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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57호
단기 4343 / 서기 2010. 5. 31 (음력 4.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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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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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하나는 내일의 둘의 가치가 있다.-B.프랭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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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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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건너 소식’과 ‘마세’
매스미디어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풍문으로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풍문으로 들려오는 소식을 북녘에서는 ‘달 건너 소식’이라고 한다. 정확한 사전적인 의미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이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소식이 왜 달 건너 오는 소식인지 궁금하기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문학작품에서는 “강 건너 장군님의 부대가 압록강 연안을 휩쓸고 돌아가면 왜놈들을 삼대 버이듯 한다는 소리를 달 건너 소식으로 듣고 기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여러 번 있었소만 이렇게 장군님의 군사를 눈앞에 대하리라고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소. 내가 바로 김명순이오.”(<그리운 조국산천>, 박유학, 문예출판사, 1985년, 318쪽)와 같이 쓰인다.
북녘에는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말로서 ‘마세’라는 말이 있다. ‘말썽’이라는 뜻이다. 문학작품에서는 “《그래서 레방비장이 선사포로 부랴부랴 내려간 건가?》 《그렇다더군. 그런데 그처럼 마세를 일으켜 놓고도 그 물건짝들을 돌려달라구 떼질을 쓰는 통에 소동이 벌어졌다지 않겠나.》 《아니. 그런 뻔뻔스러운 놈들을 그냥 놓아둬? 남의 나라 법을 어기고 흥정하려 들다니?!》”(<성벽에 비낀 불길>, 박태민, 문예출판사, 1983년, 158쪽) 등과 같이 쓰인다.
전수태/전 고려대 전문교수
포클레인
쇠로 만든 커다란 삽을 움직여 땅을 파거나 삽 대신에 정을 달아 아스팔트 또는 바위 따위를 깨는 중장비를 흔히 ‘포크레인’이라고 한다. 이것의 삽 끝에 달린 갈고리가 마치 포크(fork)의 창처럼 생겼고, 때로는 무거운 것을 들어올려 옮기기도 하기 때문에 크레인(crain)의 일종인 것 같은 점을 두고 붙은 이름인 듯하다. ‘포클레인’이 규범 표기로 정해져 있지만, 이는 이것이 포크나 크레인과는 상관이 없고 프랑스의 제작회사인 ‘포클랭’(Poclain)사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표현이 ‘포클랭’이라는 원래 이름에 가깝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 말이 영어를 통해서 들어왔거나, 아니면 널리 퍼진 ‘포크레인’과 너무 멀어지지 않게 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포클레인은 ‘삽차’로 순화되었는데, 영어권에서도 비슷하게 ‘유압식 삽’이라는 뜻의 ‘하이드롤릭 셔블’(hydraulic shovel)이라고도 하니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를 흔히 ‘굴착기’ 또는 ‘굴삭기’라고도 하는데, 굴착기가 바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땅이나 암석을 파는 기계나 판 것을 처리하는 기계를 통틀어 이른다. 포클랭사는 1930년대에 조르주 바타유가 세운 회사로 그 후손과 친척들이 발전시켰는데, 유압 모터 방식의 삽차를 개발함으로써 세계 시장을 선도하여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선철/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해설피
정지용의 시 ‘향수’.“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해설피’는 어려움을 준다.‘해가 질 무렵’,‘구슬프게’ 등으로 이해한다.‘설핏하다’라는 말이 있다.‘해가 져 밝은 빛이 약하다’는 뜻이다. 충청 지역에서는 ‘해설핏하다’는 말이 쓰인다.‘해가 질 무렵’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 이어지는 ‘금빛’이 쉽게 다가온다.
지붕
집의 맨 꼭대기를 덮어 씌운 지붕.‘집+웅’으로 분석된다.‘집’은 우리가 사는 곳이니 설명이 필요 없고.‘웅’은? 옛말에서 ‘지붕’은 ‘집’이었다.‘’은 ‘위’라는 뜻이다.‘’은 이른바 ‘히읗종성체언’이다. 중세 국어에서 ‘ㅎ’을 말음으로 가지는 체언을 이렇게 부른다. 이 ‘ㅎ’이 ‘ㅇ’으로 변한 말들이 있다.‘웅’도 그 가운데 하나다.
단추를 꿰다, 끼우다, 채우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것은 구직(求職)의 첫 단추를 꿰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개혁의 첫 단추를 꿰고 있는 데 불과하다." "여당은 이제라도 민의를 겸허히 수용해 17대 후반기 국회가 첫 단추를 잘 꿰도록 노력해야 한다."
''단추를 끼운다''라고 할 때는 맞게 잘 쓰다가도 ''첫 단추''와 관련해선 예문처럼 ''꿰다''를 사용하는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꿰다''는 "실을 바늘에 꿰다"(실이나 끈을 구멍이나 틈의 한쪽에 넣어 다른 쪽으로 나가게 하다)나 "오징어를 댓가지에 꿰어 말리다"(어떤 물체를 꼬챙이 따위에 맞뚫리게 찔러서 꽂다)처럼 쓰인다. ''끼우다''는 ''벌어진 사이에 무엇을 넣고 죄어서 빠지지 않게 하다''라는 뜻으로, "아기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끼우다"와 같이 사용된다.
