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규칙용언 (5)
이르다, 푸르다, 따르다’처럼 어간 끝음절이 ‘르’인 용언은 세 가지 유형으로 활용한다. ‘(시간이) 이르다’나 ‘(엄마한테) 이르다’는 ‘이르고, 이르니, 일러(이르+어), 일렀다(이르+었다)’와 같이 활용한다. ‘르’가 ‘-어’ 계열의 어미를 만나 ‘ㄹㄹ’로 바뀌었는데, 이런 용언을 ‘르불규칙용언’이라 한다. ‘벼르다(별러, 별렀다), 거르다(걸러, 걸렀다), 다르다(달라, 달랐다), 오르다(올라, 올랐다)’ 따위도 르불규칙용언이다.
‘(정상에) 이르다’는 ‘이르고, 이르니, 이르러(이르+어), 이르렀다(이르+었다)’와 같이 활용한다. 어미 ‘-어, -었-’이 ‘-러, -렀-’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용언을 ‘러불규칙용언’이라 한다. ‘노르다(노르러, 노르렀다), 푸르다(푸르러, 푸르렀다)’ 따위도 러불규칙용언이다. ‘(물을) 따르다’는 ‘따르고, 따르니, 따라(따르+아), 따랐다(따르+았다)’와 같이 활용한다. 어간 끝음절의 모음 ‘ㅡ’가 ‘-어’ 계열의 어미를 만나면 탈락하는데, 이런 용언을 ‘으불규칙용언’이라 한다. ‘크다(커, 컸다), 모으다(모아, 모았다)’
따위도 으불규칙용언이다.
지난해에 ‘푸르다’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로 ‘푸르르다’가 새로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그럼, ‘푸르다’는 어떤 불규칙용언에 속할까? ‘푸르르다’는 ‘푸르르고, 푸르르니, 푸르러, 푸르렀다’와 같이 활용한다. 자음 앞에서는 어간 ‘푸르르’가 그대로 유지되는데, 모음 앞에서는 어간 끝음절의 모음 ‘ㅡ’가 탈락한다. 으불규칙용언인 것이다. 정리하면, ‘푸르러’는 ‘푸르다’의 활용형일 수도 있고 ‘푸르르다’의 활용형일 수도 있는데, 전자라면 러불규칙활용의 결과이고 후자라면 으불규칙활용의 결과인 것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행여나’와 ‘혹시나’
낱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된 언어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낱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어떤 낱말의 정확한 뜻을 따질 때 해당 낱말의 원 뜻을 중시할 수도 있지만, 현재 통용되는 현실 의미를 중시할 수도 있다.
치료에 (행여나,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약을 보낸다.
괄호 안 두 낱말 중 무엇을 써야 할까. 두 낱말의 기원이 ‘幸여나’와 ‘或是나’임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행여나’든 ‘혹시나’든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낱말을 쓰든 틀린 건 아니니 그 차이를 보란 듯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다음 예에서는 이들의 논리가 분명해질 것이다.
(행여나, 혹시나) 내가 잠이 들거든 바로 깨워라.
(행여나,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생겼는지 걱정이 되었다.
‘행여나’의 행(幸)에는 행복과 행운의 의미가 있는데, 이 말을 ‘잠이 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잠이 든 상황’과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고가 난 상황’을 가정하는 데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국어사전은 이들의 편이 아니다.
그들은 행여나 늦을세라 서둘러 출발했다(표준국어대사전).
어머니는 자식들이 행여나 다칠세라 늘 마음을 졸이셨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국어사전 편찬자는 언어의 변화를 경계하면서도 언어의 변화 추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니 사전의 풀이가 고정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런 설명이 덧붙기도 한다. “‘혹시나’와 ‘행여나’는 대체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데 동일하게 쓰이지만, ‘행여나’의 경우는 ‘바라건대’라는 화자나 주체의 바람이라는 뜻이 덧대어 있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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