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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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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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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람 뒤의 격려는 소나기 뒤에 나오는 태양 같은 것.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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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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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눈
지난주 대관령 산자락에 사는 막내 누님이 눈이 하얗게 쌓인 마을 사진을 보내왔다. 산간 지역이라 눈이 오면 불편한 점이 적지 않을 텐데도 우선은 그 소담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뺏기고 마는 것이다.
예부터 겨울에 눈이 많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으니, 눈은 고마운 존재였다. 동요 ‘눈’에서도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라고 하였듯이, 눈은 따뜻한 솜이불이자 배고픔을 달래주는 양식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얀 쌀알처럼 생긴 ‘싸라기눈’의 옛말은 아예 ‘쌀눈’(ㅄㆍㄹ눈 또는 ㅄㆍ눈)이었다. 북한어에서는 겨울에 많이 내리는 눈은 복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복눈’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눈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말들이 많다. 초겨울에 조금 내린 눈은 ‘풋눈’,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눈은 ‘자국눈’이다. 이와 달리 한 길이 될 만큼 많이 내린 눈은 ‘길눈’, 또는 한 자나 된다고 하여 ‘잣눈’이라고 한다. 그리고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을 가리켜 ‘숫눈’이라고 한다.
‘숫-’은 깨끗하다는 뜻의 접두사이다. ‘숫백성’이라고 하면 거짓을 모르는 순박한 백성을 뜻한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숫눈처럼 깨끗한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 어린이의 눈으로 시조를 쓰셨던 시조시인 서벌(徐伐)의 ‘섣달 그믐밤의 눈’이라는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새하얀 가운 입은 하늘의 약사님이 / 아픈 우리나라 건강 빨리 찾으라고 / 조제한 귀한 약봉지 얼른 풀어 내리신다. // 앓는 산, 우는 강물 그런 들판, 그런 마음 / 다 함께 받고 있는 조선백자 빛깔 가루 / 새해가 내일이니까 건강 금세 찾을 거야.”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개좋아
영어 단어 중에는 접두사와 어근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들이 많아 접두사의 뜻만 알고 있어도 단어의 뜻을 쉽게 유추해 영어의 어휘 창고를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con-(com-)’이 강조의 뜻을 지닌 접두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conㆍcise(=cut)’가 ‘간결한’의 뜻이고 ‘comㆍpact(=fasten)’가 ‘꽉 짜인’의 뜻임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말에도 강조의 뜻을 지닌 접두사들이 많은데, ‘강-’ ‘들-’ ‘새-’ ‘초-’ ‘한-’ 등이 그것이다. 먼저 ‘강-’은 ‘매우 센’의 뜻을 더해 ‘강타자’, ‘강추위’ 등으로 사용된다. 또한 ‘강-’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의 뜻을 더하기도 하는데, ‘강술’이 대표적인 예이다. ‘강술’은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이라는 뜻으로, 흔히 ‘깡술’로 쓰기 쉽지만 ‘강술’이 표준어이다.
‘들-’은 ‘몹시’의 뜻을 지녀 ‘들끓다’, ‘들볶다’ 등으로 사용되고, ‘새-’는 ‘매우 짙고 선명하게’의 뜻을 더해 ‘새까맣다’, ‘새빨갛다’ 등으로 사용된다.
‘초-’는 ‘어떤 범위를 넘어선’의 뜻을 지녀 ‘초강대국’, ‘초음속’ 등으로 사용되고, ‘한-’은 ‘큰’의 뜻을 더해 ‘한길’, ‘한시름’ 등으로 쓰인다. 또한 ‘한-’은 ‘정확한’ 또는 ‘한창인’의 뜻을 지녀 ‘한가운데’, ‘한겨울’ 등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개좋아’처럼 ‘좋아’를 강조한 말로 형용사 앞에 ‘개-’를 붙여 사용하는데, ‘개-’는 접두사로서 명사 앞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개고생’은 ‘정도가 심한 고생’을 말하고, ‘개죽음’은 ‘헛된 죽음’을 말하며, ‘개살구’는 ‘야생의 살구’를 말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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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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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 천상병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제킨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 같다.
∼∼∼∼∼∼∼∼∼∼∼∼∼∼~~~~~~~~~~~~~~~~~~~~~~~~~~~~~~~~
소곡 - 정지용
물새도 잠들어 깃을 사리는
이 아닌 밤에,
명수대 바위틈 진달래꽃
어찌면 타는 듯 붉으뇨,
오는 물, 가는 물,
내쳐 보내고, 헤어질 물
바람이사 애초 못믿을손,
입맞추곤 이내 옮겨가네.
해마다 제철이면
한등걸에 핀다기소니,
들새도 날러와
애닯다 눈물짓는 아침엔,
이울어 하롱 하롱 지는 꽃닢,
설지 않으랴, 푸른물에 실려가기,
아깝고야, 아기 자기
한창인 이 봄ㅅ밤을,
초ㅅ불 켜들고 밝히소.
아니 붉고 어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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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맥(冬麥) - 김수영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내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믿는 것이있기 때문이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광선의 미립자와 분말이 너무도 시들하다
(압박해주고 싶다)
뒤집어진 세상의 저쪽에서는
나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타락도 안했으리라
그러나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싯퍼런
작열의 의미가 밟허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
햇빛에는 겨울보리에 삭이 트고
강아지는 낑낑거리고
골짜기들은 평화롭지 않으냐-
평화의 의지를 말하고 있지 않으냐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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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께 - 이해인
당신의 눈 속에 들어있는
높고 푸른 하늘을
가까이에서 본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반세기 동안 쏟아부은
당신의 사랑은
캘커타를 넘어 세계로
흘러가고
이제 당신은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순례의 어머니가 되어
먼길을 가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당신의 두 손을 잡고 싶어할 때마다
괴로운듯 나직이 말씀하셨지요.
"오 나는 성녀가 아닙니다.
나를 보고 싶거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세요"
맨발로 빈 손으로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던
사랑의 어머니여
흠도 티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이제 편히 쉬십시요.
아직 어머니를 닮지 못하고
서성이는 저희에게
"오직 사랑만이 전부다"라고
하늘의 별이되어
말씀하여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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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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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과 햇살 - 유미희
눈보라가 씽씽 달려오자
"참 춥겠다."
강물은
꽁꽁 몸 얼려
물고기들 지붕을 얹어 주었어요.
봄바람이 씨앗들 깨우러 다니자
"잘 참았어."
햇살은
초로록 내려와
강물의 언 몸을 녹여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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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임재석
조록조록 조록조록 비가 내리네.
나가 놀까 말까 하늘만 보네.
쪼록쪼록 쪼록쪼록 비가 막 오네.
창수네 집 갈래도 갈 수가 없네.
주룩주룩 주룩주룩 비가 더 오네
찾아오는 친구가 하나도 없네.
쭈룩쭈룩 쭈룩쭈룩 비가 오는데
누나 옆에 앉아서 공부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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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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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뇽(Mignon) - 괴테(Goethe) / 안삼환 옮김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선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감람나무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 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立像)들이 날 바라보면서,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고 물어 주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보호자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
노새가 안개 속에서 제 갈 길을 찾고 있고
동굴 속에는 해묵은 용들 살고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
폭포수 내려 쏟아지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우리의 갈 길 뻗쳐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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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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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3장. 의를 기른다
4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귀가하기 전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 이유인즉 아버지가 귀가해서 샤워를 끝내는 즉시, 가족 모두가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다. 가정의 저녁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태인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순서와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으며 자란다. 그것은 비단 샤워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금요일 일몰 때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날, 자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숙제 등을 재빨리 마친 다음 목욕을 하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모든 일과는 어머니가 일몰과 동시에 양초에 불을 켤 때까지 마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런 까닭으로 자녀들은 매일, 또는 매주 시간과 승부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엄수함으로써 자녀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정된 시간 안에 끝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가는 것이다. 그 밖에 유태교의 축제행사 때에도 시간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예를 들면 봄철에 치르는 가장 큰 축제인 '유월절(Passover)'에는 빵을 못 먹게 되어 있다. 그날에만 먹는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대단히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은 이것이 큰 고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성한 행사인 만큼, 축제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 자녀들은 시간의 중요성을 거의 생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영생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믿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시간관리가 공부의 기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유태인 소년들은 열세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 주로 손목시계를 선물로 준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다짐을 주기 위해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을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를 상세하게 짜는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춰 일을 확실히 해치웠을 때는 일종이 쾌감마저 느낀다. 흔히 동양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이 자녀들이나 부모가 사전에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 계획표를 짜기는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리인 것을 알고는 몇 번씩 변경을 하는 동안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책상에 모래 붙들어 앉히려고 한다. 이것은 곧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떻게 시간을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깨우쳐주도록 해야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리듬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는 30분 이내에 끝내도록 시간을 정해 놓고, 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우물거린다면 사정을 보지 않고 모두 치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30분이라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그 시간 안에 식사를 끝마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다. 나는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세수하고,식사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재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즉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더욱 중요한 일을 등한시하는 따위의 나쁜 버릇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어렸을 때의 시간관리가 가장 능률적인 공부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42. 가족 모두가 모이는 식사시간을 활용한다
식당에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잘 아는 일본인 가정에 저녁식사를 초대받았을 때 대단히 기묘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집 가족들과 우리 부부가 식탁에 둘러앉아 막 식사를 하려던 때였다. 초등학교 4년생인 그 집 장남이 벌떡 일어나더니 식당 한쪽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었다. 마침 텔레비전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 광경이 나에게는 참으로 기묘하게 생각되었다. 우리 집의 경우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홈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마침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시각 아마 다른 집에서도 이와 똑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가족의 일체감을 느끼는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식사시간은 자녀들의 마음의 양식이다
우리 유태인은 구약성서에 의해 굳게 뭉쳐져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태인에게 있어 식탁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유태인들이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이유는, 텔레비전은 한갖 오락물일 뿐이지 가족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는 다양해서 가족 모두가 공통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족이 텔레비전 프로를 화제로 삼는 것은 '회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대화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역시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간의 대화의 단절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듯한데, 그 한 가지 원인은 식당에 텔레비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낮 동안 아버지는 직장에서, 자녀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활동하다 한 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가족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유익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이러한 귀중한 시간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봄으로써 가족의 유대관계를 흐려놓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이 포인트!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다.
