는 게 무서워 말없이 밥숟갈만 입에 퍼넣어요. 오전 시간 마치고 돌아가던 2학년 종천이가 낼름 창 밖에서 얼씬거려도 난ㄴ 나갈 수 없었어요. 축구공을 가지고 온 영천이가 책상 밑으로 내게 툭 공을 차보내도 나는 모른 척 했어요. 그러다 반장 몰래 벌떡 일어나 창 밖으로 운동장을 내다보니 4학년 아이들이 축구를 하잖아요. 에이! 야, 반장! 우리 나가 놀자! 혼나면 혼나지 뭐! 안 돼! 어제는 다섯 대지만 오늘은 열 대야! 그 소리에 풀이 죽어 다시 풀썩 주저앉지만 난 오늘따라 반장이 미웠어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노예처럼 말 잘 듣는 반장이 오늘은 유난히도 미웠어요. 그래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 "선생님, 우리 좀 놀게 해줘요!" 당장에 화난 선생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난 듯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나는 다시 맘속으로 외쳤어요. "선생님, 우리는 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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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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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9장 생활의 즐거움
3. 벗과의 정담에 대하여
<임과 하룻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 이것은 옛날 중국의 한 학자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한 말이다. 이 말에는 많은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야담>이라는 말은 벗과의 유쾌한 이야기를 밤에 나누는 것을 나타내는 유행어가 되어 있다(과거의 밤에 주고받는 이야기도 좋고 이제부터 맛볼 밤 이야기라도 좋다) 벗과 더불어 마음껏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인생에서 다시 없는 즐거움은 일생 가운데 여간해서 맛보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이입 옹도 말했듯이 현명한 사람으로서 말 잘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 법이고, 말 잘하는 사람치고 현명한 인사란 찾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인생의 모든 일을 이해하고 더우기 말재주도 뛰어난 그런 인물과 산속 깊은 절간에서 우연히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천문학자가 새로운 유성을 발견하거나 식물학자가 새로운 종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사업계의 경황 없이 변하는 템포 때문에 벽난로를 둘러싸고 크래커 통에 걸터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화술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고 현대인은 한탄하고 있다. 이른바 템포라는 것이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가정이라는 곳이 전과 달라져 통나무를 땔 수 있는 벽난로가 없는 아파트에서 살게 된 것이 화술을 파괴하는 시초가 되고 자동차의 영향이 그 파괴를 완성시킨 것이나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대체 템포라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 참된 친구와 주고 받는 정담이라면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데서 비롯되는 편안함, 유우머, 가벼운 뉘앙스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단순히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이런 운치 있는 정담을 나눈다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중국어로는 설화(Speaking)라는 말과 담화(Conversation)라는 말로 그 사이의 구별을 짓고 있지만, 담화는 설화보다는 마음 가볍고 운연한 맛이 있으며 이야기의 내용도 비교적 세세한 것이어서 사무적인 데가 적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사무용 통신문과 문우와의 편지 사이에도 있을 것이다. 사무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따지는 것은 어떤 상대와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밤을 세워 가면서 마음껏 환담할 수 있는 상대란 매우 적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의미에서의 담화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재미난 작가의 작품을 읽는 기쁨 이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담화의 경우는 상대편의 목소리를 듣고 몸짓하는 동작을 보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때는 밤기차의 끽연실에서, 또 어떤 때는 먼 여로의 객사에서 우리는 그러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갖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며, 독재자와 반역자를 욕하는 통렬한 웅변에 섞여 유령의 이야기며, 여우에 홀린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그 중에는 지금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점점 절박해진 정권의 뒤집힘이나 정변이 일어날 전주곡이니 하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을 알려 주는 식견과 앞일을 내다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좌담가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일생 동안 잊을수 없는 추억 속에 남게 마련이 것이다. 이야기를 서로 나누기에 가장 좋은 때는 물론 밤이다. 밝을 때 주고 받는 이야기는 어딘지 매력이 적은 법이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장소는 어디건 좋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유쾌한 대담을 즐기는 것은 18세기 식으로 꾸민 살롱에서도 할 수 있고,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면서 그 어느 농장 안에 놓인 빈 술통에 걸터 앉아서도 할 수 있다. 어쩌면 또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밤이나 비가 내리는 밤에 강을 배를 타고 여행한다. 맞은편 기슭의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어른어른 물 위에 비치는데 이런 정취 속에서 사공들은 여왕의 공주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의 진짜 구수한 맛은 그 환경, 즉 장소나 시간이나 이야기 상대가 그때그때 바뀌는데 있다. 어떤 때는 강남차의 꽃이 필 무렵 산들바람이 부는 달 밝은 밤과 관련지어 그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고, 또 어떤 때는 벽난로에서 통나무가 활활 타던 캄캄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밤의 기억과 함께 연상할 때도 있다. 또는 어느 누각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강을 내려가는 몇 척인가의 작은 배를 내려다보던 것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한 척의 배는 급류에 휩쓸려 뒤집혀졌었지. 그리고, 또 아침 한때 역 대합실에서 지낸 일도 추억에 떠오른다. 그러한 정경은 그때그때 주고 받는 이야기의 기억과 하나로 연결되어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 방 안에 있던 사람은 아마 두서너 명이었었지. 그리고 그날 밤은 아마 대여섯 명은 되었을 거야. 진군은 그날 밤 술이 좀 취해 있었던 것 같았어. 그리고 김선생은 코감기가 들어서 약간 코맹녕이 소리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것은 특히 그날 밤의 기분을 더욱 짙게 했었지.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좋은 벗들은 언제나 서로 만나기 힘들다>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니까 우리가 이런 단순한 즐거움에 잠겨 있을 때 신들도 인간을 시새움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란 언제나 친밀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뛰어난 수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스타일이나 내용이 모두 수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여우의 망령, 파리, 영국인의 기묘한 습관, 동양 문화의 서로 다른 점, 세느 강변의 노점인 헌책방, 양복점에서 일하는 음란증이 있는 여점원, 우리의 지배자, 정치가, 장군들의 숨은 이야기, 불수감(시트론의 변종)의 보존법 등 이런 것들은 모두 한담 재료로서는 안성마춤인 화제라 하겠다. 이야기가 수필과 가장 공통된 점은 그 여유 만만한 스타일에 있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슬픈 변화라든가 혼돈 상태에 대한 비판도 나올 것이고 자유와 인간의 품위, 나아가서는 인간이 목표로 삼는 행복까지도 앗아가버리는 광적인 정치 사상의 종류 속에 문명 그 자체가 몰락해 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에 대한 비판도 나올 것이다. 또한 더 나가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진리나 정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겠지만, 그러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엄숙하고 중요한 화제라 할지라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마음 편하고 친밀감이 있고 한가한 태도로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를 약탈한 자에 대하여 아무리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명 사회에서는 입가나 펜 끝에 띤 가벼운 미소에 의해 그 감정을 나타내는 도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감정을 모두 드러내 놓고 진짜 열을 띠고 이야기하는 격한 말 따위는 정말로 친절한 몇몇 친구들에게나 들려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뜻에서 기탄없는 이야기를 즐기려면, 있어서는 난처한 싫은 사람들은 빼놓고 소수의 마음 맞는 친구들만 모여서 정다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 편하게 각자의 의견을 털어놓는 것이어야 한다.