염주나 묵주처럼 단추의 구멍에 줄이나 실을 통과시키는 것이라면 "이 단추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봐라"처럼 ''꿰다''를 쓸 수 있지만, 옷에 있는 단춧구멍에 맞춰 단추를 잠글 경우에는 ''단추를 끼워라/채워라''라고 해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전체 옷매무새가 어그러진다. 이를 비유해 어떤 일의 시작이나 출발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할 때도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라고 해야지,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라고 쓰면 틀린다.
주년, 돌, 회
거장의 걸작이 없는 영화제로 불릴 만큼 명성에 기대지 않고 흔히 접할 수 없는 스릴러와 공포물을 선보여 영화광들의 사랑을 받아 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 지난해 내홍으로 와해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0회째를 맞아 영화계와 관계 복원에 나서며 재도약에 나섰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PiFan과 관련해 영화제 홈페이지나 기사 등에서 "1997년 막을 올린 부천영화제가 어느새 10주년을 맞았다" "10돌을 맞은 부천영화제가 13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22일까지 열흘간 열린다"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임기 중 일방적으로 해촉되면서 영화인들의 반발을 불러온 부천영화제가 10회를 맞아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처럼 10주년, 10돌, 10회를 섞어 쓰고 있다.
그러나 이들 낱말은 그 의미가 다르다. PiFan은 97년을 시작으로 매년 열렸으므로 2006년이면 10회째이지만 10주년, 10돌이 된 건 아니다. ''주년''과 ''돌''은 특정한 날이 해마다 돌아올 때, 그 횟수를 세는 단위로 기준이 되는 해는 제외된다. PiFan은 올해로 9주년, 9돌이 되는 셈이다. "10월 개최되는 1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96년 첫 막을 올렸으므로 올해로 꼭 10주년을 맞는다"처럼 의미를 구별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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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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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길을 위한 주례사 - 수피아
강변을 따라가고 있었어. 풀과 나무 잎새의 계절을 읽으며 그와 나란한 생을 가고 있었어. 예고 없이 내리는 폭우를 잘 견디리라. 수면은 깊게 빠르게 흘렀어 그럴 때마다 흔들 흔들리는 신문, 경제면에 예민한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돌보며 어루만지게 되는 방천(防川)은 수해의 고비마다 상처를 가질 수 있었어. 긴 둑에 허물어져 있는 뿌루퉁한 은혜들. 그가 내 입술에 걸려 넘어져 제기랄 돌부리, 거친 푸념을 했지만 졸지에 엎어져 나와 달콤한 키스를 맛본다는 것. 인생이 별건가? 나는 강을 따라가고 있었어.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백년해로를 언약했어. 백 년의 폭염을 증명하려고 강은 가장 잔인하게 말라갔어. 가능하다면 밑바닥까지 차지한 사랑을 보여주리라. 자락자락 갈라져 피 한 방울까지 가물리라. 구덩이에 묻히는 날까지 끝까지 걸어가다가 밤하늘 환한 구덩이에 이르러 소원을 빌리라. 우리 사랑 영원하기를…… 강변을 따라가고 있었어. 저기 봐, 서걱이며 한 계절을 겪어내고 몸 비벼대는 억새풀 그림자 휘어지는 길처럼 강물에 굴절되는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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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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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뢰 1 - 홍성란
지상에서 맺지 못한 너와 나는 만나서
푸른 깃을 부닥치며 서러운 밤 포효할 때
불씨들 기립한 천지 찬미하라 이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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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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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연 - 윤석중
팔랑팔랑 방패연 우리 오빠 연 길떠나신 아버지가 접어 주신 연.
우리 남매 남겨 놓고 혼자 가시며 울지 마라 달래면서 접어 주신 연.
연아 연아 방패연아 춤 좀 추어라. 길 가시는 아버지 좀 구경하시게.
고개 고개 넘으시다 네가 노는 걸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바라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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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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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墨戱題其額 贈姜國鈞(작묵희제기액 증강국균) - 강희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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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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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백학기
아카시아 꽃향기에 묻어난 지상의 순수
내 그리움 속에 낮달이 떠 있다 나는 낮달이라고 내 그리움에게 전한다 낮달을 그냥 낮달이라고 그리움을 그리움이라고 부르지만 내 그리움 속에 낮달이 푸르게 떠 있다
꽃과 시 몇 편 놓인 삶을 꿈꾸었던 내 삶의 책상 위로 바람의 달력이 내 손등을 쓸어가는 동안
내 그리움 속에 낮달이 떠 있다. 시 '낮달'전문
