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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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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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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인내심을 가지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 St. 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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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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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과 혼술
혼자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것은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일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혹은 집단 문화가 퇴색하면서 이런 일이 점점 느는 게 현실이다. ‘혼밥’과 ‘혼술’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 새말이다.
그런데 ‘혼자서 하는 말’은 ‘혼잣말’이라 하고, ‘혼자서만 일을 하거나 살림을 꾸려가는 처지’는 ‘혼잣손’이라고 한다. 또한 ‘혼자’의 의미로 쓰일 수 있는 접두사로 ‘홀-’이 있다. 배우자나 형제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홀몸’이란 말이 있고,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가리키는 ‘홀아비’와 ‘홀어미’란 말도 있다.
이런 예를 보면 ‘혼밥’이나 ‘혼술’은 ‘혼잣밥’이나 ‘혼잣술’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혼잣밥’과 ‘혼잣술’ 대신 굳이 ‘혼밥’과 ‘혼술’을 만들어 쓰게 되었을까? 또 ‘홀밥’과 ‘홀술’이란 말은 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혼잣술’이나 ‘혼잣밥’이 이전에 쓰인 말이라면, 이 말에는 혼자 술과 밥을 먹어야 하는 처지에서 오는 외로움과 슬픔이 오롯이 담겼을 것이다. 그런데 ‘혼밥’과 ‘혼술’은 혼자 밥과 술을 먹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세태를 반영하여 만든 새말이다. 낱말의 형태를 바꿔 ‘혼잣밥’과 ‘혼잣술’에 배어 있는 외로움과 슬픔을 걷어낸 것이다. 그러면 ‘홀밥’과 ‘홀술’은 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홀아비, 홀어미, 홀씨 …’에 답이 있다. ‘홀-’에는 ‘짝을 갖추지 못한’이란 뜻이 있으니 밥과 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혼밥’과 ‘혼술’이 정착했으니 혼자 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새말은 늘어날 것이다. ‘혼자 하는 놀이’인 ‘혼놀’도 그런 예다. 그런데 ‘혼놀이’가 아닌 ‘혼놀’이다. 글자 수를 맞추려는 뜻도 읽힌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단위명사
한국어에는 물건을 세는 단위명사가 유난히 많다. 그 중에서 오늘 소개해 드릴 단위명사는 ‘매, 손, 죽, 제, 축, 쾌, 두름, 쌈, 접’ 등인데, 나열한 순서는 적은 개수에서부터 점점 많은 개수의 물건을 세는 단위명사의 순이다.
먼저 ‘매’는 젓가락 한 쌍을 세는 단위로서, ‘젓가락 한 매’는 ‘젓가락 두 짝’을 말한다. 또한 한자어 단위명사인 ‘매(枚)’는 ‘원고지 백 매’처럼 종이나 널빤지 따위를 세는 단위로 쓰이는데, 이 경우에는 ‘장(張)’으로 순화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손’은 한 손에 잡을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로서, 조기, 고등어 등의 생선을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두 마리 분량을 말한다.
‘죽’은 옷이나 그릇 따위의 열 벌을 묶어 세는 단위인데, 여기에서 ‘죽이 맞다’는 속담이 나왔다. ‘죽이 맞다’는 ‘서로 뜻이 맞다’는 의미인데, 그릇이 열 개면 한 죽이 되는 것처럼 서로 뜻이 맞거나 행동이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제’는 한약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로서, ‘한 제’는 탕약 스무 첩의 분량을 말한다. ‘제(劑)’는 한자로 ‘약제 제’이므로 발음이 비슷한 ‘재’로 잘못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축’과 ‘쾌’, ‘두름’은 모두 20마리를 묶은 단위인데, ‘축’은 오징어 스무 마리를 묶어 세는 단위이고, ‘쾌’는 북어 스무 마리를 묶어 세는 단위이며, ‘두름’은 조기 따위의 물고기를 한 줄에 열 마리씩 두 줄로 엮어 세는 단위이다.
끝으로 ‘쌈’은 바늘을 묶어 세는 단위로서, ‘한 쌈’은 바늘 스물네 개를 이르고, ‘접’은 채소나 과일 따위를 묶어 세는 단위로서, ‘한 접’은 채소나 과일 백 개를 이른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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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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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 - 윤동주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라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 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 폭으로
가지 우에 퍼지고
둥근 달과 기러기를 불러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에 타고, 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의 눈물을 비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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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밭 가에서 - 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 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앉은 석경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앟고
젖어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있을 때
북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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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 이해인
한 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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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흰구름 단상 1~6) - 이해인
1
비온 뒤의 하늘. 하늘 위의 흰구름. 구름이 아름다운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잠시 시선을 둔 사이 어느새 모양이 바뀌는 구름. 어린 시절 그리 했던 것처럼 잔디밭에 누워 흰구름을 실컷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구름에 대한 노래, 구름에 대한 시, 구름에 대한 그림을 모으며 나는 구름이 좋아 수녀 이름도 구름(Cloud)으로 하지 않았던가. 시인 헤세(Hesse)와 셸리(Shelley)의 `구름`. 성서에 자주 나오는 구름의 상징성을 논문으로 쓰고 싶던 나의 갈망도 이젠 구름 속에 숨고 말았다. 푸른 하늘 위에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처럼 내 안에 떠다니는 구름 같은 생각들을 종종 종이 위에 적어 둔다. 그래서 `흰구름 단상`이라 부쳐 놓고 내 생각들을 그려 넣으면 이것이 후에는 시와 수필의 소재가 되고 편지도 된다.
2
나이 들수록 새로운 사귐, 새로운 만남이 혹시 사랑으로 오더라도 왠지 두렵다. 누가 이것을 케케묵은 생각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항아리 속의 오래된 장맛처럼, 낡은 일기장에 얹힌 세월의 향기처럼, 편안하고 담담하고 낯설지 않는 것이 나를 기쁘게 된다. 새 구두를 며칠 신다가도 이내 낡은 구두를 다시 찾아 신게 되고, 어쩌다 식탁에서 자리가 모자라서 두리번거리다가 새 얼굴인 수녀들이 오라고 해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들을 얼른 찾아가게 된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개방성과 선선함이 좋은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역시 옛 것이 좋고 오래된 것, 낯익은 것에 집착하는 나이기에 가끔은 답답하리만큼 보수적이고 고루하다는 평을 듣는지도 모르겠다.
3
미국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유진 수사님이 어디서 구했는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조이스 킬머(Joyce Kilmer)의 사망 이후 그를 추모하는 글이 실린 1918년 8월 19일자 <뉴욕 타임스>의 추모 기사 원본을 오려서 보내 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거의 80년 된 기사이니 빛깔이 바래고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졌지만 원본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느낌... 여러 시인들이 추모 시구를 모아 놓은 내용도 마음에 들어 몇 개 복사해서 피천득 선생님과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벗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겠다. `시는 나와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하느님뿐` 이라고 노래한 J. 킬머의 `나무들`이란 시가 어느 때보다도 생각나는 날이다. 사소한 일로 마음이 부대끼고 갈등 속에 있다가도 창 밖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뭐 그걸 가지고 그래?`하며 빙그레 웃는 것도 같고... 나무의 모습을 닮은 성자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4
간밤엔 웬 꿈을 그리도 많이 꾸었을까? 평소 생활을 반영해 주기도 하는 꿈의 세계.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너무 많은 의미가 있음을 나도 자주 체험하는 편이다. 피정중에도 지도자들이 가끔 꿈을 주제로 묵상시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깨고 나면 잊어버리는 꿈이 더 많지만 수도원에 오래 살면서 나의 꿈의 세계도 이젠 좀 정화되고 아름답게 성숙되고 있음을 문득 느끼며 스스로 고마워할 때가 있다.
