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765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10 (음력 5.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 」 로 표시되어 보이지 않는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어떤 한자인지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슬픔은 그 자체가 약이다. -W.쿠퍼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지식이나 업무처리 능력,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베테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테랑 기술자’, ‘베테랑 배우’, ‘베테랑 경찰관’과 같은 표현을 쓴다. 여기서 ‘베테랑’은 프랑스말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는 ‘나이 든’을 뜻하는 라틴말 ‘베투스’(vetus)에서 왔다. 즉 라틴말에서 프랑스말로 전해지면서 ‘나이 든(사람)’이라는 뜻에서 ‘노련한(사람)’이라는 뜻으로 번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은 프랑스말에서는 원래 ‘퇴역 노병’을 뜻하는 말이고, 이로부터 ‘숙련가’, ‘전문가’라는 뜻으로 번졌다고 한다. 이와 달리 우리말에서는 나중에 번진 뜻으로만 쓰인다. 이는 일본말이나 영어의 영향으로 생각되는데, 일본말은 우리와 이 말의 쓰임이 같고 영어가 베테랑을 ‘베터런’(veteran)으로 받아들이면서 ‘숙련가’라는 뜻을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역 노병’이라는 뜻이 아예 없는 우리말과 달리 영어에서는 이를 두 번째 뜻으로도 쓰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영어에 비해 원래의 프랑스말과 상대적으로 조금 더 달라진 것은 영어가 프랑스말을 바로 받아들였고 우리는 다른 언어를 거쳐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으로 알 수 있듯이, 어떤 언어에서 시작하여 다른 언어들로 낱말이 퍼질 때에는 퍼지면 퍼질수록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 보통이다.
김선철/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뒤 막힌 진터(배수지진)
한나라 2년(서기전 205년)에 한나라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지니까, 여러 나라가 초나라에 붙었다. 한나라 한신이 위나라를 치고 조나라를 치러 갔다. 조나라를 치려면 정경이라는 좁은 길을 지나야 한다. 조나라는 20만 병력을 정경 어귀에 배치했다. 조나라 광무군 이좌차(이좌거)가 성안군 진여에게 말했다. “한신 군대는 멀리에서 왔으므로 군량이 뒤에 처져 있습니다. 정경은 좁아 군대가 길게 늘어질 것이므로, 내가 기습 부대 3만을 끌고 샛길로 가서 한나라 군량을 끊겠습니다.”
성안군은 선비로서 정의로운 군략을 좋아하여 기습 부대 싸움을 싫어했다. 이 사실을 염알이꾼(첩자)으로부터 들은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정경의 좁은 길 어귀 30리 앞에서 진을 쳤다. 한신은 날랜 기병 2000명을 뽑아 모두 붉은 기를 들려 샛길로 가서 산 밑에 숨어 조나라 군진을 엿보게 해놓고 말했다. “우리 군대가 도망한다. 조나라 군대가 본부를 비우고 쫓아올 것이다. 그 틈에 조나라 본부에 들어가 조나라 군기를 빼앗고, 한나라 군기를 세우라.” 한신은 정경 어귀를 나와 강을 뒤로 하고 진을 쳤다. 한나라 장수들이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을 뒤로 하고 강을 앞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신이 답했다. “병법에 ‘군대를 꼭 죽는 고비에 두어야만 살길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한신의 ‘뒤 막힌 진터’(배수지진)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늙은이
늙은이는 ‘늙다’의 관형형 ‘늙은’과 사람을 뜻하는 의존명사 ‘이’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생물학적으로 늙은 사람을 가리킨다. 늙으면 쇠약해지고 병들기 쉽다. 그래서일까. 사회가 이들을 대하는 시선은 젊은이와 달라 보인다. 늙은이에는 생물학적 의미 외에 사회적 의미가 덧붙었다. 젊은이에는 얕잡아 본다는 의미가 없으나 늙은이에는 있다.
독불장군
“그는 독불장군이야.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 독불장군(獨不將軍)은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대로 혼자서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래는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남과 협조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었다. 지금은 자기 고집대로만 일을 처리하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더위가 사그러들다
불볕더위가 한창인 요즘 열대야에 지친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아래 표현 중 정확한 것은?
① 폭염이 사그러들고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② 폭염이 사그라들고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③ 폭염이 사그러지고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④ 폭염이 사그라지고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익숙한 사지선다형 문제지만, 알쏭달쏭 고르기는 쉽지 않다. 우선 정답부터 이야기하자면 ④번이 맞다.
주변에서 ''삭아서 없어지다''라는 의미로 ''사그러들다''''사그라들다''''사그러지다''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불길이 사그라졌다" "끓어올랐던 울분이 점차 사그라졌다" "흥분이 좀 사그라진 뒤에 다시 보자"와 같이 ''사그라지다''로 쓰는 게 바른 표현이다.
~겠다, ~것다
걱정도 팔자인 사람이 있다.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해석해 안절부절못하는가 하면, 별일 아닌데도 근심부터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일은 항상 좋게 봐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돈 있겠다, 자식 잘 길렀겠다, 뭐가 걱정이겠어?" 시계가 불투명한 때일수록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자신의 삶에서 감사할 거리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아직 젊것다, 건강하것다, 이만하면 괜찮지 뭐."
''-겠다''와 ''-것다''는 비슷한 표현이지만 다른 점도 있다. "네가 나를 때렸겠다/것다, 두고 보자"에서처럼 상대가 이미 알고 있는 동작.상태를 다져 말할 때나, "미인이겠다/것다, 학벌 좋겠다/것다"처럼 상대에게 조건이나 원인 등이 충분함을 나타낼 때, "지금쯤이면 벼 이삭이 고개를 내밀었겠다/것다"처럼 추측해 으레 그러함을 표현할 때는 서로 넘나들며 쓸 수 있다. 그러나 ''-것다''를 쓰면 ''-겠다''에 비해 예스러운 맛이 난다. 또 ''-겠다''가 ''하겠구나/하겠어요?/하겠니?''처럼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과 달리 ''-것다''는 거의 ''-것다'' 형태로만 쓰인다. "뭔가 흰 것이 앉아 있지 않것어요?"처럼은 쓸 수 없는 것이다. ''않겄어요?''와 같이 ''-겄-''을 쓴 경우는 ''-겠-''의 방언 형태다.