43. 외식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데려가지 않는다
젖먹이는 외식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음식점에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가족이 정답게, 늘 머리를 맞대고 사는 자기 집과 다른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겨우 두세 살밖에 안 된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온다는 사실이다. 한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유태인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 또래의 어린이들이 밖에서 식사하는 즐거움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에게는 외식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경우,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거나 돌아다니며 수선을 떠는 등 다른 손님들에게 폐를 끼칠 것이 틀림없다. 때로는 음식을 흘리거나 그릇을 깨서 종업원이나 주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밖에서 식사를 하는 행위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는 생일 등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이다. 그 외에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일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서 외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른의 세계에서는 어느 경우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것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식사하는 것만이 흥미로울 뿐, 외식을 통해 그 어떤 기쁨도 얻지 못한다. 이처럼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 외식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른들 역시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쓰느라 외식의 즐거움은커녕 기분만 망치게 될 것이 뻔하다. 어른에게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유태인들의 상식이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외식을 할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남에게 협조하는 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탈무드>에 '날마다 오늘이 최후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하루 하루, 한순간 한순간을 전 생애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내세'라든가,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의 생활신조이다. 그러므로 외식을 즐기는 것도 우리들 생애의 귀중한 한순간이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이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약간 과장된 말 같지만, 외식에 어린이를 동반하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 방법에 역행하는 셈이다. 음식점에 어린이를 데리고 가서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다른 사람과의 협조는 곧 자기 희생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견해도 우리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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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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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다시 '순행'에
서기 128년 여름, 52세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두 번째로 긴 여행을 떠났다. 첫 번째 순행의 목적이 제국 서방을 시찰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여행의 목적은 제국의 동방을 시찰하는 데 있다. 긴 여행이 될 것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수도 로마를 떠나기 전에, 원로원이 결의했는데도 10년 동안 계속 사양했던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내 사비나한테도 '아우구스타' (황후)라는 칭호를 주었다. 최고통치자로서 맡은 바 책무를 완수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제는 원로원이나 시민에게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부각시킬 필요도 없어졌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떠난 배는 우선 남쪽으로 내려간다. 본국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을 갈라놓고 있는 메시나 해협은 좁지만 물살이 빠르다. 이 해협을 빠져나간 배는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을 돈 다음에는 에게 해를 북상하여 동경의 땅 아테네로 향한다. 지난번에 아테네에 머문 지 3년이 지났다. 그 3년 동안, 하드리아누스가 지시해둔 대로 '테세우스의 아테네' 옆에 '하드리아누스의 아테네'가 거의 완성된 상태에 있었다. 돈이 움직이면 사람도 움직인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드리아누스의 진흥책 덕분에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역이 활성화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와 그리스 각지를 돌면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반 년 동안이나 머물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에도 참가했다. 지난번과 다른 점은 지시해둔 공공건물의 준공식에 잇따라 참석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 부흥을 상징하는 '제우스 올림피아신전' 완공을 기념하여 'Olympeion'이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했다. 기념화폐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통화다. 하드리아누스가 그리스 활성화를 공무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은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로마 황제에게 '올림피우스'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올림포스 산에 살고 있는 그리스 신들의 반열에 끼었다는 뜻이다. 이것도 그리스-로마 문명을 한데 묶여 논의되는 경우가 많은 그리스와 로마가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신격화를 인정하지 않은 반면, 그리스는 왕을 곧 신으로 여기는 게 보통인 오리엔트와 가까운 탓인지, 그리스 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신격화하는 데 별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의 아테네'라고 명기하기는 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자기가 세운 공공건물에 자신의 가문 이름을 붙이는 로마의 관례를 따르기를 완강히 사양했다. 그런 황제에게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아테네 시민들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올림포스 신들의 반열에 넣어주는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신격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그 신격화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안에서만 통용될 뿐이고, 또한 신이 되었다 해도 그에게 독자적인 신전이 바쳐진 것은 아니고 제우스 올림피아 신전 안에 있는 제단만 바쳐졌을 뿐이다. 피통치자가 주고 싶어하는 것도 통치자에게는 하나의 시책이다.
전선기지를 시찰하는 순행이 아니라 안전하고 쾌적한 그리스를 돌아다니는 순행인데도 하드리아누스는 황후 사비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미소년 안티노는 물론 말상대인 시인 플로루스도 함께 데려갔는데,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정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은 설령 아내라 해도 데려가기를 꺼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 취향에 맞는 일밖에 하지 않은 네로와는 전혀 다르다. 즐거운 반년이 지난 뒤, 공무를 재개하는 것은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향전환에 불과했을 것이다. 서기 129년 봄이 오기를 기다려 피레우스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 서해안으로 향한다. 에페수스에 상륙한 뒤에는 곧장 소아시아 북부로 간다. 시노페를 중심으로 흑해에 면해 있는 소아시아 북부를 시찰하는 여행이다. 황제와 동행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쓸모 없는 궁정인 따위는 한 사람도 없고, 여느 때처럼 건설 전문가가 가장 눈에 띄는 집단이다. 흑해 남쪽 연안에 늘어서 있는 도시들 중에는 가장 동쪽에 있는 트라페주스(오늘날 터키의 트라브존)에도 갔다. 여기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만 가면 아르메니아 왕국이다. 이 일대에는 로마의 군단기지는 없지만, 그리스인이 세운 이 도시들은 이 지방에서 로마 지배의 '핵'이기도 했다. 흑해 지방을 순행한 뒤에는 로마 영토의 경계선을 따라 소아시아 내륙지방을 남하한다. 사탈라와 멜리테네(오늘날의 말라티아)를 시찰하기 위해서다. 아르메니아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로마 속주는 카파도키아인데, 사탈라와 멜리테네는 그 로마의 방위선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탈라에는 제15군단, 멜리테네에는 제12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황제가 이곳까지 순행한 것을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하드리아누스는 'Exercitus Cappadocicus'(카파도키아 방위군)이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했다. 국경의 방위시설을 하드리아누스가 어떤 식으로 시찰했는가를 짐작케 해주는 글이 남아 있다.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에 동행한 것으로 보이는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가 쓴 글이다.