5
“수녀, 잘 있었나? 실은 간밤 내 꿈에 수녀 얼굴이 보여서 말이야. 혹시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가 하고 전화 걸었지.” 아침에 걸려 온 구상 선생님의 전화. 몇 년 전. 내가 매스컴에 시달리며 괴로워할 때도 옆에 함께 안타까워하시며 힘과 위로가 되어 주셨던 선생님은 내가 당신의 조카딸쯤 되는 것 같다고 웃으신다. “시인 노릇보다도 수녀 노릇을 더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선생님은 오늘도 사면이 시집으로 둘러 싸이고 새소리도 들리는 서재에서 시를 쓰고 계시겠지.
6
미국 오하이오에서 마종기 시인이 보내 준 두권의 시집. <그 나라 하늘빛>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여러 번 읽었다. `바람의 말` `나비의 꿈` `비오는 날` `우화의 강`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들이다. 평범한 일상의 삶. 남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그토록 깊고, 절제되고, 따뜻한 시를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의 눈과 마음을 한껏 부러워했다. 장미꽃 우표가 붙은 그의 편지도 시만큼이나 아름답고 따뜻하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기념 삽질을 하며 흙을 붓다가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왈칵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아동문학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아버지 마해송 씨의 동화 모래알고금` `앙그리께`를 밤새워 읽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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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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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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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 이호우
진달래 사태진 골에
돌 돌 돌 물 흐르는 소리,
제법 귀를 쫑긋
듣고 섰던 노루란 놈,
열적게 껑청 뛰달아
봄이 깜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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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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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 - 발레리 / 김현 옮김
뺨 색깔의 하늘이 마침내
눈길의 애무에 맡겨지고
시간이 금빛으로 소멸하기까지
장미빛 색조 속에 노닐 때
이러한 그림이 유혹하는
쾌락의 벙어리 앞에서
띠 풀린 그림자가 춤추다가
저녁 어스름에 뭍히려 한다.
떠도는 이 띠는
공기의 숨결 속에서
이 세계와 내 침묵의
그지없는 유대를 끊을락말락한다…….
부재인가 현존이런가…… 난 정말 혼자이다.
그리고 어두워라, 오 그윽한 수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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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감성사전
대학입시
대학생을 선발한다는 명목으로 재수생을 배출해 내는 시험제도.
고문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인간이 살고 있는 나라라면 제일 먼저 공연 정지 처분을 내려야 할 악마의 조작극이다.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서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일로서 무고한 양민을 폐인으로 만들기 쉬운 인간이하의 월권행위이다. 비록 손상된 육신은 회복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상처받은 영혼은 치유되지 않는다. 고문을 묵과하는 처사는 살인을 묵과하는 처사보다 몇 배나 더 비열하고 잔인하다.
비상구
이 세상의 모든 통로 또는 위급할 때의 모든 하나님.
술
마약이다 절제하면 쾌락을 가져다 주지만 과용하면 불행을 초래한다. 마실 때는 찬양하게 만들고 끊을 때는 저주하게 만든다. 유사 이래로 물에 빠져 죽은 사라보다 술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다는 설도 있다. 뼈저린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인 쾌락을 담보로 영구적인 불행을 대부해 주는 악마의 독액이다. 그러나 술은 때로 사랑을 불붙게 만드는 묘약이 되기도 하며 메마른 정서를 적셔주는 감로주가 되기도 한다. 이태백과 같은 시선은 술 속에서 달빛과 시를 건져내기도 했으며 오마르하이얌과 같은 주성은 술 속에서 루비이야트라는 언어의 보석을 건져내기도 했다.
음주운전
자동차가 운전수 대신 술에 취한 승객을 탑승시킨 채 교통사고를 일으킬 만한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는 행위. 또는 교통수단을 이용한 취중 살인 예비음모.
불행
행복이라는 이름의 나무 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 나무 만한 크기의 그늘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그 그늘까지 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
신이 매사를 완벽하게 선처해 놓았는데도 이에 불만을 품은 인간들이 처우개선을 구두로 상소하는 행위.
주정뱅이
술이 인간을 마셔버리고 동물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하려고 발악적으로 애쓰는 사람
엄숙
권위주의가 형식주의와 결합해서 만들어낸 비만형의 부랑아.
타인에 대한 존엄성보다는 자신에 대한 존엄성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용상표. 자신을 사실이상의 인격체로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착용하는 무형의 가면. 행사장이나 회의실 같은 장소에 의례적으로 동참하는 고위층의 들러리. 무언으로 강요되는 도덕의 중량.
눈보라
겨울이 깊어지면 바람의 함성을 타고 수 천만 마리의 백색 나비 떼가 어지럽게 난무하며 마을에 출몰한다. 눈보라다. 때로는 길이 막히고 통신이 두절된다. 시간도 깊어지고 그리움도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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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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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소설가의 유명도에 대하여
가끔 바의 카운터 같은 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옆에 앉은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한 소문 얘기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얘기를 어렴풋이 듣고 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 소문의 대상은 나도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어느쪽이든 그 나름으로 재미있다. 제일 재미 없는 얘기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경우로, '저 말이지, 누구 누구 말이야, 그 자식 굉장한 놈이야. 재능이 있어' 같은 얘기가 나오면 내 쪽도 시큰둥해져 '빨리 험담이나 하지' 하고 마음 속으로 채근을 하기도 한다. '그 자식 바보라니까. 정말 바보 얼간이라구. 도저히 구제불능이야'하는 기세이면, 어차피 남 얘기니까 내 쪽도 유쾌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인가 요코하마에 있는 '스토크' 란 재즈 클럽의 카운터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옆에 앉은 샐러리맨인 긋한 두 사내가 줄곧 신교지 기미에 얘기를 하고 있걸래, 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귀를 솔깃하고 있었더니, 느닷없이 '저 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 있잖아, 그 사람 말야-' 라는 식으로 얘기가 바뀌어 그 다음은 듣지도 않고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찌하여 신교지 기미에 얘기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 얘기로 화제가 바뀔 수 있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런 때는 정말 애책이 없다. '음, 이제 신교지 기미에 얘기는 이쯤하고 말이야, 다른 장르의 얘기를 좀 해보자구' '뭐가 놓을까?' '소설 얘기나 할까' '젊은 작가들 것 워 읽은 거 있어?' '그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하는 정도의 쿠션이 있으면 나로서도 일단 경계 태세를 갖출 수 있어 좋은데, 못 밑에서 바로 위가 시작되는 것 같은 식으로 화제를 바꾸니, 그만 온더롯 잔에 콧부리를 부딪히고 마는 사태가 벌러지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안면이 없는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거는 일도 있다. 나는 TV에 나가지 않으니까 아주 드문 정도로 그치지만, 쉴 새 없이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몹시 황당하리라고 추측된다. 잡지 사진쯤이라면 실물을 보아도 의외로 알아 먹지 못라는 경우가 많은데,TV라고 하는 것은 거의 실물에 가깝게 비춰지니까 실로 난처한 모양이다. 그런 까닭으로 난 TV 출연은 하지 않는다. 가끔씩 TV 방송국으로부터 출연 의뢰가 오면 '인형 옷을 입고 출연해도 괜찮다면 나가지요' 라고 농담으로 응수하는데,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꼭 나와 주십시오' 라고 한경우는 한 번도 없다. 워 당연지사라고는 생각하지만서도.