길다란, 기다란, 짧다랗다, 얇다랗다, 넓다랗다
학교나 가정에서 ''길다란'' 회초리가 거의 사라졌다. 예전에는 회초리를 ''사랑의 매''라며 교육의 한 부분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체벌이 폭력으로 간주되는 시대다. 우리말에서 ''길다란 회초리''는 없다. ''기다란 회초리''만 있을 뿐이다. ''길다란''은 ''기다란''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한글 맞춤법에 ''용언의 어간 뒤에 자음으로 시작된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혀 적는다''라고 돼 있다. ''(높)다랗다, (깊)다랗다, (굵)다랗다'' 등이 그러한 예다. 이 규칙을 ''길다''에 그대로 적용해 ''(길)다랗다''로 적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길다랗다''는 변한 형태인 ''기다랗다''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우리말에는 원래의 말에서 변한 형태를 표준어로 삼는 것이 꽤 있다. ''기다랗다''는 ''매우 길거나 생각보다 길다''는 뜻이다. "기다란 회초리/ 목을 기다랗게 빼고 기다리다"처럼 쓰인다.
''기다랗다''의 반대어는 ''(짧)다랗다''가 아니라 ''짤따랗다''다. 이는 ''겹받침의 끝소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원형을 밝혀 적지 않고 소리대로 적는다''라는 규정 때문이다. ''얄따랗다, 널따랗다''도 마찬가지다. ''기다랗다''를 ''길따랗다''라고 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올바른 표기가 아니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
|
|
근황 이후 - 이섬
요즈음 흙과 노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목젖을 씰룩거리며 꿀떡꿀떡 단비를 빨아대는 흙의 모습은 볼때기라도 한줌 꼬집어주고 싶도록 귀엽다 포실포실 분가루 날리는 엉덩이도 예쁘고 쌔근거리는 숨소리도 예쁘고 단내가 베어있는 불그레한 귓부리도 예쁘다 저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이고 예뻐해 주면 좋아라 방실거리며 더 실한 것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 주고 싶어하는 의젓하고 대견한 녀석
은혜도 사랑도 입 싹 닦고 고개 돌리면 그만인 세상에 은혜를 은혜로 아는 정직한 녀석
가꾸고 꾸미지 않은 나를 땀으로 얼룩진 나를 더 좋아하는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십리화랑(十里畵廊) - 박영록
안개로 물감 풀고 소나무 뽑아들어
천자산 자락에나 그려놓은 역작이다
백설은 화선지 위에 설화한폭 더한다.
|
|
문학나눔 → 동시 |
|
|
가을 바람 - 강소천
아람도 안 벌은 밤을 따려고 밤나무 가지를 흔들다 못해 바람은 마을로 내려왔지요.
싸릿가지 끝에 앉은 아기 잠자릴 못 견디게 놀려 주다 그도 싫어서, 가을 바람은 앞벌로 내달렸지요.
고개 숙인 벼이삭을 마구 디디고 언덕빼기 조밭으로 올라가다가, 낮잠 자는 허수아빌 만났습니다.
새 모는 아이 눈을 피해 가면서, 조이삭 막 까먹는 참새 떼 보고, 바람은 그만 그만 성이 났지요.
저놈의 허수아비, 새는 안 쫓고, 어째서 낮잠만 자고 있느냐? 후여후여 팔 벌리고 새를 쫓아라.
가을 바람에 허수아비 정신차렸다. 두 팔을 내저으며 새를 쫓는다. 새들이 무서워 막 달아난다.
가을 바람 오늘은 좋은 일 하고 마음이 기뻐서 막 돌아갑니다. 머리를 내두르며 돌아갑니다.
|
|
|
|
문학나눔 → 삶속의 글 |
|
|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김상미
파랑새
-과거는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온 것들은 앞으로 올 새벽의 여명일 뿐이다.(H.G.웰스)
나는 그와 헤어졌다. 어제와 헤어지고, 어제의 섹스, 어제의 거짓말, 어제의 눈부신 하늘과 헤어 졌다. 나는 오늘의 단단한 붉은 벽돌 속에 박혀, 웃는다. 모든 웃음은 어제의 눈물이다. 어제의 그리움, 어제의 오독, 어제의 분노이다. 나는 그와의 교감을 끊었다. 진부한, 모두가 가는 그 길을 이탈했다. 나는 내 가슴에 켜져 있던 촛불을 껐다. 언제나 삶을 선호하게 만들던 뜨거운 심장 속의 피를 모두 뽑아버렸다. 모든 밧줄과 엉킨 매듭과 고리들을 끊어 버렸다. 액자에 같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나는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개념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포장된 상자 속의 선물, 나는 나를 사방으로 퍼뜨린다. 모든 선물상자는 살아 남은 자들의 것. 나는 웃으며 나를 집어올리는 그들을 본다. 어제의 두개골인 어제의 바람이 나를 붙잡으려 데구루루 굴러오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새벽, 그 누구도 어제의 바람으로 오늘을 씹어 삼키지 않는다. - 시 '늦은 새벽'전문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나의 오빠.그러면 그는 그의 커다란 호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을 통해 나는 그에게로 갔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하늘이, 그의 가슴에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세상이었고, 나는 언제나 세상의 바깥쪽에 있었다. 오빠, 나의 오빠, 나를 세상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아무리 애원하여도 그 세상엔 내 자리라는 게 없었다.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똑 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 혈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그에겐 부인이 있고, 아이가 있다는 게 수긍이 갔다. 해서는 안 되는 근친상간처럼 내 사랑 또한 불륜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하나의 얼굴만이 있었다. 수천의 얼굴들 속에 불켜진 하나의 얼굴. 나는 그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푸른 실핏줄 사이로 스며 나오는 기쁨, 분노,고독, 슬픔 등을 들이마셨다. 그러면 그가 샅샅이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반백의 머리카락, 생기 만발한 웃음소리, 한 웅큼 공기를 쥐고 있는 손바닥...... 사랑이란 물 흐르듯 그렇게 가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 흐르듯 가는 것. 그런데도 내 사랑은 왜 이렇게 끝이 없고, 한도 없고, 원도 없는 것일까?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아무리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왜 이렇듯 끝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를 따라 그가 있는 서울로 왔다. 몸과 마음에 지옥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그 지옥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마치 내 방에 있는 것처럼 편했다. 어차피 지옥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그 끔찍한 지옥이 나의 선이 되도록 하리라 결심까지 했다. 끝간 데 없는 지옥에서 천사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하여 그가 나를 울릴 때도, 세상 밖으로 나를 밀어내어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때도, 절대 그를 비난하거나 분석하거나 방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여, 나를 숨김없이 털어놓고,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오빠,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똑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 혈육이라고생각했다. 그런식으로 나는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열정을 다스렸다. 오빠를 연인으로 생각하는 건 죄다. 그 건 사랑이 아니라 근친상간일 뿐이다. 끊임없이 나를 달래고 달랬다.