(우리는 압솔루스에 있었다. 보조병으로 편성된 5개 대대가 주둔해있는 기지다 우리 일행은 우선 무기고를 시찰했다. 그리고 기지를 둘러싼 방벽과 그 바깥쪽에 파놓은 참호도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부상하거나 병든 병사들을 위문했다. 병동을 나오자, 곧장 창고로 가서 식량 비축 상태를 조사했다. 그 날 안으로 가까운 성채나 요새도 시찰했다. 또한 기병들의 훈련도 참관했다. 이 기병대 기지에서도 방벽을 둘러보고, 그 바깥쪽에서 참호를 시찰하고, 병동을 방문하고, 식량창고와 무기고를 시찰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격려하는 황제의 연설도 어느 기지에서나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변경을 지키면서 긴장과 불편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병사들에게는 황제가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아리아누스라는 인물은 원래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속주의 니코메디아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다. 플라비우스라는 가문 이름이 보여주듯,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그의 아버지가 황제의 추천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태어난 해는 서기 95년 무렵이라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보다 스무 살쯤 젊었다. 철학을 비롯한 그리스 문화를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그리스인의 혈통에 긍지를 갖고 있었지만, 로마 제국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깊은 교양과 명석한 두뇌,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인정한 하드리아누스는 이 순행이 끝난 지 2년 뒤인 131년에 36세의 아리아누스를 카파도키아속주 총독에 임명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전선을 방위하는 이 어려운 임무를 6년 동안이나 아리아누스에게 맡겼다. 그동안 아리아누스는 북동쪽에서 쳐들어온 야만족을 격퇴하는 공도 세웠다. 그는 총독을 지내는 동안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방위 문제 전반을 논한 저술도 발표했다. 이 저술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앞에서 인용한 글은 이 저술에서 발췌한 것이다. 아리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총애를 받고 중용된 행정관 겸 무장이었지만,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의 임무를 완수한 뒤에 주어진 근무지는 전선이 아니라 아테네였다 황제가 그를 아테네의 행정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는 로마로부터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는 자유도시였기 때문에, 로마의 공인이 행정에 관여할 수는 없다. 43세가 된 아리아누스는 무엇보다 먼저 아테네 시민권을 얻어 사인이 될 필요가 있었다. 아리아누스 같은 유능한 무장이라면 전선에 보내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그런 아리아누스를 하드리아누스가 굳이 아테네로 보낸 것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이 무장에게 아테네를 맡기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로부터 1년 뒤에 세상을 떠나지만,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도 아테네는 아리아누스에게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는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아리아누스는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아테네인이 된 뒤, 문인으로서 아리아누스의 재능이 꽃을 피운다. 문무를 겸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크세노폰(고대 그리스의 군인 ·역사가·문필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플라톤과는 경쟁자였다)을 경애했던 만큼, 아리아누스의 재능은 역사물로 결실을 맺는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것은 그의 대표작인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기> (Anabasis Alexandri)다. 7권으로 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읽히고 있는 믿을 만한 알렉산드로스 전기로서, 클루티우스 루푸스의 10권 짜리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 (Historiaurm Alexandri Magni)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카파도키아 전선기지를 시찰한 하드리아누스 일행은 남쪽으로 향했다. 서기 129년에서 130년에 걸친 겨울을, 시리아 속주의 도읍이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필적하는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하드리아누스는 강대국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 속주에서도 군단기지 시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리아에는 3개 군단이 상주해 있고, 그중 2개 군단의 기지는 소아시아에서 안티오키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사모사타(오늘날 터키 동남부의 삼사트)에 주둔하고있는 제14군단과 제우그마(오늘날 터키의 바르키스)에 주둔하고 있는 제4군단이다. 제3군단의 기지만 안티오키아보다 남쪽인 라파네아이(오늘날 시리아의 샤마)에 있었다.
로마군은 모두 28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단기지만 해도 28곳. 거기에 보조부대 기지, 기병대 기지, 성채, 감시용 요새 등을 시찰하고, 방위체제의 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퇴역병들의 식민도시, 원주민의 지방자치단체를 시찰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책무라기보다 고행이었다. 어쩌면 다음 에피소드는 시찰한 어느 군단기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있을 때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 하드리아누스의 일행 가운데 풍자시를 장기로 하는 플로루스가 우스개 노래를 불렀다.
"황제는 되고 싶지 않아.
브리타니아인들 사이를 싸돌아다니고
(변경)을 헤매고
스키티아의 혹한에 살을 찔리니."
하드리아누스도 즉흥시를 지어 화답했다.
"플로루스는 되고 싶지 않아
싸구려 술집을 싸돌아다니고
술통 사이를 헤매고
살찐 모기한테 살을 찔리니."
음성으로도 두 사람을 뒤따라가 볼 수 있도록 라틴어 원문도 소개하겠다. 로마자를 그대로 읽으면 되니까 간단하다.
'ego nolo Caesar esse ,
ambulare per Britannos ,
latitare per...... (......는 불명)
Scythicas pati pruinas
"ego nolo Florus esse ,
ambulare per tabernas ,
latitare per popinas ,
culices pati rutunolus"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는 정말 중요한 외교를 해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그리스계 도시로 중동지역의 제후들을 초대한 것이다. 파르티아 왕까지 참석했으니까,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참가국 대표들이 모두 모이는 일이 있었다면 그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파르티아 진영과 로마 진영 사이는 '철의 장막'으로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양대국의 패권 경계선 근처에 있는 약소국들은 정세를 보면서 강한 쪽에 붙곤 했다. 그래도 이처럼 입장이 늘 바뀌는 제후나 부족장들이 파르티아 왕과 로마 황제가 얼굴을 맞대는 자리에 동석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14년 전에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수도를 공략했을 때 사로잡아 그동안 볼모로 계속 잡아두었던 공주를 파르티아 왕에게 돌려준다. 이때의 회동은 파르티아 쪽에 반로마 분위기가 고조되어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열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로마가 볼모를 돌려주는 대가로 파르티아 쪽의 양보를 얻어낼 필요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볼모를 돌려준 하드리아누스의 외교 감각은 상당하다. 외교도 전투와 비슷해서, 상대가 예상치 못한 전술로 공격해야만 이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때의 회담에서 중동의 평화가 확인되었다.
이듬해인 서기 130년 봄,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팔미라로 간다.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강의 거의 중간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팔미라는 시리아 사막 한복판에 있는 도시지만, 팔마이(야자나무)의 도시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오아시스이고, 낙타 캐러밴이 오리엔트에서 서방으로 운반하는 물산의 중계지로 번영해왔다. 경제력이 풍부한 만큼 독립의식이 강하고, 교역상의 이점 때문에 팔미라의 번영은 파르티아에도 로마에도 유익했지만, 이곳 팔미라에도 약점은 있었다. 사막의 유목민 베두인족의 약탈이 그것이다. 베두인족에게 약탈은 악행이 아니라 어엿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직업은 피해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약탈을 꺼린 캐러밴이 다른 교역로를 택하게 되면 팔미라는 숨통이 끊긴다. 그런데도 팔미라는 경제에만 전력투구하는 민족이 으레 그렇듯이 방위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로마의 패권이 유프라테스 강까지 미치게 된 뒤로는 로마가 팔미라방위를 담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팔미라도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베두인족도 로마의 패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팔미라의 부호들도 베두인족의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직업'을 금지 당한 베두인족에 대해서 로마는 변경을 방위하는 부대에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팔미라는 이 지역에 적합한 국경인 유프라테스 방위선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방벽'처럼 울타리와 참호, 성벽과 요새가 끝없이 이어지는 닫힌 방위선은 아니다. 가도와 망루, 요새와 군단기지를 요소마다 건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열린 '방벽'이다. 이런 식의 '방벽'은 북아프리카 사막 앞에도 세워졌지만, 유프라테스 방위선은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유지하면서, 아니 오히려 장려하면서 적의 습격을 막는 방위체제의 좋은 보기다. 팔미라를 지킬 수 있으면, 그것은 열린 방벽'인 유프라테스 방위선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로마는 사막 한복판인 이곳 팔미라에서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와 흥해 연안의 아카바까지 로마식가도를 부채꼴로 깔아놓았다. 안티오키아를 떠난 하드리아누스도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팔미라 방문을 마친 하드리아누스는 이번에는 다른 길을 통해 우선다마스쿠스로 간다. 사막이라서 거의 직선으로 뚫려 있는 로마식 가도를 230킬로미터만 가면 다마스쿠스에 이른다.
다마스쿠스 방문은 거쳐가는 정도로 끝낸 모양이다. 이 길을 택한 진짜 이유는 아라비아 속주(오늘날의 요르단)에 주둔하고 있는 제3군단의 보스트라(오늘날의 부스라) 기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도 시찰과 훈련 참관과 격려 연설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도 'Adventui Aug(USTR) Arabia'(황제, 아라비아 순행)이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했다. 물론 황제가 중동의 사막까지 시찰하러 갔다는 사실을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로마 군단
이로써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주요 방위선을 모두 순행하고 시찰한 셈이 된다. 라인 강과 도나우강,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흑해와 홍해를 잇는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 황제가 몸소 시찰하면서, 필요 없는 것은 폐기하고 필요한 것은 추가하여 재구축한 로마군사력은 실제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좀 길기는 하지만,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증언을 소개하고 싶다. 다음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점에서도 로마인의 식견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군단기지에서 일하는 노예조차도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칠 뿐 아니라, 무기를 주어서 적이 공격해오면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사실 로마인의 모든 군사제도를 살펴보면, 그들의 광대한 제국은 행운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와 노고의 성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 병사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울 때는 인생을 즐기다가 필요할 때만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무기를 손에 들고 태어난 것처럼, 그것도 실전에서 시험해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듯이 날마다 훈련과 연습에 힘쓰고 있다. 이 군사훈련의 격렬함은 실전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전투를 할 때와 똑같은 기백으로 혹독한 훈련을 거듭한다. 그 때문에 실제 전쟁터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지쳐서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고, 전투대형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다. 그래서 거의 언제나 승리를 얻는다. 어떤 적도 그들만큼 엄격한 군단생활을 하지 않는다. 로마 병사와 다른 나라 병사 사이에 뚜렷한 격차가 생기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그들에게 군사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실전이고, 실전은 피 흘리는 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 군단병은 적의 기습에 허를 찔리는 일도 극히 드물다. 적지로 쳐들어갔을 때 그들이 맨 먼저 하는 일은 적과 맞서는 것이 아니다. 방책을 둘러친 견고한 숙영지를 짓는 일이 우선이다. 아무데나 숙영지를 짓지도 않는다. 입지조건을 엄밀하게 검토한 다음, 입지가 결정되면 모두 나서서 작업을 시작한다. 전략적 필요 때문에 평탄하지 않은 땅에 숙영지를 지을 수밖에 없을 때는 땅을 평탄하게 고르는 공사까지 해치운다. 평탄한 땅이 아니면 방어에 적합한 사각형 진지의 유효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마 병사들은 공병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군은 다량의 작업도구까지 짊어지고 행군하게 된다. )
하룻밤을 묵어도 견고한 숙영지를 짓는 것은 공화정 때부터 로마가 변함 없이 고수한 방식으로, 근대전의 전문가들도 높은 평가를 내리고있다. 병사들은 여차하면 도망칠 곳이 있어야 용감하게 싸울 수 있고, 전투에서 지더라도 숙영지로 도주하여 공포에서 해방된 상태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다음 번 전투에서 지난번의 패배를 만회하기도 쉬워진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다. 견고하고 안전한 진지를 만드는 데 드는 수고는 병사들을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게 하는 이점으로 충분히 보상된다는 뜻이다. 로마군에 대한 유대인의 평가는 계속된다.