그러니까 첫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오는 그 옛날의 추억은 살아가면서 갖고 그윽한 향기로 누구에게나 남아 있을 터. 그 비밀스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련한 향기와 함께 온몸을 휘감아오는 전율을 느끼게 될 터이다. 내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나. 생각컨대, 초등학교 시절 동네 주변의 옥이나, 경희등 흔한 또래의 계집아이들에게서 느꼈던 감정의 골에서부터 중학교 시절 옆동네의 가슴이 봉긋한 고등학생 누나를 사모했던 어리숙한 감정들이 교묘하게 교직된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내 연정의 씨앗이 발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이성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살이 붙고 뼈를 이루어 사랑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데 첫사랑의, 그 처음의, 풋풋하고 향기로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코 끝에 다가오는, 지독히도 아련한, 그래서 때로 그 향기를 다시 되맡아보기 위해, 오랫동안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그 옛날의 시절을 되돌아볼 때, 아카시아 향기의 냄새가 어느새 전신을 휩싸 노곤노곤하게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안에서 나는 그절의 어린 내가 되어 한 마리의 사슴처럼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 산과 계곡에는 온통 아카시아 물결로 출렁이면서 아카시아의 향기가 온 산과 계곡을 뒤덮고 있어 첫사랑을 꿈꾸는 자의 내밀한 욕망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내 첫사랑은 그렇게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동네 주변의 같은 또래 옥이나 경희 등 그 애들은 같이 뛰고 놀면서 그 애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첫사랑의 신비한 맛이 사라지고, 그냥 동무나 친구 같은 기억들로 남아 있으나 어느 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치게 될 때의 감정들은 또 특별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애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없을 터이다. 그보다도 그 애들에 대한 순수한 감정은 이내 그 애들의 대학생이 된 오빠나 삼촌 또는 공무원인 무섭고 근엄하게 보이는 아버지들에 의해서 순수한 감정들이 이내 기화돼버릴 수밖에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그 애들은 제법 여성다운 냄새를 풍기면서 모양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또래의 머슴애들은 코를 킁킁거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 옥이가 있었다. 그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참으로 예쁘고 착하게 생긴 옥이는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답지 않게 맑고 순수한 여자애였다. 어느 때 방학이 끝나갈 무렵 군산인가 친척집에 다녀온 그 애는 풀지 못한 방학숙제를 내 도움을 빌어 무사히 마친 일이 떠오른다. 이게 인연이 돼 다른 애들보다 비교적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됐다. 방학 동안 옥이가 없는 동네는 적이 고즈넉할 수밖에 없었다. 전주-군산간을 오가는 두 칸짜리 열차는 지금도 그 대로여서 항시 갯비리내가 났었다. 삐익거리면서 철길 위를 지나가는 그 화차에서 갯비린내가 났다고 회상하는 것은 아마도 동네 아이들과 무임승차로 이 열차를 타고 군산항 부두까지 가 건너편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바라본 일이 있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흙들위로 썪은 냄새가 진도하고 부듯가에는 각종 생선횟감들과 시끄러운 소음, 거친 사내들의 음성이 한데 어우러진 그곳은 시각적인 풍경들과 함께 갯비린내 나는 곳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어쨌든...... 지금도 생각나지만 그 애는 위로 두 살, 네 살, 여섯 살 터울의 오빠들이 줄줄이로 버티고 있어 동네에서 아무도 그 애에게 접근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 애네 오빠들은 한결같이 험악한 인상이어서 어떻게 한 집안의 형제들이 저렇게 다를 수 있나 의아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게 중 용기 있는 또래의 머슴애는 옥이에게 도전하는 폼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 애의 오빠들에 의해서 무참히 도 혼쭐이 나기도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나는 방학책의 인연으로 그 애의 오빠들로부터 비교적 점잖은 대우를 받았는데, 그런 나를 향해 누구는 주먹다짐으로 중학교만 들어가면 옥이를 빼앗아 밤열차를 타야겠다든가, 마을의 뒷동산으로 끌고가 먹어버리겠다든가, 누구는 다른 동네 애들을 동원해 여럿이 함께 쓰러뜨려버리겠다든가 하는 도저히 어린애다운 생각이랄 수 없는 허황된 꿈을 꾸기조차 했다. 밤 늦은 시각 동네 애들이 함께 모여 놀던 희미한 가로등 아래 담벼락 아래서 군산에서 오는 마지막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이처럼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던 이이들조차 왜 그들이 그렇게 옥이에게 탐닉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옥이는 또래의 다른 계집애들보다 예쁘고 착하고 맑고 그랬다. 아니다. 거기에다 뭐할까 수컷을 .... 아니다. 그런 상상일랑 그만두자. 옥이는 한마디로 예뻤다.
우리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고등학교 입시에 매달리던 그 3년 동안 나는 옥이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등.하교시 옥이가 말쑥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집을 나와 학교를 가고 오는 모습을 간혹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가슴이 어느 때는 콩 볶듯이 뛰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또래의 다른 녀석들은 킁, 하고 콧방귀를 뀌거나 못 견디겠다는 듯 아랫도리를 잡고 뱅글뱅글 도는 시늉을 해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당시의 우리 또래들은 그렇게 악도들이었을까! 하긴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시내 영화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다 기도에게 걸려 쫓겨나고 여름이면 부래옥 아리스케키통을 들고 다른 동네를 싸돌아다니면 팔다가 이웃집 어른에게 발각돼 된통 혼나기도 하는 무언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면 참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옥이에게는 할 수 있는 한 갖은 방법을 동원해 꼬드길 수 있는 묘안을 찾거나 담벼락에 옥이를 그려넣고 못된 짓을 일삼던 우리들은 만약 자신들의 여동생에 대해 이 따위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면 멱살을 쥐고 흔드는 일면도 있었다. 내가 공부에 매달리면서 자연 동네 아이들과 멀어지게 됐는데 야간 자율학습 후 귀가길에 어떤 은밀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것은 흔한 말로 운명의 장난일까.