진짜 담화와 이와는 다른 정중한 의견 교환과의 다른 점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수필과 정치가의 성명과의 다른 점을 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정치가의 성명 가운데도 특히 고상한 감정을 표현한 것도 상당히 있다. 즉 민주주의 감정, 봉사하겠다는 열의, 가난한 사람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국가에 대한 충성, 숭고한 이상주의, 평화에 대한 사랑과 변함없는 국제적인 우의의 확보, 권세욕이나 금전욕의 냄새를 절대로 풍기지 않는 태도 같은 것은 정치가의 고상한 정조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성장을 하고, 지나치게 짙은 화장을 한 여인처럼 마음 놓고 가까이 갈 수 없는 한가닥 악취를 풍기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진심으로 들려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또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수필을 읽고 있을 때에는 수수한 옷을 걸쳐 입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시골 처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머리칼은 약간 헝컬어지고 단추는 하나쯤 떨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애교가 있고 친밀감이 있어 호감이 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서양 부인들이 입는 실내의가 노리는 정감 있는 매력이어서 아무렇게나 꾸민 가운데 깃든 세련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친밀감에서 오는 이 정이 가는 매력이야말로 온갖 즐거운 이야기와 수필이 지녀야 할 공통 요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담화가 지녀야 할 올바른 양식은 친밀감과 대범한 느낌이 하나로 어울린 양식이어야 한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의식을 잃어버리고, 몸차림이 어떻다느니, 어떤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느니, 재채기를 했다느니, 어디에 손을 얹어 놓고 있다든가 그런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또한 이야기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전되거나 도무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렇듯이 친한 친구들과 서로 만나 서로 마음을 편히 갖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은 곁에 놓인 탁자 위에 두 발을 올려 놓고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창틀에 걸터 앉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방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소파에서 끌어내린 쿠션에 몸을 기대고 있는 형편이어서 소파의 3분의 1은 텅 빈 채로 남아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손발이 편해지고 몸이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되어야 비 로소 심장도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바 모두 마음에 드는 친구뿐일세 / 내 주위에 눈 거슬리는 놈은 아무도 없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적어도 예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온갖 한담을 주고 받는데 절대 필요한 요건이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까 이야기에는 이렇다 할 순서도 방법도 없이 차례로 거침없이 나가게 마련이다. 이윽고 모두 유쾌한 기분을 지닌 채 흩어져 가게 되는 것이다.
이상 이야기한 것이 한가로움과 담화와의 관계이며 또한 담화와 산문체가 흥륭하는 관계이다. 본디 나는 진실로 세련된 한 나라의 산문은 담화가 이미 하나의 예술의 경지까지 발달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사실은 중국과 고대 그리이스에 있어서의 산문 발달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가장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공자가 나타난 뒤 몇 세기에 걸쳐 중국 사상은 발랄한 생기를 보여 이른바 <구류학파>를 낳기에 이르렀는데, 그 원인으로서는 주로 입씨름만을 일삼는 학자 계급에 의하여 구성된 교양이 높은 시대적 배경의 발달이라는 원인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화술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한적 사회에만 국한돼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뛰어난 수필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화술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술과 훌륭한 산문 기술은 문명사상 그 모두가 비교적 늦게 발달되었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은 어느 정도 감정의 섬세함과 경묘함을 발달시켜야 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한적한 생활에서만 바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한가함을 즐기고 가증할 유한 계급에 속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반혁명적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은 모두 대중에게 여가를 즐기게 하는 것, 즉 한가로움의 향락을 일반화시키는데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가함을 즐기는 것이 죄악이 될 까닭이 없다. 아니 죄악은 커녕 문화 자체의 진보가 한가로움을 총명하게 이용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담화는 그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말할 수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곧 잠이 들어 소처럼 쿨쿨 코를 고는 실업가 따위는 아마도 문화의 발달에 대해 아무런 보템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 <한가함>이 때로는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구한다고 좀처럼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뛰어난 문학적인 작품은 강제적인 한가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겨났다. 창창한 앞날을 가진 문학적 천재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회적인 모임에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시국 문제에 대한 논문을 쓰거나 하여 정력을 소모하는 것을 보면 그를 구해낼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방법은 감옥에 집어 넣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왕이 인생의 변화를 논한 철학의 고전 <역경>을 쓴 것도, 사마천이 한문으로 쓴 가장 훌륭한 역사인 <사기>라는 걸작을 쓴 것도 모두 감옥에 갇혔을 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문인이 정계에 대한 야심이 무너졌을 경우, 또는 정계의 정세가 너무나 비관적인 경우, 이따금 문학과 미술의 걸작이 생겨난다. 몽고가 중국에 군림했던 시대에 위대한 원대의 화가와 희곡가가 많이 쏟아져 나왔고,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했던 첫 무렵에 석도나 팔대산인과 같은 위대한 화가가 나타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애국심이 이민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극도의 굴욕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서, 예술과 학문에 대하여 전신전령을 쏟게 했던 것이다. 석도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 낳은 거장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거장이지만, 그의 이름이 널리 유럽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면도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청조의 역대 황제가 자기네 통치에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았던 이들 예술가의 공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데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실패한 다른 위대한 문인들은 그들의 정력을 승화시켜 오로지 창조의 길로 정진하기 시작했다. <수호전>을 쓴 시내암의 경우, <요재지이>를 쓴 포송령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수호전> 속에 역시 시내암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 머리말 가운데 친구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쾌한 글이 있다.
친구들이 모두 내 집에 모이면 모두 합해서 열 여섯 명인데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이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비나 폭풍우가 부는 날이 아니고는 한 명도 오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드문 일이다. 대개 보통 날에는 여섯 명이나 일곱 명이 모이게 되는데, 그들은 집에 오자마자 곧 무엇을 생각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싫어지면 그만둔다. 즐거움은 술을 마시는데 있는 게 아니라 벗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정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의 격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이렇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장에서는 대부분의 소식은 세상 소문에 의지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전해 들은 소식은 한낱 뜬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뜬소문을 갖고 논한다는 것은 타액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세상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주고 받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과실은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비방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는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놀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아직도 그렇게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주고 받는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바쁜 세상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내암의 대작이 나오게 된 것은 이러한 정서 속에서였으나 그것은 그들이 한가로움을 즐겼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에서 산문이 일어난 것도 분명히 이러한 한적한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이스 사상의 맑고 깨끗함과 그 명쾌한 산문체는 분명히 한담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대화>라는 표제만 보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향연>편을 보면 한떼의 희랍 학자들이 땅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술과 과일과 미소년의 분위기 속에 싸여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사상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고 문체가 매우 명쾌한 것은 화술의 수련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아카데믹한 저자들의 저 현학적이고 거만한 문체와 얼마나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분명히 철학의 화제를 마음 가볍게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매력적인 환담의 분위기,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풍, 좋은 이야기 듣기를 소중히 여긴 점, 이야기를 나누는 환경에 마음을 썼다는 것은 <파이돈>의 머리말에 아름다운 필치로 쓰여져 있다. 이 글을 읽으면 고대 그리이스의 산문이 훌륭한 원인을 잘 알 수 있다. 플라톤이 쓴 <공화국>만 하더라도 현대의 저술가라면 능히 쓸만한, <그 발전의 연속적인 단계를 통해서 본 인류 문명은 이종으로부터 동종으로의 역학적인 운동이다>라느니 어쩌니 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잠꼬대 같은 말로 시작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같은 즐거운 문장이 첫머리에 나오고 있다. <나는 어제 아리스토의 아들인 글로코와 함께 여신을 참배하려고 페레우스로 갔다. 그리고 시민들이 어떤 모양으로 제전을 기리는지 보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이번 제전은 처음 보는 제전이었기 때문이다> 사색이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행해진 고대 중국 철학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가 <대비극 작가는 또한 대희극 작가이어야 하는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가>와 같은 화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그리이스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다. 향연에 묘사되어 있는 그대로이다. 그곳에는 진지함과 명랑함이 뒤섞인 공기가 감돌고, 듣기에도 마음 가볍고 다정한 응답이 오가곤 했다. 한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마시는 모양을 놀려 대지만, 소크라테스는 매우 태연하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잔을 들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술잔을 내려 놓곤 한다. 손수 따라 마시는 것이니까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는다. 이렇듯 아리스토파네스와 아가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어 버릴 때까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무리에게도 빨리 잠자리에 들도록 권하고 마지막에 혼자 남게 되면 소크라테스는 연회석상을 떠나 아침 목욕을 하러 리세움으로 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신선한 마음으로 그날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이스 철학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친근미가 넘치는 환담이 있는 분위기 속에서다.