(숙영지 안에는 수많은 천막이 늘어서 있고, 그 바깥쪽에는 통나무를 늘어 세운 울타리가 방벽이 되어 숙영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그 방벽에는 요소마다 망루가 세워진다 게다가 망루와 망루 사이에는 투석기를 비롯한 대형 병기가 배치되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사각형 진지의 네 변에는 출입문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이 출입문은 이동식 대형 병기나 대오를 짠 병사들이 드나드는 데 지장이 없는 너비로 되어 있다. 숙영지 내부는 중앙 도로로 양분되어, 한쪽에는 저장소나 병동이나 장교용 막사가 늘어서고, 또 한쪽은 병사들의 천막이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숙영지 한복판에는 마치 신전처럼 군단장의 막사가 높고 넓게 설치된다. 이 숙영지가 항구적인 기지로 승격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도시화할 수 있다. 병사들이 집결하는 장소는 광장으로, 병기창은 직공들의 공방으로, 군단장이 장교들을 소집하는 회의장은 공회당(바실리카)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단 하룻밤을 묵는 경우에도 숙영지를 둘러싼 울타리까지 익숙한 손놀림으로 놀랄 만큼 빠르고 견고하게 만들어낸다 필요하면 울타리 바깥쪽에 깊이와 너비가 각각 4큐빗(약 2미터)이나 되는 참호까지 파버린다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촌락 못지 않다. 숙영지 건설이 끝나면 병사들은 각자 천막으로 들어간다. 땔감과 식량과 물을 배급하는 일까지 모든 일을 그 날의 당번 소대가 질서정연하게 수행한다. 제멋대로 식사를 시작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나팔소리를 신호로 이루어진다. 취침도, 4교대제인 야간 보초도, 기상도 나팔소리가 신호다. 해가 뜨기 조금 전에 울리는 나팔소리에 기상한 병사들은 각자 백인대장 앞에 정렬한다. 부하 점호를 마친 백인대장은 상관인 대대장에게 보고하러 간다. 그리고 대대장들은 한데 모여 군단장에게 보고하러 간다. 군단장은 그들에게 그 날의 행동을 지시한다. 군단장의 훈령은 보고가 올라올 때와는 반대방향으로 병사들에게 전달된다. 이 명령 하달방식은 실전에서도 그대로 지켜지기 때문에, 전투 중에도 전술 변화가 신속 정확하게 전달된다 따라서 로마군은 공격도 후퇴도 일사불란하게 해낼 수 있다.)
숙영지를 떠나는 경우에도 모든 것은 나팔소리를 신호로 진행된다.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작업에 참가한다. 첫 번째 나팔소리에 천막을 걷고 짐을 꾸린다. 두 번째 나팔소리가 울리면 짐을 수레에 싣고 대형 병기와 말과 소를 끌어낸다. 그것들이 숙영지 밖에 집결한 광경은 한 줄로 늘어선 경마들이 일제히 출발하는 광경이라도 보는 듯하다. 이어서 세 번째 나팔소리가 울려 퍼진다. 뒤쳐진 자들을 불러내고, 모두 각자의 위치에 정렬한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에야 숙영지를 둘러싼 울타리에 불을 지른다. 적에게 이용당할 경우의 피해에 비하면, 새로 건설하는 수고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출발 준비가 끝나면, 군단장 오른쪽에 서는 포고 담당관이 라틴어로전투 준비는 되었느냐고 세 번 거듭해서 묻는다. 병사들도 세 번 거듭해서, 오른손을 비스듬히 쳐드는 로마식 경례와 함께 일제히 큰 소리로 "준비 완료!"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행군이 시작된다 모두 전쟁터에 포진해 있을 때와 똑같이 각자의 위치를 지키면서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나아간다. 군단병들은 흉갑과 투구를 착용하고 허리에는 칼을 찬다. 왼쪽에 찬 글라디우스 칼은 좀 길고, 오른쪽 옆구리에 찬 칼은 짧다. 사령관 주위를 둘러싼 보병부대는 긴 창과 둥근 방패만 든다. 나머지 군단병은 투창과 직사각형 방패 이외에 톱과 곡괭이, 도끼, 창칼, 운반하는 데 쓰이는 굵은 가죽띠, 가죽도 자를 수 있는 대형 나이프, 쇠사슬, 사흘치 식량을 모두 짊어진다 짐수레를 끄는 소나 당나귀보다 군단병이 훨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기병들은 오른쪽 옆구리에 칼을 차고, 왼손에는 긴 창을 들고, 안장 옆에는 방패를 매달고, 날카롭고 긴 화살이 든 화살 통을 등에 메고 행군한다. 기병이라도 투구와 흉갑은 보병과 같은 모양이다(로마인들에게 있어 기병과 보병은 사치적 지위를 나타내는 분류가 아니라 기능상의 차이에 따른 분류에 불과했지만, 이 유대인 필자에게는 그것이 자못 놀라웠던 모양이다) 사령관 주변을 지키는 기병이라 해도, 장비는 전쟁터에서 양쪽 날개에 배치되는 기병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로마군에서는 행군할 때 어느 군단이 선두에 설 것인지를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이상이 로마군의 숙영지 건설 방식과 행군 방식과 군장 방식이다. 전투에서도 그들은 무엇 하나 무계획적으로 하지 않는다. 계획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은 다음 계획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극히 적다. 또한 잘못을 저질러도 금세 만회할 수 있다. 게다가 로마인은 생각지도 않은 행운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황을 엄밀히 조사한 뒤에 실패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계획 없는 성공은 조사의 중요성을 망각시킬 위험이 있지만, 완벽하게 조사한 뒤에 실패하는 것은 두 번 다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효과적인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운으로 인한 성공은 누구의 공적도 아니지만, 정황 조사를 완벽하게 하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대책만은 충분히 강구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로마인은 군대를 통해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단련했다. 군사훈련은 공포심을 극복하고, 엄격한 군율은 집단생활에 필요한 사항을 가르친다. 로마군에서 사형에 처해지는 죄는 탈영 죄만이 아니다. 사소한 태만조차도 그것이 군단 전체의 안전을 좌우하는 경우에는 중벌을 받는다.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법률보다 사령관이다. 그렇다고 사령관이 그저 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칭찬할만한 병사에게는 포상을 아끼지 않는 방법으로 엄격함과 균형을 유지한다. 따라서 로마군에서 지휘관에 대한 복종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평시에도 전시에도 변함이 없고, 이것이야말로 로마군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요인이다. 전쟁터에서 로마 병사들은 전열을 흩트리지 않고, 전우와 함께 움직일 때도 하나의 개체처럼 움직이고, 귀는 명령을 놓치지 않고, 눈은 깃발을 놓치지 않고, 손과 발은 훈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인다. 적의수적 우세도, 적지에서 싸우는 데 따른 불리함도, 행운의 여신의 의향까지도 그들의 사기를 꺾지 못한다. 마치 그들 자신이 운수보다 강하고 확실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우선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토대로 정황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로마 민족이다. 게다가 결정한 일을 실행에 옮긴 뒤의 높은 효율성은 결정할 때까지의 주도면밀함과 쌍벽을 이룬다. 그들의 제국이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으로 대서양, 북쪽으로는 도나우강과 라인 강에 이를 만큼 광대해진 것도 경탄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다. 정복자의 노력에 비하면 정복한 비장이 아직 좁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로마군에 대해 길고 상세하게 서술했지만, 그것은 결코 로마군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정복당한 것은 정복당한 자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로마인의 뛰어난 자질 때문이라고 피정복자들을 위로하고, 혹시라도 반란을 꿈꾸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적인 로마인이 어떤 민족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폭거를 단념시키기 위해서다. 또한 로마군의 조직에 대한 서술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당겨 있다.) 유대인의 칭찬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래서는 마치 로마군이 정교한 군사기계에 불과한 듯한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로마 군단병은 단순한 '톱니바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전사한 병사의 묘비명을 두 가지만 소개하고 싶다. 로마인은 본인이 생전에 써놓은 글귀를 묘비에 새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줄곧 진심으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러니까 그대들도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술을 즐겨다오. )
(평화를 위해 일익을 담당하자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켰다.