처음에는 내 눈을 위심했으나 이내 그 상황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뿔싸, 희미한 가로등 아래의 담벼락에서 누군가 낯익은 여자애와 남자애가 함께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 군산에서 오는 마지막 열차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지만 않았다면 내 존재는 그대로 그 현장에 있는 그들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당혹감이란! 그 상황을 목격하고 난 뒤 한동안 나는 미열에 시달리는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잊어버리기로 했다. 옥이는 그렇게 내 관심 밖으로 멀어져갔다. 누군가는 옥이가 다른 동네 머슴애와 사귀게 돼그 애네 오빠들에게 된통 당했다거나 못내 두들겨맞았다는 소식도 그즈음 듣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옥이는 머리를 두 갈래로 양어깨에 땋아 내린 멋진 모습의 여자애가 됐다. 말하기 부끄러우나 나는 지방의 명문고에 입학했으며 옥이는 3류 여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식으로 옥이를 만나게 되는 우연치 않은 일이 생겼다. 동네 뒷산 아카시아 향기가 향기롭던 늦은 봄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엔가 나는 처음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이처럼 강렬한가 하고 느끼는 '봄 타는' 녀석이 되어 있었다. 첫사랑은 그렇게 오는가. 옥이는 이전보다 휠씬 성숙해져 보였다. 옥이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로 나를 불러낸 뒤 손바닥만한 편지를 내보였다. 아카시아 향기가 부드럽게 녹아 있는 날이었다. 전주-군산행 열차가 이날은 소리없이 지나갔다. 나는 옥이가 내민 편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내 생각대로 였다. 여자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향내나는 편지. 첫편지의 추억과 함께 가슴에 물결치는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며칠후 옥이와 나는 시내 중앙통 제과점에서 만났다. 교복을 입은 우리들은 탁자 위에 놓인 우유와 한 접시의 빵을 놓고 조심스레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가슴이 타고 입술이 마르는지 알 수 없는 나는 우유 잔만 만지작거릴 수밖에. 제과점의 넓은 창밖으로는 슬로우비디오로 행인들이 지나가고 건너편 영화고나의 대형간판에 미모의 여배우가 웃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옥이는 그 어린 날의 옥이가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숨바꼭질하던 그 어린날의 옥이가 내 시야에 가볍게 떠올랐다.
제과점을 나와 천변을 걸어가는 나는 아카시아 향기에 취했다. 천변 건너편 산에 지천으로 널린 아카시아 나무들의 꽃향기. 그 꽃향기는 내 전신을 휘감아 아련한 첫사랑의 길로 나를 인도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해 걷다가 천변에 앉아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다가 그렇게 늦은 밤 귀가했다. 참으로 멀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옥이의 집 앞에서 헤어진 나는 껑충껑충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흐린 가로등 담벼락 아래서 지켜본 옥이의 방에 불이 켜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잔영으로 남았다. 타고르의 시를 읽고 릴케와 헤세의 시를 읽는 날이 바야흐로 펼쳐졌다. 교과서나 종합영어, 수학정석의 참고서를 보는 날보다 타고르와 릴케와 헤세가 나와 함께했다. 창밖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거나 도서관 옥상에서 지붕을 내다보는 일이 잦아지고,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서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는 동안 옥이와 나는 몇 번을 더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들의 첫사랑이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지만 않았다. 가슴 설레는 날들이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들이 져버릴 즈음 귀가길에 우리는 옥이의 집 앞에 버티고선 그 애 오빠를 맞닥뜨리는 숙명 앞에 놓여졌다. 그 다음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다. 아카시아 꽃향기와 함께 시작된 나의 첫사랑은 아카시아 꽃향기와 함께 사라졌다. 그 뒤 옥이네가 이사를 가고 우리 집 또한 어찌어찌한 이유로 이사를 하면서 내 첫사랑은 가슴속에만 아련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크게 달라진 나와 옥이네가 살던 동네 앞을 우연한 기회에 자나다보면 그 시절의 나의 옥이와 아카시아 꽃향기가 함께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낸다. 또 옥이네 문 앞에 버티고 섰던 그 애 오빠도 함께 떠올라 웃음도 난다.
백학기 -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원광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받고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는 조극으로 가야겠다', '나무들은 국경의 말뚝을 꿈꾼다.'가 있다. 1997년 제33회 1천만원 고료 동아일보 논픽션에 '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천하의 박봉우'가 당선됐다. 현재 KBS홍보실에 근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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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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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원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여덟살 짜리 꼬마 아이가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선생님이 대답했다. "하느님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는걸요?" 하고 꼬마가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꼬마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원에서 처음 시작되는 곳과 끝나는 곳이 어디 있어?" "이제야 조금 알듯 한데" 하고 처음 꼬마가 말했다.
