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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85호
2010. 8. 25 (음7. 16)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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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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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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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문학상》신인상 모집 공고
역량 있는 신인을 찾습니다 우리詩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다음과 같이《우리詩문학상》신인상을 공모합니다. 감동 깊은 작품으로 시문학의 미래를 열어갈 참신하고 역량 있는 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응모분야 시 10편 이상 / 시평 1편 (70매 내외) ■ 응모마감 매년 4월 30일 / 9월 30일 (년 2회 공모) ■ 보내실 곳 142-892 서울시 강북구 샘마을길 46 (우이동 124-17) 우리시회 ■ 당선발표 매년 월간《우리詩》8월호 / 12월호 지면에 발표 ■ 심사방법 및 특전 - 심사위원은 본회에서 위촉하고, 당선작 발표와 함께 발표합니다. - 당선작은《우리詩》에 게재하고, 상패와 고료 100만원을 지급합니다. - 당선자는 기성시인으로 인정하며, 창작활동을 적극 지원합니다. - 당선과 동시에 우리시진흥회 입회자격을 드립니다. ■ 시상 - 상반기 : 여름자연학교 행사장에서 시상 / - 하반기 : 송년행사장에서 시상 ■ 유의사항 - 원고 표지에 <우리시문학상 응모작품>이라 표기하고 성명, 나이, 집주소, 이메일, 연락처를 명기하기 바랍니다. - 원고는 우편으로만 접수합니다.(이메일, 팩스 불가) - 응모작품은 일체 반환하지 않습니다. - 모방 표절로 밝혀질 경우 당선을 취소하고 상금은 전액 회수합니다. - 문의는 (02)997-4293, 이메일 urisi21@naver.com 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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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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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은 지상으로 내려오는 사다리이고, 동양철학은 천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다. - 철학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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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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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했다. 하느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해 그 일을 막았다. 이후 온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 11장 1절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라고 했듯이, 바벨탑을 쌓기 전에는 세상 모든 사람의 언어가 하나였다.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인류는 바벨탑을 쌓은 죗값으로 오늘날에 이르러 외국어 공부라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직장인 연봉 높을수록 어학 점수도 높다.” 중앙 일간지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어학 점수’는 ‘외국어 점수’를 말한다. 예외는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영어 점수’를 말한다. ‘어학’이라는 말에 담긴 뜻은 자못 크다. 사전은 ‘어학’을 ‘어떤 나라의 언어, 특히 문법을 연구하는 학문’ 또는 ‘언어학’과 같은 말로 풀이해 놓았다. 여기에 “외국어를 연구하거나 습득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풀이가 또 하나 달려 있다. ‘어학 점수’라는 말은 이 뜻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어학’의 대중적 쓰임은 그냥 ‘외국어’다. 사전이 ‘외국어’라는 뜻의 ‘어학’을 받아들이면서 너무 거창한 해석을 달고 있지 않나 싶다.
영어 학습 열풍에 온 나라가 휩싸여 있다. 조기 유학도 영어 습득이 일차 목적이다. 그러다 보니 영어가 어학이라는 격조 높은 낱말로 표현되고 있다. 영어가 과연 어학일 수 있을지?
우재욱/시인
노닐다
한가하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놀다. ‘노닐다’는 ‘놀다’와 ‘닐다’의 합성어다. ‘놀-’의 ‘ㄹ’은 탈락했다. ‘ㄴ’ 앞에서 ‘ㄹ’은 흔히 탈락한다. ‘살다/사니, 줄다/주니.’ ‘닐다’는 ‘가다’라는 뜻의 옛말이다. 옛말에서는 ‘닐다’와 ‘니다’가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닐다’는 ‘거닐다’와 ‘나닐다’에서도 보인다. ‘니다’는 ‘다니다’에 형태가 남아 있다.
딴따라
‘딴따라’는 사람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 낸 말 의성어(擬聲語)다. 무엇의 소리를 흉내 냈을까? 우리말의 의성어에서 온 것 같지만 영어에서 왔다. 나팔의 소리를 뜻하는 영어 ‘탠타러(tantara)’에서 왔다. 이전엔 연예인을 ‘딴따라’라고 얕잡아 부르곤 했다. ‘딴따라’가 나팔 부는 소리 같아서 연예인의 행동을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거렁뱅이
한동안 취업난을 풍자하는 표현으로 '이태백'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다. 이젠 그것도 모자라 이구백(이십대의 90%가 백수), 십장생(십대도 장차 백수를 생각해야 한다)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단다. 대학을 졸업한 뒤 눈치가 보여 용돈도 타 쓸 수 없고, 취업 준비로 아르바이트하기도 힘든 이십대들은 그야말로 '거렁뱅이' 신세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이렇게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고 남에게 빌어먹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흔히 '거렁뱅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러나 '거렁뱅이'는 표준어가 아니다. 걸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은 '비렁뱅이'다.
'-뱅이'는 다른 말 뒤에 붙어 '그것을 특성으로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로 쓰이며, '가난뱅이/게으름뱅이/안달뱅이/앉은뱅이/주정뱅이'와 같이 사용된다. 비렁뱅이는 '빌다'와 '뱅이'가 결합한 것이다. '배랑뱅이'도'비렁뱅이'와 같은 의미다. 강원.경상도 방언으로는 '거렁배이'라고도 한다. '비렁뱅이같이 힘겨운 생활'이 앞날의 성공을 더 값지게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이태백' 아자! 아자!