나는 차츰 그에게로 얽히는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놀랄 만큼 친밀한 객관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남매 같았다. 큰오빠와 막내 여동생. 쉴러나 셰익스피어, 몰리에르가 알면 혀를 내두를 만큼 우리는 어떤 비극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으며, 서로를 믿고, 잘 이해하였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가야 할 슬픔의 길을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쑥쑥 걸어갔다. 나는 점차 서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주는 절망보다도 서울이 내게 주는 고독이나 쓸쓸함 들이 휠씬 내게는 감미롭고 덧없이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완전한 공범관계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해서는 철저한 공범자였다. 우리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희망과 절망의 끝까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가정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노래하는 '즐거운 나의 집'이 있었다.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심연-그게 가정이고, 가족들이다. 피로 얽힌 괴물들이 내쉬는 숨결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런데도 부도덕한 건 나였고, 세상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건 나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마시다 만 커피처럼 차디차게 식어가는 나를 남겨둔 채, 커피 물이 절절 끓는 그의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안락한 평화의 집으로.....
파랑새. 그는 나를 파랑새라 불렀다. 어디서 이런 예쁜 파랑새가 내게로 날아왔을까?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파랑새나 나비로 부를 때마다 왠지 슬퍼졌다. 날개 달린 것들은 언젠가는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린다. 그가 나를 붙잡지 않는 이유도, 언젠가는 내가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릴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하여 나는 그가 나를 파랑새나 나비로 부르는 게 싫었다. 그냥 그의 말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불꽃이 필요했다. 자꾸만 야위고 비워 가는 내가 안쓰러웠다. 나는 타오르고 싶었다. 남김없이 나를 태우고 싶었다. 살아 있는 육체가, 영혼이 되고 싶었다. 나 스스로 흘리는 눈물과 웃음 속에서 인생을 만지고 껴안고 싶었다. 손님처럼 왔다가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싫었다. 조각 조각 껴맞추어 만든 사랑이라는 낱말이 싫었다. 나는 마치 사랑으로 불타 버린 집을 고치러 온 건축 견습공 같았다. 나는 슬프고 불행했다. 모든 게 헛된 욕망 같아 보였다. 석양에 사라져버리는 희미한 그림자. 너는 알까? 네가 언제 올지,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너는 알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기다리는 걸 포기했다. 그와 함께 오르던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무섭게 단순해졌다. 모든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거울만을 응시했다. 나는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다 주었다. 내 사랑, 내 책들, 내 음악, 내 불행, 내 피까지도 그리고 그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낮이든 밤이든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그와 함께 가꾸고 싶었던 '즐거운 나의 집' 에 대한 환상을 바닷속에 처넣었다. 인생이 내게 일구라고준 모든 불들을 끄고, 나는 어디든 혼자서도 쑥쑥 걸어갔다. 그는 나에게 줄 것이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인생을 들고 그에게로 갔지만, 그는 내가 읽는 책들처럼 언제나 내 인생 밖으로 지나갔다. 나는 공허한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을 붙잡고 활활 타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파도소리가 내 온몸을 소리치며 밀려갔다. 밀려오면서 내 몸에서 나오는 불꽃들을 모조리 다 꺼 버렸다. 나는 바다 깊이 파묻혀 버렸다. 청춘을 낭비한 죄, 나는 난파당한 배에 불과했다.
오빠, 나의 오빠. 나는 혼자서 조금씩 나는 연습을 했다. 그가 예감한 대로 나는 그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야만 했다. 자생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얼굴 한복판에 날개를 펄럭이며 거대한 우주를 향해 날아가야만 했다. 나는 무섭게 인생에 매달렸다. 내 위치로 다시 돌아가야 해. 날마다 들판을 달리고, 물속을 헤 엄쳤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소리쳤다.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아지려 한다고, 그건 너의 스타일 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빠, 나의 오빠. 나는 이제 오빠와 놀지 않겠어요. 맨날 술래가 되어야 하고, 맨날 되어 주기만 해야 하는 게임, 이젠 싫어요. 사랑이라는 연못 아래에서 그대로 얼어버리는 내 감정, 내 꿈들, 내 절망들이 불쌍해서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파랑새처럼 날아갈래요. 어두운 창공에 걸려 그대로 그대로 제가 될지라도 하늘로 휠휠 날아갈래요.
어떤 면에서는 절망이 위안이 될 때도 있다. 희망과 달리 절망은 밑바닥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결혼이나 함께사는 것으로 성취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면서도 헤어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파멸조차 불사해야 한다는 건 억지이다. 세상에 사랑처럼 무정부주의인 게 있을까? 사랑처럼 피비린낸나는 식민지가 있을까? 사랑이 온유하고 평화로울 땐 규범 안에 있을 때뿐이다. 사랑이 그 규범을 뚫고 나오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한 대의 불덩어리가 된다. 사랑하는 연인 중 한사람이 그 불덩어리를 삼키거나 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하늘까지 치솟는다. 나는 내가 먼저 그 불꽃을 꺼버렸다. 사랑 대신 삶을 선택했다. 삶을 선택함으로써 사랑을 영원히 내 가슴에 묻어 놓았다. 나의 첫사랑. 몸과 마음이 함께 행복했고 함께 고통스러웠던 사랑. 문득 문득 그 사랑이 깨어나 나를 괴롭히긴 했지만, 이제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진 않다. 그 사랑이 벽이 되어 나의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한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 사랑의 한계이며 전부였지만, 그 사랑이 대해 어떤 회한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그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지나간 사랑이 아름다운 건 덧없이 어두운 이 세상을 빛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나간 사랑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속에 아직 남아 있는 연인들의 희미한 박수소리, 사라져 버릴 나날들의 그 반짝거림 때문이 아닐까?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어제의 찬란했던 빛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열렬히 그 사랑에 매달렸음에도, 나는 이제 그 사랑의 뒤쪽에 무엇이 남아 있는 지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이제 나의 오빠일 뿐이다. 똑 같은 피를 가진 사람.