교양이 담긴 담화에는 그것에 필요한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여성의 참가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경쾌한 기분이라는 것이 한가로운 이야기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실없는 말을 하거나, 떠들어대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이윽고 답답해지고, 철학 그 자체도 인생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하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생활방식을 이해하는데 흥미를 갖는 문화가 존재했을 때에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언제나 사교하는 자리에서 이성을 환영하는 풍습이 발달됐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젠스에서도 그러했고, 18세기 프랑스의 살롱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남녀가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지했던 중국에서조차도 남자 학자들은 말벗이 되어 주는 여성이 참석하기를 바랐었다. 화술이 수련되어 일세를 휩쓴 진, 송, 명의 3대에 있어서는 사도온, 조운, 유여시, 이밖의 재원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중국의 남성은 아내가 정숙하고 다른 남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재능이 풍부한 여성들과 함께 앉아 즐기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 문학사는 결국 직업적인 창녀의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자리에 여성의 매력을 약간 보태고 싶다는 요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일찌기 나는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몇의 독일 여성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뒤 영국과 미국에서 내가 아무리 애써 보아도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경제학에 조예가 깊은 여성들을 보고 매우 어리둥절해진 경험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논할 수 있는 여성은 예외라고 치고,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알고 단정하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 여성이 몇 명 자리에 함께 있으면 이야기는 언제나 기분 좋은 자극을 얻는 것이다. 나는 멍청이같이 생긴 사나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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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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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5. 아리스토텔레스 - 현세계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플라톤과 더불어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유명한 문헌학자 빌라모비츠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스콜라 철학이 존경하는 그러나 시험 준비생들은-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무미 건조하게 주입식으로 공부해야 했다-저주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혹은 383년경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자주 스타기라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셀링을 "레온베르크 사람", 니체를 "뢰켄 사람", 피히테를 "람멘나우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베를린에서 위대한 람멘나우 사람이 그의 유명한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했다고 했을 때의 그런 의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타기라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도시는 그를 제외하고는 주목할 만한 철학자를 더 이상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타기라가 트라키아 어딘가의 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이라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위대한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그리스의 정신적 수도 아테네의 시민이 아니라 지방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플라톤과 구별된다. 그렇다고 그가 천한 집안 출신인 것은 아니다. 그는 훌륭한 시민 가문 출신으로 의사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의 궁정 의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으려 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직업에는 고대의 증인들이 "약제사"라고 부르는 약을 조제해 파는 일도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아테네로 가고 싶어했다. 가족들은 그를 아테네로 보내 주기로 하고, 가기 전에 그가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신탁에 물어 보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철학을 공부하라는 신의 대답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신탁이 다른 대답을 주었더라면 서양 정신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 지는 예측할 수 없다.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학문 연구를 위한 충분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일생 동안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호화로운 저택과 훌륭한 시중을 받으면서 지내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었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디오게네스는 집 대신에 커다란 통 안에서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범적인 인물로 비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훗날 기술하듯이, 행복에는 이 세상의 물건들을 충분히 소유하는 것도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화려한 옷을 입고 반지를 끼고 머리를 손질하는 등 남달리 치장에 신경을 썼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화려한 치장에 상응하는, 남의 이목을 끌 만한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그는 다리가 가늘었고, 눈은 작았으며, 이야기할 때 약간 말을 더듬거렸다"고 덧붙여 말한다. 스타기라에서 아테네로 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그 당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한 학문에 골몰하며 쓸데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철학은 오히려 굉장히 폭넓은 관심사로 통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지식과 모든 학문이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정치가이든 장군이든 또는 교육자가 되려는 사람이든 처음에 한번쯤은 철학에 몰두해 보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고 여겨졌다. 그 당시 아테네에서 철학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던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아카데모스의 신성한 숲에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자기 주위에 한 무리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그들과 공동으로 철학을 하였다. 이 공동체에 17세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합류한다. 그는 20년간을 그곳에 머물면서 배우고 익히면 토론하였고, 특히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으며 책에 파묻혀 지냈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에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는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고, 이러한 스승에 대한 정중한 태도를 일생 동안 유지하였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은 악한 사람들이 감히 칭찬해서도 안 되는 그러한 사람이며 심지어 플라톤은 신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 사상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고령의 플라톤이 가르치는 그 모든 것에 동의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플라톤은 "어린 망아지가 자기를 낳아 준 어미말을 뒷발로 차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한껏 두들겨 팬다"고 약간은 체념 섞인 어조로 읊조렸다. 그러나 그것이 공공연한 갈등으로 비화된 것은 플라톤이 죽은 후이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아카데미아의 새 원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일로 비위가 상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 소아시아의 어느 군주에 의해 새로운 안식처를 제공받았다. 이 군주는 플라톤적인 정신의 철학을 진심으로 좋아하였고, 그의 철학적인 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이 군주는 페르시아가 침공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 속에 있으면서까지도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철학의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는 사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군주의 성을 떠난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인생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만남을 체험한다. 그는 아테네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을 만난 이래로, 마케도니아에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자 천재적인 정치인인 알렉산더 대왕을 만난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은 이 당시 아직 대왕이 아니었고 13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 고문관이 아니라 그의 가정 교사가 된다. 우리는 이 철학자의 교육 방법이 장래의 정치가이자 장군이 될 알렉산더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힘과 정신, 즉 장차 세계를 정복할 대왕과 보편적인 의미로 정신계를 지배한 철학자가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아무래도 공교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임명된 관직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자리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임으로 왕자의 가정 교사로 온 사람은-일부러 그랬는지 실수로 그랬는지 분명하게 밝혀낼 수는 없지만-반란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쇠창살로 만들어진 철장에 갇혀 그 나라의 구석구석을 끌려 다닌 뒤 마침내 사자의 밥이 되고 만다. 고대의 수다쟁이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알렉산더를 계획적으로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운다. 추측하건대 이 이야기는 진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추적자들은 이 철학자를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이 그는 궁중을 떠나 자유로운 도시 아테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들였다. 그는 제자들과 큰 홀에서 만나 그들과 더불어 홀의 여기저기를 왔다갔다하면서 토론하였다. 