냄새, 내음
남쪽에선/ 과수원의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의 시 '가을의 향기')
가을비가 내리더니 잎들은 더욱 붉은 기운을 머금고, 제법 서늘해진 공기에서는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가을 냄새' '가을 내음' 어느 것이 더 맛이 날까. 시의 '노을이 타는 내음'처럼 '가을 내음'이 훨씬 더 맛깔스럽다. '내음'은 '바다 내음' '흙 내음' '시골 내음' '고향 내음' '사람 내음' '봄 내음' '꽃 내음' 등과 같이 시적이고 멋스러운 표현으로 두루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규정상 '내음'은 경상도 방언으로,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을 냄새' '바다 냄새' '흙 냄새' '시골 냄새'라고 하기에는 영 내키지 않는다. '냄새'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현상 이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여기에서 규정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발행한다. '나래→날개' '떨구다→떨어뜨리다'도 마찬가지다. 이럴 땐 우리 맞춤법 규정이 '표준어=맞는 말, 비표준어=틀린 말'이라는 이분법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야속하기만 하다. 시에선 몰라도 일반 글에서는 '내음'을 '냄새'로 쓰는 수밖에 없다.
은둔, 은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곤충들은 다양한 방법을 이용한다. 유리창나비의 애벌레는 입에서 토해 낸 실로 나뭇잎을 엮어 그 안에서 지낸다. 나방은 새들이 활동하는 낮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움직인다. 이같이 몸을 숨기는 일을 '은신(隱身)'이라 하는데 "아프간과 파키스탄 접경지대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사마 빈라덴의 존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처럼 쓰인다. 비슷한 뜻으로 '은둔'이란 말도 많이 사용한다. '은둔(隱遁)'은 세상일을 피해 숨는 것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창설 멤버였던 시드 배릿은 1968년 팀 탈퇴 이후 30년간 은둔 생활을 해 왔다"와 같이 쓴다. 둘 다 숨어 지내는 일을 뜻한다는 점에선 의미가 비슷하다. 그러나 '은신'은 단순히 몸을 숨기는 것이고 '은둔'은 세상사를 피해 삶을 숨기는 것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경찰은 범인의 고향 등 그가 은둔할 만한 곳을 모두 뒤졌다"라고 하면 어색하다. 수사망에 걸리지 않도록 피신해 있는 것이므로 '은신'으로 써야 자연스럽다. "담양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양산보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은신한 곳이다"도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사는 것이므로 '은둔'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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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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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태양을 채집한다 - 김경주
1 허공사이로 둥근 피안이 놓여지고 돋보기 알에선 오래 전 묻어있던 햇살 냄새가 난다 돋보기는 주술이다 물 속처럼 고요한 세계 속에서 햇살은 넘칠 듯 넘칠 듯 출렁거린다 어느 행성으로 가던 빛을 나는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한 생을 건너 온 맑은 시간들 종이 위로 차르르 쏟아진다 가만히 보면 행성의 마른 돌가루 같기도 한 이승의 찬 공기가 그 뜨거운 시간들에 닿아 치지직 탄다
2 생은 아련한 굴절이다 서랍 속이 복잡하던 유년, 채집망엔 수많은 시간들을 날아 온 곤충들이 날개에 붙은 보송보송한 햇살들을 털곤 했다 적금을 소매치기 당하고 낮술에 취해 돌아온 어머니의 속옷을 살 속에 넣어주는 아버지의 눈빛은 느티나무보다 젊었다 고통은 몇 개의 꽁트 같았다 나는 그 밤 우는 어머니에게 가장 웃기게 생긴 곤충 한 마리 보여주었던가 아침이면 차갑게 식은 곤충의 몸에서 부스스 떨어져 나오던 햇볕들, 그 해 겨울 우리도 지상의 계절 위에서 잠시 떨던 몇 마리 뜨거운 시간이었을까 통장에 남은 이파리들을 세어 보고 새벽 대중 목욕탕 바닥에 나란히 누워 어머니와 나는 뽀얀 수증기 한 방울씩 이마로 뚝뚝 맞으며 오래 말.없.었.다.
3 고개를 들면 공터의 생수 같은 꽃잎들 소실점 잃고 흔들거린다 멀리 송전탑이 나르는 싱싱한 전기들이 순하게 엎드린 마을의 창문마다 불씨 한 장 씩 부치고 있다 어머니 치약처럼 방안에 풀어져 타는 노을을 보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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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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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 김광수
한 삼동 지하도 계단 손 벌리고 수그린 어멈
휘모는 눈바람에 모정마저 앗겼을까.
차디 찬 시멘 바닥에 저 어린 걸 뉘어 놓다니.
자장가로 들리느냐 무심한 발자국 소리
누더기 강보에 싸여 잠결 방싯 웃는 아가야.
네 꿈속 어느 먼 이역엔 민들레가 피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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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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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 어효선
"여보셔요! 여보셔요! 그만 눈을 뜨셔요." 봄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쥐고 흔든다,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셔요! 여보셔요! 그만 잠을 깨셔요." 봄바람이 개나리 가지를 잡고 흔든다, 어서 노란 꽃을 피우라고.