다키아인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그 맹세도 지켰다.
개선식에 참가하여 야단법석을 떨고 싶었다. 그것도 만끽할 수 있었다.
수석 백인대장이 되어 그 지위가 약속하는 영예와 보수를 얻고 싶었다. 그것도 얻었다.
여신의 나체를 경배하고 싶었다. 그것도 경배했다 )
그렇지만 <유대 전쟁기>의 저자는 로마 병사들의 인간성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군의 기능성에 관심이 있었다.
요세푸스에 관해서는 제8권에서 상세히 서술했지만, 서기 1세기 후반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로마인과 유대인이 공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사람이었다.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군 지휘관으로 로마군과 직접 대결한 경험도 있다. 위의 글도 유대 반란 진압군 총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을 직접 목격하고 쓴 증언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왜 로마군이 막강한지를 고찰한 것이다. 요세푸스가 본 것은 서기 70년 무렵의 로마군이니까, 하드리아누스가 재구축하려고 애쓴 130년 무렵의 로마군과는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한 존재다. 효율성과 기능성의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이 그 조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세푸스가 본 것은 유대 전쟁이라는 전시의 로마군이었다. 공세 일변도였던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군은 요세푸스가 서술한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의 로마군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평화 시대에도 동등한 기능성을 로마군에 요구했다. 그것만이 세금을 올리지 않고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전시에 훌륭히 기능을 발휘하는 군대라고 해서 평시에도 반드시 그런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시에 충분히 기능을 다하는 조직은 전시에도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제국의 변경을 시찰하고 순행하면서 치세의 태반을 보낸 것도 평시에도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는 방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황제의 책무는 '안전'과 '식량'의 보장이다. 하지만 '안전' 보장이 우선이다. 안전만 보장되면, 사람들은 자기한테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상태로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통치자의 책임이다. '식량' 보장은 개인의 노력으로도 이를 수 있지만, '안전' 보장은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되도록 피한다는 방침으로 일관했으면서도, 하드리아누스가 방위체제 확립에는 남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은 이 점을 근거로 방위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브리타니아인들 사이를 싸돌아다니고, 변경의 땅을 헤매고, 스키타이의 혹한에 살을 찔려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황제는 되고 싶지 않다'였다. 다마스쿠스에서 홍해 연안의 아카바까지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건설된 로마 가도가 뚫려 있다. 유프라테스 방위선의 요충 가운데 하나인 보스트라 군단기지 시찰을 끝낸 하드리아누스는 그 길을 통해 필라델피아(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남하를 계속하지 않고 유대 속주에 발을 들여놓는다 로마 제국의 화약고였던 유대의 통치체제를 재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 많은 속주에는 북부에 제6군단, 남부에 제10군단이 상주해있었다. 이것은 서기 70년에 이스라엘 함락으로 끝난 유대 전쟁 뒤에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 당시 유대에 상주해 있던 로마 군단은 1개 군단뿐이었지만, 트라야누스 황제 말기에 다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2개 군단으로 증강되었다. 군단 수를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던 하드리아누스는 유대 주둔군을 더욱 증강하기 위해 새 군단을 편성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유대 주둔군을 늘린다면 다른 방위선에서 이동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현재상태로는 불가능했다. 현재 주둔해 있는 2개 군단의 전력으로 지하에서 항상 마그마가 끓고 있는 듯한 유대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드리아누스가 결단을 내려야 할 문제는 군단기지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6군단은 유대 북부의 스키토폴리스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전통적으로 친로마적 도시인 지중해 연안의 카이사레아에서도 가깝고, 다른 속주이긴 하지만 보스트라에 주둔해 있는 제3군단과 공동 전선을 펴면 유대 북부 일대를 진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남부를 담당하고 있는 제10군단의 기지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서기 70년에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 시내에 군단을 주둔시켰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 상태를 지속시키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 시내가 아니라 바로 북쪽에 제10군단 기지를 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기지를 중심으로 한 도시를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이름 붙였다.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가문 이름이다. 따라서 '아일리아'는 '하드리아누스의 땅'이라는 뜻이 된다. 카피톨리노는 수도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로, 최고신 유피테르를 비롯한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들만 서 있는 로마인의 성역이다. 자신들의 성역인 예루살렘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이런 이름을 붙인 도시가, 더구나 자신들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인 군단의 기지로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유대교는 다른 신들을 일절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일신교다. 카피톨리노 언덕은 패자의 신들에게까지 '로마 시민권'을 주어 받아들이는 로마식 다신교의 상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드리아누스는 유대교도의 할례를 금지했다. 아니, 단순히 금지한 게 아니라, 범죄자에게 할례를 강제하여 할례를 경멸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유대교도에게 할례는 자신이 유대교도임을 육체에 각인시키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데없이 육체를 손상시키는 야만적인 관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조치는 지하의 마그마가 꿈틀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는 마그마가 폭발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앞에서 소개한 요세푸스의 '충고'가 그의 동포인 유대교도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이 망설인 것은 아니다.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고, 따라서 옳고 뛰어나다고 굳게 믿는 독실한 유대교도가 무엇보다 강력하게 거부한 것은 타민족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인이지만, 그들의 눈으로 보면 로마에 몸과 마음을 팔아 넘긴 배신자였다 당장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반란에도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유대 민족의 신앙심에 깊은 상처를 줄 게 뻔한 이 두 가지 조치를 왜 굳이 시행했을까.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건설된 제10군단기지 안에는 전부터 유대교회가 있었다. 그 유대교회는 파괴되고, 그 자리에는 그리스-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신 신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로마 황제인 하드리아누스도 그리스를 애호한 나머지, 오리엔트에 사는 그리스인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던 반유대 감정에 물들어버린 것일까. 오리엔트에 사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 헬레니즘 시대에 오리엔트 일대를 지배한 것은 그리스인이었고, 유대인은 오랫동안 그 지배를 받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게다가 양쪽 다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민족인 만큼, 이해관계가 상충해 있었다는 이유도 있다 그리고 로마가 지배자가 된 뒤에 그리스인은 로마에 협력했는데 유대인은 종교적 이유를 내세워 협력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이유다. 유대인이 지배자 로마에 요구한 것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평등화였지만, 그것은 사회 안에서의 평등화가 아니라 경제활동 면에서의 평등화였다. 사회 안에서의 평등화를 요구하면, 권리에는 반드시 따라다니는 의무도 완수해야 한다. 그 의무는 공무와 군무에 종사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로마 황제에 대한 복종을 선언해야 하고, 그런 짓을 하면 자기네 신한테만 복종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유대교 교리에 어긋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의무가 부과되지 않는 경제활동 면에서의 평등화만 확보되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생활방식이 의무를 완수함으로써 로마 제국에 협력하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의 반감을 샀다.