아테네인은 이 광경을 매우 기이하게 여겨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에게 "배회자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철학사는 이 사실을 고려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을 매우 고상하게 "소요학파"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배회자들"을 뜻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제자들은 특히나 그들 스승의 괴팍한 면을 주의깊게 관찰한다. 실제로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몇 가지 기이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으레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도 짓궂게 특히 스승의 잠자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승이 항상 배 위에 뜨거운 기름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놓고 자는 모습을 알아내고는 참으로 기이하다고 여겼다. 아마도 그는 그 주머니가 분명 필요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기록이 맞다면-아리스토텔레스는 지병인 위장병으로 고생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더욱더 궁금하게 여긴 것은, 어떤 방법으로 스승이 잠을 줄였으며 가능한 한 재빠르게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 사유하는 자세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휴식을 취할 때면 손에 청동으로 된 구슬을 쥐고 그 밑에는 그릇을 놓아두었다. 그렇게 해서 스르륵 잠이 들면 구슬이 그릇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서 철학적인 사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제자들의 공동 작업이 고작 그런 이야기에나 나오는 것 정도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을 개별적인 연구보다는 공동 연구를 하도록 엄격하게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서양 정신사에서는 여기서 최초로 조직된 탐구 집단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인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더불어 아테네의 정치적 상황도 급변하였다. 아테네는 이제 마케도니아의 영향에서 벗어났고, 마케도니아인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적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치범이라고 공개적으로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했지만 그의 유죄를 증명할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죄가 될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그가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고소를 피해서 도망쳐 버린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컬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아테네 시민들이 이미 그 전에 소크라테스에게 저지른 그와 똑같은 죄를 두번째 철학자에 대해서도 저지르는 것을 막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망명하여 얼마 살지 못하고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노예들과 애첩까지도 일일이 다 신경을 쓴 상세하고도 사려깊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상이 바로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이다. 여러 차례의 거주 변경, 궁중에서의 잡다한 활동, 매우 다양한 종류의 교육적 의무, 죽음의 위험과 비난 등 그가 겪은 이 모든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그가 철학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처럼 조용하게 연구할 수 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철학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리스토텔레스만큼 꾸준히 성실하고 근면한 연구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개인적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온전히 사물과 사물의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만일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채찍질을 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눈을 돌리지 않은 만큼 더욱더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박식한 학자이면서도 세계를 대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모든 관심은 실재에, 그 모든 다양한 실재의 형상에 쏠려 있었다. 그는 동물의 형태와 행태, 그리고 천체, 헌법, 시학, 수사학 등 광범한 분야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행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유해야 하며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물음은 단순히 박식한 사람의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 모든 것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며, 결국에는 모든 실재가 바탕을 두고 있는 그것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며 그리로 향해 가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연구 결과를 방대한 저서로 후세에 남겼다. 고대의 한 증인은 400여 권이었다고 하고, 다른 증인은 1,000여 권이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무척 정직한 학자인 또 다른 증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해 놓은 줄 수를 세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때 그가 계산한 합계는 총 445,270줄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방대한 저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학문의 창시자가 된다. 그러나 그가 자연 과학 저서에 남겨 놓은 연구 결과들은 그렇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저술 내용의 대부분이 낡아빠진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제자들과 협력하여 아주 세밀하게 사람들이 동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전부와 동물을 정확하게 탐구하여 동물에게서 밝혀낼 수 있는 것 전부를 모았다. 거기에는 동물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번식을 하는지, 어떤 병에 걸리는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기이한 사실들도 밝혀내곤 했다. 가령 진흙과 모래 사이에서 일종의 원초적 교미로 생겨나는 동물이 있다거나, 생쥐들이 소금통을 핥기만 해도 새끼를 밴다거나, 자고라는 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미풍만으로도 새끼를 밴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여 인간을 해부학적 관점에서 탐구하였다. 그는 여기에서도 몇 가지 기이한 사실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뇌는 중요하지 않은 부속 기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것은 바로 심장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비해 뇌는 단순히 뜨거운 피를 식혀 주는 일종의 냉각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뇌는 장의 온도와 흥분을 조절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기이한 생각들을 꿰뚫고 하나의 위대한 사상, 아주 커다란 결실을 맺는 하나의 사상이 대두된다. 즉 생명체를 단순히 부분들이 모인 더미의 축적이나 단순한 기계 장치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하나의 유기체인 것이다. 즉 자기의 부분들에게 처음으로 비로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러한 전체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는 생명의 영역을 넘어서 세계 전체로, 즉 하늘, 별, 지구로 향했다. 그러나 이 모든 탐구는 자연 그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시도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후대의 과학, 특히 중세, 더 나아가 근세의 과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발견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기체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유기체는 하나의 독특한 전체로서 그것이 하나의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끌려지고 있다. 그런데 목적과 목표는 유기체 밖에서 안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가 그것을 그 자체 안에 근원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기체의 목적과 목표는 어디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유기체가 자신의 가능성의 전 영역을 실현시키려고 추구하는 바로 거기에 성립하고 있다. 예컨대 식물의 본질은 그것이 식물이 되려는 모든 가능성을 실현시키려고 추구하는 것, 즉 그것이 배아, 개화, 결실을 통해 자신을 구현하는 거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현실태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는 현실태의 개념을 통해 개개의 모든 생물은 각기 자기 자신 안에 추구해야 할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내적인 목적 추구성에 따라 스스로를 전개시켜 나간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듯 개개의 유기체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러한 것을 전체 자연을 설명하는 그의 해석에 적용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 안에 배태되어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충족시켜 실현하려고 한다. 전체 세계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완전성을 위해 노력한다. 바로 거기에 자연의 생동감이 있고,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세계는 완전성으로의 열망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지배되고 있으며 자연 자체도 바로 이러한 욕망의 집합체일 뿐이다. 세계는 자기 실현과 자기 완성이라는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다. 이 보편적 목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상에서 매우 중요한 근본 사상이다. 이제 이 보편적 목적론은 인간에게도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몰입해 왔던 그리스 정신에 대해 언급한다. 즉 사적인 생활에서나 공적인 생활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인간의 현존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전체 자연에 대해서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실현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생물처럼 인간도 하나의 근원적인 추구라는 특성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에게 좋은 것, 그가 자신의 연락을 거기에서 느끼고 있는 바로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참으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참된 선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그가 본질상 그것이어야 하는 바, 그것을 가능한 한 최대로 실현하여 성취시키려 한다. 인간은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숙명이다. 이 사상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네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 무엇이 되어라"라는 원칙을 준거로 삼고 있는 모든 휴머니즘의 시조가 된다. 물론 그러한 윤리학은 모든 것이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잘 되어 가고 있고, 인간이 전체 세계 안에서 단절없이 잘 융합되어 있다는 의식을 아직 갖고 있었던 그러한 시대에만 가능하다.