"여보셔요! 여보셔요! 내 말 좀 들으셔요." 봄바람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낼 모레면 개나리가 필 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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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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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장석주 - 잃어버린 한 마리의 '새'에 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 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의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당신을 만나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 시 "사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전문
지난 겨울 뜰 한켠에서 말없다가 기지개 켜는 나무들, 나하고 끝끝내 무관하던 암벽들, 물결에 씻기던 백년의 뿌리들, 좀벌레들, 그리고 나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출렁거릴 저 바다의 잔 물결들과, 쇠냄새 나는 수돗물과, 땅에 길게 드리워지던 짐승의 그림자들과, 달빛들, 달빛아래 염소들, 무성한 잡초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이름만큼 많은 저녁별들. 나의 피들은 그것들 모두를 기억한다. 그것들 모두와 함께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첫사랑'이란 미숙한 열정 속에 들려 한없는 혼란과 방황으로 보냈던 날들을. 그것들을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아직도 안고 있는 내 몸의 혈관의 피들은 불온하다. 사랑은 마음을 고요하게 비워놓고 난 다음에 이는 정열 속에 있다. 증오나 질투나 분노 속에는 괴로움과 흔들림과 혼란스러움만 깃들 뿐이다. 거기에는 일체의 욕망도, 의심도, 괴로움도, 의무도, 권리도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온 마음과, 온몸과, 온 심장과, 온 영혼을 다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 내게 더 이상 바칠것이 없을 때까지 내 전존재를 그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죽음과 같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우리 마음속에, 심장 속에, 몸 속에, 영혼 속에 찾아드는 것은 고요한 평화와 분별과 사려가 깃든 정열과 이 세상 모든 고귀한 것들의 있음이 일으키는 행복한 충일이다. 그러나, 첫사랑이란 그런 완전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사랑이다. '첫사랑'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의 모든 순간에 걸쳐 경험하는 사랑은 전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말한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고 첫사랑이란 그렇게 꿈꾸는 '다른 땅'이다. 그것은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에 진절머리를 치며 도망가는 지중해의 기슭, 빛의 사막이다. 저문 거리의 인파 속에 파묻혀 걷다가 뒤돌아보면 역광을 받고 서 있는 빌딩들의 기하학적인 선으로 분할된 하늘에 황혼이 암암히 걸려 있을 때 우리는 이유 없이 돌연한 슬픔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경영에 불가피하게 끼어들어 있는 어리석음, 시행착오, 뼈아픈 과오 등이 선명하게 환기되면서 일어나는 날카로운 회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사랑이란 어리석음, 시행착오, 뼈아픈 과오이다. 그런 것들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첫사랑이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의 결과와 그것이 생의 표면에 남기는 흠집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그 무엇이다. 첫사랑이란 실패에 의해서만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입증하는 비극의 그 무엇이다. 나는 부쩍 '새'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간밤의 꿈에서는 나는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에 떨어져 헐떡거리는 '새'를 보았다. '새'는 오래된 이끼 냄새가 나는 그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에서 몇번이나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시도했으나, 이내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곤 했다.
아주 오래 전 홀연히 내 곁에 날아왔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새'에 대한 꿈을 꾸고 난 이튿날은 언제나 가슴이 텅 빈것만 같은 공허감에 오래 시달리곤 했다. 베갯잇은 간밤에 흘린 땀으로 아직 축축하고, 거기 떨어져 있는 몇 올의 덧없는 머리카락을 집어올리며 나는 '새'가 떠나버리고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가 버렸는가 가늠해 보며 몸을 떨곤 했다. 내가 '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새'를 만나기 이전에 나는 이미 어떤 이성에 대하여도 성적 배타성을 굳게 유지해야 할 결혼관계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새'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사실을 서둘러 말해 버렸고, 그 순간 나는 '새'의 얼굴에 스쳐가던 실망과 안타까움의 그림자를 보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는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렸다. 그 무렵 나는 숨쉬기 조차 힘들정도로 지쳐 있었고, 내게 홀연히 날아왔던 '새'는 위안과 희망, 그리고 구원이었다. 나는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미소하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참담하게 깨달았다. 나는 한 인간에게 그때처럼 무목적적으로 빠져들었던 적이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결코 없었다. 한 인간에 대한 그토록의 몰입과 탐닉을 통해 나는 인간의 애증의 그 끝간 데 없음에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고, 그것이 찰나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을 드나들게 하는 열락임을 비로소 알았다. '새'와 나의 시간들 속에는 일몰에 황량하고 장엄한 나신을 드러내는 서해 바다와, 교외선들과, 서울 근교의 유원지들과, 늦가을 산사들이 있다. 그리고 밤여행, 독주들, 서로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열망, 머리를 짓 찧는 고통, 불면, 편지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거나 소진되지 않은 비속한 정욕, 도덕적 갈등, 몇 번의 인위적인 쓰라린 헤어짐,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이 강했던 운명의 인력, 눈물, 돌연한 파국들이 남아 있다. '새'는 나로부터 사라져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지만, 나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년 동안을 혼자 지냈다. 어느 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몸으로 빠져나와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혼자 밥 먹고, 일하러 회사에 나가고, 퇴근해 돌아오는 길에 몇 병의 맥주를 사들고 들어와 늦도록 마시다가 취해 잠드는 단조로운 생활이 몇 년이나 이어졌다. 그때 나는 목젖을 막 통과하는 혼자 먹는 저녁밥의 아픔에 자주 목이 메이곤 했다. 그 동안 나는 낡은 수동타자기를 두드리며 많은 글들을 썼고, 내가 하는 일에 마음을 붙잡아매려고 무진 애를 썼고, '새'에 대해서는 간간이 아주 조금씩만 했다. '새'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고, 나는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떤 날은 '새'와 내가 가끔 들렀던 신촌 로터리에 있는 고전음악이 나오는 레스토랑에 몇 시간을 멍청하게 혼자 앉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새'는 "여기 정신병원이야"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도 장난끼가 많았던 '새'가 나를 놀려주기 위해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새'가 어떻게 해서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이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전화를 끊고도 나는 오래 힘들어 했다. 