이 난에 그림을 그려 주시고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도 한 번 TV에 나갔다가 그 후 여러모로 곤욕을 치뤘다고 한다. 그 다음날 따르릉따르릉 하고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 와서는,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TV에 출연했더군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TV라고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뭐니 뭐니 해도 문예지가 제일이다. 문예지에 소설을 발표해 본들 전화 한 통 안 걸려오니 말씀이죠. 한번은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야쿠르트대 츄니치전을 보고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무라카미씨, 사인해 주세요'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진구 구장의 외야우익수석에 오는 여자에게는 대개 호감을 갖고 있으므로 '예, 그러죠'라고 대답하자, 상대방 여자는 '저-, 힘내라 야쿠르트 스왈로즈 라고 써 주시겠어요?'란다. 이런 사람을 나는 비교적 좋아한다. 한번은 소부선 전철 안에서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을 걸어 온 적도 있다. 단 이런 경우 나는 몹시 얼어 버리는 타입이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상대방에게 실례될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전철 안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힐끗힐끗 보니까 매우 부끄럽다. 야쿠르트대 쥬니치전만큼 텅텅 비어 있다면 내 쪽도 마음이 편할텐데. 아카사카에 있는 베르비라는 맨션 빌딩의 로비의자에 부루퉁하게 앉아 있을 때도(마누라의 쇼핑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말을 걸어 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의 상대방은 젊은 청년이었는데 '무라카미씨, 열심히 하십시오'라기에, 나도 모르게 '옛 열심히 하겠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쯤되면 '프로 야구 뉴스'의 인터뷰 같은 꼴이다. 내친 김에 생각나는 대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롯폰기에서 젊은 커플이 말을 걸어 온 적도 있다. 오차노미즈의 메이지대학과신주쿠의 이세탄 백화점의 이층과 후지사돠에 있는 세이부 백화점과 오타루의 길모퉁이에서 한 번씩. 오타루에서 내게 말을 건 사람의 얘기에 의하면 홋카이도에서는 내책이 제법 잘 팔린다고 한다. 암만 그렇다고 오타루역 앞 상점가에서 잘도 나 같은 사람의얼굴을 알아봤다고 내심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 둘 손꼽아 보니,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육 년 동안에 길러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내게 아는 척을 한 횟수는 전부 여덟 번이 된다. 대충 일년에 한 번 하고 나머지 조금의 비율인 셈인데,이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 빈도'가 나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에게 많은 수치인지 적은 수치인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옛날, 모 가수가 살고 있는 맨션 옆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그 모 가수가 차에서 현관까지의 십여 미터 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필시 팬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였겠지만 한 시가 넘은 한밤중, 사방에 사람 그림다 하나 없을 때 조차도 그랬다. 유명인이란 상당히 기묘한 인생읗 강요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세라복을 입은 연필
얼마 전에 좀 볼일이 있어서 어떤 잡지사의 편집자와 만났다. 일이 다 끝난 후 둘이서 술을 마시며 세상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화제가 학용품 얘기로 옮아 갔다. 학용품 얘기는 나도 퍽 좋아하는지라, 볼펜은 어느 게 좋다는 등, 지우개는 어느 게 최고라는 둥 하는 두서없는 얘기를 술집에 앉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러던 중 상대방이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늘 어느 정도 딱딱한 연필을 사용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늘 F심 연필을 사용하니까 '예, F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그렇습니까. 그런데 F심 연필은, 전 늘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란다. 술자리에서의일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요. 느끼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로 많은 세상입니다'하는 정도로 웃고 있는 사이에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는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얘기만이 점점 마음에 걸렸다. 왜 F심 연필이 하필이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인지를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생각할수록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하여 영문도 모르는 채 F심 연필이 어김없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으로 보여지곤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무척 난감하다. 최근에는 F심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세라복차림의 여학생을 상기하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체가 한 번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이미지가 거꾸로 물체를 규정짓고 만다는 현상이까, 어찌 됐든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폐를 끼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그대로 진행되면 언젠가는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성욕을 자극당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직업상 연필을 사용하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상당히 번거롭게 될 것이다. 차라리 F심 연필을 쓰지 말고 HB심으로 바꿔 볼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 시점에서 '만약 F심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이라면, HB는 학생복을 입은 남자 고등학생이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ㄷ르고 만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건 또 이것대로 영 달갑지가 않다. 나는 원래 세라복이니 학생복이니 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세라복이란 멀찌감치에서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멋있어 보이지만,가까이 가서 보면 예상 외로 더럽고, 별로 볼품이 있는 옷도 아니다. 학생복이 그 얼마나 더러운가에 대해거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H심은 어떤가. 이건 또 왠지 폴리스(록 밴드 폴리스 입니다.)의 멤버인 스팅하고 분위기가 비슷하다. 스팅에 대해서라면 나는 딱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감정이 좋고 나쁘고는 차치하고 연필이 스팅과 닮았다는 느낌은 어쩐지 심히 껄끄러운 일이다. 늘 귀 밑에서 '몰리스'의 음악이 쩡쩡 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H심보다 딱딱한 연필이나 B심보다 부드러운 연필은 작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결국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 이거나, '학생복을 입은 남고생' 이거나, '폴리스의 스팅' 이란 세가지 가능성이랄까, 선택의 여지가 세 가지 밖에 없는 셈이다. 어쩌다가 하찮은 연필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 빠져 들게 됐는 지 잘 모르겠지만, 그원인은 'F심 연필은 왠지 에라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라는 쓸데없는 말을 꺼낸 편집자에게 있다. 거기에서부터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이미지가 퍼져 나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이 원고의 고칠 부분을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쓸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볼펜에 대해서는 최대한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볼펜은 그저 단순히 볼펜이다.
그런데 연필이란 제법 귀여운 필기구이다. 요즘은 샤프 펜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학용품계에서 연필이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간 저하됐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는 사람의-적어도 나의-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 있다. 단순하다면 시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 수많은 수수께끼와 예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최초로 연필을 만든 사람은 꽤나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음이 분명하리라. 나는 치즈를 집어넣은 치쿠와(대나무 줄기처럼 원통형으로 만든 어묵)를 발명한 사람에 대해거 늘 외경심을 품고 있는데, 치즈를 넣은 치부와보다는 연필을 만드는 쪽이 발상으로 보나 기술로 보나 훨씬 더 복잡할 듯하다.