고대 말기에 그리스도교가 발원하면서 인간성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의식이 번져가기 시작하자 사정은 달라진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여전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인 과제는 인간 본질의 근원적인 선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규정은 아직 형식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인간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질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하는 물음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서 관찰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정신과 이성, 즉 로고스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의미 없는 것을 계획할 리 없는 자연이 그 모든 생물 외에 또 인간을 태어나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 즉 정신, 이성, 로고스가 실현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인간 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이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인 이성을 도야하는 데 있으며, 인간이 실제로 그 무엇 즉 이성적인 생명체가 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참된 본질을 로고스에서 보았다면, 인간이 이 로고스의 탐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것은 그 어떤 학문적 관심의 우연이 아니라 그가 발견한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즉 인간은 그의 가장 고유한 본질인 로고스를 올바른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 로고스에 대해 통달해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단순히 로고스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이 충분히 규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로고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오직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인에게 로고스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로고스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바로 세계를 인식해야 하는 인간의 사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나 그리스 사상 전반에 걸쳐 인간 현존재의 의미는 근세의 사상에서처럼 세계정복이 아니라 세계 인식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최고의 생활 형태는 행위하는 생활 형태가 아니라 인식하는 생활 형태라고 주장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박식한 학자의 교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철저한 숙고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 인식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 위에 놓여 있다. 만일 현대에도 여전히 학문과 순수한 인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특히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영향을 계속 받은 덕택이다. 인식의 우위는 그밖에도 행동 영역에서까지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이성이 행동을 지배한다. 정열에 맹목적으로 이끌려 가는 행동이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 신중하게 생각해 이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존재를 형성하도록 하는 행동이 도덕적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또한-가장 정열적인 민족의 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바로는-인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시키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오직 통찰만이 올바른 척도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사물, 인간, 인간의 행동을 인식하려는 이러한 관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력이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철학자로서 궁극적으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 이렇듯 낭비스러울 정도의 풍족함을 눈앞에 보이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세계와 인간은 그들 본래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적 정신의 철학적 문제, 즉 현실의 더 깊은 근거에 대한 물음에 봉착한다. 여기서 그가 현실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한 근본 특성, 즉 보편성이 문제가 된다. 전체 세계를 철두철미하게 지배하고 있는 위대하고 포괄적인 운동은 본래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세계를 끊임없이 그 모든 구석구석에서 움직이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운동이 출발해 나오는 그러한 첫번째의 운동자가 존재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실제로 세계는 어떤 최초의 운동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최초의 운동자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또 다른 운동자는 무엇이냐고 또 물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최초의 운동자는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서(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운동자 또는 그 운동자가 만들어 놓고 있는 그것을 주의깊게 관찰하면, 우리는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부단한 추구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추구는 무엇에 의해서 야기되는가? 사랑이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기듯이 분명 그것도 그것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에 의해 야기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세상의 그 모든 추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또 다른 많은 규정들을 덧붙인다. 세상에서의 그 모든 추구는 자기 실현을 도모한다. 따라서 궁극의 목적은 현실적인 것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것, 즉 순수 현실이다. 그렇다면 가장 현실적인 것과 가장 완전한 것은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바로 신성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현실의 근본 특성, 즉 부단한 실현과 완전성을 향한 부단한 욕구는 바로 여기 이 신성 안에 근거하며 거기로부터 발원하고 있다.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자신 안에 신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물을 냉철한 정신으로 탐구하는, 세상을 대변하는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최종의 말은 세계가 아니고 신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의미로서의 밖에서부터 세계를 존재하게끔 만든 그러한 창조주 신이 아니라 세계에 내재하는 세계 추구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신성이다.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우화 작가", "타락한 철학자"라고 불렀을 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그리스도교적 신개념과는 현격하게 다른 본질적인 차이를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사상은,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이 그를 끌어들이는, 아니 더 나아가 그를 때때로 "자연적인 것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라고까지 칭하게 한 그러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어떻게 궁극적인 목적, 즉 신성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방식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그것,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것인 그것은 완전성에 있어서의 신성 즉 이성, 로고스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신은 정신이거나 정신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신성이 사유하는 정신이고 그의 본질이 인식함에 있다면, 도대체 신성은 무엇을 인식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세계는 아니다. 세계라면 궁극적인 목적이 다시금 자신의 대상인 세계에 얽매이게 될 것이고 이로써 신성은 더 이상 최종적인 목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신성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성의 인식 대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신성 자신이라고 대답한다. 신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순수 사유이며, 일종의 자신의 본질에 대한 관상에 푹 빠져 있음이다. 이러한 통찰과 더불어 실제의 근원에 대한 그리스적 숙고는 그 절정에 도달한 셈이다.
이렇듯 세계에 온몸을 바친 냉철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근원을 갖는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실재를 인식하려고 한 그의 부단한 노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말을 남겼다. "내가 내 자신으로 다시 던져지면 질수록, 고독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신화를 사랑하게 된다." 세계를 충분히 관찰한 사람은 결국에는 신성에 대한 앎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과제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윤리학)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일 따름이니 인간적인 일을, 사멸할 따름이니 사멸할 것들을 생각하라는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자신을 불사 불멸한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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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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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넷째 묶음 - 성숙 인격
인문주의 심리학
자연과학적 입장에 서 있는 전통적 심리학은 인간을 외적 자극에 좌우되는 수동적인 생물체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의 자극들을 적절하게 통제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조절하고 변용 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인간이 어디까지나 생물체의 한 종류로서 자연 현상에 적용되는 법칙에 그대로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을 연구하는 방법에서도 자연 과학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과학적 방법을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 이렇게 전통적 심리학은 그 근본 입장이 과학적이며 결정론 위에서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심리학은 기계론적으로 인간 행동을 보며, 환경론적인 관점에서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대립하여 인문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행동의 주체 혹은 행동의 결정자로 보고, 인간은 어떤 사태에서나 자유롭게 어떤 행동이든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을 연구라는 데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 세계라 한다. 이 내면 세계 즉 의식을 통제하므로써 인간 행동이 통제될 수 있다 하여 이 의식 현상을 직접 기술하는 현상학적 방법이 중시되고 있다. 이들은 정신과학적 방법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비결정론의 입장에 서서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볼 때 로크와 라이프니쯔, 마르크스와 키에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과 사르트르, 그리고 스키너와 로저스(1902-, 미국의 인문주의 심리학자)의 대립으로 이어져 온 인간관의 기본적인 두 가지 경향이라 하겠다.