나는 '새'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쳤다. 나는 '새'의 인생이 저토록 망가지게 방치해 두었다. '새'를 생각하는 동안 참담한 자괴감이 내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리고 세월은 또 흘러갔다. 나는 말라버린 우물 밑바닥에 갇혀 언제까지나 날개를 퍼덕거리는 꿈 속의 '새'를 생각한다. '새'는 이미 내 손길이 미치치 않는 저 낯선 세상의 복판으로 흘러가버렸다. '새'는 세상은 커다랗고 정다운 여인숙이고, 인생은 하룻밤 짧은 꿈이라고 말하며, 아득히 흘러간 날들처럼 웃고 있다. 나는 나를 구속하는 일체의 인습과 이데올로기, 내게 주어진 현실의 조건들과 싸우며 살아왔다. 내가 그 싸움들을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하려고만 했다면 내 삶에 어떤 흠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그것들을 피동적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하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싸워 왔다. 그 싸움은 내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이기보다는, 내자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내 삶의 많은 흠들은 그 싸움의 생생한 흔적들이다. 나는 이제 단단하게 아문 그 상처의 자리에 나의 눈물과 욕망을 비벼넣으며 어루만진다. 가끔 어둠에 침잠하는 내 영혼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삶을 살 수 없는가?' 나의 인격, 주체, 정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딱딱하게 엄습할 때, 사방을 둘러봐도 뚫고 나갈 길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자기혐오와 우울함에 빠져들고 나의 이성은 마비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 마비된 이성은 가까스로 힘을 회복하고 다시 내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나됨을 가능케하고 뒷받침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씩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는 막연하게 자기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믿고 행동하다가 어느 계기에 직면해 낮은 문설주 따위에 호되게 부딪쳐 정신이 막막해 지는 것과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모순으로 가득찬 자아에 대한 생소함, 삶의 주체인 자기자신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자기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뛰어넘을 길 없는 막막함으로 형언할 길 없는 고통과 절망의 바닥에 떨어져버리는 경험 말이다.
첫사랑이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운명이다. 그것은 생의 통과의례, 한 번은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 무엇이다. 내 의지와 선택의 바깥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쉽게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나'라는 티끌처럼 작은 실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역사, 더 크게는 자연,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성과 힘, 알 수 없는 그 어떤 필연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첫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 나는 어느덧 첫사랑을 관조해야만 하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내겐 더 이상 세상의 규범들을 바꾸고자 하는 잉여의 힘들을 다 탕진한, 저 뻘밭처럼 황량하게 비어 있는 내면만 있을 뿐이다. 그 황량한 뻘밭에는 어떤 '새'도 날지 않는다.
- 장석주 :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평론이 동시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청하출판사를 설립하여 단행본들과 계간 '현대시세계', '현대예술비평' 등을 펴냈다. 시집으로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11월', '절망에 관하여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세기말의 글쓰기', '문학의 죽음', '문학 인공정원' 등과 장편소설로 '세도나 가는 길' 등이 있다. 지금은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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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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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합리화
합리화란 가식적인 추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이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생에 있어서 그대는 매일같이 합리화를 한다. 그대는 화가 난 채 귀가한다. 상사가 자기 비위를 거슬리게 했다해서 당장 그 자리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할 수밖에 없다. 상사가 아무리 야단을 쳐대도 그대는 화를 낼 수 없다. 그 자리에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생크림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대를 곤경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어떤 구실을 찾기 시작한다. 때마침 그대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장난치며 떠들어댄다. 그때 그대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얘들아 그만해. 조용히 하란 말이다. 이거 원 단 한순간이라도 마음 편할 때가 없잖아.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집이라고 들어와봤자 시장바닥처럼 이렇게 난장판이니. 이거야 원..."
이제 그대는 마치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난 것처럼 합리화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항상 그렇게 행동한다. 다만 그대가 오늘 화가 났기 때문에 그렇게 합리화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아내가 준비한 저녁식사에 대해서도 불만을 터뜨린다. 사실 음식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다만 그대는 뭔가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음식이 잘 요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대는 아내에게 화를 내고 자신을 합리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진짜 이유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진실로 깨어나기를 원한다면, 모든 합리화를 떨쳐 버려라. 이러한 합리화는 모두 눈속임이다. 그대는 이 합리화 때문에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위장하기 위해 무수한 방법들을 생각해 낸다. 이러한 가식은 제거되어야 한다. 만일 화가 나면 그것이 분노임을 자신에게 분명히 인식시켜라. 그리고 아내에게 "여보, 난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소.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노를 삭여버려야만 할 것 같으니 제발 뭘 좀 잘못해 줘요."라고 말하라. 그 편이 훨씬 더 솔직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소리쳐라! 방바닥이 꺼지도록 뛰어. 뭔가를 좀 깨뜨려라. 아빠는 지금 화가 나서 너희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구나. 아빠를 도와주렴." 하고 말하라. 이것이 훨씬 더 의식적인 행동이리라.