하드리아누스는 단순히 그리스인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인의 이런 반유대 감정도 공유했을까. 아7면 방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뛰어다닌 그에게는 계속 협력을 거부하는 유대교도가 밉살스럽게 보였을까. 하지만 그가 유대 민족 전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 중에도 당시에는 로마군에서 승진을 거듭한 티베리우스알렉산드로스나 요세푸스처럼 로마인과 공생하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가 혐오한 것은 공생에 필수 불가결한 협력을 계속 거부하는 광신적인 유대교도였다. 상당히 무신경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인 도발로밖에 보이지 않는 일을 했는데도,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에 머무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유대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하드리아누스는 짧은 유대 방문을 마치고 이집트로 발길을 돌린다. 헬레니즘 왕국의 하나였던 이집트도 2세기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은 지금은 그 넓은 지역에 1개 군단만 상주시키면 충분할 만큼 정세가 안정되어 있었다. 경제력도 훨씬 풍부하고 땅도 넓은 이집트를 1개 군단으로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데, 해안지역에 늘어서 있는 그리스계 도시들을 제외하면 모두 가난하고 땅도 손바닥만한 유대-팔레스타인에는 2개 군단을 상주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방위체제의 기능을 향상시키려고 애쓰는 하드리아누스인 만큼, 이 차이에 대해서는 남보다 훨씬 예민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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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보람에 대하여 -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 / 김욱 옮김
어느 심포지엄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주제(主題)는 노인의 사는 보람에 대해서였다.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많았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사는 보람에 대한 나의 평소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먼저 ‘노인의 사는 보람’과 ‘젊은이들의 사는 보람’은 과연 다른 것인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노인에게는 노인의 사는 보람이 있고, 젊은이에게는 젊은이의 사는 보람이 있어 마땅한 것이라고. 그런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노인과 젊은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는 표면적인 차이는 있다. 노인은 체력(體力)이 떨어지면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러다가 노쇠해진 다음에는 노인병(老人病)과 죽음에의 불안이 엄습해 오게 마련이다. 이와는 달리 젊은이에게는 넘치는 활력과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가 있다. 일거리가 있고, 경제력은 늘어나기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젊은이가 지니고 있는 체력과 경제력,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 잃게 될는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 40명 분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낮에는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로 튼튼한 체력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에서 국민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은 여성으로서는 급료도 고급축에 끼는 직업이었다. 내게는 또한 약혼자가 있었고, 푸른 미래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고열(高熱)로 쓰러졌다. 폐결핵으로 인한 발병이었다. 스토마이라든가 파스도 없는 시대여서 결핵요양소에서 요양 중이던 친구들은 마구 죽어갔다. 나는 경제력을 잃게 되면서 의료 보호를 받게 되었다. 40명 분의 식사 준비를 하면서 학교에 나갔던 체력은 간 곳도 없이, 화장실 출입을 할 기력마저 없어졌다. 몇 해를 이렇게 앓다가 이번에는 카리에스가 발병, 꼬박 7년을 기브스 베드에서 신음하는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변기(便器)를 써야만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설 수조차 없었다. 결국은 12년 동안이나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래도 몸이 나아진 것은 37세 때이다. 당시의 나의 요양 중의 몰골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체력도, 지력도 잃은 채 사회에서 뒤쳐진 몸으로 언제 회복될는지도 모르는, 이를테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틈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저들 많은 환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노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서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일까? 만일 틀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이가 젊다는 것뿐이다. 젊었던 만큼 차례로 죽어가는 요우(療友)를 바라보며 다음은 내 차례가 될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오히려 더욱 강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이와 노인이란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인간은 늙은 후에야 비로서 체력과 기력이 뒤떨어짐을 느끼거나, 무력한 경제력을 한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는 ‘노인의 사는 보람’ 이라는 한정된 표현에 대해 찬성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의 사는 보람이 장년(壯年)이 되어서는 또다른 사는 보람으로 바뀌고, 또한 장년 시절의 사는 보람이 나이가 들어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으로 되는 것이라고 한 대서야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것이야말로 사는 보람이라고 믿었던 것을 버리고 다시 또 사는 보람을 찾아야만 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사는 보람’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처럼 연대(年代)가 바뀜에 따라 사는 보람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사는 보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사는 보람으로 삼아온 것이 아닌가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뜻으로의 사는 보람이란 건강한 때도, 건강을 잃은 때도, 일할 것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잃었을 때도, 나이들었을 때도 불변(不變)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가 사는 보람은 무엇인가를 때때로 조용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남편이 사는 보람이요, 아이들이 사는 보람이요, 일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 되고 한다면, 그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사는 보람을 잃게 된다. 잃을 수 없는 사는 보람은 반드시 있다. 나는 그것을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가 있다. 나는 건강을 잃고, 직업을 잃고, 연인을 잃으며 병상(病床)에 누워 있으면서도 내가 믿은 사는 보람만은 잃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신의 사랑이며, 신앙이었다.
<죽음보다 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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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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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0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1/2)
이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힘을 주는 무언가가 그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하면서, 그를 축 늘어진 시골의 분위기 속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개똥지빠귀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는 마치 고목에 다시 싹이 돋은 듯한 기분에서 시내 출입이 더 잦아지고 그곳에 더 기분 좋게 머물렀다. 루첼라이 원은 영원히 문을 닫아버렸지만, 이제 또 다른 정원이 그에게 열려 있었다. 산 프레디아노 성문 밖의 야코포 르노차이오 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곳은 문인도 펄학자도 자주 들리는 곳이 아니며, 학식 있는 쟁론이 들려오는 곳도 아니었다. 대신에 그곳에서는 향연이 열리며, 음식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였다. 포르나차이오는 하층 시민plebeo 출신의 부자였지만, 귀족들이라고 해서 그의 집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특히 피렌체에서라면 편견까지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카르피에서의 농담들에도 불구하고 미식가인 마키아벨리에게는 그 자체가 큰 매력이었으리라. 그리고 또한 바르베라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매력 만점의 젊은 가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와 벗하고 싶어했으며, 친구들도 한동안 그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에 대한 첫 언급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신임 교황에게 하례를 드리러 갔던 베토리가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쓴 1524년 2월 5일자 편지에 나타난다. (니롤로 마키아벨리에게 안부 부탁하네. 그리고 그에게 전해 주게나. 저녁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도 종내 열리지 않는 여기 이 문옆에 서 있는 것보다는 때때로 포르나차이오가 내는 저녁 식사를 바르베라와 함께 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말일세. )
사실 마키아벨리는 친구나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녀에게 끌려들고 있었다. 바르베라는 가까이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매력을 지닌 그런 여자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가난한 처지의 몰락한 (신군주) 같은 그에게는 그것이 다만 한동안이나마 자신이 무엇을 정복하며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을 법하다. 그는 그러한 환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는 시인이었고, 게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내면서 그러한 생각을 연장하며 그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은 56세의 남자가 겪을 수 있는 , 때로는 활기차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작은 연애 사건이었다. 혹은 스스로의 기분과 여인의 기질에 따라 환히 타오르는 듯하다가도 금방 사그라드는 조그만 모닥불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중년의 연인인 그가 비록 재능 외엔 가진 것이 없어도 다정하게 굴었다. 물론 가끔은 애정 어린말로 그를 놀려대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의 재치를 좋아했고, 그의 재능에 이끌렸다. 위대함이란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원하게도 하지만, 또 때로는 사소한 일에서조차도 빛을 발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법이다. 이들 둘 사이에는 보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17년이나 된 1544년에 와서 어떻게 바르베라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의 좋은 추억 속에 담긴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소송 사건을 도와달라고 로렌초 리돌피에게 청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복잡한 것이긴 해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니콜로는 자신의 양처 마리에타를 사랑했다. 그녀는 다정한 아내이자 부지런한 주부였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아이들의 엄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칼리말라의 옷감 장수에게도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니었던 이러한 역할들만으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힘들었다. 시골집이며 숲이며 새 잡는 여흥이며 모두가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그에게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아꼈지만 마음이 넓을 수는 없었던 마리에타 역시도 바로 그런 집이며 숲이며 새 잡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주 포르나차이오의 만찬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바르베라도 그곳에 있었다. (클리치아 Clizia)가 탄생한 곳도 바로 이러한 만찬과 모임에서 였다. 그 얼마 전, 카추올라 극단이 몬텔로로에 있는 베르나르디노 디 조르다노의 저택에서 (만드라골라)를 상연한 적이 있었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바스티아노 다산 갈로가 배경을 그린 무대였다. 포르나차이오는 자신의 연금 상태가 풀린 것을 축하할 목적으로 1525년 1월 13일에 열기로 한 잔치 마당에서 이 장관을 재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드라골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인심이 후한 주인에 보답하려고 했건 또는 바르베라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건 간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새로운 희극 작품을 선보이는 쪽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곧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나, 잔칫날은 멀지 않았고 시간은 빠듯했다. 불쑥 제의를 하긴 했으나 써놓은 것이라곤 아직 한 자도 없는 데다 무엇을 쓸 것인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이번 같은 경우라면 고전 시대의 희극을 토대로 각색하는 도리밖엔 딴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Casina)를 모형으로 삼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이것이 그냥 우연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포함해서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놀려대곤 했는데, 이 새로운 희극에서는 바로 자신의 애정 행각들을 재미의 도마위에 올렸다. 비록 그가 자신에 의해 피렌체인 니코마코(이름의 아이러니라니! 그 첫 음절들은 바로 자신으 것과 같지 않은가)로 둔갑한 스탈리노네 만큼 나이가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르베라에게 보낸 몇몇 편지와 시구들 속에는 약간 우울한 어조로 자신의 뒤늦은 연애 사건을 희롱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못마땅한 건
당신이 아니야 차라리 나 자신이지.
내가 알고 실토하건대
그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더 싱싱한 젊음을 사랑해야 해.
이 시구들은 운율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표현을 빌려 희극의 칸초네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래, 이사랑에 빠진 늙은이야
그 일은 불타는 젊은이에게 맡겨두는 쪽이 더 나았을 텐데.
전기 작가든 문학사가든 여태까지 고려에 넣지 않았던 작품의 이러한 기원은 지금까지도 해명되지 않고 있던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간의 예술적 가치의 큰 차이를 쉽게 설명해 준다. 앞의 경우는 솟구치는 감흥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었고, 뒤의 경우는 포르나차이오가 열고 싶어하는 잔치에 시간을 대어야 하는 상황에서 비교적 냉정한 마음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작품의 도덕적 목적성을 상정하여 고안되었던 둘로 접은 글판의 가설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클리치아)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는 플라우투스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고, 당시의 풍취에 따라 자유롭게 그것을 따오기도 하며, 때로는 내용을 지어내고 새로이 바꾸기도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급히 작품을 써내려갔다(그의 이러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속에서 진정 새롭고도 신선한 것은 그 문체이며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이다. 그것은 비록 (만드라골라)의 기지와는 비할 수 없다 해도, 원본의 고전극보다는 종종 더 나은 데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야말로 그 작품이 영감의 세례를 별로 받지 않고 급히 씌워졌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몇 주 동안 (피렌체사)를 한쪽으로 제쳐놓았을 것이다. 아니면 둘을 동시에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역사를 쓰다가 싫증이 나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희극으로 가는 식으로 말이다.