인문주의 심리학도 여러 갈래여서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먼저 인간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이해하는 방식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전통적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무수히 작은 부분 지식으로 나누어 취급하고, 이들을 합쳐서 전체 인간 행동을 설명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 심리학은 인간 행동의 이해라는 관점에 서서 인간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 즉 인간이 지니는 각자의 개별성과 이에 관한 개인적 의식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되는 객관적 자료를 합쳐 인간을 직접 경험하는 개체로서 기술하여 그 대인의 참뜻을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인간 연구의 과학적 방법인 설명적 방법에서 벗어나 보려는 노력은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인 딜타이(1833-1911)와 슈프랑거(1882-1963) 등이 시도한 바 있다. 이들은 자연과학적인 설명적 방법에 대항하여 이해적 방법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과학적 방법에서 쓰이는 법칙 기술적 방식을 버리고 개성 기술적 방식을 내세워 인과 관계의 파악보다는 의미성 파악에 중점을 둘 것을 강조한다. 이같은 이해적 방식을 적용시켜 연구하는 인문주의 심리학의 방법을 전통적 심리학의 방식과 대조시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인문주의 심리학자들은 표면화된 행동을 다룬다기보다는 내면적인 의식의 기술에 입각하여 의의 있게 연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야스퍼스는 실존 심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의식을 문제삼으면서 이것의 형식적 특징으로 활동 의식, 통일 의식, 자기독립 의식을 내세우고, 이러한 의식으로 자기가 존재함을 아는 존재로서의 여러 활동을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둘째, 자연과학에서는 학문의 기본 목표로 자연 현상의 설명, 예측, 통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인문주의 심리학은 그 기반이 결정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행동의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주말의 자동차 사고 건수나 한 대학 내에서의 학생들의 낙제율이 일정한 자료에 따라 꽤 정확하게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심리 치료 환자의 치유 가능성이나 한 학생의 장래 직업 선택의 방향 같은 거이 그리 쉽게 예측될 수 없다. 이런 문제는 결정론에 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문주의 심리학적 고려가 요구되는 분야라 하겠다. 셋째, 전통적 심리학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서 논리에 좇아 지적으로 행동하는 합리적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초합리적 존재로 보고 신념, 종교, 철학, 천명에 따라 몸바쳐 살아가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합리적 설명보다는 기술적 이해를 통해 개인이 지향하는 바를 의미성과 상징성에 입각하여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넷째, 전통적 심리학은 인간을 일반적으로 서로 비슷한 존재로 보고 인간 전체에 공통되는 일반 법칙을 찾아서 이것으로 인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문주의 심리학은 각자를 각기 특유한 존재로 보고 그들의 개별성과 특유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인문주의 심리학은 행동을 좌우하는 요인이 바로 이 개별성과 특수성이라고 본다. 따라서 전자는 인류 전체에 통하는 일반 법칙이 강조되는 분야라고 한다면, 후자는 오히려 각 개인의 개별성을 중시하여 개성 기술적 이해의 깊이에 중점을 두는 분야라 하겠다. 다섯째, 전통적 심리학은 인간을 실현성의 측면에서 다루는데 반해, 인문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가능성의 측면에서 다룬다. 이제까지 전통적 심리학과 인문주의 심리학의 전형적인 방법론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상당수의 인문주의 심리학자들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병용해서 적용시킨다. 즉, 이들은 인간의 이해와 더불어 인간의 객관적 파악을 결합시킨다. 인간을 전체로서 파악하되 객관적 파악 즉 인간 일반의 경향성을 토대로 인간 개개인의 개별성과 특유성을 고려하는 개별적 이해에 중점을 두는 접근 방식이 보다 더 타당한 연구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문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그의 전생활사를 통해 전체로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을 실존주의적으로 다룬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실존적 고려가 이 학문의 밑바닥을 이루는 철학적 기초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인간 실존의 경험을 가장 중요시하고, 또 이를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을 행동 통제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실존 경험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지향성의 현실적 경험이므로 그들은 인간의 자아가 그의 동기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다. 여기에서 지향성이란 지적이며 의지적인 경향으로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 자기를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지향성은 이렇듯 자신에게 의미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 자기를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지향성은 이렇듯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에 향하는 경향이다. 그러므로 의미성은 중시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의미란 정신의 의향이며 한 대상에 대하여 이를 인지하고 의욕을 갖는 집중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문주의 심리학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다루게 하는 것, 즉 자기 문제에 자신이 지향하는 것을 이미 치료된 상태로 간주한다.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에 지향하게 되면 이미 자기와 세계와의 관계는 변화된 것이라고 본다. 상대를 믿는 능력이 증진되면 자연히 자기를 믿게 되고, 이때 기억이 다소 소생되어 스스로의 문제를 똑바로 볼 수 있는 태도가 생긴다. 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욕이 생기고 세계에 대해 인간 전체로서 지향하는 자세를 보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지향성에서 자기의 동일성을 느끼고 자기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중심적 핵 역할을 자기로 보지만, 이 자기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에서 쓰고 있는 자아라는 개념과는 다른, 자기 의식의 핵심적 체제를 이루는 목표 지향적인 확고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인문주의 심리학에서 행동을 유발하는 요인은 환경 조건이나 자극이 아니고 또 본능도 요구도 아니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핵심적인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바에 따라 행동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현명하고 성실하게 선택해서 행동할 때 각자가 지니는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이렇게 현명하고 성실한 선택을 위해 인간은 스스로의 실존 가능성을 자각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 인간은 늘 스스로가 개방된 채로 있어야만 한다. 이 자기 개방은 진정한 자기 또는 순수한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데, 인문주의 심리학자들은 이것이 인격의 건전 상태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들이 자각하게 되는 가능성이란 무제한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누구에게나 다 같은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에게 다르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가능성도 다르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고려한 자신의 참된 가능성을 자각해야 현명한 선택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또 인간의 생활에서 생성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인간 실존은 어디까지나 정적인 상태가 아니고 항상 새로운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의 자기를 초월하여 보다 새롭고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실존을 찾는다. 현존재는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생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기의 의미를 찾는다. 상황이 어려워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세계 속의 자기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빈틈없이 달성해 나가는 것이 바로 생성이다. 인간이 이 생성을 거부하라 때, 스스로 어두워지고 폐쇄되어 이 때문에 강박증이나 망상 등은 생긴다. 여러 가지 이상 행동은 생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표시일 수도 있다.
전통적 심리학에서는 인간 행동의 궁극 목표를 동질성체로 보고, 모든 이론은 이에 맞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기 실현 또는 자기 완성을 인간 생활의 최종 목표로 본다. 호나이나 프롬이 그랬고, 골트슈타인(독일의 정신 의학자)이나 매슬로우도 그랬다. 로저스도 발달을 생활의 목표로 보았는데 이를 가능성이 실현되는 성장 과정이라고 했다. 샤롯과 버블러(정신 의학자)는 자기 실현을 "가치를 구현시키는 경험"이라고 했다. 한편 프랑클(독일의 정신의학자)은 인간 실존을 자기 초월이라고 했고, 인간의 목표는 자기가 그것을 위해 살고 있는 것에 투사시킨 개인적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개념은 프로이드를 비판하고 나선 정신의학자 융, 애들러, 랭크 등이 원래 쓰기 시작했는데, 그후 유기체 이론이나 현상적 이론에 계승되었고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건전한 인간이 참된 인간성을 발휘하는 근본적 요인이며, 자기 가능성의 올바른 실현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프롬은 이상적인 인간형을 생산적 성격이라고 이름 붙이고, 이러한 인간이란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하는 자라고 보았다. 이것은 대인 관계에서는 사랑으로, 행동이나 인지에서는 이성적으로, 생활에서는 창조적으로 살아 나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자기 실현에 관해 적극적이고도 확고한 이론적 기초를 닦은 사람은 매슬로우다. 그는 현대 사회의 체제와 문화가 잘못되어 있어 인간 각자의 자기 실현이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로서 기아나 갈증 같은 생리적 욕구를 지니며, 이것이 결핍되어 있으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충족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키면 다음에는 신체의 계속적인 안전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되며, 이 안전이 보장되면 소속 욕구에 몰두하여 가족, 친구, 애인과 같이 있으면서 서로 애정을 주고 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제대로 충족되면 또 자기 평가를 받으려는 욕구가 나타나 권력, 지위, 지배, 성공 등을 얻고자 한다. 이러한 생리적 욕구 내지 안전감, 소속감, 자기 평가, 욕구가 순차적으로 모두 충족된 후에야 본격적으로 자기 실현 욕구가 나타난다고 매슬로우는 보았다. 스스로 타고난 자질과 역량의 가능성을 충분히 사용 개발하는 것을 자기 완성이며,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는 사람이 건전하고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다. 이러한 자기 실현 욕구는 자연과학적 법칙이 적용되는 대상이 아니며 예측 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기 실현 욕구에 좌우되어 사는 인간은 어떠한 외적 자극이나 내적 자극이 작용하든 그때 그때의 특유한 상황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은 일정한 자극에 대한 일정한 반응으로 응하기 보다는 그때 그때의 상황과 자신의 가능성을 깊이 고려하여 선택적으로 행동한다. 이 자기 실현의 욕구는 어떤 결핍 상태를 메꾸기 위하나 것이라기보다 모든 결핍을 충족시켰어도 스스로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보려는 것이므로 자기 표현적 경향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기 성장의 동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자기 실현은 성격 표현이며 인간으로서의 발전과 성숙을 밀고 나가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인문주의 심리학은 이제까지의 심리학 특히 정신분석학이 병적인 인간의 연구에 너무 치우쳐 있었으므로 이제부터는 건전한 사람의 행동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올포트, 매슬로우, 프롬, 로저스 등이 이런 분야의 연구를 많이 하였다. 건전 인격 또는 성숙 인격의 특성에 관한 이들의 주장을 개괄해 보기로 하자.