그대가 의식적으로 살기 시작한다면, 자신이 그 동안에 삶에 있어서 합리화를 얼마나 많이 해 왔는가를 차차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합리화 이외에는 아무것도한 것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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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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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고통 없는 행복
인생에서 고통(불행)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을 느낄 때 더욱더 강렬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준다. 한결같은 삶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든 지속되는 것은 고통이다. 단 것이 좋다고 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 것을 먹는 것은 쓴 것을 먹는 것만큼이나 고통이고, 비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좋다고 해서 궂은 날 없이 맑은 날만 지속되는 것은 비오는 날만큼이나 고통이며, 노는 것이 좋다고 해서 일하지 않고 계속해서 놀기만 하는 것도 일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이다. 행복을 행복이게 하는 것은 고통이다. 쓴맛은 단맛을 더욱더 달콤하게 느끼도록 해 주고, 궂은 날은 맑은 날을 더욱더 산뜻하게 느끼도록 해 주며, 일은 휴식을 더욱더 즐겁게 느끼도록 해주듯이, 고통은 행복을 그만큼 값지고 소중하게 한다. 갈증 끝에 마시는 물맛이 꿀맛이듯이 우여곡절 끝에 얻어진 행복이 정말로 달콤한 것이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불행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고통(불행)을 몸소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행하네, 살기 싫네 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진정으로 불행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이 푸념을 늘어 놓는 이유이고, 만약에 한 번만이라도 고통(불행)의 시달림을 받는다면 그러한 푸념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말 것이다.
부도덕한 가정
부모로서 가정에 도덕적인 결함을 남기지 마라. 부모가 만드는 부도덕한 가정의 최대 피해자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죄 없는 자녀들이다. 자녀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좀 주는 것은 괜찮다. 가세가 기울어 많이 가르치지 못한 것도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도덕적으로 결함(외도, 범죄)있는 가정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안 된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준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결함을 안겨 주는 것은 자녀들의 앞으로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주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도덕적인 결함은 곧바로 자녀들에게 흠이 된다. 특히 인생의 대사인 결혼에서는 엄청난 흠이 된다. 사윗감이나 며느리감을 고를 때는 꼭 그의 부모의 행실도 보기 떄문에, 자녀가 좋은 사윗감 좋은 며느리감의 자질을 갖추고 있더라도 부모가 외도를 하여 두 집 살림을 했다거나 범죄를 저질러 전과 경력이 있다거나 하게 되면, 자녀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엄청난 장애물이 되고 만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는 자녀들의 인생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녀들에게 너의 부모가 그러니 너도 그럴 것 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는 비극은 결코 없어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듯이 부모는 자녀들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자녀가 잘못하면 그 부모가 욕을 먹지만 부모가 잘못하면 그 자녀들이 욕을 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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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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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예종에의 길(The Road to Serfdom) - 하이에크(Friedvicw August von Hayek,1899~1992)
이책은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정부의 시장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식 계획경제는 전체주의로 통하게 되며 결국 개인의 자유까지도 억압하게 되어 국민 등을 노예에의 길로 이끌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모든 것을 시장기능에 맡기자는 하이에크의 생각이 담긴 이 책은 오늘날 경제에 대한 국가적 통제 및 복지국가관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자 내지 신보수주의자 들의 고전이자 케인스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서다.
케인스의 영원한 라이벌
이미 50년 전에 사회주의가 인류를 노예의 길로 인도하고 결국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끝내 종언을 고하리라고 예언한 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이에크다. 케인스의 숙명적 라이벌 하이에크. 그의 생애는 전기의 경제학자적 생애와 후기의 사상가적 생애로 구분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귀족적 전통 속에서 자랐다. 빈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21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서 그의 스승이자 동료로서 그를 이끌어준 미제스를 만난다.1923년 경제학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경제학이 법학부에 부속되어 있었던 당시의 제도 때문이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세계관의 형성은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빈 대학인데,그는 여기서 자본주의적 세속에서 벗어나 학문적 도원경에 젖으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그뒤 미국을 방문하여 본격적으로 경제학 수업을 쌓으면서 당시 신대륙에서 성행한 경기변동의 실증적 연구에 주목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19년 (화폐이론과 경기변동이론)이라는 저서를 내고, 모교인 빈 대학의 강사가 된다. 그의 평생의 연구분야는 전반기의 경기이론과 후반기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후 그는 영국의 로빈스의 초청으로 1931년 런던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케인스와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로빈스가 그를 영국으로 초빙한 데는 케인스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로빈스의 부탁으로 하이에크가 케인스의 저서(화폐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자 케인스도 다른 학자를 시켜 하이에크의 저서(가격과 생산)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후 두 당사자는 물론이고 아서 피구를 비롯한 당대의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이 대거 토론에 참여하여 반론과 재반론의 치열한 공방을 전개했다. 존 힉스가 일대 드라마로 표현한 논쟁에서 그는 무려 10편의 논문을 쓰며 분전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당분간 케인스 쪽으로 미소를 보내는 듯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가격수준에 관한 케인스의 거시적 분석은 상대가격의 변화가 투자와 생산의 각 분야에 끼치는 미시적 영향을 무시하고 있고, 소비수요의 증대 역시 케인스의 관찰과는 달리 투자를 위축시켜 불황을 야기 한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한 제자가 그에게 당시의 견해로는 내가 새로 양복을 구입하면 사회의 실업이 증가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 고 대답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부호와 수식을 잔뜩 늘어놓았다 한다. 그러나 케인스의 승리는 새 양복이 실업을 줄인다는 이론 때문이 아니라 1930년의 대공황에 직면한 각국 정부가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제시된 그의 처방을 하이에크의 무위도식 적인 권고보다 한층 더 절실하게 받아들인 현실에 기인한다. 