공연의 밤이 왔다. 포르나차이오는 호화찬란한 연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는 물론 몇 달 전 교황이 공화국의 수반으로 내정하여 보낸 어린 이폴리토 데 메디치를 필두로, (도시의 저명 인사들과 당시 권력층에 있던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초청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주요 인사들에 뒤이어 중간층 시민들 cittadini mezzani과 그보다 하층 시민들도 함께 초대되었다. (이미 퍼진 명성으로 인해 모두가 보고 싶어했던 )그 연극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무대 배경과 무대 면은 바스티아노 다 산 갈로, 일명 아리스토텔레라 불린 바로 그 사람이 맡았고, 바바리에 따르면 이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다).
연회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화려함 덕분으로 연극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 소문은 피렌체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물론 곧이곧대로 모두 믿을 바는 못 디지만, 당시 모데나의 총독으로 있던 필리포데 네를리는 마키아벨리에게 부친 1525년 2월 22일자 편지에서 농담조의 과장을 섞어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의 희극 작품은 어디에서나 이름을 날리고 있네. 내가 이러한 소문을 친구의 편지에서 전해 들었다고는 생각지 말게나. 난 그것을 여행객들로부터 들었다네. 그들은 길을 가며 산 프레디아노 성문에서의 그 화려했던 장관과 그 멋있었던 광경들을 외치고 다닐 정도라네. 그러한 장관을 어찌 토스카나 안에서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나. 여기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알프스너머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그런데 자신이 도덕적으로 뭔가 낫다는, 위선이랄까 혹은 질시랄까에서 (클리치아)와 그 저자를 구설수에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네를리 자신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농담 섞인 축하의 말을 바로 며칠 후,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바르베라의 (꽁무니를 쫓아 다니면서) (그게 무슨 잘난 일이라고 그 이야기를 희극으로) 썼느냐고 비난하며 (마키아)의 행동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는 독설을 끝내면서, 델 네로에게 (자신의 이름은 말하지 말고) 무언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촉구하였다. 델 네로는 니콜로의 처남이었으므로, 이는 가계내에서 그를 귀찮게 만들려는 위선적 간계였던 셈이다.
그 무렵 이미 수정 작업이 끝난 (피렌체사)를 직접 헌정하려는 생각에서, 마키아벨리는 (클리치아)의 상연 얼마 후 로마로 돌아가는 친구 베토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dEjs 다른 생각들을 심중에 품고 있었음이 분명한 교황은 베토리를 보자마자 즉시 마키아벨리의 근황과 함께 책이 끝났는지의 여부를 물어왔다. 베토리는 로렌초의 죽음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자신이 그 일부를 읽어보았는데, 좋은 것 같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혼란스러운 정황이 아니었다면 벌써 직접 그것을 헌정하러 왔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교황은 일단 겉으로는 (아무렴, 와야지! 어째 그 책은 반갑고 기쁘게 읽힐 것 같구먼)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베토리는 질시 때문인지 차가운 성격 탓인지는 모르지만, 교황 레오네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마키아벨리의 희망을 서둘러 미리 막아버리려고 하였다. 교황의 말을 전한 3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시기가 책을 읽고 바치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직접 책을 들고 와야 하는지 어떤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억지로 김을 빼놓았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최근 교황의 기분으로 보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한 일에 자네를 굳이 오라고 하고 싶지가 않다네.) 그는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도 똑같은 내용을 써보냈다.
책을 읽고 그것을 바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얼마 전인 2월 24일, 제국 군은 파비아에서 프랑스 군을 무찔렀고, 그로 인해 결국 교황은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와 연합을 뜻한다고 보이는 몇몇 조약들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에스파냐의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클레멘테는 돈도 군대도 잃은 채, 정복자의 뜻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처지에 놓였다. 교황은 레오네에게는 영민함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다만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을 의미할 뿐인 갈팡질팡 정책을 밀고 나가, 서둘러 4월 초하루에 황제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덕분으로, 교황과 황제는 당시 (카이사르의 그늘 아래) 프렌체스코 스포르차(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1401-66)가 아니라, 로도비코의 둘째아들인 프렌체스 마리아를 가리킨다. 그는 1521-1524년, 1529-1535년 동안에 밀라노 공이었다-옮긴이)가 소유하고 있던 밀라노 공국을 함께 지키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제는 교회령 국가들 (그가 페라라 공으로부터 빼앗아 주겠다고 약속한 레초를 포함해서)과 피렌체 국 그리고 그곳에서 메디치 가의 세력을 지켜주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조약에 따르면, 교회령 국가를 지켜주고 메디치 가의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피렌체인들은 관례가 그렇듯이 황제에게 십만 두카토를 지불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피렌체에서 교황, 황제 동맹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축제가 아무런 흥을 내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평화를 희생해서 교황의 안전을 보증받았던 조약도 그 안도감이 오래가지 않았다. 항제는 총독을 통해 자신 명의로 된 조약을 비준하였으나, 헤초 문제를 비롯한 부속 조항들에 대해서는 비준이 연기되었다. 황제의 좋지 않은 성품을 알리는 징후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서 교황은 당시 이미 유럽 정치의 중심 축이 되어 있던 마드리드궁에 조카인 살비아티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여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동행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과거에 추기경에 대한 충성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전술론)이 인쇄되었을 때, 로마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이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의 궁에서 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그의 부친인 야코포였다. 그는 기품 있는 노인이자 훌륭한 시민이었다. 추기경의 자줏빛 옷조차도 언제나 아버지의 꾸지람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5월 3일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마키아벨리를 거명한 사람도 바로 야코포였다. 그리고 13일에 그는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었다. (네가 더불어 자문을 구할 만한 서기관으로 내가 보기엔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제일 적임자인 듯하구나. 내가 이에 대해 성하께 말씀올렸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않고 계신다. 어떻게 하실지 두고 보자꾸나.)
그 기품 있는 노인은 바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품행과 풍속에서 매우 엄격한 사람이어서, 아들의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뚝뚝하게 꾸짖곤 하였다. 이로 보아, 이러한 측면에서 니콜로에게 붙어다니던 악평은 사람들이 주장하던 바와는 달리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야코포가 떠도는 얘기들보다는 사실적 측면을 더 중시했든지. 하지만 교황의 망설임은 결국 그 제의를 거절하는 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정치적인 혹은 도덕적인 생각에서 였는지 아니면 그를 다른 데 쓰기 위함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야코포가 아들에게 보낸 5월 17일자 편지에서 (교황께서 꺼려하니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만 접어야 되겠다)고 한 말이나, 24일자 편지에서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고 한 말뿐이다. 애석할지니! 그가 서기관으로 동행했더라면, 그 사행은 새로운 의미를 가졌을 텐데. 새로운 경험을 한 마키아벨리의 머리에서 또 무엇이 나왔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처럼 이베리아 행이 좌절되고, 아마 모든 일이 이미 끝난 뒤 이를 알게 되었을 법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로마로 가서 (피렌체사)를 교황에게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5월의 마지막 며칠 간을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교황이 그를 맞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친절하고 다정한 것이었으리라는 점은 6월 9일 클레멘테가 자신의 사금고에서 그에게 120두카토 금화를 답례로 주도록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로마에 올 때 책 하나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 특유의 열정으로 피력하여 교황의 냉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를 단시간 내에 돌려놓는 데 성공햇던 것이다. 교황은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자신의 정책 어디가 나쁜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스스로 우유부단했던 관계로, 언제나 결단력 있는 정복자의 희생물이었던 것이 지금까지 그의 타성적 행로였다. 인색한 성품 때문에 병사라고 제대로 있을 리 없었고, 레오네가 했던 것과는 달리 관직가 성직록 판매도 주저하니 수중에 돈도 있을리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나쁜 교황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훌륭한 세속 군주가 되기를 망설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미 해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병대 제도였다. 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생각이자 오래전부터 내건 깃발이 아니었던가! 교황과 자문관들, 살비아티, 사돌레토, 심지어는 목석 같은 숌버그조차도 설복되어 그의 말에 넘어가버렸다. 로마냐 사람들을 무장시켜라!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가 쓴 교황의 급전을 가지고 당시 파엔차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냐 총독, 즉 친구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비상한 질병에는 비상한 치유책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 급보의 요지였다. 따라서 총독은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듣고 즉시 그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사안은 매우 중대하며, 바로 여기에 교회령 국가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 나아가서는 거의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안위가 달려 있노라.) 이제 남은 일은 이러한 열정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열정이 과연 총독의 냉담함을 녹일 것이지 아니면 도리어 얼어붙게 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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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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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6. 지혜의 샘
수녀와 신랑감
지천으로 굴러 다니는 개똥도 약에 쓰려고 찾으면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여느 때 흔하던 것도 필요해서 찾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중이 되니 고기가 흔하다’고 하듯이 먹어도 될 때는 없다가 못 먹을 때가 되니 흔해지는 게 그렇다. 노처녀로 있을 때 마땅한 신랑감을 못 구해 안달했다가 막상 수녀가 되니 일등 신랑감이 줄을 서는 예라고나 할까. ‘버스 지난 후에 손 들고’,‘사또 행차 뒤에 나팔 불기’이다. 같은 뜻으로 서양에서는 ‘하느님은 이빨이 없는 사람에게만 호두를 주신다’고 한다. 우리의 인생을 뒤돌아 보면, 필요한 것은 귀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없거나 필요 없는 것은 흘러 넘치는 일이 자주 목격된다. 사막에서는 물이 귀하고 홍수가 난 곳에서는 물이 흘러 넘치듯이. 사후약방문이라고, 죽고 난 후 처방이 나오면 아무 쓸모가 없다.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이를 열심히 활용해야 한다. 혹,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크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삶이란 원래 풍요 속에서도 없고, 없는 가운데서도 있기 마련이니까.