나는 원고를 쓰다가 자잔하게 '고칠' 부분이 생기면 재개 연필을 사용한다. 샤프 펜슬도 편리하니까 곧잘 사용하긴 하지만, 감촉이나 쓰는 맛으로 치자면 아주 평봄한 연필 족이 작업에 더 적합하다. 아침나절에 한 한 다스 정도 연필을 깍아, 언더록용잔에다 담아 두었다가는 그걸 차례차례로 써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얘기는 또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연ㅎ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의 자태처럼 보이거나 하면 몹시 곤란 해지는 것이다.
"이번엔 어디, 널 써 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는 둥 혼자서 놀고 있노라면 작업ㅂ에는 눈꼽만큼도 진전이 없고, 바보 같은 짓이다.
- 신조사의 스즈키 치카라씨 덕분에 터무니 없는 일을 당한 셈인데, 본인은 곤드레가 되어 자기가 한 말을 기억조차 못한다. '예? 그런 얘길 했습니까?왜 F심 연필이 여학생이 됐지!' 하며 말이다. 그런 걸 내가 알 턱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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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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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8. 지혜로 보는 생과 사
솔로몬이 본 헛된 인생
솔로몬의 인생론인 성경 전도서에 따르면, ‘나는 나의 헛된 세상살이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로운 사람도 젊어서 죽는 사람도 있고 악한 자도 오래 사는 자가 있다.’고 하여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음을 실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마천과 같은 견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인간의 삶에 대하여’는 사마천과 달이 모든 것을 하느님이 정햐여 준다는 천정론을 펴고 있다. 솔로몬은‘나는 신중하게 모든 것을 살펴보고 의로운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들이 하는 일이 모두 하느님손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였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의롭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죽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 빨리 죽지 않는 방법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불공평한 인생
솔로몬은 불공정한 세상살이에 대해 여러 말을 하였다. ‘신성한 법정에서도 악이 있고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에 악이 있다’,‘하느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부귀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함을 주어 굶어죽게 한다’,‘의로운 사람이 악인의 벌을 받고 악인이 의로운 사람의 상을 받는다’는 말들이 그것들이다. 솔로몬은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을 정말 알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불공평하게 차별대우하는 창조자 하느님께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따지기보다 공자나 맹자와 같은 숙명론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는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오래 전에 운명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사람이 어떻게 될 것도 정해진 것이며, 사람보다 강한 하느님과 다투어봐야 맨주먹으로 바위치기와 같이 자신만 손해이다. 선한 자나 깨끗한 자, 더러운 자 모두가 같은 운명이므로 선한 자가 악한 자보다 더 낳다고 볼 수 없다.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에서 사람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결론
인간은 불공평하지만 이것이 바로 인가의 공동운명이다. 왜 나를 낳았냐고 우리 부모에게 대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듯이 왜 우리를 불공평하게 창조했느냐고 창조주에게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명령의 준말인 천명으로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자는 오래오래 생각한 후에,‘살거 즉음은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느니라’고 하였다.
욕을 많이 얻어 먹은 사람이 오래 산다.
나쁜 놈이 오래살든 훌륭한 사람이 빨리 죽든, 우리는 하늘이 준 짧은 일생 동안 먹고 마시며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는 일이 제일 좋은 일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인 것임을 알아두자.
운명
사람의 생사회복을 주관하는 이는 하느님이다. 우리는 이를 운명이라고 한다. 죽어야 할 운명이면 발목까지 차는 물에 빠져 익사 할 수 있고 살아야 할 운명이면 망망대해 에 빠져도 살아남게 되어 있다. 미얀마의 랭군 아웅산 장군 묘역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사건이나, 괌도 칼기 추락사건을 보자.‘명줄’이 고래‘힘줄’같이 질긴 사람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죄없이 ‘도매금’으로 죽었다. 왜 어떤 사람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외석종신하고 어떤 사람은 비명에 가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솔로몬은‘의로운 사람도 젊어서 죽는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도 오래오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하느님은 모든 것을 자기 목적에 맞도록 만들었으므로 악인들은 재앙의 날을 위해 존재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악인이 오래 산다고 즐거워 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것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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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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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Ulysses:1922) - 조이스 2/2
6장 하데스. 더블린 거리와 공동묘지
오전 한 시 블룸 사이먼 디덜러스 칸닝험 잭파우어 네 사람이 디그남의 장례 마차를 타고 묘지를 향해 출발한다. 이들은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라든지 그 밖에 여러가지 일들에 대하여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것은 블룸은 언제나 모두에게서 경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지날 때 통행인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곧 묘지의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 때 블룸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의 뒤에 선 채 소년의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칼과 새하얀 칼라 속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목덜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불쌍한 소년! 아버지가 죽었을 때 곁에 있었을까? 둘 다 아무런 의식도 없었을 테지. 드디어 인부들이 관을 교회 안으로 옮겨 왔다. 뒤이어 하얀 옷을 걸친 신부가 나타났다. 그는 책을 펴 들고 봉독하고 나서 라틴어로 기도를 했다. 간단한 절차가 끝나자 인부들이 들어와 관을 손수레에 실었다. 그리고 묘지로 향하였다. 얼마 뒤 관 위에는 흙더미가 덮이기 시작하였다. 블룸은 얼굴을 외면했다. '아직 녀석이 살았다면 어떡하지? 흥 천만에! 그런 일이 있다면 큰일 날 노릇이지. 녀석은 죽은 걸. 암 그렇고말고. 월요일에 죽었으니까. 심장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든가, 아니면 전기 벨이나 전화를 장치하든가 하는 법이 있음직도 하지 않는가. 조난 신호 시체는 사흘 동안 그대로 놓아 두라. 여름에는 기간이 좀 오랜 셈이지 하긴 죽은 것만 분명히 판명되면 곧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흙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7장 아이올로스. 신문사
블룸은 프리먼 신문사에 나타났다. 키즈의 광고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신문사는 한창 시끄럽고 떠들썩하다. 그는 먼저 교정 부장에게 가서 광고의 게재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다음에 편집장에게 가서 프리먼 신문사의 관리를 받고 있는 텔레그라프 신문의 토요일 붉은색 판에 키즈의 광고를 크게 내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신문사에는 사이먼 디덜러스 램버트 논설 위원 맥휴 교수 그리고 클라우포드도 함께 참석하고 있다. 모두들 신문에 보도된 단 도우슨의 아름답게 꾸민 말로 쓰여진 연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때 사이몬과 램버트가 한잔하러 밖으로 나간다. 뒤이어 스티븐이 디지 교장에게 부탁받은 원고를 가지고 신문사를 방문하였다. 원고를 받아 본 편집장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구창이라? 허어 자넨 언제 직업은 바꿨나?"
"아닙니다. 그건 제 원고가 아니라 디지 씨에게 부탁을 받아 쓴 겁니다"
스티븐이 대답하자 편집장은 더블린의 생활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권했다.