만약 삶이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원은 완성된다. 그러나 그 원이 완전하지 못함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빠져 있음을 느꼈다. 인간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원은 완성되고, 인간 또한 완전해진다. 선에서는 말한다. 내가 도에 이르기 전에는 강은 강이었고 산은 산이었다. 내가 도에 깊이 빠져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강은 더이상 강 같지 않았고, 산 또한 더이상 산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거꾸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내가 마침내 도를 깨우쳤을 때는, 다시 강은 강이 되었고 산도 다시 산이 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어디에서 출발하든, 우리는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만약 원이 완성되고 여행을 다 마친 후 우리가 성취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도에서 끝을 맺는다면 모든 사물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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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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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삶의 기술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기술을 가르쳐 주라. 남자가 되어 못 하나도 못 박고 여자가 되어 밥도 못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잘못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부모로서의 임무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교육은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하고 학교에 보내 놓으면 저절로 사회인이 되고 삶의 기술도 터득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리하여 좋은 대학에 보낼 생각만 하지 삶의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녀를 상전 모시듯 하여 공부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젊은이들 중에는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많다. 남자가 되어서 못 하나 박을 줄 몰라 쩔쩔매고, 여자가 되어서 전기 밥솥에 밥조차도 할 줄을 모른다.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자란 자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상전 행세를 하는 것뿐이다. 집안일은 당연히 부모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들은 부모를 하인 부리듯 부려먹기나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학교 교육과는 별도로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어려서부터 집안일도 가르치고, 부엌일도 가르치고, 물건 사는 법도 가르치고, 사람 사귀는 법도 가르치고, 돈 쓰는 법도 가르쳐서 언제든 독립하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그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가르칠 사람이 없고, 교육 기관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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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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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 에세이 (지식인과 글쓰기)
소수를 위한 문학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가 대중의 삶 속 깊이 파고 들어오면서, 문화가 환금성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문화 현장은 환금성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기 위해서 저마다 급하게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에 고급문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문학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유명 문인들이 거의 연예인처럼 여겨지고 있고, 문인들도 스스로의 위상을 연예인으로 정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문학마저 대중성 안에 함몰되면서, 출판사들도 대중적으로 이미 판매가 보장되어 있는 문인들을 '모셔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인들의 작품은 엄정한 평가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이미 확보되어 있는 환금성 때문에, 문학적 권위를 가진 거대 출판사로부터 문학적 호위를 받게 된다. 일단 누구 하면, 최소한 십만 부는 나간다.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든 좋다. 그 작가를 잡기만 하면 된다. 작품의 내용과 질은 이미 문제가 아니다. 어떤 논리로든 팔기만 하면 된다.
대중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게 된다. 따라서, 전통과 권위를 가진 출판사와 명망 있는 비평가가 추천하는 작품이라면, 일단 믿고 선택한다. 게다가 그런 작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써내는 대로 문학상을 받고,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집중적인 광고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대중들로서는 문학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식으로 비판적 담론의 생산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어 버린다. '몰아가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비판적인 말을 했다간 자기만 바보가 되고, 출판사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문단에는 인기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얘기는 꺼낼 수조차 없는 억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오죽하면, <현대문학>이라는 한국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잡지가 '죽비소리'라는 무기명 비판 형식으로 겨우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겠는가. 가장 자유롭게 말이 유통되어야 할 곳에서 말이 재갈이 물려 있다. 공적인 담론의 장에서는 물론이고, 사적인 자리에서조차 쉬쉬한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이 하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문학 출판사들이 다 무너질 지경이고,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눈감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대중적 작품들이 대중성 때문에 팔려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편취한 문학성의 아우라 때문에 팔려나간다는 것이다. 대중은 그러한 작품이 어떤 문화적 허영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읽는 것이지. 그 작품을 대중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대중 문학을 한다"고 공언했던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은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관행은 빈대 잡자고 초가 삼간 태우는 격이다. 이런 식으로 고급문학으로 포장된 대중문학이 문학의 존재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출판사들은 어떤 특정 작가를 십만 부 이상 파는데 재미를 붙였을지 모르지만, 그 작가를 십만 부 이상 팔고 나면, 나머지 작가들은 몽땅 팔리지 않는다.
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성만을 쫓아다니면,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매몰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세계 안에서 다수가 취하는 힘의 논리에 매여 있게 된다. 그것은 돈과 힘을 위해서 영혼을 팔아버린 노예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소수를 위한 문학, 당장은 팔리지 않더라도, 10년 20년에 걸쳐 조금씩 팔려나가는 문학작품도 살려두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 살아남는다. 문학인들에게 문학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간절히 호소한다. 문학이 언제는 가난하지 않고, 언제는 무력하지 않았던가, 무엇이 달라졌다고 그렇게 불안해하는가. (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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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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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 - 톨스토이(L.N. Tolstoi, 1828~1910)
상류사회의 정숙한 부인 안나의 불륜의 사랑을 중심으로, 1870년대의 러시아 귀족사회를 묘사한 가정소설이자 사회소설이다. 그는 여기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구원받을 수 없는 관능적인 사랑에, 레빈과 키치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이며 이기적인 데 비해, 후자는 형이상학적 사랑의 개념이며 자기 희생이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아울러 이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한 풍속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다.
문학가에서 구도자로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톨스토이 가의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는 러시아로 어로 밝은 숲속의 공터 라는 뜻으로 톨스토이 문학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다. 그의 작품이 배후에 항상 광활한 러시아의 자연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나 친척집이나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타고난 이원성, 즉 풍부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으로 인해 불안과 동요 속에 일생을 보내야 했다. 19세에 카잔 대학에서 대학은 학문의 장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퇴, 고향으로 돌아가 합리적인 농장관리와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방탕하여 지내다가 형의 권유로 군에 입대했다. 이때 그는 이 아름다운 카프카스의 자연에서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며 보냈는데, 어린이의 심리를 가장 매혹적으로 묘사한 (유년시대)를 비롯하여 크림 전쟁을 소재로 한 (세바스토폴 이야기)는 그가 군에서 경험한 전재의 참혹성과 비인도성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후 두 차례의 서유럽 여행을 통해 문명의 해악을 실감하고 루소의 자연 에 바탕을 둔 농민교육에 힘을 쏟았다.