수녀가 되고 나니 신랑감이 흔하다. (The gods send nuts to those who have no teeth.)
윗물과 아랫물
시장에서 물고기를 고를 때는 머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썩을 때 항상 머리부터 썩기시작한다. 그래서 고기의 신선도를 알려면 눈동자와 아가미를 들춰보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국가나 회사 그리고 가정을 막론하고 지도자가 부패하거나 나쁜 짓을 하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썩게마련이다. 지도층 인사가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법도에 맞게 처신하면 아랫사람들은 자연히 따라간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자기의 길을 굽히고 부정을 일삼는 사람이 남의 잘못을 고쳐주었다는 예는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논어에서도 ‘자신을 바로잡지 못하면서 어찌 남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한다. 그래서 군자는 하류에 있기를 싫어한다고 하였다. 강의 하류는 더러운 물의 집산지이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올바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고 한 예기의 구절이나 ‘근원이 흐리면 그 흐름이 맑지 않다’고 한 묵자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The fish always stinks from the head downward.)
외투를 벗기는 따뜻함
식초보다 꿀에 개미나 날파리들이 더 많이 모여들 듯이, 명령조의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이 더 큰 효과를 낸다. 온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격한 말은 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할 때에 곧되 온화하게, 너그럽되 엄하게, 굳세되 사납지 않게, 오만하지 않게 대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존경할 것이다’라고 서경은 전한다. 말이 순한데 따르지 않으면 좋지 못하고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들어 보지 않고 자기 주장부터 내세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춘추는 가르치고 있다. 강한 것이 해로울 때가 있고 유약한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강한 바람보다 따뜻한 햇볕이 외투를 벗기듯, 말은 부드럽게 하는 것이 좋다. 얼마 전 패스트푸드 식당 화장실에서 어깨를 부딪쳐 서로 시비를 겨루다 18세의 재미교포 학생이 22세의 대학생을 칼로 찔러 죽인 일이 있었다. 어깨가 부딪쳤더라도 부드럽게 ‘죄송합니다’ 한마디만 했더라면 한 사람은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숟가락을 놓고’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못된 사람 중에는 이렇게 생명의 나무처럼 부드러운 말을 하는 데도 기어오르는 사람이 있다. 악인은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뼈아픈 말을 함부로 지껄여대나 지혜로운 자의 말은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고 성경은 말한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길 수 있다. 악한 말은 부드럽게 맞받아 주자.
강한 바람보다 따뜻한 햇볕이 외투를 벗긴다.(Honey catches more files than vinegar.)
모르는 게 약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연인과 잘 조리된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음식의 맛과 향만을 즐기면 그만이다. 소가 죽을 때 소리지르는 장면이나 도살장에서 소 껍질이 벗겨지고 고기가 잘리는 모습을 연상하여 입맛을 떨어뜨릴 이유가 없다. 미녀 선발 대회에서는 예쁜 아가씨들의 아름다움만 감상하면 되지. ‘저 아가씨는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생각하여 즐거운 기분을 잡칠 필요가 없는 거와 같다.
모르는 게 약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첫사랑이었으나 여자는 과거에 사랑했다 헤어진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고 마침내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행복감에 젖은 남편이 슬며시 아내에게 ‘과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아내는 처음에는 과거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행복에 겨운 나무꾼이 선녀에게 옷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듯, 장난 섞인 남편의 거듭된 질문에 여자는 결국 지난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말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과거라도 용납할 것 같던 남편은 말을 듣고 난 후부터 번민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서 돌아눕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머리’로는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은 그녀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시험
남자나 여자나 모두 상대방의 진심을 시험해 보고 싶어한다.하지만 시험을 하지 말아야 한다. 모르는 게 약이고, 시험해 보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옹졸한 욕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라는 예수의 주기도문을 머리 속에 떠올려야 한다. 사람은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았다 해서 행복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질투는 꼭 현재의 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두고 미래에 대한 짐작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질투와 파탄을 일으키는 과거의 일, 알고서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는 것보다 모르고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노자는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견해를 표시했다.
‘사람들이 학문에 대하여 열심히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이 생겨난다. 학문이란 것을 배우지 않으면 이 세상에 걱정거리가 없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Where ignorance is bliss, it is folly to be wise.)
원효대사는 중국에 도를 닦으러 가다가 그만둔 일이 있다. 중국에 가던 도중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굴속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 목이 말라 옆에 있던 ‘바가지’의 물을 먹고 갈증을 풀었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간밤에 시원하게 마신 바가지의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은 후 그 곳에서 성불하였다고 한다.
충고 받아들이기
아무리 좋은 지적이나 충고를 해 주더라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현들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답하고 있다. 공자는 “충고해서 잘 이끌어 주되 듣지 않으면 그만 둘 수 밖에 없다”고 하였고 장자는 “항상 무엇엔가 혹해 있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논어는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에 입각하기 때문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착각을 맹신하기 때문이다. 유사종교나 사교에 빠진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착각’을 진리로 맹신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맹수는 항복시킬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항복시키기 어렵고, 깊은 골짜기는 메울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의 꿈은 만족시키기 힘들다고 주역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은 열매 맺을 수 있어도 설익은 지식을 뽐내는 자는 꿈을 이루기가 힘이 든다고 하였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 있으나 강제로 물을 먹일 수 없다.
(You can take a horse to the water, but you can't make him drink.)
방심
그리스 신화를 보자. 제이슨의 배인 아르고호의 조타수 앤키어스는 자기 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예언을 들었다.
“주인님은 주인님이 일구어 낸 포도원에서 생산된 첫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죽을 것입니다.”
그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말하며,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벌을 내리겠노라고 종을 꾸짖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앤키어스는 포도원에서 생산된 첫 포도주를 앞에 놓고 종을 불러 그의 예언이 터무니 없는 엉터리라며 조소를 보냈다. 그러나 그 종은 “틀림없이 되는 쉬운 일, 즉 컵을 입에 대고 마시는 것과 같은 일에도 실수가 있게 마련입니다.“고 말했다. 바로 그 때 다른 종이 급히 뛰어와서 앤키어스에게 포도원 멧돼지 한 마리가 들어와 엉망진창을 만들고있다고 보고했다. 앤키어스는 마시려던 포도주 잔을 내려놓고 급히 나가서 멧돼지를 붙잡으려 했으나, 날뛰는 멧돼지에 받쳐 목숨을 잃었다. 종의 예언과 같이 첫 포도주를 마시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세상만사 손에 확실히 붙들기 전에는 절대로 장담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지듯이 많은 일들이 될 듯 될 듯 하다가 실패로 끝이 났다‘고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도 말했다. 손을 뒤집는 쉬운 일에도 실수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방심은 금물이다.(There's many a slip between cup and lip.)
컵을 입에 갖다대는 간단한 일도 빗나갈 수 있듯이, 틀림없이 된다고 장담하던 일도 실패로 끝날 때가 많다.
시작과 끝
일의 시작은 신중하여야 한다. 신중하라는 말은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 아니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건축이나 토목 공사의 경우를 보자. 도면, 자재, 그리고 인력이 준비된 상태라면 일은 70% 이상 마친 것이나 같다고 한다. 주역에서는 ‘군자는 일을 시작할 때 심사숙고하여 사리 판단을 한 후에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림을 그리려면 흰 바탕을 잘 만든 후에 시작한다‘는 논어의 말과 같이 시작 전에 잘 준비해야 유종의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기초를 든든히 해야 결과적으로 이익을 본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기초를 단단히 하지 않고 졸속 시공을 하면, 개통하자마자 보수공사에 들어가게 되어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성수대교, 삼풍 백화점, 당산 철교 등의 예에서 보듯이 처음부터 기초를 튼튼히 하고 적절한 자재를 쓰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건설했더라면 그러한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범을 잡으러 가려면 튼튼한 밧줄을 준비하여야 한다. 썩은 새끼줄로 범을 잡으려다가는 오히려 범에게 잡아 먹힐 염려가 있다. 시작 전에 준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다. (Agood begining makes a good ending.)
우리 사회는 실패를 교훈으로 삼고 자산화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가 주는 교훈을 망각하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한 후 일을 시작하는 지혜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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