케인스가 주도한 케임브리지 경제학과 그에 대항하는 런던 경제학의 일대 자존심이 걸린 전투에 하이에크는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예로 그는 전력을 다해 케인스의 (화폐론)에 대한 논평을 끝내고 나니, 케인스가 그 책에 담긴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바람에 완전히 김이 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반론이 나오면 케인스가 또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할지 몰라서 (일반이론)에 대한 서평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런던 대학에서 그는 세번째 학위를 얻는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경제학 박사학위였다. 그러나 경제학 박사와 함께 그 뒤의 하이에크는 오히려 철학자와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변모에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 체류하던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적들)의 저자)의 역사주의 비판이 큰 영향을 주었다. 하이에크 역시 개인의 행위를 역사보다 중시하면서 흄의 개인주의는 우연적이므로 옳으나, 루소의 개인주의는 계획적 이기에 싫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 자신이 정치적 저작 이라고 선언한 1944년의 (예종에의 길)은 자유주의 전도사로서 그의 명성을 세계에 전파한 책이 되었다.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 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계획은 반드시 전체주의로 통한다는 소신에 입각하여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맹렬히 규탄한다. 나아가 그는 사회주의를 유태인 다음으로 박해한 나치즘에서 사회주의적 연원을 추적할 만큼 참으로 정치적 저작다운 모험을 강행했다. 매카시의 반공 히스테리가 기승을 부리던 1950년 하이에크는 극우 경제학의 본산인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윤리학 교수로 취임한 그는 주로 지성사를 강의했으며,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다. 미국에서 출간한 최초의 저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헤리에트 테일러 : 그들의 우정과 결혼)이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이혼과 소꿉친구와의 재혼이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밀은 친구의 부인 해리어트를 20년 동안 사모하다가 친구가 죽자 그녀와 결혼한 세기의 불출을 실연한 장본인이다. (자유의 헌법)은 이 시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자유의 근본원리를 강제의 부제 로 간단히 규정했다.
12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그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왔다가,1968년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 대학으로 초빙된다.경제학의 학위과정조차 개설되지 않은 이 대학에서 그는 아주 무료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1974년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다. 화폐이론과 경기변동이론에 대한 무려 50년 전의 기여가 시상 이유였지만 정작 그의 수상연설 제목은 지식의 가면 이었다. 1938년 영국에 귀화했으므로 그의 공헌은 영국경제학의 업적으로 기록되었다.1977년 다시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서 (법입법자유)의 3부작으로 완성한다.그후 연구와 여행에 몰두했으며, 1978년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1988년에 저술한 (치명적 망상 : 사회주의의 오류)는 그가 남긴 마지막 반공 메시지다. 예를 들어 그는 사회적 이란 말이 은연중에 옳은 이란 냄새를 풍기는 족제비처럼 교활한 언어라면서 사회정의 조차 흔히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분배정의를 가리키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라고 단죄한다. 민주주의마저도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전집은 22권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 방대한 저술과 관련하여 언젠가 그는 '물리학자는 물리학자이기만 하면 일급이지만 경제학자는 경제학자이기만 하면 폐를 끼친다' 고 토론한 적이 있다.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수상인 대처의 극우 보수주의가 발호하고 고르바초프의 현실주의가 무너지는 가운데 그는 평생의 지론이 승리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1992년 9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계획경제와 케인스의 복지국가관 비판
제2차 대전 중 자신이 머물고 있던 영국에서도 계획경제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그의 우려는 점점 깊어져, 그의 관심이 점차 자유의 문제로 옮겨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온 책이 본서이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열띤 논쟁을 야기시켜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그 요약판을 게재할 정도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우리가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간 역사와는 다르다. 우리들은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평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 사건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고 기술 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그 배경과 사회학적 원인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시즘 혹은 나치즘의 발생을 그 이전 시대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그러나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걸어온 지적 발전의 경로를 거슬러가다보면 파시즘은 공산주의가 환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뒤에 도달한 당연한 결과임을 알게된다다.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집산주의의 일종이다. 만약 자유의 길이라고 믿어왔던 장밋빛 미래가 사실을 알고 보니 노예의 길 이었다면 얼마나 큰 비극일까? 어쩌면 사회주의는 집산주의가 가장 정체된 형태로 발현된 사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겐 그들이 이미 포기했던 경제생활에 대한 통제에 한번 더 복종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모든 계획의 출발점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파시스트들은 어떻게 하면 여러 자원을 확고한 방법으로 특수한 목적에 봉사하도록 운영하는가,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모든 경제활동을 중앙집중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있다.중앙집중적 계획에 따르면 경제문제는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여러 가지 욕망의 상대적 중요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사회 내지 그 대표기관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계획에 따른 지도는 어쩔 수 없이 단일한 전문가 진용에 의한 것이 되고, 결국 책임과 권력이 총지휘자의 수중에 집중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단 경쟁 대신 중앙계획을 채택하게 되면 이전에 계획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생활부분에 중앙적 지도가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생산부문에서 중앙적 지도가 실시된 후엔 소비부문에서도 중앙의 지도가 필요해지고, 경제영역에서의 계획은 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중앙적 지도를 유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를 심하게 제약하는 계획사회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