첫째, 건전 인격을 지닌 사람의 특징은 자기의 독자성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기의 천분을 깨닫고 주체성과 자기 책임을 자각하며 이를 성취해 나가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라고 본다. 앞서 지적한 자기 실현을 밀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프롬은 자신이 자기 행동의 주체자임을 깨닫고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책임 있는 행동으로 자기 존재에 의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건전 인격의 참모습이라고 보았다. 리즈만은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 관점에서 살되 의미 있는 목표를 지니고 이를 위해 사는 존재로서 합리적이고 비강박적이며 비권위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을 자주적 인간이라고 해 이를 건전한 사람의 이상형으로 보았다. 둘째, 건전 인격의 특징은 객관적인 지력이다. 이 경우 자기나 타인 또는 현실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편견이나 집착이 없이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현실 파악이나 처리가 능률적이고 정확하며 판단력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자기 객관화와 현실적 파악은 그 기초가 정서적 안정성에 있는데, 이는 마음이 담담하고 지나친 흥분이나 충격이 없는 상태로서 이성적이고 애정적인 상태요 자기 수용적인 태도에서 연유된다. 셋째, 건전 인격의 특징은 대인 관계에서의 따뜻한 사랑과 이해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참된 사랑이란 상대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며 상대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에 더해 상대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알고 이들을 인정하여 상대를 받아들이는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넷째, 건전 인격의 특징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이는 확고하고도 타당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인간 생활을 이끌어 주며 우주 속에 생기는 여러 현상을 인간과의 관련성에서 그 의미성과 방향성을 설명해 주는 통괄적인 체계를 지니는 것이 건전한 인간에게 꼭 있어야 한다. 다섯째, 건전 인격의 특징은 매슬로우가 주장하고 있는 문제 중심성이다. 자기 자신의 평가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열중하는 것을 말한다. 매슬로우는 "자아가 가장 강한 사람이 자기 완성인인데, 이들은 쉽게 자기를 잃고 자기를 초월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문제 중심적이어서 사물을 인지하고 창조하는 일에 곧잘 열중하며 그 일을 철저히 해낸다. 또 자기 완성인은 의식이 통일되어 있고 순수한 편이다. 자기를 늘 의식하면서 이기적으로 움직이거나 욕구 충족을 위해 활동한다기보다는 외계의 일에 열중하는 편이라고 한다. 대체로 욕구 충족에 결핍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 문제 중심성이 적고 자의식이 많으며, 자기 실현 욕구가 강한 사람은 문제 중심적이 되기 쉽고 자의식이 적어 객관적 세계를 다루기가 쉽다.
"197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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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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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고장난 오르간
어떤 왕의 거대한 궁정에 오르간이 하나 있었다. 왕은 그것을 매우 아꼈지만 어디엔가 고장이 있었다. 그 오르간은 매우 독특한 것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수리할 줄 몰랐고 아무도 그와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이 왕이 아주 어릴 적, 그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그 오르간 소리를 들었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고장이 나버렸다. 그러나 왕은 그 오르간을 몹시 아꼈으므로 자기의 방 안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곁에서만 봐도 아름다웠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많은 기술자가 불려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많은 노력을 했으나 점점 더 나빠질 뿐이었다. 그 오르간은 점점 더 망가졌고 그 왕은 희망을 잃었다. 그 오르간은 고쳐질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늙은 거지가 나타나서 문지기에게 말했다.
"오르간이 고장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 문지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러 나라에서 뛰어난 기술자와 음악가들이 왔었으나 어디가 고장인지를 몰랐고, 그 오르간이 너무 복잡해서 그것이 어떤 형태의 오르간이며 어떤 종류의 음악이 연주될 수 있는지조차도 몰랐었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웃음을 터뜨리려다 그 거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거지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믿을 만한 듯이 보였다. 거지는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비록 거지일 망정 그의 얼굴은 당당해 보였다. 그 문지기의 마음은 말하고 있었다.
"아마 또 한 번의 시간 낭비가 될 거야." 그러나 그의 가슴은 말했다. "이 사람은 매우 자신에 차 있는 듯한데 한번 고쳐 보게 한들 또 어떻겠나?" 그래서 그는 그 거지를 왕에게 데리고 갔다. 거지를 보자 왕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많은 기술자가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대는 미쳤음에 틀림없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그 거지가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 오르간은 벌써 완전히 고장이 나 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고장낼 수도 없을 것이니 폐하께서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신들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왕은 생각했다. '그의 말이 옳다. 더 이상 고장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승낙했다. "좋아, 한번 고쳐 보게." 여러 날 동안 그 거지는 오르간 뒤에서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한밤중에 그는 오르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궁전 전체가 미지의 멜로디와 매우 신성한 뭔가로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달려왔고 왕도 침실에서 나와서 말했다.
"그대가 해냈구나. 그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그대는 기적을 행했네!" 그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아버님 때에 제가 이 오르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 그대가 준비되어 있다면 더 이상의 피해가 그대에게 가해질 수는 없다. 그대는 이미 피해를 받고 있으며 나는 더 이상 그대를 해칠 수가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눈을 바라보고 나의 목소리를 느껴 보라. 나에게 기회를 달라. 그것은 어렵지 않다. 일단 그대가 무한속으로 녹아들게 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나온 그 근원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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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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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선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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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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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用厚生(이용후생) 利(이로울 리) 用(쓸 용) 厚(투터울 후) 生(날 생)
상서(尙書) 우서(虞書)의 대우모(大禹謨)에는 우(禹)와 순(舜)임금과 익(益) 세 사람의 정치에 관한 대담이 기록되어 있다.
우는 순임금에게 말하길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십시오. 덕으로만 옳은 정치를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보양(保養)하는데 있으니, 물·불·쇠·나무·흙 및 곡식들을 잘 다스리시고, 또 덕을 바로 잡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터이 함을 잘 조화시키십시오(正德利用厚生, 惟和) 하고 하였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7년조에도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의 여섯가지가 나오는 것을 육부(六府)라 하고, 백성의 덕을 바르게 하는 정덕(正德)과, 백성들이 쓰고 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이용(利用)과,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후생(厚生), 이것을 삼사라 이릅니다(正德利用厚生, 謂之三事) 라는 대목이 보인다.