1862년 34세의 노총각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18세의 소피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밝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결혼 후 새로운 창작열에 불타오른 톨스토이는 문학에 전념하여 양적, 질적인 면에서 최대의 걸작으로 알려진 서사시적 대하소설(전쟁과 평화)(1864~1960)를 발표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의 찬가인 이 작품은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 (안나 카레니나)(1873~77)를 완성하여 세계적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 등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 신학, 과학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농부들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의 사상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이 시기를 전환기 라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숙명적인 영혼의 투쟁은 시작된다. 1882년 그의 (참회)에는 그의 정신적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종교로 전향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로 도덕가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즉, 평등, 노동존중, 생활의 간소화, 반문화, 반국가, 반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인도주의, 이른바 톨스토이즘 이 대두되었다. 그후부터 그의 문학활동은 주로 종교적, 정신적 방향으로 기울어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소설무용론으로까지 발전하여 그의 이전의 작품들을 허위의 예술이라 폄하하고 오로지 선을 추구하는 작품만이 참다운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50세를 전후로하여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는 사상가, 종교가로서의 톨스토이로 전환한다.
그는 교회의 일체의 권위화 형식을 부정했다. 그는 모든 과학적인 발전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의 원시적인 신앙을 따르며 농민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크리스도교는 무저항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보고 어떤 형식의 폭력도 비난했다. 그는 이 세상의 종교들, 즉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을 연구하여 보편적인 종교를 만들려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러시아의 정교회를 전세계의 종교로 만들려 했던토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르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종교와 도덕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남겼고,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했다.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하여 그의 저작권은 그의 부인이 관리했다. 이 무렵 병역을 거부하여 탄압을 받고 있던 이교도들의 캐나다 이주자금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 쓴 (부활)(1889)이 발표된다. (부활)은 그의 정신적, 종교적 마지막 참회라는 의의를 가지나, 이 작품에서 그리스 정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1901년 파문을 당하게 된다. 사유가 모든 악의 뿌리 라는 생각에 만년에 그는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했는데, 이는 가족에게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이상을 품고 러시아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뜻에 공감하지 못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아내와의 불화로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1910년 10월 28일 새벽, 13명의 자녀 중 마지막까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준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의 사상과 주요작품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을 비판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앞세대 러시아 소설가들의 영향보다는 루소, 스탕달, 새커리 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는 진리탐구에 지칠 줄 몰랐고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그러한 강박관념에 가까운 의무감 때문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 교육, 비폭력 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런 면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에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해했고, 이의 궁극적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의 주장인 경제 결정론이나 폭력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19세기 도덕사상가였다.
전쟁과 평화
현대의 (오디세이아)라고 불리워지는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피에르와 안드레이, 그리고 로스토프 가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의 국민생활의 일대 파노라마가 선명하게 재현되고 있다. 559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전형적인 귀족인 안드레이 공작은 전장에서 부상한 이래 삶의 공허감 속에서 죽는다. 이에 반해 피에르는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은 사는 데 있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진 발랄한 나타샤와 함께 새생활을 떠난다. 이는 당시의 톨스토이 자신이 체험한 신혼 당시의 밝은 낙천주의의 반영이다. 안드레이 공작은 작가가 부여한 삶 이라는 과제에 대하여 마이너스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멸망한 데 반해, 피에르는 긍정적인 해답을 내려 행복한 새삶을 살 수 있었다. 처참한 전쟁을 묘사하면서도 이 작품에서 의외로 밝은 청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부활
이 작품은 코니라는 법률가 친구로부터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년의 작품이다. 여죄수 마슬로바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네플류도프 공작은 피고가 자신이 청년시절에 추행했던 카추샤란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고, 잘못된 재판으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그녀를 따른다. 그러나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장래를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는 사랑하면서도 그와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네플류도프는 여관에서 성서를 펴놓고 복음서 속에서 갱생의 길을 찾아낸다. 원숙하고 예리한 심리묘사, 당시 사회의 불합리성을 파헤친 이 작품을 두고 비평가들은 종교적 속죄와 영혼의 완성을 설교하는 예술적 성서라고 평가하기도한다.
당대의 도덕과 애정을 형사화한 작품
이 작품을 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작품으로 완벽한 것이며 현대 유럽문화 가운데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작품 이라 평했고, 로맹 롤랑은 악에게 파멸당하고 신의 섭리 속에 분쇄되는 이 영혼의 비극, 대단히 심각한 한 폭의 그림 이라 평했다. 세계문학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하나인 안나는 젊고 아름다우며 근본적으로 선량하지만 파멸의 운명을 지닌 여성이다. 어린 나이에 숙모의 선의의 중매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와 결혼한 안나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사교계에서도 가장 활기찬 교제로 만족한 나날을 보낸다.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20세나 연상인 남편을 존경하며 타고난 낙관적인 기질로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모스크바 여행에서 만난 브론스키에서 안나는 격렬한 사랑을 느낀다. 이 사랑은 그녀의 주변을 온통 바꾸어놓는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페테르스부르크의 철도역으로 나온 카레닌의 귀가 불품 없고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그녀는 갑자기 깨닫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편을 비판적으로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귀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남편은 자기 생활과 관계하는 온갖 사물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에 대한 브론스키의 정열은 강렬하고 하얀 광선이며, 그 빛에 조명되었던 예전의 세계는 이제 사멸된 혹성의 풍경처럼 보인다.