아직도 나는 여전히 그를 오빠라 부른다. 그러나 이제 그 부름속에 타는 불꽃은 없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속에 담금질된 헛된 욕망이나 갈증은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어제가 되었다. 나는 어제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제의 빛이 아무리 오늘의 영양소가 된다 해도 나는 그 영양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에다 내 영혼을 묶었다. 어제의 내 사랑은 그의 건물이다. 나는 이제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갈 것이다. 언젠가 먼먼 훗날, 그가 내 선물상자를 풀 게 될 때쯤이면, 아마도 나는 그 상자 속에 없을지도 모른다. 파랑새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 새이다.
- 김상미 1957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90' 작가세계'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때'가 있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가장 값싼 노동력
한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항상 결혼을 반대해 왔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습니까?" 그는 말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번 겨울에 매우 추울 것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중앙난방은 내 능력에 닿지를 않으니 아내를 얻는 것이 더 경제적일 것 같아서요."
- 이것이 곧 논리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안락하고, 편리하고, 경제적이고, 더 싸게 먹히기 때문에 함께 산다. 혼자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내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주부, 요리사, 하녀, 간호사... 그녀는 전혀 보수를 받지 않고 매우 많은 일을 하는, 세상에서 가장 값싼 노동력이다. 그것은 하나의 착취이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인생의 길
나를 먼저 찾아라. 나를 잃어버린 채 인생의 길을 찾아 헤매고 참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등에 업힌 아이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를 찾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를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을 찾는 일은 나를 찾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찾음으로써 나의 참 모습을 찾아낼 수 있고, 참 모습 속에서 참가치를 찾아낼 수 있으며, 참 가치 속에서 내가 가야 할 옳은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고, 옳은 인생의 길을 찾음으로써 옳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를 보는 것이 세상을 보는 시초다. 나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인생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진찰이 정확이 되어야 그에 대한 처방도 정확히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나를 정확이 볼 수 있어야 나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인생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도 이해하지 않고 해답부터 찾아내려는 어리석음이다. 온통 세상(타인)으로만 향해 있는 시선을 내게로 두어 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나만 정확히 이해하면 세상(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나만큼 이해하기 힘든 존재는 없다. 세상(타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나를 이해하는 것이고, 내가 볼 수 없고 애해할 수 없는 사각 지대는 세상(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
|
문학자료 → 수필 |
|
|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에세이
10대 문화에 대한 두 가지 잣대
10대 문화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10대 문화가 마이너리티였던 시대는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TV, 잡지 영화, 패션, 할 것 없이 온통 10대가 문화주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제는 10대에 아부하지 않는 문화인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10대 문화는 더 이상 비주류 문화가 아니다. 10대 문화는 10대의 빠른 피드백에 힘입어 점차로 문화 시장의 가장 막강한 공룡이 되어가고 있다. 20대만 해도 문화만 해도 문화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3,40대 이후 세대는 말할 것도 없다. 얼추 서태지의 등장으로 문화시장에 상장되기 시작한 10대 문화는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들을 숨기고 있다. '댄스뮤직'으로 대표되는 이 문화는 '몸'을 부각시킨다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진다. 가사, 멜로디, 메시지 등은 이 문화 안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춤', 즉 몸의 격렬한 사용이다. 멜로디는 그 몸의 격렬한 사용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춤'에 곁들여지는 요란한 패션 역시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일종의 바쿠스적 통음난무를 닮아있는 춤의 제전. 이 문화를 리드하는 예술가들이 거의 대부분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자아의 망실을 부추기는 집단적 최면상태인 바쿠스적 통음난무의 성격과 일정 부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현상을 근원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그것이 사춘기 특유의 '몸의 에너지' 폭발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를 지나면서 인류는 육체를 이성의 억압으로부터 복권시켰고, 그 결과, 육체적 욕망을 다스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육체가 복권되면서, 타자의 자리에 처박혀있던 육체가 스스로 문화적 발언권을 장악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젊음의 찬란함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 가장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젊은 육체이다. 육체는 이미지화 하고, 그럼으로써 가상 현실이 된다. 이미지를 가장 닮은 육체들만이 대중 앞에 모범적 기호로 전시된다. 따라서, 육체적 인간이 가장 완벽한 개화 상태에 놓여 있는 사춘기의 육체가 가장 선호의 대상이 된다. 사춘기의 육체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숨기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에너지는 발산될 어떤 계기도 없다. 다만 문화적인 계기만이 그 에너지의 발산을 합법화하고 있을 뿐이다. 문화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기 시작한 육체, 전시되고 팔리고, 이상화한 육체. 그러나 그 육체는 정작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장 안에서는 성숙하고 타당성 있는 사용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10대들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거기에 '대학 입시'로 대표되는 현대적 통과의례의 무자비한 단일성이 에너지로 흘러 넘치는 십대들의 육체를 끔찍할 정도로 억압하고 있다.