"무언가 강하게 어필해 오는 것을 써 주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말이야"
8장 레스트리고니언즈. 더블린 시 한복판
오후 한 시. 블룸은 신문사에서 나왔다. 그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이제 그는 국립 도서관에 가서 킬케니피플을 조사하는 것이다. 걷고 있는 그에게 미국의 전도사가 포교하기 위한 전단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엘리야가 왔다!'
시몬의 교회 부흥 운동을 벌리고 있는 '존 알렉산더 다위'가 왔다는 선전이었다.
'흥, 한몫 볼 셈이군'
구름이 햇빛을 가렸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도 어두운 그늘이 덮였다. 디그넘이 죽었다. 출산의 고통 일 초마다 어디선가 한 사람씩 태어난다. 또한 일 초마다 한 사람씩 죽어간다. 내가 오분 전에 물오리에게 먹이를 던져 주고 난 뒤에도 벌써 삼백 명이 죽었을 것이다. 브라스트 사무소의 시간표가 그로 하여금 시차에 대한 의문을 종일 품게 했다. 힐리점의 샌드위치 맨 광고를 보자 그는 자신이 그곳에 근무하던 때를 상기했다. 거리를 오락가락하는 순경들의 무리가 재학 당시 보어 전쟁에 대한 반대 데모를 떠오르게 했다. 블룸은 데비번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보일란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블룸은 아내의 부정한 소행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는 되도록 화제를 돌려가며 치즈 샌드위치 등으로 주렸던 창자를 채웠다. 포도주도 마셨다. 그는 다소 거나한 기분으로 자유 분방한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서른 가지의 식사라. 호사스런 타후크 연회, 상류 계급의 야회복 반나체의 귀부인, 아내 마리언과 함께 즐기던 지난 날의 바닷가, 아름다운 여신들 신들의 회식 광경, 그 요리와 우리들이 6펜스짜리 점심. 식당의 유리창에는 파리가 윙윙거리고 있었다. 블룸은 식당에서 나왔다. 그는 여신의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박물관으로 향하였다. 블룸이 박물관 근처에 이르렀을 때 보일란이 눈에 띄어 박물관으로 황급히 뛰어들어갔다.
9장 스킬라와 카립디스. 국립 도서관
오후 두 시 더블린 국립 도서관에는 스티븐과 당대의 젊은 문학가들이 모여 셰익스피어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의 역사적 진실성의 연관 및 햄릿의 성격 예를 들면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고향에 두고 온 그의 아내와 그의 동생과의 부정한 관계를 소재를 했다는 것,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기질에는 이아고나 샤일록과 같은 기질이 있어 "오셀로"나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 자신을 드러낸 작품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회고주의를 추구하는 아일랜드 문예 부흥 운동의 참가자들과 모더니즘을 추구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 스티븐과의 의견 대립을 다루고 있다. 스티븐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털어 놓는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인생이 그의 인식의 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내면에서 더 나갈 수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통일과 형태를 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타난 예술은 깊어 가는 그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술은 예술이다. 인생은 인생이다'라는 식으로 고집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노릇이죠"
그는 또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아버지란 존재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악입니다. 자연 속에서 부자를 결합시키는 것은 한 순간의 맹목적인 욕정의 발로인 것입니다. 부권이란 법률상의 가정인 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거나 또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엉뚱한 의문을 끄집어내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관념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10장 배회하는 바위들. 거리
거리의 풍경. 세 시와 네 시 사이의 더블린 거리의 장면이다. 스티븐이 재학했던 클론고즈 우드 칼리지의 교장 콘미 신부가 거리를 걷는다. 디덜러스의 집에서는 스티븐의 여동생들이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는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장난조로 마구 지껄이고 있다. 블룸은 자기 아내가 즐겨 읽는 묘한 책을 사기 위해 책방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때 "죄의 감미로움"이 눈에 띄었다. 이게 아내에게 맞겠군! 그는 책을 펼쳐 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받은 돌비라를 잘라 멋드러진 가운과 비싼 옷깃에 모두 써 버렸다. 그이를 위해서였다. 라울을 위하여!
'라울을 위하여...'
블룸에게는 보일란이 바로 그 라울처럼 느껴졌다. 같은 시각에 스티븐은 책방 앞에서 "여자에게 매혹되는 비결"이라는 책을 펼쳐 읽고 있었다. 그것을 여동생 딜리에게 들키자 당황한다. 다음 순간 그는 딜리가 갖고 있는 프랑스 어 기초 독본을 보면서 요즈음 집안 형편을 들었다. 그가 집에 남기고 온 책들이 전당포에 가 있다는 얘기며 살림이 몹시 옹색하다는 얘기를 듣고 심한 가책을 느꼈다.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였다.
11장 세이렌. 주점
오후 네 시 오먼드 바의 음악 감상실
오먼드 바의 웨이트리스인 흑갈색 머리의 도즈와 금발의 케네디는 그 앞을 지나는 마차 행렬을 창 밖으로 내다보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스티븐의 아버지가 들어섰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면서 도즈에게 은근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뒤에 보일란이 마차를 몰고 왔다. 그는 블룸 부인과 만날 시간을 조금 앞두고 오먼드 바에 들른 것이다. 보일란이 들어서자 도즈와 케네디는 그를 둘러싸고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보일란은 오먼드 바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덜컹덜컹...'
한편 블룸은 애인 마사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편지 쓸 종이와 봉투를 사들고 "죄의 쾌락"을 옆에 낀 채 오먼드 바로 향하였다. 걸어가는 블룸의 머리에는 아내가 보일란과 밀회하기로 되어 있는 시간이 떠올랐다. 오후 네 시경이었다. 블룸은 오먼드 바 근처에서 우연히 친구 슬딩을 만나 함께 오먼드바로 들어가 식사를 하였다. 블룸은 마침 마사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라 마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 앞에 그려 보았다. 동시에 젊은 날의 마리언 모습도 떠올랐다. 블룸은 마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벤 달라스가 굵은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딱딱. 맹인의 지팡이 더듬는 소리. 딱딱딱. 맹인이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딱딱딱딱딱. 이 소리는 마리언과 보일란의 밀회가 다가옴에 따라 블룸의 심장 박동 소리와 혼동이 되었다
12장 키클롭스. 바니커넌 주점
오후 다섯 시. 바니커넌 주점 정체 모를 한 사람의 술꾼이 화자로 등장한다. 주점에 들어선 블룸은 시민과 한데 어울려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 그는 사형 제도며, 아구창에 대한 대책 문제며, 위생 운동 등 여러가지 문제에 걸쳐 자기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블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오히려 유태인계 블룸을 앞에 놓고 유태인들을 마구 헐뜯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그 말에 상대하지 않고 있었던 블룸도 차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드디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면서 그들을 향하여 크게 소리질렀다.
"이봐 멘델스존도 마르크스도 스피노자도 너희들의 하느님 예수도 다유태인이었어..."