안나는 남자답고 핸섬한 브론스키에서 점점 더 강렬한 애정을 느끼게 되어 이성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안나는 공작부인 베트시처럼 자신의 정사를 비밀에 부칠 수 없었다. 성실하고 정열적인 안나의 성격이 속임수나 비밀에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안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에게 내주는 일에 동의하면서까지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브론스키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다음엔 중앙 아시아의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그와 함께 지낸다. 이 공공연한 정사는 사교계 사람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부도덕으로 보인다. 결국 안나와 브론스키는 도시의 생활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정사 그 자체보다도 사교계의 관습에 대한 안나의 공공연한 도전이 위선에 찬 사교계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안나가 사교계의 노여움을 사서 냉대받고 모욕당하고 버림을 받는 데 반해 브론스키는 남자이기에 비난받는 일 없이 옛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귀족회의 등으로 외출을 자주하여 안나의 허전함은 더해진다. 정식부인이 아닌 그녀는 브론스키가 어느 집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마음에 걸려 끊임없이 질투의 불꽃을 태운다. 한편 브론스키는 그녀의 이러한 이기주의적이며 독점적인 애정이 차차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 사소한 일로도 말다툼이 잦아지고 그때마다 광적인 포옹과 애무로 해결되지만 이튿날에는 역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한다. 질투와 정신적 불안에 몰려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었다고 단정해버린 안나는 절망한 나머지 달리는 열차에 투신자살한다. 안나를 잃음으로써 또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브론스키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마저 가질 수 없게 되어 때 마침 발발한 세르비아 전쟁에 의용군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떠난다.
이것과 병행해서 언뜻 보기에는 연관이 없는 줄거리가 진행된다. 귀족지주인 레빈과 공작의 딸 키티와의 구애와 결혼 이야기다. 영지에 틀어박혀 농지관리에 전념하고 있던 레빈은 상경하여 키티에게 청혼하나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키티는 매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안나에게 브론스키를 잃은 키티는 정신적 타격을 입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둘은 결혼하여 레빈의 영지에 정주하고 농업경영에 온 정열을 기울여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키티와의 평화스런 생활 속에서 레빈은 가끔 심각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철학서적을 탐독하지만 어떤 철학서적도 인생의 의의 같은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레빈은 주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눈을 돌려 소박한 농민들이 그런 의문 따위는 조금도 품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동한다.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문체와 서술기법에서 있어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다소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나,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비관적이며 주인공들은 내부갈등으로 인해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두 사랑 방식
작가가 이 소설에서 전하려는 도덕적 메시지 는 무엇인가는 이 소설을 다시 정독한 후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와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를 비교해본다면 명확해질 것이다. 레빈의 결혼은 형이상학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희생이 기초가 된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육체적 사랑이 그 기초가 되었으며 거기에는 파국이 깃들어 있다. 언뜻 보기에 안나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짐으로 해서 사회로부터 벌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같은 도덕은 물론 비도덕적이며 비예술적이다. 왜냐하면 같은 사회의 상류부인이라면 누구나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정사를 즐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하고 불행한 안나는 이 거짓의 베일을 쓰지 않았다. 사회의 규율은 일시적인 것으로, 톨스토이의 관심은 영원한 도덕적 요청에 있었다. 여기에 톨스토이가 전하려는 참된 교훈이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오로지 육체적 사랑만은 존재할 없다는 것이다. 그 경우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그러기에 창조보다는 오히려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놀라운 형상의 흐름 속에서 두 가지 사랑을 묘사하고 생생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브론스키와 안나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과 키티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이 그것이다. 물론 후자의 사랑도 충분히 관능적이지만 그것은 책임과 온화함과 진실과 가족의 즐거움이라는 순수한 분위기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에 의한 인간의 심판
한편 성서에서 인용된 '복수는 내게 맡겨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한마디로 안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신뿐이라는 믿음이다. 언제나 도덕률은 불변이며 이것을 어긴 자는 반드시 멸망으로 끌려가는데, 신의 법도를 범한 자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신뿐이라는 사상,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는 자비의 법칙만이 있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사상이다. 그러나 안나를 통해 부패한상류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한편 그녀의 자아발견 과정에 동정하면서도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토마스 만은 이 작품에 대해 조금의 흠집도 없이 전체의 구도나 세부의 디테일에 한 점의 티도 없는 작품 이라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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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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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사랑의 열매
신혼 부부가 밀월을 농가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농부와 그의 아내에게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곧 바로 자기들 방으로 들어갔다. 이틀이 지나도록 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농부의 아내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뒤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난 농부가 문을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려댔다. 이에 대해서 새신랑은 음식이 전혀 필요치 않으며 자기들은 사랑의 열매를 먹고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사랑의 열매?" 농부가 소리쳤다. "바로 그게 문제요. 이젠 창문 밖으로 그 열매 껍질을 던지지 마시오. 내 병아리들이 그 껍질을 먹고는 벌써 두 마리가 죽어 버렸소."
- 이야기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항상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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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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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 신에게 묻는다
청 말기인 1889년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병든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천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은나라의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왕의영. 그는 당시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의 제주, 즉 대학총장으로 있었는데, 금석학 등 고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유철운도 있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라는 지병이 있어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서 약재로 쓰고 있었다. 용골이란 북경원인의 발굴에도 단서를 제공했던 바로 그 동물의 뼈이다. 용골이 막 빻아지려는 순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4년 후 그는 (철운장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간, 세간에 갑골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용골의 출처를 찾아 나섰던 왕의영과 유철운에게 비자의 기업비밀을 쉽사리 알려줄 약재상은 없었지만, 이제는 골동품상을 통해 글자가 있는 용골이 고가에 거래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 기원전 15년경부터 은이 주에게 멸망되었던 기원전 1100년경까지, 즉 은 후기의 도읍지 은허였음이 확인되었다.