집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영역과 자원을 단일한 목적을 위해 조직하려는 점에서나 개인의 목적이 최고의 자주적 영역임을 무시하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집산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복리와 행복은 경중만을 표시하는 단일한 목적으로 적당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활동을 단일한 계획에 따라 지도하려면 우리들의 욕망에 가치서열을 매겨 적당한 자리에 끼워맞출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또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들 가치서열을 계획자가 충분히 조정,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절무결하게 정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계획이 성공하려면 서로 다른 인간의 가치가 적재적소에 배치 될 수 있는 도덕률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 역시 인간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도 모든 인간의 동기를 의식적으로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분산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산업제도를 의식적인 중앙계획 아래 두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룩해낸 분화복잡성, 탄력성의 수준에 결코 도달할수 없었을 것이다. 분산주의와 그에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시장의 자동조절수단에 의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비하면 중앙의 지도는 말할 수 없이 열등하고 원시적이며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중앙계획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의식적인 통제를 시도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쟁은 우리가 지금껏 경험한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방법일뿐 아니라, 정부당국의 강제적자의적 간섭이 없이 우리의 활동을 상호간에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우리는 그 우월성을 인정한다. 자의적인 사회통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에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도 경쟁은 가치가 높다. 인간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인간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주의 혹은 다른 형태의 집산주의와 대비해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자기 중심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이 해야 할 일의 영역이 아무리 협소하다 할지라도 각자의 견해와 취미가 최고의 표준이 되어야 하고, 개인의 능력과 재주를, 개발하는 길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사건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급적이면 사회의 자발적인 힘을 이용해야 하며 강제수단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본원리를 실제에 적용할 때면 무한히 많은 변수가 있음도 사실이다.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태도는 식물을 기르는 정원사의 태도와 같은 것이며, 사회발전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가 움직여나가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무조건 자유방임주의와 일치시키는 것은 오류다.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법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경제학자에서 사상가로
이상에서 살펴본 하이에크 사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수 있다. 하나는 자유와 자유경제가 무엇이며, 다른 하나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공존하는 현상)을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처음 순수경제학에서 출발하여 곧 정치학법학사회학철학 등 인접 사회과학으로 그의 관심을 확대심화시켰으며, 현대의 영지??를 대표하는 철인적 지도자 로 평가되고 있다.
독자적 세계 구축
이제 우리는 모두 하이에크 학파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미국의 신경제 법학이나 신경제 학자들도 공급 경제학 이나 작은 정부론을 내세우면서 모두 하이에크에게서 자유와 스태그플레이션을 배웠다. 그의 자유는 신 자유주의에서 우러나오며 스테그플레이션 대책은 케인스 비판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 모두 하나가 커다란 하이에크 세계에 바탕을 두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의 사상을 간혹 자유주의자의 진부한 생각 정도로,또는 자유주의적 반동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의 비판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자 케인스조차도 하이에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할 정도로 깊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알면 알수록 외경의 마음을 갖게한다고 한다.
자유주의 경제
그의 자유는 법의 지배하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질서이며, 사회 내부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자발적 질서로서의 자유를 말하기 때문에, 각자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전제조건을 깊이 음미하고 자기 환경에 맞는 자유주의 사회와 자유주의 경제를 구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자유주의 경제는 교과서적인 추상적 자유경제의 사회 경제가 아니라, 그 사회 특유의 자발적 시장경제가 개개인의 지식을 가장 잘 종합할 때 생기는 역사적 특징을 지닌 경제를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경제를 통해서만 노예에의 길에서 벗어날수 있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경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믿고 있다. 이 책의 중심적인 명제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라는 정치체제를 낳게 한 것이 계획경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들은 모두 국가 사회주의라는 특수한 형태를 띠었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경제에 있어 중앙집권적 계획화가 확대될수록 그 국가의 정치체제가 틀림없이 전체주의화되어간다고 보고, 복지국가도 이러한 맥락으로 비판하고 있다.
현대 경제학에 경종
그는 (예종에의 길) 이후 여러 저서를 통해 칼 포퍼의 (단편적 사회공학)을 발전시키고, (전체와 개체)(사회적 다위니즘)(사회의 의인화)등을 논하면서 신자유주의 사상을 전재해가고 있다. 특히 근래에 발표된 (법,입법 및 자유)는 문자 그대로 하이에크의 걸작으로,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고 야경국가주의도 아니며, 과학혁명과 시민혁명이 밑바탕이 된 질서 자유주의 라고 말하면서 자유를 하나의 사회적 질서, 또 자유는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없거나 그것을 육성, 추진하는 정책적 틀을 확립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하이에크의 지적 발단단계에서 볼 때 이 책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그 이후 그는 화폐적 경기 변동론보다는 자유의 조건을 규정하고 인간사에서 작용할 수 있는 강제력을 최소화시키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인이 감소된 제도를 연구하는 데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케인스 경제학 비판뿐만 아니라 수학과 증명만을 중시하는 현대 경제학자에게도 충격적인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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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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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금연
어느 신비주의자는 매일 아침 대도시에 있는 박물관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 박물관 안에 들어와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옷은 잘 입고 있었으나 항상 면도를 하지 않고 있어 마치 방금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옷을 걸쳐 입고, 박물관으로 달려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단 박물관에 와서는 벤치에 앉아 "타임"지를 펼쳐 보고 약 한 시간 동안 읽곤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한 경비원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왜 매일 여기에 오는지 궁금하겠지요? 나는 지금 담배를 끊으려 하고 있소. 그래서 나는 금연 장소에 있어야 했던 거요. 알겠소?" 그리고 나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박물관이 문을 닫는 일요일에는 교회로 간다오."