문제를 더욱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렇게 몸이 부각되어 있는 10대 문화에 대해서 기성세대가 너무나 모순되는 두 가지 잣대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댄스뮤직'으로 대표되는 10대 문화를 무턱대고 찬양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다. 지금 10대 댄스가수들은 문화시장에서 가장 귀하신 몸이다. 한번 뜨기만 하면, 몇 십억씩 벌어들이는데 누가 그들에 대한 선망을 숨길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자식을 댄스가수로 만들기 위해서 어머니들마저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딴따라'라는 경멸적인 어조는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연예인은 신흥 귀족 계급의 표지이기마저 하다. 연예인이 되는 것. 그것도 어린 시절에 되는 것, 그것이 많은 십대들의 희망이다. TV는 10대 댄스가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방영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 입는 것, 생활, 모든 것이 전설의 차원으로 들어올려진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춤만 잘 추면 성공은 보장된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다는 것이 반드시 이 성공 스토리에 포함된다. "생각하는 능력"은 "몸을 잘 움직이는 능력"에 비해 한없이 열등한 것으로 느껴진다. 생각을 무엇 하러 한단 말인가. 돈도 생기지 않고, 유명해지지도 않는데, '뜨기만' 하년, 일생동안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다. 그러니 '춤'을 배우자. '춤' 만이 살길이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여전히 사춘기의 몸을 억압하는 군사문화가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버티고 서있다. 그나마 자율화의 분위기가 잠깐동안 형성되어서 교복이 없어지는 듯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도로 돌아갔다. 모든 중 고등학교가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몇십 년 전 스타일 그대로 학생부가 복장을 감시한다.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복장검사를 둘러싸고 성적 수치심마저 느끼게 하는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두발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실은 TV 청소년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드라마 안에 나오는 10대 청소년들의 헤어스타일은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여학생들의 경우에도 무스를 발라 올린 머리,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경우 등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훈육주임 선생이 자를 들고 다니며 '몇 센티미터'를 외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위나 바리캉을 들고 쥐 뜯어먹은 것처럼 뭉텅 잘라버리기도 한다. 선생님들은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이런 일을 당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머리'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제도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종의 '육체에 대한 모욕'이다. 이러한 일들은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상처를 입힌다. 사춘기 아이들은 유난히 육체의 문제에 민감하다. 그것의 중요성이 문화적으로 증폭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사회는 모든 육체적 욕망이 다 실현될 것 같은 환상을 매일처럼 주입한다. 내 머리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거야. 어른들이 뭔데 내 머리를 멋대로 자르는 거야.
복장 문제를 둘러싸고 학교 안에서 아이들과 선생님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의 양상을 잘 지켜보면 일종의 사도 마조히즘적 병리학적 냄새가 강하게 난다. 어떻게든 찍어누르려는 선생님들과, 죽으라고 말을 듣지 않는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 한쪽에서는 문화 소비 주체로 10대들의 자아감을 부풀릴 대로 부풀려놓고, 한쪽에서는 그 부풀려진 자아감을 병적인 사디즘으로 찍어누른다. 문화적으로 힘있는 소비주체가 된 아이들의 자신감을 문화적으로 소외된 힘없는 어른들이 '학교'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복수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쪽에서는 21세기의 국적불명의 가벼운 문화가 팔리는 힘에 실려 용가리처럼 자라나고 있고, 한쪽에서는 아직도 19세기말인 줄 아는 시대착오적 권위주의 문화가 이미 주체로 성장한 아이들에
- 이하 게시판에 |
|
|
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
|
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산해경 - 작가 미상
중국 최고의 대표적인 신화집이다. 그러나 신화는 물론 고대 중국의 사회지리역사민속종교 등에 관한 내용이 광범위하게 담겨 있는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주지주의에 대한 반발의 산물로서, 불로장생의 신선사상, 유토피아 사상, 이백의 낭만주의 사상 등 중국 문학과 예술의 정신적 원천이다. 중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그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중국문화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작가 및 성립시기
마르크스는 신화란 "인민의 환상을 통하여 무의식적인 예술적 방식으로 가공한 자연 및 사회형태 그 자체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신화는 고대인들이 자연계와 사회생활을 인식하는 일종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신화는 고대인들의 염원과 이상의 체현이기도 했다. 따라서 많은 신화들이 널리 전파되어 끊임없이 개작되었고, 그 풍부한 상상과 예술성으로 말미암아 고대인들에게는 예술작품 그 자체가 된다. 중국의 고대신화는 그리스 신화처럼 체계적이지도, 풍부하지도 않다. 다만 <산해경>을 비롯한 <회남자> <초사> <장자> 등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산해경>이란 이름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대완전>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그 성립시기와 저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전통적인 견해는 하나라의 우임금과 그의 신하인 백익이 국토를 정리하고 각지의 산물을 파악한 결과로서 편찬했다는 것이다. 편찬시기는 빠르게는 서주 초기인 기원전 12세기로부터, 가장 늦게는 위진시대인 서기 3~4세기까지 편차가 크다. 다만 작자 및 성립지역을 초나라와 초인으로 보는 견해와, <산해경> 중의 <오장산경>의 경우 그 성립시기를 전국시대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나 <산해경>이 어느 특정기간에 특정인에 의해 제작된 것은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첨삭이 가해져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산해경>은 신화서인가 지리서인가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사마천이 "감히 말할 수 없다"라고 하며 인용을 꺼려할 정도의 기서인 <산해경>의 내용에 대해 오늘날 현저히 대립되는 두 가지 해석 경향이 있다. 즉 <신화학적 입장>과 <지리학적 입장>이 그것이다. 그것은 두이미와 위정생, 두 학자의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들로부터 엿볼 수 있다. 먼저 두이미 교수는 <산해경>을 신화로서만 규정하고 그 내용을 일정한 상징체계로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산해경>은 태음숭배의 산물이다. 변화무쌍하고 불사불멸하는 음과 양의 양성구조적 존재인 달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불사관념을 기조로 한 월신월산월수 등의 존재가 상상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그는 <산해경>에서 출현하는 황제를 비롯한 모든 신화적 영웅들을 월신의 다양한 현시로, <곤륜산>을 비롯한 모든 산들과 괴상한 형태의 동식물을 달의 의화된 존재로 파악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산해경>은 달의 상징체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면에 위정생씨는 <산해경>을 완벽한 지리서로 간주한다. 그에 의하면 <산해경>은 전국 연의 소왕때의 외래학자 추연이 왕명을 받들어 조직한 탐험대의 세계지리에 관한 현지답사 기록이다. 위씨는 지리학자와 합작하여 <산해경>의 각 지역을 현재의 지명에 일일이 비정한 <산경지도>까지 작성했다. <산해경>이 이와 같이 실제지역에 대한 기록일 때 그곳의 동식물 및 광물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인 양 해석되게 마련이다. 두위 양씨의 견해는 모두 <산해경>의 한쪽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다. 결국 <산해경>은 일정한 방위개념에 입각한 각 지역에 대한 조사기록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는 지리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수록된 내용은 해당 지역의 민속종교구전신화 등 원시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신화서적인 성격 역시 당연히 띠고 있다. 따라서 <산해경>에 대한 해석은 지리서로서의 기본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신화연구 방법들을 적용해보는 것이 소망스러울 것이다. 중국의 원가, 대만의 이풍무 교수, 구미와 일본의 다수학자들은 비교적 상술한 두 가지 입장을 고려하면서 문학인류학 혹은 민속학적 관점 등에서 조명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상상력이 낳은 신화집