은나라의 본래 이름은 상, 황하연변의 수많은 성읍국가 중의 하나였던 상읍이 주변의 성읍국가들과 연합, 주도권을 구축해나갔다. 아직 대규모 수리공사도 없었던 시절,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고, 주변에는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호시탐탐 농경민을 약탈하고자 하는 종족들이 있었을것이니, 농경민들은 서로 연합하게 되고 은족은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사기)의 은 본기에 의하면,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은허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유적 은허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이다. 갑골은 점복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껍질이 많고, 수골은 소의 어깨 뼈가 많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듯이,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면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온 나라는 없다.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을 이어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와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어 은대의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에 끝나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의영은 의화단 사건 이후, 외국 군대가 중국에 진주하게 되자 이에 분노, 자결했고, 백화문으로 사회를 풍자한 (노잔유기)를 남기기도 하고 기인으로 유명했던 유철운은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정부의 허가 없이 관곡을 풀어 나누어준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유철운의 친구였던 나진옥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만주 괴뢰정권에 관련,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청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명한 왕국유는 언제나 전통복장을 하고 변발을 허리께까지 드리우고 다녔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에게 제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청조의 몰락을 바라보다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써 인생을 마감했다.
은의 왕실은 국가의 행사를 결정할 때마다 갑골로써 점을 쳐서'신의 뜻'을 묻고는, 갑골에 언제, 누가, 어떠한 내용으로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갑골문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되며,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천 7백 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우선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자가 바로 왕이다. 왕은 신과 인간사회를 매개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정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긑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은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도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의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10간이다. 그들은 절대신인 상제로부터 10개의 태양신, 각종 자연신을 숭배했으면, 조상들이 이들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각별히했다.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화려한 제단이 마련되고 술도 빚어졌다. 제단에는 수백 마리의 양, 소 등의 동물과 함께, 피정복민이 적게는 몇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씩 목이 잘려진 채 제물로 바쳐졌다. 제사의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전쟁이 수행되기도 했다. 은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은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을 위압해나갔다. 생산활동은 오로지 평민들이 전담하게 되었지만,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기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을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수백,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을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전쟁포로이거나 피정복민 노예였을 터였다. 훗날,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수천의 도용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니, 생산력의 발달은 지배와 전쟁의 목적을 단순히 수확물을 얻기 위한 것에서, 토지와 백성의 획득을 위한 것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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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2. 자살은 운명이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했다. 되짚어 보면 내 팔자도 정말 우습게 바뀌어져 버렸다. 어차피 도 닦을 팔자, 무엇을 하든 똑같은 팔자 아니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앞이 캄캄한 상태에서 막연하게 전진하는 생활과 앞을 내다보며 시원스레 수련에 매진하는 생활과는 천양지차이다.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소복여인만 해도 그러하다. 만약 그녀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과거를 잊고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필요하게 과거에 집착하고 가슴 속에 한을 품으면서 살다가 그 한을 못 이겨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 건 사정이 어떠하건 어리석은 짓에 분명한 것이다. 사람의 수명은 거의 정해져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위 말하는 천수를 다 누리고 가는 것이다. 삼풍 백화점도 성수대교도 사람들의 눈에는 어처구니없이 당한 불행한 사고로 보일지 모르나, 교통사고도 추락사고도 다 그 사람의 천수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슴이 아플지 모르나 죽은 이는 살만큼 살다 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운명은 무엇이고 숙명은 무엇일까? 사고로 죽는 것도 천수를 다하는 거라면 자살 또한 그렇지 않을까? 불행히도 그렇지가 않다. 소복여인이 왜 저승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야 했을까? 바로 자살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자살이 왜 죄가 될까?'라는 어찌 보면 뻔한 질문에 선생님은 친절하게 답을 주신다.
"일사, 그걸 이해하려면 운명과 숙명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해야 해. 만약 내가 태어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건 죽기 전에 부산까지 가게 되어 있지. 그게 바로 숙명이야. 그건 바꿀 수가 없는 거지. 하지만 서울부터 부산까지 가는데, 비행기를 타고 갈지, 기차를 타고 갈지, 아니면 도보로 갈지... 그 방법은 개인이 선택을 하는 거야. 본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지. 그게 바로 운명이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바뀌어지는 것. 이게 바로 운명인 거지."
그렇다. 왜 자살이 죄가 되는 것일까? 자살은 선택이다. 하지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무자비하고도 어리석은 선택이기에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을 한 경우엔 저승사자가 데리러도 안 와. 만약 60평생을 살 사람이 30세에 자살을 한다면 그 사람은 나머지 30년 동안을 이승을 떠돌며 갖은 고초를 다 겪어야 해. 그 30년이 다 지나야 저승사자도 데리러 오지."
흔히들, 현실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게 되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면 결코 자살을 꿈꿀 수는 없을 것이다. 모르니 자살을 하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평온의 상태라 믿고, 그게 끝인 줄 알고 자살을 하는 것이다. 자살 지침서까지 나오는 세상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르기에 한 순간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한다. 본인은 물론 가족친지들의 고통은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다. 답답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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