- 불편한 것은 모두 떨쳐 버려라. 그리고 참아라. 노력은 예고를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호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노력할 때,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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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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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3. 절도사들의 시대 - 안사의 난(755~763년)
안녹산의 체중은 200킬로그램. 어찌나 뚱뚱했던지 뱃살이 늘어져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 어느 날 현종이 그의 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리도 뚱뚱한가?) 안녹산의 대답인즉, (예, 오직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만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아부다. 그는 현종의 사랑이 쏠려 있는 양귀비에게도 양아들로 행세했는데, 그의 나이는 양귀비보다 10여 살이나 위였다. 이러한 능수능란한 처세로 말미암아, 그가 세상을 뒤흔드는 대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현종은 이 사실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녹산은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란계 소그드인을 아버지로, 돌궐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성씨인 '안'은 중국에 귀화한 이란계를 표시하며, '녹산'이라는 이름은 소그드인에게 흔한 이름으로, '빛'을 의미하는 소그드어의 한자표기이다. 소그드인의 탁월한 중개무역 솜씨는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는바, 안녹산의 사회생활도 역시 한족과 이민족간의 중개업 상인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익살스럽고 소탈하게 성격을 타고난데다 6개 국어에 능통했던 까닭에 점차 상인으로서의 솜씨를 인정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주 절도사의 눈에 들어 군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절도사란 부병제가 무너지고 모병에 의한 전문군인이 출현하게 되명서, 710년 처음으로 변방에 설치되었던 전문직 군관으로, 떠도는 농민과 이민족을 모아, 당 중기 이후 뚜렷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는 변방의 위구르, 토번, 거란, 발해 등의 세력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중앙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절도사의 권한은 군정뿐만 아니라, 정치 일반에 미쳐 '번진'이라고 부르는 지방군벌로 변화해갔다.
한편, 명문귀족 출신인 재상 이임보는 정치에 싫증이 난 현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입가에는 꿀, 마음에는 칼'을 가진 자로 일컬었는데, 그는 국내 귀족세력의 반대를 견제하고자 이민족이나 서민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에 안녹산은 이임보의 지원 속에 평로, 범양, 하동 삼번진의 절도사가 되는 파격적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권신 이임보가 죽고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에 오르자, 그의 출세가도에는 먹구름이 끼게 되었고, 그의 야심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삼번진의 용병 군단을 몰아 대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이때가 755년, 그의 병력은 20만에 달했다. 반란군은 이렇다할 저항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안녹산은 낙양에서 즉위, 국호를 대연, 연호를 성무라 칭했다. 현종은 72세의 늙은 몸으로 서쪽의 촉 땅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장안을 떠나 백리쯤 되는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성난 호위병사들의 요구로 사랑하는 양귀비와 양국충 일족에게 죽음을 내렸다. 연도의 백성들은 현종의 피난행렬을 막으며 반란에 적극 대처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현종은 아들에게 양위하게 되니, 그가 숙종이다.
점차 각지에서도 의병이 조직,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위구르에 원군도 요청했다. 이때 우리에게는 서예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안진경의 활약이 돋보였다. 그는 당시 평원 태수로 있었는데, 위진 이래의 대표적인 명족 출신이었다. 그의 글씨는 종래 서예계를 풍미하던 왕희지의 '왕체'를 대신, 성당기의 서도를 대표하게 되었는데, '안체'라고 불린다. 흔히 당나라 사람들은 '안진경의 글씨에는 힘줄이 있고, 유공근의 글씨에는 뼈가 있다'로 표현했는데, 그의 글씨가 호방하고 중후하면서도 탄력이 넘쳐 힘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뒷날, 당 왕조에 반기를 든 회령의 지방관 이희열을 설득하는 사자로 파견된 후, 그의 회유책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76세의 나이에 교살당했다.
한편,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킨 후 시력이 나빠져서 완전히 실명에 이른데다가 악성 종양까지 생기는 등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가 애첩의 소생인 안경은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미리 알아챈 적자 안경서가 먼저 안녹산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된 반란군의 내분은 관군의 반격보다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어 안경서 토벌군이 일어나고, 안경서를 지원했던 안녹산의 부장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대연황제라 칭했다. 그의 아들 사조의가 다시 사사명을 죽이고 즉위한 후, 패전을 거듭한 끝에 763년 자살했다. 이로써 안녹산, 사사명의 반란, 줄여서 '안사의 난'이라고 불리는 당 중기의 대 반란은 마감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로도 당 왕조는 150여 년간 명맥을 유지하게 되나, 이제 중국사회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변경에만 설치되었던 절도사제가 전국에 확산되고, 이들이 점차 자립화하여 중앙권력에 도전하게 되니, 세계제국으로서의 당의 풍모는 어디서도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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