이 때 별안간 큰 지진이 일어났다
13장 나우시카. 샌디마운트의 해변
오후 여섯 시 블룸은 오늘 아침 스티븐이 명상에 잠겨 거닐던 샌디마운트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가까운 바윗돌 위에 세 처녀가 나와 바닷바람을 쏘이며 불꽃 구경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시쉬 카프리, 에디보드맨, 가티 맥도웰이었다. 가티는 첫눈에 마음이 끌리는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들 중에 하나가 뿔을 찼다. 이 때 블룸은 바위 틈으로 굴러가는 그 뿔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티의 스커트 밑으로 굴러가도록 겨냥해 던졌다. 그 때문에 뿔을 주으려던 가티의 스커트가 젖혀지면서 속이 들여다 보였다. 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소녀는 블룸의 눈에 고요히 감돌고 있는 정열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블룸은 가티가 불꽃을 보려고 되돌아서거나 그네를 타거나 얕은 개울을 건널 때 스커트 밑으로 드러나곤 하는 하얀 허벅다리를 훔쳐보며 자위 행위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을 뉘우치면서 생각했다. 그녀의 눈망울 속에는 면죄시킬 수 있는 말이 담겨져 있다고 블룸은 혼자 남아서 아내와 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든 여성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내에게 사 주기로 한 화장수도 생각하였다
아홉 시가 가까워왔다
블룸의 뇌리에 오늘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분수처럼 흘러가는 것이었다.
14장 태양신의 황소들 산부인과
산부인과 장면 입원 중인 퓨포이 부인에게 문병을 갔다. 밤 열 시경이었다. 거기엔 이미 블룸이 아는 의학생과 스티븐 등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블룸도 그들 틈에 끼었다. 그들과 함께 산부인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산인 경우에 산모를 살려야 하는가, 아이를 살려야 하는가 등 모두들 술에 취해 음담을 섞어가며 외설스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층 병실에서 퓨포이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다는 기별이 왔다. 바로 그 때 번개가 번쩍이며 폭우가 쏟아진다. 온 좌석이 신바람이 나서 농담을 지껄이고 있는 사이에도 블룸은 마냥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자 바크의 술집으로 가세!"
갑자기 스티븐이 소리칠 때에야 블룸은 비로소 공상에서 깨어났다. 퓨포이 씨를 위해서 축배를 들자는 것이었다. 모두 환성을 지르며 몰려나갔다. 블룸도 따라 나섰다. 그들은 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밤거리로 향했다.
15장 키르케. 밤거리
블룸은 술이 취한 채 마보트 가를 헤매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린 뒤라 짙은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블룸은 술 취한 스티븐을 보살피기 위해 스티븐을 뒤따라 가다 짙은 안개 속에서 그를 놓친다. 밤의 마보트 거리는 난폭한 군인들 술꾼들 비틀거리는 노동자들이 우글댄다. 블룸은 안개 속을 헤매다 베라 코헨의 집에서 스티븐을 만났다. 스티븐은 그곳에서 피아노 곡을 연구하며 매음녀와 즐기고 있다. 스티븐의 환희가 절정에 달한다. 거기서 블룸은 베라와 마주 앉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부채와 더불어 얘기를 주고받았다. 부채(펄럭펄럭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잠잠해진다)
"마누라가 있는가 보군요"
블룸
"글쎄 중도에 망친 셈이지 딴은 내 잘못이기도하지만..."
부채(반쯤 폈다가 다시 접히면서)
"그러니 마누라가 판치겠군"
블룸(무안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숙인다)
"하기야 그런 셈이지"
부채(아주 접힌 채 귀고리 곁에 머물렀다)
"당신 날 잊었수?"
블룸
"원 천만에 그럴 리가..."
부채(접힌 채 그녀의 옆구리에 가로놓였다)
"제가 당신이 최초로 꿈꾸던 여잘까요? 아니면 우리가 사귀고 나서부터 당신이 늘상 꿈꾸던 여잘까요? 지금도 우린 옛날 그대로일까요?"
블룸은 이렇게 베라의 부채와 더불어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스티븐과 함께 매춘부와 어울려 자동 피아노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 때 블룸에게는 부모님의 유령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그가 신앙을 저버린 것을 꾸짖었다. 이어서 아내의 얼굴도 나타났다. 또 다른 얼굴들도 연달아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이런 데 있게 된 것을 애써 변명하곤 하였다. 환상은 잇달아 일어났다. 매춘부와 춤을 추던 스티븐이 그만 졸도해 버렸다. 블룸이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장의사인 코니와 함께 그를 간호해 주었다. 이 때 반쯤 의식을 잃은 스티븐은 에이츠의 시를 입 속으로 읊고 있었다. 이러한 스티븐을 지켜보는 블룸에게는 스티븐이 마치 열한 살에 죽은 루디의 귀여운 모습으로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스티븐이 자기 아들이었으며 하고 은근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하여 블룸과 스티븐은 정신적인 부자로 서로 가까이 마주서게 되었다. 오후 열두 시경이었다.
16장 시우마이오스. 역마차의 오두막
블룸은 스티븐의 옷매무새를 고쳐 주고 곁에서 부축해 가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마차를 찾았으니 보이지 않았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자칭 귀족이라고 떠벌이는 코리를 만났다. 그들은 코리와 헤어지고 나서 어느 주막에 들렀다. 거기엔 낯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블룸과 스티븐도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그리고 어느 뱃사공과 같이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았다. 매춘부의 얘기며, 여행에 대한 얘기며, 그 밖에도 더블린의 장래 도시에 관한 노동자 아일랜드의 천연 자원 마리언 그녀의 공적 유태인 아일랜드의 자치 운동 죽은 파넬과 그의 귀국 디그넘의 주점 등 닥치는 대로 화제를 벌여 놓았다. 주막에서 나온 블룸은 스티븐이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자기 집에 데려가려고 하였다. 코코아를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은 오두막을 나와 서로 팔짱을 끼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클레즈 가 7번지로 향한다
새벽 한 시경이었다
17장 이타카. 이클레스 가 7번지. 블룸의 집
새벽 두 시 블룸의 집
블룸과 스티븐은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걸으면서 그들은 교리 문답식으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고대 히브리 어와 아일랜드 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화제는 마냥 번져 갔다. 세 시경 블룸이 스티븐에게 묵고 가라고 권했으나 스티븐은 굳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블룸과 악수를 나누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스티븐을 배웅하던 블룸은 문턱에 머리를 부딪쳤다. 실내의 구조가 잘못된 탓이다. 그는 옷을 벗으면서 하루의 출납표를 자세히 작성하였다. 뒤이어 상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18장 페넬로페. 침실. 마리언의 독백
침실에서의 마리언의 독백으로 구두점도 전혀 없고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비몽사몽 간에 흘러가는 그녀의 의식의 흐름이 42페이지나 전개되어 간다. 그녀가 젊었을 때부터 관계해 온 많은 연인들의 그림자가 오간다. 성적 갈망이 일관되어 가는 여기에는 수치심도 도덕심도 없다. 자연으로서의 여체 도리어 건강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감에 가득한 잠재 의식의 세계가 폭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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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외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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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1부 끝머리의 시작
1938년 9월 어느 늦은 오후에 프랜치스 치셤 노신부는 성 콜롬바교회에서 나와 다리를 절룩거리며 언덕 위에 있는 자기 집으로 통하는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노쇠하긴 했으나 그는 마커트 와인드의 완만한 고갯길보다는 이 비탈길을 더 좋아했다. 이윽고 담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좁은 문 앞에 다다라선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정복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언제 보아도 좋은 경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눈 아래에는 은빛 티드 강의 잔잔하고도 폭넓은 흐름이 가을의 석양에 엷은 사프란 빛을 발하며 굽이치는 것이 보였다. 북쪽 스코틀랜드 쪽의 강변 언덕바지에는 티드사이드 시의 너저분한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핑크나 노랑색 천조각과 같은 타일 지붕들이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가리고 있었다. 이 국경 도시는 지금도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성벽 위의 크리미아 전쟁 때 빼앗은 대포는 지금은 게를 쪼아먹으러 오는 갈매기들의 휴식처에 지나지 않았다. 강어귀의 모래톱에 널어놓은 어망에는 안개가 자욱했으며, 항구로 들어오는 고깃배의 너덜너덜한 돛대는 하늘을 향해 늘어서 있었다. 뭍 쪽으로 눈을 돌리니 청동색의 조용한 다람 숲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그 숲을 향해 백로가 한 마리 부지런히 날아가고있었다. 맑고도 싸늘한 공기는 장작을 태우는 냄새와 떨어진 사과의 강한 향기에 넘쳐 있어 계절보다도 빨리 첫서리가 내릴 듯한 느낌이었다.