독자들은 <산해경>을 읽을 때 우선 괴이함과 아울러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갖게 된다. 책을 펴자마자 거북이 몸체에 새의 머리와 살모사 꼬리를 하고 있는 <선구>라는 짐승, 호랑이 몸에 소의 꼬리와 개짖는 소리를 내는 <체>라는 동물, 올빼미 모양에 사람의 손을 가진 <주>라는 동물 등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산해경>에 처음으로 주석을 단 곽박은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라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상함은 결국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산해경>에는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보는 것은 결국 인간의 판단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은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정신을 기저에 담고 있다. 사실 책을 계속 넘기다 보면 처음의 기이한 느낌은 곧 친숙함으로 바뀌면서 자신도 모르게 <산해경>의 별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먼저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내용구성
청나라의 주석가인 학의행에 의하면 본래 <산해경> 고본은 32권이었는데, 전한시대의 유흠이 18권으로 정리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대의 곽박이 주석을 처음으로 달았다. 현존하는 18권은 본문만 30,825자로 크게 <산경> 21,265자와 <해경> 9,560자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산경>은 곧 <오장산경>인데 동서남북 중의 5권 26편으로, <해경>은 <해외경>의 동서남북 4권, <해내경>의 동서남북 4권, <대황경> 동서남북 4권과 독편 <해내경> 1권 등 13권으로 편성되어 있다. <산경>과 <해경>은 서술체계나 내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산경>에서는 중국 및 주변의 지역을 다섯방향으로 나누고 447개소의 산에 대해 거의 한결같은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를테면 먼저 산천의 형세를 말한 다음, 산출되는 광물 및 동식물, 그곳에 사는 특이한 괴물이나 신령에 대해 서술하고 각편의 말미에서 반드시 제례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산경>은 내용면에서 비교적 단조롭고 <지리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해경>의 경우 편명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해내경>은 사해안의 지역, 곧 중국권 내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고, <해외경> 및 <대황경>은 중국권 밖, 머나먼 세계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나 실제내용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해경>의 기술방식은 <산경>과 다르긴 하나 그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용은 이국의 풍속과 사물, 영웅의 행적, 신들의 계보, 괴물에 대한 묘사 등 다양하여, <산경>의 지리서적인 성격에 비해 <신화서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제 <산해경>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곤륜산>과 <서왕모>에 관한 부분 등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보자.
곤륜산
곤륜산은 중국 고대전설에 나오는 성산으로 곤륜이라는 명칭은 혼돈과 관계가 깊으며, 원초의 카오스(혼돈)을 의미한다. 곤륜산의 위치는 중국인의 지리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서쪽으로 옮겨졌는데,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감숙성 주천 남방에 있는 산을 곤륜산이라 믿었다 한다. <산해경>과 <목천자전>에 그 기록이 보인다. "서호와 백옥산이 대하의 동쪽에 있고 창오가 백옥산의 서남쪽에 있는데 모두 유사의 서쪽, 곤륜허의 동남쪽에 있다. 곤륜산은 서호의 서쪽에 있는데 모두 서북쪽에 있다." <산해경>에 나타난 곤륜산에 관한 기록은 위에 인용한 글이 전부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초기에는 천상계에 사는 천제의 지상궁전이 세워진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후에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고대 중국인의 이상세계로 탈바꿈하게 된다. 곤륜산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여 산 정상이 북극성을 향해 있으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나무를 비롯한 온갖 약초가 돋아나, 예로부터 불사의 명약을 구하기 위한 인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산 주위를 흐르는 강물의 방해로 아무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다. 후한시대 이후에는 여신 서왕모가 선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생활하는 지상낙원으로 알려졌다. 황제가 곤륜산을 등산한 일과 주 나라의 목왕이 이 산 위에서 서왕모를 만난 전설은 유명하다.
서왕모
서왕모는 중국의 고대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선녀로, 그 기원은 은대까지 거슬러올라가며 갑골문자에 나오는 서모는 서왕모인 것으로 보인다. 문헌상으로는 <산해경>에 서왕모에 관한 기록이 세 번 보인다. 먼저 <서산경>에 나타난 기록을 보자. 다시 서쪽으로 350리를 가면 옥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서왕모는 그 형상이 사람 같지만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하고 휘파람을 잘 불며 더부룩한 머리에 머리꾸미개를 꽂고 있다. 그녀는 하늘의 재앙과 오형을 주관하고 있다. 다음에는 <해내북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서왕모가 책상에 기대어 있는데 머리꾸미개를 꽂고 있다. 그 남쪽에 세 마리의 파랑새가 있어 서왕모를 위해 음식을 나른다. 곤륜허의 북쪽에 있다. 그리고 <대황서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해의 남쪽, 유사의 언저리에 적수의 뒤편, 혹수의 앞쪽에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을 곤륜구라고 한다. 신(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몸인데 꼬리에 무늬가 있으며 모두 희다)이 있어 여기에 산다. 산아래에는 약수연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바깥에는 염화산이 있어 물건을 던지면 곧 타버린다. 어떤 사람이 머리꾸미개를 꽂고 호랑이 이빨에 표범의 꼬리를 하고 사는데 이름을 서왕모라고 한다. 이 산에는 온갖 것이 다 있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록상으로 서왕모는 사람의 모습에 표범의 꼬리, 호랑이의 이빨을 갖고 풀어헤친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자주 으르렁거리는 괴이한 존재이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왕모는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녀로 변신하고 그녀의 거처도 곤륜산으로 정해졌다. 전한 말기에 이르러 그녀에 대한 신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민간신앙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초기의 도교교단은 서왕모를 신선의 하나로 숭배하여, 도교수행자에게 서왕모가 강림하여 가르침을 준다는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서왕모는 정통 도교보다는 민간신앙 쪽에서 불로불사의 여신으로 크게 숭배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주나라의 목왕이 곤륜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서왕모를 만나 시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한편 신화는 비록 인간의 환상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이러한 환상은 사회적인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신화에서의 황당하기 그지없는 여러가지 해석과 묘사는 결코 단순한 의식이나 심리 활동이 아니라, 현실 및 투쟁의 반영이다. 원시시대에 있어 가뭄과 홍수는 큰 재난이었다. 더욱이 농업경제가 발전하는 시기에 큰 물을 방지하고 관개를 잘하는 것은 큰 문제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곤우치수
<산해경>의 <해내경>편에는 <곤과 우가 물을 다스리다>란 기록이 있다.