利用厚生 이란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 라는 뜻이며, 정치의 핵심을 집약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판에는 利用厚生 은 커녕 국민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삶과 지위를 풍족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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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중세의 고문도구로 보였던 지퍼
고대에서는 지퍼에 해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지퍼가 근대에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지퍼는 끈질기고 오랜 기술 개발 끝에 탄생했는데, 이 아이디어가 시장에 나온 뒤부터 현실화 될 때까지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또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지퍼는 처음에 단추와 경쟁하는 옷의 고정 도구로 연구된 것이 아니라, 목이 긴 부츠의 옆을 닫는 도구로서 1890년대에 구두의 긴 구두끈을 대신하여 등장했다. 1893년 8월 29일 시카고에 살던 기계기사 위트컴 잿슨은 '클래스프 로커'(열쇠 후크식 지퍼)라는 이름으로 지퍼 특허를 땄다. 당시 특허국의 파일을 보면 잿슨이 발명한 지퍼와 조금이라도 닮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두 개의 클래스프 로커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잿슨 자신의 부츠에 달려 있었고 또 하나는 잿슨의 동료인 루이스 워커의 부츠에 달려 있었다. 잿슨은 원동기나 철도의 브레이크 등에서 몇 개의 특허를 따낸 실적이 있는 발명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클래스프 로커에는 아무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후크(hook 갈고리)와 구멍이 직선으로 이어진, 언뜻 보기에 섬뜩한 이 장치는 시간을 절약하는 근대적인 도구라기보다는 중세의 고문 도구처럼 보였던 것이다.
잿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클래스프 로커를 1893년의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다. 하지만 이 회장에 몰려든 2천 1백만 명의 관람객들은 세계 최초의 전기식 대관람차와 밸리 댄서, 리틀 이집트가 자랑하는 '쿠티 춤'(허리를 비틀며 추는 춤)으로 몰렸고 세계 최초의 지퍼에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잿슨과 워커가 경영하는 유니버설 파스너 사는 미국 체신부로부터 지퍼가 달린 우편 배낭 20개를 주문 받았다. 하지만 지퍼가 너무 자주 움직이지 않게 되어 우편 배낭은 폐기처분 당했다. 위트컴 잿슨은 이 열쇠 후크식 지퍼를 계속 개량했으나, 이 장치를 완전한 것으로 만든 발명가는 스웨덴계 미국인 기술자 기데온 샌드백이었다. 샌드백은 1913년에 잿슨의 지퍼보다 좀더 작고 가볍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의 지퍼이다. 샌드백이 만든 지퍼를 최초로 주문한 것은 미 육군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쓰는 의료품으로 여러 가지 장비에 이용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은 부츠나 주머니에 달린 벨트, 담배 주머니 등에 지퍼를 사용했다. 일반인들 옷에 지퍼가 붙여진 것은 대략 1920년 대의 일이다.
지퍼가 처음부터 특별한 인기를 끈 것은 아니다. 금속 지퍼는 녹이 나기 쉬웠으므로 세탁할 때 떼어 놓았다가 마르면 또다시 붙이는 수고를 해야 했다. 거기다가 지퍼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단추를 단춧구멍에 끼운다는 사실처럼 손쉬운 것이 아니어서, 지퍼를 잠그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옷에 지퍼를 달아 놓고도 그 장치의 사용 방법이나 손질법을 가르쳐 주는 안내서는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1923년에 B. F. 굿리치 사는 이 새로운 '후크가 없는 파스너(fastener)'를 붙인, 고무로 만든 오버 슈즈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부츠의 파스너를 닫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에서 굿리치 자신이 의성어인 '지퍼'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굿리치는 신제품에 '지퍼 부츠'라는 이름을 붙였고, 나중에 터론 사라고 이름을 바꾼 부클레스 파스너 사에 15만 개의 지퍼를 발주했다. '지퍼'라는 독특한 이름과 함께 제품의 신뢰성도 커졌고 녹에도 강해졌으므로 지퍼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1920년대에 지퍼는 주머니 덮개에 숨겨진 채로 아주 당연한 옷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35년에는 복식 액세서리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이 해에 "뉴요커"지는 유명한 디자이너인 엘자 스카폴레리가 내놓은 봄옷 컬렉션을 "지퍼가 잔뜩 붙었다"고 소개했다. 스카폴레리는 색을 넣은 지퍼를 사용한 패션 디자이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탄생하고 또다시 받아들여지지 않은 긴 세월을 거친 뒤에 지퍼는 비닐 필통에서 고성능 우주복에까지 모든 것에 이용되는 길을 찾아냈다. 이 아이디어의 진정한 발명자였던 위트컴 잿슨은 불쌍하게도 자신의 발명품이 실용화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며 19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복식업계에서 지퍼의 안정된 지위를 뒤흔드는 발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화과 잡초의 작고 둥근 가시투성이의 덧껍데기를 본 한 남자가 그것을 합성섬유로 만들어봄으로써 매직 테이프가 탄생한다. 1948년 알프스에서 산을 오르고 있던 스위스 등산가인 조지드 메스트랄은 바지나 양말에 질기게 달라붙는 덧껍데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덧껍데기를 뜯어서 버리는 일을 되풀이하던 그는, 비록 지퍼를 대신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파스너를 덧껍데기 같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매직 테이프는 두 장의 가늘고 긴 나일론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한쪽에는 무수한 작은 갈고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작은 고리가 있다. 두 장을 겹치면 갈고리가 고리에 걸리며 달라붙어 떨어지기 어렵게 된다. 이 단순명쾌한 아이디어도 완성되기까지 10년의 노력이 들었다. 드 메스트랄이 상담을 한 섬유업자들은 인공 덧껍데기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웃으며 응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명 프랑스 리용에 있는 섬유 공장의 섬유공이, 특별히 만든 작은 베틀을 사용하여 한쪽에는 작은 갈고리가 있고 또 한쪽에는 작은 고리가 있는 두 장의 면조각을 간신히 만들어 주었다. 눌러붙이면 두 장은 딱 붙어서 일부러 뗄 때까지 붙어 있었다. 드 메스트랄은 이 시작품에 '로킹 테이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직조공의 손작업에 따를 만큼 미세한 작업을 하는 기계 장치를 개발하는 데는 기술적인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여러 번 개폐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면 소재에 붙인 갈고리와 고리가 못쓰게 되자 좀더 튼튼한 나일론 천으로 대체했다. 더 나아가 드 메스트랄이, 보들보들한 나일론 실을 적외선 밑에서 짜면 딱딱해지고 거의 망가지지 않는 갈고리와 고리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커다란 돌파구가 열렸다.
1950년대 중반에는 첫 나일론제 로킹 테이프가 현실화되어 있었다. 상표를 결정할 때도 드 메스트랄은 단순히 울림이 좋다는 것 때문에 벨벳의 '벨'을 땄고 프랑스어로 '갈고리'의 파생어인 '크로셰'에서 '크로'를 따서 '벨크로'로 붙였다. 1950년대 말에는 기계 직조기에서 연간 6천만 야드의 벨크로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 나일론제 파스너는 드 메스트랄이 바라던 것처럼 지퍼를 대신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퍼와 마찬가지로 다방면으로 사용되었다. 인공 심장의 심방 접합, 우주의 무중력 공간에서도 도구류의 고정, 그리고 드레스나 수영복이나 기저귀에도 사용되고 있다. 조지 드 메스트랄이 한때 꿈꾸었던 것만큼 무한하지는 않지만 매직 테이프의 용도는 끝이 없을 정도로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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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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