치셤 신부는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는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들어갔다. '비취 동산' 의 정원과는 비할 수 없었으나 스코틀랜드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부드러운 울타리를 따라 손질이 잘 된 과수가 늘어서 있어 실로 풍요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정원 남쪽에 있는 배나무가 으뜸이었다. 잔소리가 많은 정원사 두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신부는 조심스레 부엌 쪽을 살펴보고 나서 제일 잘 생긴 배를 하나 따서 법의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낡아서 지금은 못 쓰게 된 우산 대신 유일한 사치품으로 산 격자무늬 새 우산을 지팡이 대신 짚고는 주름투성이의 누런 얼굴을 자랑스럽게 반짝이면서 절룩거리며 자갈길을 걸어갔다. 무심코 현관 쪽을 바라보니 자동차가 한 대 멈춰 서 있었다. 불쾌한 생각으로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기억이 나쁜데다 이따금 방심상태가 되는 것을 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는 차를 보고 갑자기 얼마 전에 주교의 편지로 당혹했던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주교는 비서인 스리스 신부의 방문을 제안이라기보다는 통지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스리스 신부는 응접실에 불기가 없는 난로를 뒤로 하고 약간 굳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거무스레하고 여윈 듯한 얼굴을 기품이 있어 보였으나, 주위의 초라함을 보고는 성직자의 위엄이 손상이라도 된 듯 화가 나 있었다. 도자기라든가 칠기 같은 뭔가 동양의 토산물이라도 있어 주인의 취미를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방 안은 텅 비어 있고 바닥은 보잘것없는 리놀륨이 깔려 있었으며, 담요로 덮어씌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을 뿐 이렇다 할 만한 특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힐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낡아빠진 벽난로 위에 아직 계산도 하지 않은 현금과 그 옆에 놓여 있는 팽이를 곁눈질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절을 지키겠다는 생각인 듯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치셤 신부가 정중하게 변명하려는 것을 말렸다.
"저는 벌써 가정부의 안내로 제가 쓸 방을 알았습니다. 4, 5일 신세를 져야 할 형편인데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오후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 경치는 참으로 근사했답니다. 타인카슬로부터 여기에 이르는 길은 마치 산 모랄레스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어두워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리스 신부를 보고 있으려니까 타란트 신부와 신학교의 일이 생각나서 늙은 신부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스리스 신부의 고상한 몸가짐이나 날카로운 눈초리, 오똑한 콧날까지가 타란트 신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무쪼록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하고 노신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곧 식사시간이 될 겁니다. 정식을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여기서는 그만 스코틀랜드의 하이 티(고기 요리를 곁들인 저녁 식사)의 습관대로 한답니다."
스리스는 반쯤 외면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침 그때 미스 모파트가 들어와 낡은 커튼을 걷어 젖히고 식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리스는 겁에 질린 듯이 자기를 힐끔 쳐다보는 얌전한 이 여자가 이 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 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불쾌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녀가 있었으므로 화제는 이어나갔다. 식탁에 앉자 스리스는 이번에 건립되는 타인카슬 대성당의 외장을 위해서 주교가 일부러 카라라에서 구해 온 특별한 대리석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햄과 내장을 곁들인 달걀찜을 다 들고 나자 브리타니아의 티 포트로 따라 준 홍차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잘 구어진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면서 그는 치셤 신부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어떻습니다, 수프는 안드레아도 함께 들어도 되겠습니다. 안드레아, 이 분이 스리스 신부님이시다."
스리스는 얼굴을 들었다. 아홉 살쯤 된 사내아이가 어느 사이에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푸른색 스웨터를 입은 길쭉하고 창백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긴장시킨 채 머뭇머뭇하더니 살며시 자기 자리에 앉으며 기계적으로 우유 주전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접시 위로 고개를 숙였을 때 축축한 갈색 머리카락이-미스 모파트가 스폰지로 씻어 주었기 때문에 젖어 있었다-보기 싫게 이마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 파란 눈에는 어린이답지 않게 이 자리의 심상치 않은 일의 예감이 깃들어 있었다. 소년은 불안스럽게 고개를 떨군 채 얼굴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스리스 신부는 의젓함을 보이며 다시 천천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이야기의 본론을 꺼낼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 그의 시선은 은연중에 소년 쪽으로 가 있었다.
"아, 네가 안드레아냐?"
단순한 인사로라도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조금은 친절함을 보여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래, 이곳 학교에 다니니?"
"네......"
"아, 그랬었구나. 그럼 무엇을 배웠니?"
그는 상냥하게 간단한 질문을 두세 가지 던져 보았다. 소년은 얼떨떨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스리스 신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형편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빈민굴의 아이 같군.' 그는 내장요리를 다시 한 입 먹었다. 문득 알고 보니 자기만이 고급 요리를 먹고 다른 두 사람은 죽을 먹고 있었으므로 얼굴이 붉어졌다.노인으로부터 이런 금욕주의를 과시 당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치셤신부도 그의 기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나는 스코틀랜드의 맛있는 오트밀을 몇십 년이나 먹지 못하여 요즘은 매일 그것만 먹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스리스 신부는 잠자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던 안드레아가 얼핏 눈을 들어 먼저 일어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식후의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다가 스푼에 팔꿈치를 부딪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거운 장화 소리를 내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식사를 끝낸 스리스 신부는 거만스럽게 일어나 난로 앞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는 아직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늙은 동료를 슬며시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참 곤란하군' 하고 스리스는 생각했다.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이건 너무나도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얼룩진 더러운 법의, 땟국이 반질거리는 칼라, 혈색이 나쁜 까칠한 피부의 볼품없는 늙은이! 한쪽 볼에 있는 흉터처럼 보기 흉한 빨갛게 부은 자국은 아래 눈꺼풀을 뒤집어 놓아서 그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었다. 영원히 비뚤어진 것 같은 목은 절름거리는 한쪽 다리와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언제나 아래를 향하고 있는 눈은-이따금 위를 쳐다보는 수도 있지만-날카로운 사팔뜨기며, 그것이 이상스럽게도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스리스 신부는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얘기를 꺼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는 애써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치셤 신부님?"