"큰 물이 저 하늘을 삼킬 듯했다. 곤은 상제의 명을 기다릴 새 없이 식양토를 훔쳐내어 물을 막았다. 그래서 상제는 축융씨에게 명하여 우산 밑에서 곤을 죽여버렸다. 그랬더니 곤의 뱃속에서 우가 나왔다. 상제는 우에게 명하여 끝내 흙을 폄으로써 구주를 안정시켰다."
곤은 자신의 머리에 떨어질 재난을 무릅쓰고 상제의 식양(끝없이 불어나는 흙)을 훔쳐다가 홍수를 다스린 탓에 살해된 영웅이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불을 훔쳐다 인간에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타서 바위에 결박되어 독수리에 간을 쪼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곤의 뱃속에서 나온 우는 상제의 명령을 받아 홍수를 막는 방법을 포기하고 흙을 펴는 방법, 즉 소통의 방법을 취했다. 곤과 우는 원시인들이 홍수를 이겨내기 위해 상상해낸 영웅이다. 이 두 형상을 통하여 홍수를 이긴 원시인들의 영웅적인 투쟁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우는 물을 다스리는 기간에 세 번이나 집을 지나치면서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추호도 사리를 도모하지 않고 홍수방지에 전념하는 우의 모습은 곤의 희생정신과 마찬가지로 치수의 성공과 사회적 진보의 근원을 일깨워준다.
중국문학에서의 위치
신화의 예술적 가치는 자못 크다. 그리스 신화가 그리스 예술의 토양이듯이, 중국 고대신화 역시 후세 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산해경>은 상상력과 환상의 보고로서, 고대인의 꿈과 무의식에 뿌리를 둔 원형적 심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단의 정신은 갈홍의 <포박자>로 계승, 발전되고, 결국 도교라는 거대한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유교와 대립되는 중국의 유력한 이면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상상력의 원천
<산해경>은 중국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째는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산해경>이 문학예술의 세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지대하다. 동진의 시인으로 일찍이 주석을 단 곽박은 그의 <유선시>에서 <산해경>의 시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고, 도연명 역시 <독산해경시> 13수를 지은 이래 수많은 유명문인들이 <산해경>을 제재로 하여 시가와 소설을 창작했다. 둘째는 지이류 문체의 효시로 간주된다. 지이류의 작품들은 기이한 이야기를 위주로 하고 사람과 풍물의 묘사가 생동감이 있다. 이 묘사법은 중국소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소설 <서유기>와 <봉신연의> 등 대표적인 신마소설에 등장하는 온갖 괴물들의 군상 및 신통력의 극치라든가, 중국의 <걸리버 여행기>라 할 이여진의 <경화연>에서 전개되는 기묘한 세계여행 등은 그 중요한 이미지와 상징구조를 대부분 <산해경>으로부터 차용하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노신은 유년시절부터 일찍이 <산해경>을 탐독하여 상상력을 함양했음을 토로한 바 있고, 실제로 그의 <고사신편>은 <산해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에 미친 영향
한국의 경우 이미 백제 때에 일본에 <산해경>을 전했다는 역사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삼국시대부터는 <산해경>이 읽혀져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신수와 괴수의 형상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산해경>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그러나 <산해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감과 자극은 먼 옛날에 한하지 않는다. 시인 황지우는 <산경>에서 당대 현실에 대한 가열찬 풍자의식을 담아냈는데, 이는 <산해경>에서 모티브를 빌려왔다. 그리고 박인홍도 그의 작품에서 <산해경>의 충격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괴물 이미지를 통해 일상의 관념을 해체하여 이 시대의 포스트모던한 삶의 양태를 묘사했다. 또한 <산해경>에는 조선개국숙신국맥국 등 고대한국과 관련되는 나라 이름이 등장하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른바 동이계 문화로 간주되는 내용들이 적지않게 포함되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최근의 연구경향
<산해경>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문학,신화학,민속학,종교학,생물학,광물학,지리학 등의 각 방면으로부터 진행되어 <산해경학>이라 불릴 정도로 하나의 종합과학을 지향해나가고 있다. 이미 영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한국 등 수개 국어로 번역된 것은 물론 많은 연구서 및 논문이 산출되어왔다. 국내의 경우도 3편의 석사학위 논문을 비롯, <산해경> 및 중국신화와 관련된 다수의 논문 및 번역서들이 계속 발표되어 <산해경>에 대한 우리의 잠재적 관심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산해경>은 결코 한 측면에서 규정될 수 없는 다방면의, 다학문성의, 다중적 언어체계를 지닌, 그렇기 때문에 <기서>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성격의 책이다. 이러한 사실이 <산해경>을 고의로 신비화하여 그것의 탈학문성을 부추키지만 않는다면, <산해경>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겨주는 근원적 상징 그 자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마치 달의 뒷면처럼 잊혀져 있던 우리의 감춰진 세계의 총체인 셈이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추녀와 거울
한 추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울을 너무나 싫어했다. 왜냐하면 거울 앞에 서면 그녀의 추한 모습이 일깨워지기 때문이었다. 만약 거울이 없다면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은 그녀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까지도 거울이 눈에 띄기만 하면 그녀는 거울을 깨 버렸다. 거울이 그녀를 추하게 만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그 불쌍한 거울은 그녀의 추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추함을 거울의 책임으로 돌리고 거울과 싸웠다. 세상 종교들의 본질이 그것이다. 그들은 거울과 싸우고, 그림자와 싸우면서, 신의 관념을 버리지 않은 채 에고만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에고는 그대의 마음이라는 작은 연못에 비친 허구의 그림자일 뿐인데도 말이다.