"1년이 되었군요."
"아, 그렇습니까. 주교님께서 신부님을 이곳에 오시게 한 것은 여간 친절한 배려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귀국하시자 바로 고향으로 말입니다."
"이곳은 주교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스리스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교님께서 신부님과 같은 고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신부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다? 일흔이 다 되셨지요?"
치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노인다운 긍지를 가지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래도 안셀모 밀리보다 나이가 많지 않소."
스리스 신부는 노인의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투에 얼굴을 찌푸렸으나 그것은 이내 연민의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요? 그러나 같은 일생이라도 신부님은 주교님과 비교할 때 너무 심한 차이가 나는 것 같군요."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주교님도 저도 신부님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성실하게 일해 오신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부님이 그 보답을 받으실 때라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은퇴하실 때가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나는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소."
"저도 여기 온 것이 무척 괴롭습니다."
스리스는 조심성 있었고, 시선은 천정을 향한 채 말했다.
"조사를 한 다음 주교님께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간과해선 안 될 일도 있고 해서요."
"그게 뭡니까?"
스리스는 안절부절 못하는 몸짓을 했다.
"여섯 가지......열 가지......아니 더 있습니다. 숫자를 세는 것이 제 역할을 아닙니다만, 신부님의......그 동양적인 엉뚱한 행동 말입니다."
"그건 유감이군요."
노인의 눈에서는 서서히 불꽃과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35년 동안이나 살았었다는 것을 제발 잊지 마시기를."
"이곳 교구의 사무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지요?"
"빚이라도 졌다 이 말씀인가요?"
"그런 것은 우리가 알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일년에 네 번 내는 헌금에 대해서도 최근 6개월 동안 아무 보고도 받지 못했어요."
스리스의 억양이 높아지면서 말도 빨라졌다.
"이것저것 모든 것이 너무 비사무적이고......예를 들면 말씀입니다. 브랜드의 거래처에서 지난 달에 청구서를 댄 데 대하여......양초값 3파운드와 그 밖에 있어서......신부님은 그걸 모두 동전으로 지불하셨지요!"
"받은 돈이 모두 동전이었기 때문에......"
치셤 신부는 물끄러미 스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언제나 나는 돈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니까 돈이란 것을 가져 본 경험이 없어서......그러나 결국 당신은 돈이란 것을 그렇게까지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군요."
난처하게도 스리스 신부는 스스로 의식할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들추어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하신 설교나......충고나......교리에 대해서도 어느정도까지는." 그는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가죽 표지의 노트를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위험할 정도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천만에!"
"성령 강림 대축일에도 신부님께서는 신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여러분의 손바닥 안에 있다......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그리고 어디에 있어도 좋은 것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스리스는 노트를 넘기면서 검열관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사순절 동안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신론자라 해서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할 수 없다. 나는 한 사람, 지옥에 가지 않은 무신론자를 알고 있다. 지옥에는 하느님 얼굴에 침을 뱉은 자만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 심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 공자 쪽은 유머가 풍부했다!"
스리스 신부는 단호한 태도로 노트를 덮어 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신부님은 이미 자기의 영혼에 대한 지배력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고 치셤 신부는 침착하게 "나는 어떤 영혼에 대해서도지배력 따위를 갖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는데요."라고 말했다.
스리스의 얼굴에는 불쾌한 듯한 빛이 더욱 짙어졌다. 새삼스럽게 이런 영감쟁이를 상대로 신학상의 토론을 벌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양자로 삼은 안드레아도 말입니다."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저 아이를 돌봐 주겠소?"
"랠스톤에 수녀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은 이 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고아원입니다."
치셤신부는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눈으로 스리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자기 어린 시절을 그 고아원에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소?"
"그렇게 개인적인 일에까지 비약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경우에 따라서 그 이유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이런 상태는 아주 변칙적으로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게다가......" 하고 그는 양손을 쭉 뻗쳤다. "신부님이 이곳을 떠나시고 나면......우리가 그 아이의 거처를 마련해야겠지요."
"우리를 내쫓을 작정이군요. 나도 수녀원 신세를 지란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신부님은 클리톤의 노사제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는 완전한 평화와 안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치셤 신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메마른 짧은 웃음이었다.
"완전한 안정이라면 죽은 뒤에 충분히 취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늙은 신부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으나......나는 신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오."
스리스는 당황해 하며 쓴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부님. 실례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신부님의 평판은 중국에 가시기 전부터도 역시......신부님의 생애가 좀 기이한 것이었으니까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치셤신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일생의 청산서를 하느님께 제출하겠소."
스리스는 자신의 경솔을 게면쩍게 여기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좀 지나친 것 같았다. 성격은 차가운 편이었으나 그는 늘 공정하게, 아니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처한 얼굴을 보이는 것 정도는 터득하고 있었다.
"물론 저는 신부님의 재판관이라든가 또는 조사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아무튼 어떻게 될지 이 며칠 동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지요"
하며 그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성당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대로 계십시오. 길은 알고 있으니까요."
다소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입을 일그러뜨리며 스리스 신부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치셤 신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테이블을 향해 앉아 있었다. 어렵사리 얻어낸 이 한적한 생활이 이렇게 별안간 위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엇인가가 완전히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에 여러가지 환경에서 어거지로 얻은 체념도 이번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뭔가 갑자기 하느님에게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무의미하고 낡아빠진 인간처럼 생각되었다. 타오르는 듯한 적막감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것은 대단한 무게를 가지고 밀어닥쳤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주님이시여, 주님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힘없이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 위에 있는 다락방에서는 안드레아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모로 누워 몸을 방어라도 하듯이 베개 위에 여윈 한 팔을 겹쳐 베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그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배를 꺼내어 침대 옆에 벗어 놓은 옷 위에 얹어 놓았다. 그것밖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산들바람이 모슬린 커튼을 흔들었다. 그는 창문께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서리라도 내릴 것 같은 하늘에는 별들마저 떨고 있었다. 이 별빛 아래 형태도 없고 고결함도 없는, 하찮은 노력 위에 세워진 자기의 어리석은 생애의 긴 세월이 펼쳐져 있었다. 이 티드사이드 거리에서 뛰어놀던 소년 시절의 나날이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추억은 멀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만일 자기의 일생이 어느 일정한 틀에 따라 씌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 숙명적인 첫머리의 기록은 아마 60년 전 그 4월의 토요일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누구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은 행복한 날이었기 때문인지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아무도 몰래 지나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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