|
|
|
문학자료 → 세계사 |
|
|
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13. 항우와 유방의 대결
진승, 오광의 농민봉기를 기폭제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진 타도의 물결은 마침내 항우와 유방의 숨막히는 각축전으로 집약되었다. 이들의 대조적인 성격과 천하를 놓고 벌어진 팽팽한 접전의 드라마를 중국인들이 놓칠 리는 만무한 것이어서, 일찍이 삼바천은 항우를 본기에 넣어 특별히 지면을 할애했다. 항우가 고향을 눈앞에 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최후를 맞는 장면은 명문장으로 꼽히는(사기) 중에서도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고 있다. 항우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직을 지낸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황량의 손에 길러졌는데, 소년 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숙부 항량과 함께 강동(양자강 하류)에서 거병, 양치기를 하던 초의 왕족 심을 회왕으로 추대하면서 반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유방도 역시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그는 항우와는 달리 이름없는 농민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농사에 듯을 잃은 그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는 유력 가문인 여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뒤에 권력을 독단했던 유명한 여후이다. 고향의 말단관직에 오른 유방은 죄수들을 인솔, 여산릉 축조에 동원되었는데, 도망하는 이가 속출, 화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아예 이들을 풀어주고 스스로 유격대장이 됨으로써 반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항우에 비하면 그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한 것이었다. 유방은 항량의 진영에 합류했고, 이들은 함께 진의 수도 함양을 공략하는 대출정에 나서게 되었다. 초 회왕은 여러 장군을 독려하면서 말했다.
"최초로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리라"
항우는 북로, 유방은 남로를 택해 각기 출진했는데 항우는 장감이 이끄는 진의 주력군 20만을 거록의 전투에서 궤멸시켜 전하에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막상 함양에 먼저 당도한 자는 유방이었다. 유방은 진의 허수아비 3대 왕 영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도, 모든 재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으며, 군기를 엄정하게 하여 민폐가 없게 하고, 단 3조의 법, 이른바 약법 3장만을 남긴 채 일체의 법을 폐지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뒤늦게 관중에 다다른 항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실제로 홍문에 진을 친 항우의 군대는 40만, 유방의 군대는 10만에 불과했다. 만일 양군이 전투를 벌인다면, 유방의 군대가 패주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냉철한 유방은 현실을 직시하고 수치를 무릅쓰고 항우를 찾아 홍문에 나아갔다. 항우의 모신인 범증은 유방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자객에게 명해 검무를 추게하면서 항우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방의 목숨을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장량이 유방의 호위 무장인 번쾌를 불러들였다. 번개같이 날아든 번쾌는 됫박만한 술잔으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피가 둑둑 떨어지는 돼지를 칼로 슥 베어서는 모조리 먹어 치운 다음, 유방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그를 죽이고자 하는 항우의 처사가 얼마나 용렬한 것인지 항우를 가차없이 질책했다. 가슴이 뜨거운 항우가 멈칫하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필사적으로 탈출, 위기를 모면했다. 범증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미 허사였다. 이것이 유명한 홍문지회.
함양을 장악하게 된 항우의 처사는 유방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미 항복한 진왕 영을 죽이고 함양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궁궐을 불사르고, 여산릉을 파헤쳐 재화를 획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다면, 모처럼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항우의 감상적인 처사를 빗대어 한생은 "마치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관중 지역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로 일찍이 서주와 진이 일어났던 거점이자 경제적 기반이었다. 뒷날, 유방의 모사 소하는 한번도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방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주는 커다란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관중의 경영에 주력, 든든한 후방의 보급원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항우는 초나라의 후예로서 초를 멸망시킨 진에게 복수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며, 역사를 되돌려 진 통일 이전의 사회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공신들에게 전국을 분봉했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그의 농공행상적인 영토분배는 매우 무원칙한 것이어서 커다란 불만을 샀다. 제후왕들의 불만은 각지의 반란으로 표출, 그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특히 척박한 땅을 분봉받은 유방의 불만은 대단한 것이었고, 때마침 항우가 초의 의제를 살해하자 명분을 얻은 유방은 행동을 개시했다. 사실, 항우와 유방, 즉 초와 한 사이의 3년이 넘는 대결에서 항우군의 무공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보급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후방기지의 건설에 실패한 항우는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많은 인재를 잃었다. 유방의 명장 한신도 항우의 휘하였는데, 그를 얻은 유방은 위기를 극복, 항우군에 마지막 쐐기를 박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해하(안휘성 화현)에서 겹겹이 포위된 항우의 귓가에 사방으로부터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것이 사면초가라는 고사의 유래이다.
"어느새 고향 사람들까지 한나라의 군대가 되었던 말인가?"
비감한 심정에 빠진 항우는 한밤중에 일어나 주연을 베풀고, 애마 추와 연인 우미인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덮었거만 때가 불리했도다,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추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한단 말인가
4주만에 포위망을 극적으로 탈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향 마을 앞에 선 그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의 목은 한군에 투항한 고향 친구 여마동에게 주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기원전 202년 최후의 승자 유방이 마침내 제위에 올라 한왕조를 세우니, 그가 바로 한 고조이다.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항우보다 뛰어난 개인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이재를 잘 활용했으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언제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마침내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제국은 기원을 전후한 약 400년간의 장구한 통치 속에서 진시황이 꿈꾸었던 만년 제국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번영하고 있었다.
|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